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던댄스의 출현과 선구자의 활동
허영일 / 무용평론가
19세기말 현대무용의 창시자인 로에 플러(Loie Fuller : 1862∼1928)는 그녀의 독특하고 혁신적인 무용관으로 인해 파리아방가르드 예술가 중에서도 선두격으로 부상했다. 그녀는 움직임이란 춤추는 육체만이 아니라 빛과 새, 천 모두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색조명과 슬라이드의 투사, 특이질운동이론적용, 초보무용수의 기용, 무용에서 공간의 이용 등 그녀의 기법은 1960년대 신무용가들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로에 플러의 이념과 가치들은 마리 뷔그만M. Wigman, 루스 샹 데니스R. S. Denis, 도리스험프리D. Humphrey, 마사 그라함M. Graham 등에 실린 실행된 현대무용의 출현으로 인해 빛을 잃었다. 이들의 안무와 기법은 현대무용 이론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그들의 무용운동은 본격(전통) 안무형태와 방법에 관한 모든 개념들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1960년대 초반 일군의 무용수들이 구조, 실연, 운동의 재평가를 하였다. 그들의 탐구와 관심은 부분적으로 로에 플러의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실험들은 완성도 높은 무용형태들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저항하고 창조적 분위기를 가미해야할 전통적 무용이 많은 곳일수록 실험은 성공할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1960년대 아방가르드 무용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실험들은 이전세대의 표현주의적 움직임 의존한 현대무용에 대한 새로운 대응물이었던 것이다.
여타 예술장르들의 새로운 움직임의 다양한 영향과 함께 존 케이지John Cage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의 이념과 철학은 새세대의 실험을 탄생케하는데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저드슨Judson 극장은 그들이 실험을 지속할 수 있는 창조적 분위기를 제공해주었다. 1952년 블랙 마운틴Black Mountain대학에서 열린 존 케이지의 다중매체 이벤트는 이후 해프닝들에 뿐만 아니라 20년동안의 전체 아방가르드들에게 하나의 전형(典型)을 창조하였다. 머스 커닝햄은 보다 깊은 혁신을 위한 영감으로서 그리고 비판의 전위적 전범(典範)으로서 대부분의 포스트 모던댄스에 영향을 끼쳤다.
M. 커닝햄은 그의 스튜디오에서 로버트 던Robert Dunn과 함께 구성법 강좌를 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세대들과 결연하였다. 던 은 저드슨 교회에서 이 교실작업의 첫 공연을 기획하였고 이후 이 교회는 포스트 모던댄스를 탄생시키는 구심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저드슨Judson 그룹
1962년 6월 상원의회는 공립학교에서의 공적인 기도식을 위헌으로 판결하였다. 7월 1일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미국은 1958년 7월 1일 이래 처음으로 원폭실험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날은 저드슨 공연이 있은 다음날이다. 7월10일 마틴루터킹목사는 시위주동 혐의로 조오지아에서 수감되었고, 같은 날 텔스타Telstar 우주선이 발사되었다. 8월 말 미국은 소련이 쿠바에 무기와 군대를 지원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여름내내 시위대는 인종차별에 대한 연좌농성을 벌였다. 세계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고 무용은 그 흐름 중에도 매우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트위스트가 전세계에 파급되었고 페퍼민트 라운지Peppermaint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사교장이 되었다. 제롬 로빈스 J. Robbins 발레단과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두 무용단은 봄에 백악관에서 공연하였고 케네디 정부는 공연예술에 대한 견해를 뚜렷이 밝혔다. 그리고 뉴욕타임즈는 정부고위관리들을 관객으로 「Billy the Kid」를 공연한 젊은 발레무용수들을「트위스트만큼 미국적인 사람」이라고 뉴욕시티발레단과 아메리칸발레시어터에게 주 순회여행을 주선해 주었다. 여름이 지나자 시티발레단은 소련 가을 여행을 준비했고 반면 뉴욕인들은 볼쇼이발레단의 머지 않은 방문을 기대하고 있었다. 미국의 짧은 발레 전통은 국가문화생활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만일 현대무용이 그 나름의 특정관객들을 계속 확보했었다면 미국인들 대부분은 다양한 무용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1962년 여름 몇몇 젊은 안무가들이 로버트 던R. Dunn의 안무교실을 위해 작품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 안무가들은 직업적인 무용수들은 아니었으며 그들 중에는 영상예술가나 음악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던은 아방가르드 작곡가이며 머스 커닌햄의 동료인 존 케이지와 함께 음악이론을 공부했다.
