미탐색의 발레 영역과 사회적 문제를 다룬 춤
김태원 / 무용평론가
근래 춤계에는 두 가지 변화가 눈에 띠고 있다.
그 하나는 직업발레단이나 전문발레단에서 그 공연의 레파토리 선정에 있어서 이른바「신고전주의」나 현대발레계열을 즐겨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현대춤과 창작춤의 영역에 있어서 우리시대의「사회적」문제들을 다룬 춤들이 잦게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첫 번째 사항의 예로서 나는 지난 3월 중순 첫 창단공연을 가진 젊은 발레인들의 모임인 발레 20인회가 선택한「세레나데」와「환상 완구점」을 우선 들고 싶고, 이어 4월 20일부터 23일 사이에 유니버설발레단의 제21회 정기공연으로 올려졌던 「불새」를 지적해야만 하겠다.
실상 서구 발레사에 있어 그 세 작품은 각기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20세기 초 현대발레의 개막을 선언한 전설적인 발레제작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첫 안무자였던 미하일 포킨이 안무한「불새」는 러시아의 민속적 소재와 스트라빈스키의 현대음악이 접목된 발레로 단순한 설화성의 발레 그 이상의 예술적 야심을 띤 작품이며, 그전 포킨과 그리고 니진스키에 이어 디아길레프의 세 번째 안문자가 되었던 레오니드 마씬느가 안무한 「환상 완구점」은 마씬느의 입체적이고 조형주의적인 예술적 감성이 빛을 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디아길레프의 러시아발레단의 마지막 안무자였던 죠지 발란쉰이 1934년 미국서 초연한「세레나데 」는 차이코프스키의「현을 위한 세레나데」의 은은하고 때론 애달픈 멜로디를 배경으로, 발레에 일체의 이야기를 배제한 채, 흰 로맨틱 뛰뛰를 입은 댄서들의 정적인 포즈, 날카로운 도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른바 신고전주의적 발레의 정점이 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렇게 본다면, 실상 이 세 작품은 한 가지 전통의 맥을 보여준 셈이다. 그것은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의 예술적 전통이다. 이 중「세레나데」가 비록 디아길레프의 작고 후 미국에서 만들어졌다고는 하나, 안무가 발라쉰이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디아길레프의 맥을 잇는 것이라 한다면 그렇게 말해도 무방하리라. 여하튼 공통적으로 이세 발레는「발레는 즐겁되 일견 심각한 예술적 시도로, 더 나아가 낭만주의풍의 전통적 발레에 대한 창조적 반기를 든 역사적인 작품」으로 발레사에 기록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간 우리 발레계는「지젤」류의 너무나 고전적인 작품과 아니면 창작이라는 두 가지 선택 속에서만 헤매어 왔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발레 닥숑ballet d'action적 흐름 속에서 대본에 의한 스토리의 전개, 새로운 작곡, 무거운 장치와 의상의사용으로 개인 안무가나 발레단은 많은 경제적 출혈을 해온 것이 통례였다. 또 그런 과정 속에서 발레단마다 충분치 않은 연습, 움직임과 맞아떨어지지 않은 음악, 발레를 모르는 이들에 의한 대본쓰기 등으로 인해 많은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신고전주의 계통의 발레는 그런 대본, 무거운 장치 및 의상을 필요치 않고 있다. 그것은 이야기보다 발레의 춤적인 아름다움을 더 강조하므로 오히려 「세레나데」에서 보듯 조명에 의한 환상적 아우라의 처리, 정확하고 날카롭고 드릴있는 춤동작이나 포즈가 공연에 있어 더 중요시 된다. 이것은 발레단이나 안무가로부터 대본, 혹은 문학이 주는 부담감을 벗게 해주는 것이다.
한편,「환상 완구점 La Boutique Fantasque」이나 「불새」와 같은 작품은 발레예술이란 어중이떠중이가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매우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예술이란 점을 다시 재점검케 해준다. 마씬느의 조형주의적 장면구축과 인물발레의 틀, 그리고 포킨에 의해 민속이나 설화가 현대성과 함께 상징성을 띠게 되는 것이 그런 예들의 측면이다.