그들은 공연장소로 개신교 계열인 그린위치Grinwitch 마을의 워싱턴 광장 남쪽 끝에 위치한 저드슨기념교회Judson Memoriol Church를 택했다. 그곳의 진보적 예술활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며 이후 이 곳은 그 도시 전위무용의 구심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제1회 무용발표회는 무료로 공개되었다. 이 발표회는 14명의 안무가들에 의해 짜여진 23개의 무용으로 구성되었으며 몇 시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1962년 7월 6일의 이 공연은 무용가를 뒤바꿔 놓은 역사적 과정의 출발이었다. 즉 포스트 모던댄스의 씨앗이었으며 1930년대와 40년대 현대무용 이후 무대예술에 있어서 최고의 아방가르드운동이었다.
던이 이 공연의 제목을 「무용발표의 밤the evening A concert of Dance」이라 불렀던 것은 비서술적인 역사적 전통을 환기하고 실내공연으로서의 친밀감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용발표회는 비서술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문학적, 서술적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그라함의 「Clytemnetra」나 안나 그 소콜로우지의 「Rooms」와 같은 견고한 덩어리의 극장무용과 결별함을 뜻한다. 즉 성격화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이 제목에는 음악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내용과 분위기를 보기 위해 가고자 했다. 그리고 내게는 다시금 언급하고 싶었던 역사적 전통이 있었다. 그것은 사이벌쉐러Sybil Shearer와 이사도라 던컨과 관계된 것이다. 또한 그것은 비록 철저한 연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에이츠연극에서 보이는 관객과 공연자 사이의 친밀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공연자는 관객과 같은 방에 있도록 허가된 공연이라는 것이다.
저드슨무용단의 안무가들은 그들의 무용과 매주 토론을 통해서 무용미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발레와 현대무용에 나타나는 형식화를 반대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발표회 형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무용공연의 본질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용공연을 연출하는 협동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이 분야에서 선배 권위자들에 의해 평가되길 원치 않는 젊은 예술가들이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친근한 공간에서 실험할 수 있는, 자유를 원하는 이들에게 이것은 도시의 판에 박힌 공연에 대한 하나의 대응물이 되었다. 그린위치 마을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관객들의 흥미를 끌면서 저드슨무용단은 그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예술실험의 유명한 중심으로 확산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방가르드 무용활동의 중심으로서 저드슨무용단의 출발은 우연적인 사건이었다. 로버트 던이 그의 무용교실을 개설하였고 전문적 수준에서 실험적 활동을 하고자 했던 많은 젊은 무용수들이 여기를 찾았다. 이곳에서 그들 자신의 것 뿐만 아니라 던의 이념 일부를 위한 풍부한 매체를 형성한 것이다.
기존 안무가들에게는 두 가지 의미의 전형들이 있었다. 즉 M. 커닝햄, J.웨어링, P.테일러, A.파스로프, B.슈미트, M.마르시아노와 같은 1950년대 기성 아방가르드들은 현대무용「아카데미」를 창출하는 선구적 역할을 했다. 한 때 아방가르드였던 아카데미 자체는 그 예술의 조건(거기에 예시되고 차용되고 비판되고 깨뜨려지는 것)으로 제공되었다. 결국 이 교회는 무용공연과 리허설을 위한 넓은 공간으로서 무료로 사용할 수 있으며 그것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린위치 빌리지에서 그러한 무용운동이 이론적, 실천적 이유로 성숙되었다. 국가의 실용주의적인 전후(戰後)분위기는 환경을 이용하는 해프닝에서부터 대상의 신리얼리즘적이거나 팝아트적인 묘사와 산업적 주제나 스타일과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로서 반영되었다. 경제는 확장되었고 새로운 케네디 정부는 젊음과 예술, 문화를 강조하였다. 개별적 무용수들을 위한 보조금은 없었으나 적극적인 참여정신과 비싸지 않은 재료상용에 대한 관심은 있었다. 즉 호화롭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으며 예술작품도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 창작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린위치 빌리지에서는 비트닉문화가 오랫동안 주민들의 평판에 오르내렸던「보헤미아bohemia」의 부활에 촉매역할을 했다. 이 지역은 연극, 문학, 예술행위가 핵심이 되었고 그 이념들은 자유롭게 퍼져 나가 한 예술에서 다른 예술로 전파되었다. 불교의 선(禪), 실존주의, 현상학에 대한 철학적 매혹은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 미국예술의 특정한 양상과 적절히 부합한 것이다. 존재의 구체성, 사람들의 일상적 행위에 대한 관심, 개인적이면서 집합적인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의문들은 이러한 철학적 체계(적어도 그 대중적인 환원)의 주제들이었다. 「사물에 즉하라」는 현상학적 권고는 모든 영역에서 예술가들의 선언으로 울려 퍼졌다. 시, 음악, 연극, 무용 등은 그들 형태의 문학적 측면보다는 공연을 더 강조하였고 보다 강한 직접성, 현존성, 구체적 경험 등을 열망하게 되었다. 현상학에 대한 기술적이고 방법론적인 추진력은 여러 예술양식의 유일한 형태주의다.
기술비평으로서의 동향(움직임)속에서 하나의 유추를 찾을 수 있다. 그 마을은 창조적 작품을 모으는 다양성과 공동체 정신에 참여하고 그러한 공동체 사회에서만 형성화될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기 위해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인 곳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예술적 전통의 주변에서 작업하고 그러한 예술을 만드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그 예술들의 정체성을 시험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미국현대무용은 20세기 이후 그 출발에서부터 아방가르드들의 연속이었다. 각 세대들은 새로운 주제와 무용기법 그리고 음악, 문학, 시각, 연극예술과의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마사그라함에 있던 많은 안무가들은 솔로였던 머스 커닝햄의 유연한 척추사용과 고전발레의 바스락거리는 발스텝, 엄밀하고 분절적인 기법에 결합하였다. 그의 안무상 우연적 실험은 그의 작품의 외견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즉 공간을 분산시켰고 움직임상 예기치 않고 재치있는 신체부분의 결합을 창조했다. 즉 논리적 절정이나 발전이 없다는 점 때문에 무용에서의 시간을 분산시켰던 것이다. 존케이지와의 합동작업은 커닝햄으로 하여금 음악상 가장 발전된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협동의 방법이란 음악과 무용이 단순히 같은 공간과 시간을 점유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커닝햄-케이지 협동은 저드슨무용단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커닝햄무용단의 몇몇 단원들은 저드슨무용단에 가담했고 저드슨 무용단원들은 안무가로서 커닝햄의 업적(현대무용에서 권위의 위계질서로 느껴지는 것들에 대한 반항과 정신적 함축성을 지닌 무용의 정화(淨化)을 존경했다. 무용수들은 케이지의 교육(禪불교 음악으로부터 연극으로의 이동, 안토니 아토우드 A. Artaucd의 저술, 우연방법, 일상의 기회와 같은 것들에 대한 관심) 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를 통해 젊은세대 예술가들은 아방가르드예술과 공연의 역사에 내재한 유산을 발견한 것이다.
제임스 웨어링J. Waring은 저드슨 그룹에 또 하나의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그는 커닝햄과 마찬가지로 기법을 가르쳤으며 1950년 후반부터 학생들에게 구성법을 강의했다. 저드슨 그룹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실용적이면서도 동시에 미학적이었다. 즉 많은 저드슨 무용수들이 그의 작품으로부터 공연의 경험을 얻었다. 한편 웨어링 폴 테일러, 데이비드 보한D, Vau-ghan, 에이린 파스로프A, Pascliff 등은 1951년 결성된 안무가들의 단체인 무용협회에 가담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웨어링은 무용계와 리빙 시어터Living Theatre에 관련된 시인 그룹 피안느 드 프리마Piane d Prima, 알랜 몰도우에 Alan Mordowe 등과의 사이에 다리역할을 했다.