이번 봄시즌 공연 중, 발레 20인회를 이끌고 있는 박인자와 최성이는 눈높게 그런 작품을 골라내었고, 유니버설발레단은「불새」의 한국 초연을 현재 발레단을 방문중인 발레교사 만수어 카말레디노프여사에게 맡겨 시도해 보았다.
나로서는 우리 발레인들이 그런 영역의 발레에 대해 눈을 돌리는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라 본다. 그리고 발레의 직업화와 전문화가 꾀해지기 위해서는 발레단마다 우선 발레사 내지 발레예술의 전통에 대해 확고한 지식을 갖고, 레파토리의 확충과 다양화를 꾀해야만 할 것이다. 즉 안일한 고전지향의 발레작업, 그리고 발레미학에 대한 탐색 없이 겁없이 덤벼보는 창작발레의 작업등은 모두 우리 발레의 발전을 위해서는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최근 우리 사회의 경험하고 있는 여러 사회적 문제들을 춤의 주제로 선택, 공연화된 작품으로는 박인숙 안무의「잿빛 비망록」을 들 수 있다.
안무자는 이 작품 속에서 지난 국회 청문회 때 다뤄졌던 5공 비리의 문제, 국회의원들의 수근대는 태도, 그것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의 충층 등과 같은 현상들을 스타킹을 뒤집어 쓴 일군의 집단, 이철의원의 심문의 목소리, 언론통폐합과 연행의 사건, 사물놀이와 탱고춤의 섞임을 통해 풍자하려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안무자가 장면장면의 극적 전개에 더 치중한 탓인지, 춤적인 부분의 처리에 있어서는 미흡함을 많이 드러냈다. 가령 무대 우편 계단에 앉아있던 청문회 위원들의 집단몸짓도 전문적 춤꾼들이 벌이는 움직임과 달리 선명한 윤곽이 부족했고, 큰 천을 이용해 언론 통폐합이나 사회의 입막음을 상징하려 했던 장면에서도 천을 들고 움직이는 댄서들의 워킹이나 천 뒤에서의 움직임은 거의 무미건조한 일상적 동작과 다름없었다. 그것은 무대 앞 2인무나 3인무의 구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탱고춤에 맞춘 두 커플의 2인무, 폭력적인 장면의 전개에 맞게 들어갔던 희생자가 바닥에 질질끌림의 장면은 구조가 강한 음악성과 장면설정 때문에 그런대로 생동적이었고 자극적이었다.
춤을 둘러싼 사회적 정황, 혹은 이야기를 오늘의 춤속에 담으려는 것은 물론 빗나간 예술가의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건강한 예술가의 태도다. 그러나 현실의 춤적인 반영에 있어서는 몇 가지 기술적 고려가 따른다. 그 첫째는 사회적 메시지나 사건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춤구성과 잘 맞물려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일상성, 또는 마임성의 움직임은 안무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또 능란하게 컨트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안무의 힘에 의해 컨트롤되지 않고 방기되는 일상적 움직임은 탄력성을 잃게 되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죽은 움직임이 된다.
실상 관객이란 춤을 통해 한 안무자가 어떻게 댄서들을,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을 잘 통제하는지를 보고 싶어한다. 안무자가 무한정 무용수들을 무대 위에 풀어놓을 때에도 관객은 그 통제력이 어디에선가 살아나길 기대한다. 따라서 안무자는 예술적 아이디어와 실천, 자유와 통제 속에서 갈등을 겪어야 한다. 그 갈등이 심각하게 빚어져 나올 때는 그가 아무리 거친 사회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하더라도 그것은 춤공연으로 승화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갈등이 보이지 않게 될 때는 우리는 안무자와 그의 춤공연, 그리고 안무자의 머리속에 든 상상력에 대해서도 저으기 실망하고, 그의 재능에 대해 의식을 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