저드슨 그룹의 일부는 엔 할프린Ann Halprin에게 교육받았는데 그로부터는 무용의 또 다른 자유를 배웠다. 즉 즉흥연주에서 충동에 따르는 자유이다. 이것은 곧 자연과 더 가까이하려는 욕망이며 학생들은 야외나 산의 개방지에서 작업을 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해부학과 신체동작에 대한 분석적 접근을 강조하여 학생들은 자신들의 즉흥동작의 과정 중에 경험하는 신체변화를 이해하고 분석하도록 요구되었다.
이러한 세 명의 교사 외에 다른 안무가들도 저드슨 무용단에 영향을 미쳤다. 파스로프는 발레교육을 받았으나 발레무용수로서의 전형적 몸매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고유한 무용스타일을 안무하였다. 그녀는 재치와 무대성, 그리고 시각예술가나 아방가르드 연출가들 간의 합동작업으로 뿐만 아니라 독립성으로 인해 주목을 받았다.
한편 저드슨 그룹은 필립 코너의 참여로 새로운 예술적, 사회적 조직망의 동참을 얻기도 했다. 뉴욕에서 자란 그는 유럽의 지적인 음악집단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케이지와 몰턴 펠트만Molten Feltman, 얼 브라운Earle Brown, 크리스찬 볼프Christian Wolf 및 다른 작곡가들, 즉 딕 히긴스Dick Higgins 등과 접촉하였다. 특히 2년 간 군인으로 한국에 근무하면서 서예를 배우고 한국음악의 몇가지 기법을 익혔다. 1961년 뉴욕으로 돌아온 후 그는 추상적 표현주의가 소멸되고 팝아트가 형성된 새로운 양상을 접하게 되며 신다다fluxus neodada음악그룹에 골드슈타인Goldstein, 로트라인Rothlein 등이 저드슨 워크샵에 가담하게 된다. 코너는 서예필치의 무보(無譜)를 만들어 제공했으며 무용지휘자들은 이 그림을 보고 나름의 해석에 따라 동작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을 지켜본 음악가는 그 동작을 소리로 재해석 함으로써 음악으로 만들게 되었다. 이는 자기 무용수들이 안무가의 개인적 표시를 배제한 채무용을 배우기를 원한 팩스턴Paxton의 방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저드슨 그룹의 미학은 결코 일관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위치는 교묘하게 비규정적이고 비제한적인 것이 되어 왔다. 안무 스타일은 저드슨에서 행해진 기초작업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지만 저드슨무용단에 의해 만들어진 풍부한 무용들은 무엇보다도 놀랄만한 다양성을 보여 준다. 마치 많은 안무가들이 가장 생산적이고 영향력있는 자로 부각되었듯이 이 그룹내에서 몇가지 특정한 주제와 관심들이 형성되었다. 그들의 워크샵에서는 민주적이고 공동체적인 과정처리는 한편으로 비유적으로 자유를 상징하는 방법들(예컨대 즉 흥동작, 지속적인 결정, 우연성)을 만들어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안무상의 선택과정에 대한 세련된 의식을 창출했다. 대체로 볼 때 기법과 그 완벽성의 문제는 형태적 구성의 문제보다 비중이 덜했다. 왜냐하면 안무가가 이용 가능한 무용수들은 경험자와 비경험자, 숙련자와 비숙련자의 혼합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워크샵 단원들의 참가를 허락하고 작품에 닦여지지 않고 자발적이며 자연적인 모습을 부여한 것은 미학적 나아가서는 정치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발표된 개별적 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것도 무용이라 불릴 수 있으며 무용으로 보일 수 있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시각예술가, 사진예술가, 음악가의 작품들도 무용수의 행위와 같이 하나의 무용으로 간주되었다. 극장무용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예술로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재시험될 수 있고 낯설게 될 수 있는 것이다.
1950∼60년대 다다Dada와 뉴욕아방가르드 예술세계에 있어서 우연기법과 신비철학의 합류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특히 그것은 사람들이 정반대의 세계관에 기반한 동일한 기법을 신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드슨 그룹의 사람들, 특히 선이나 신비주의를 수용한 던이나 팩스턴 같은 이들에게는 우연, 꼴라쥬, 자동기술 등의 방법은 자아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이었다. 즉 자아를 우주 혹은 무의식이나 신(神)의 커다란 흐름 속에 자유롭게 위치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본느 레이너Yonne Rainer와 같은 이들에게 이러한 기법들은 예술을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힘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 되었다.
한편, 시간과 그 인식에 대한 관심은 1960년대 선적(禪的)명상과 환각계의 영향에 의한 시간의 변형감각, 현상학에 대한 매혹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또한 비시간적 예술, 즉 회화나 조각들이 직접성, 비영원성, 자체 지속의 경험을 증진시키기 위해 시간예술양식(해프닝이나 이벤트)에 확산 침투된 것과 관련된다. 시간, 공간과 신체운동에 대한 인식은 던의 워크샵과 저드슨무용단에서 생성된 새로운 포스트 모던댄스의 세 가지 주된 관심사였다. 물론 던의 학생 모두가 선(禪)이나 환각의 효과 및 현상학이나 실존주의에 대해 알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행한 사람들과 다른 방법으로 인식과 통계의 과제에 접근했던 사람들과의 사이에는 공유된 탐구영역이 존재했다. 많은 젊은 무용수와 다른 예술가들의 지도자였던 케이지의 선(禪)에의 참여는 이러한 과제들에 대한 특정한 기틀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저드슨 그룹으로부터 훌륭한 안무스타일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본느 레이너Yvonne Rainer의 변증법적 작업은 일상적이거나 기괴한 움직임을 전통무용기법과 혼합시키며 신체의 작용과 조화를 극단에까지 추구하는 한편 안무과정에서 자유와 극단을 시험한다. 스티브 팩스턴Steve Paxton의 자연과 문화의 용해는 먹고 걷는 것과 같은 일상 행위를 지각과 인식상 가치있는 것으로 구조화시키며 시간의 평면화를 꾀한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의 과제무용은 대상을 사용하여 공연자와 관객 작품내의 주제에 대한 주의를 다른 예술작품에 집중시키며 작품속에 그에 대한 역사적 문맥을 창출한다. 루신다 차일드Lcinda Child의 냉정한 공연스타일은 무엇보다도 대상의 취급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단순한 움직임 구조에 의한 것이다. 트리사브라운Trisha Brown은 즉흥동작과 날아가는 동작을 개발했다.
이러한 분석적이고 연역적인 포스트 모던댄스 운동은 저든슨의 한 특징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데이비드골든David Gordom, 프레드 헬코Fled Herko, 알렌 로트라인Arlene Rothlein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연극적이고 유머러스하며 바로크적인 스타일이다. 세 번째 특징은 에렐인 섬머Elaine Summer의 「환상적 정원Fantastic Garden」으로부터 쥬디스 던Judith Dunn의 「최후의 순간Last Point」에 이어지는 작품에서 예증되는 다중매체 작품들이다. 이러한 세 가지 축을 따라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많은 작품이 발전되었지만 그것은 예술로서의 무용이론을 제안하고 설정한 저드슨 작업의 분석적이고 연역적인 측면일 뿐이다.
머스 커닝햄의 활동과 무용미학
길고 느린 시대적 변화, 즉 현대무용에서 마사 그라함에 의해 확산된 낭만주의로부터 도리스 험프리에 의해 개성화된 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의 변화는 균형이 기울어지는 과정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사고와 창조의 한 체계로서 낭만주의는 개체와 관계되며 감정을 고양시키고 형태의 지배에 저항하며, 반역을 선동하는 동시 발전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존중한다. 고전주의는 구조화된 집합들과 관계하며 지적인 것을 찬양하고 형태의 세련을 추구하며 질서를 주입시키며 균형을 중시한다. 다아원이나 마르크스, 프로이드는 비록 이념형성자들이었지만 그것은 낭만주의시대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시대의 축도(縮圖)는 바그너의 음악에 담겨 있다. 그것은 광적(狂的)인 낭만주의를 비유하는 제3제정에 의해 간직되어 있다.
새로운 종합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지만, 2차대전의 발광(發狂)은 후기 낭만주의시대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꿈같은 종말은 보다 깊이 있는 생각을 바라게끔 하였다. 그것은 보다 냉정하고 지적인 스타일의 최근예술, 특히 최근무용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무용에 있어서 이 지적인 스타일은 현장성, 상대성과 논리성을 통해 설명적 요소나 극적인 특수화, 연극적 함정, 주인공이나 클라이막스적 사건이나 감정의 투사가 불필요한 공연의 구현을 요구하였다. 무용, 음악, 무대장치의 개별적 독립성을 요구하였다. 모든 사건들이 똑같이 중요하며 모든 인물이 모두 흥미있을 뿐 아니라 모든 무용부분들이 관객에게 동일한 중요성을 갖는다. 동작의 중요성은 그 내적 의미보다는 그 행위 자체에 있게 된다. 팔과 다리가 자아ego와 본능적 충동의 근원보다 더 중요하다. 무용의 주제는 무용자체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어떤 것도 우연의 편중없이 동등하게 중시되는 이러한 무용은 마사 그라함 이래 어떤 무용예술가보다도 머스 커닝햄의 중요성을 인식케 해 주었다. 더욱이 머스 커닝햄과 20년 이상 함께 작업했던 케롤린 브라운Carolyn Brown은 그의 무용을「.......민주주의적 요소가 없다. 우리의 재능은 모두 차이가 있다. 우리는 모두가 성공, 실패하는 동등한 능력의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의 창조력이나 공연능력에는 우열의 능력 차이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대(공연장소)가 각기 개인적인 행위를 하는 무용가들로 꽉 채 있을 때 관객의 눈은 곧 머스 커닝햄에게 주목하게 된다. 머스 커닝햄이 세계적인 무용가임은 그의 모든 동작들이 의미성으로 충만해 있는 데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무용의 민주주의에 엘리트주의를 이식시켰다.
커닝햄의 무용과 안무는 무게와 방향의 신속한 전환과 각 단위동작에 따른 분명한 리듬에 의해 그 이전의 어떤 현대무용가들보다도 발레적이다. C. 브라운은 그의 무용훈련이「속도, 유연성, 통제력과 느린 동작의 지속적인 유지를 갖춘 동작과 함께 아무런 특정한 양식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동작의 구현을 목표로 한다」고 하였다. 특수성으로부터의 해방은 고전주의Classicism의 표징이다.
커닝햄의 무용양식을 규정하는 깨끗한 척추의 선에 언급은 발레에 대한 더욱 확대된 논의와 연결된다. 그러나 그러한 척추는 경직된 것이 아니라 커닝햄은 신체는 보다 낮은 척추에서의 균형점에서 작동한다고 가르쳤다. 척추는 팔과 다리의 근간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스프링처럼 신축적으로 긴장, 이완 회전할 수 있다. 그라함의 기법은 두 개의 축(척추와 골반)을 요구하나 커닝햄은 척추의 수직적 운동에 주로 의존한다. 결국 그의 무용은 보다 경쾌하며 수평적으로 이동할 경우에도 항상 지면과 하늘의 존재를 의식하게 한다. 그는 월터 소렐Walter Sorell에게 말하기를 무용에 있어서의 속도란「팔이나 다리를 환상적인 템포로 경련하는 것이 아니라 척추가 발과 팔을 움직이게 하는 신속한 작용에서 도출하는 것이다」고 했다.
커닝햄의 안무는 걷기, 뛰기, 건너뛰기skipping 같은 보행적 동작과 몸을 앞으로 회전시키는 불균형적 동작은 물론 고도의 숙련성과 균형미를 갖춘 동작을 요구한다. 그의 무용은 시간단위의 분할과 긴 수평적 도약과 깊은 착지reaching, 뛰어오르는 스텝bouncing step을 동시에 포함한다. 그는 신체를 굴곡시키고, 예각으로 하거나 양자를 조화시키기도 하며 허리를 굽히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거나 넘어지게 하는 동작을 취하기도 한다. 그는 전신을 이용하면 발레처럼 고도의 우아한 동작을 포함한다. 사실 커닝햄의 안무는 마사 그라함보다 조지 발란쉰George Balanchine의 발레와 유사하다고 이해하는 편이 수월하다.
발란쉰은 서술적 요소나 줄거리 전달을 위한 마임, 연극적 성격 등을 사용하지 않은 추상발레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텅 빈 무대에서 리허설에 사용한 의상을 입고 공연되었는 데 이는 재정적 이유도 있으나 무엇보다 발란쉰이 무용과 관객사이의 거리를 유발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발란쉰은 기존발레의 형식을 일부 변화시켰다. 그의 코르드 발레Corps de Ballet는 중심무용수들을 위한 아름다운 구조를 형성할 경우에도 단지 스텝만을 밟고 있지는 않는다, 대신 그들은 복잡한 무늬를 형성하거나 때로 주연들이 움직이는 환경으로서 작용한다. 주연들은 군무로부터 빠져 나와 간단한 춤을 춘 다시 대열에 합류하기도 한다.
커닝햄은 또한 서술이나 극중 인물은 사용하지 않았다. 흔히 그의 공연은 리허설 의상에 최소한의 장치만을 사용하였다. 그는 무대의 중심구역을 없애는 데 있어서 발란쉰보다도 적극적이었다. 무대공간은 상이한 행동으로 메꿔졌으며 중심되는 초점이 없었다. 그는 군무, 솔로주자, 발레리나, 카발리에(남자무용수)간의 우선 순위를 두지 않았으며 모든 무용수에게 한 번씩의 솔로기회를 부여하여 앙상블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발란쉰의 걸작 중 일부는 대중적 명성을 얻는데 수년 간이 걸렸다. 이 중 일부는 아직도 관객 일부만의 이해를 얻었는 바 이는 감정의 투영 방법에 기인한다.
그가 인정했듯이 안무자의 가장 큰 파 드 뒤Pas de deux는 연가이나 그 열정은 동작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무용수들간의 관계를 관객에게 전달시키는 줄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커닝햄의 무용 역시 이와 비슷한 난점을 지니고 있다. 부드러운 정조의 듀엣과 격동적, 혼돈스런 군무, 강렬하고 고뇌 어린 솔로 등의 포함되나 관객은 오직 동작의 유형을 통해서만 감정의 흐름을 감지할 뿐이다.
발란쉰의 발레에는 역시 음악 감정이 내재해 있다. 그는 음악을 무용의 기초로서 생각하는 뛰어난 음악가이다. 그는 즐겨「작곡가는 시간의 건축가」라고 말했으며 작곡가의 계획에 따라 작품을 구상하곤 했다. 즉 음악은 그의 무용과 불가분적 관계에 있으며 양자가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커닝햄은 이와는 대조적이다. 그는 무용을 음악에서 독립시키려는 논리적인 시도를 하였다. 험프리Humphrey와 타미리스Tamiris는 악보없이 무용을 만들었으며 그라함은 무용에 맞게 음악을 짜 맞추었다. 한편 커닝햄은 같은 시각에 극장내에 공존한다는 사실이외에 음악과는 상관없는 무용작품을 창작하였다. 발란쉰처럼 커닝햄도 시간문제에 몰두했다. 그의 구성과 율동은 작곡가에 의해 부과된 것이 아니라 그가 발명한 동작 자체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한 구절phrase의 형태와 길이는 구절 자체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의 무용은 안무와 음악이 어떻게 상이한 방식으로 관객을 자극하면서도 상호 보충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 두 예술은 공생적 관계를 유지한다.
커닝햄은 1968년 5월 뉴욕지The New yorker의 회견에서 회고하기를 1944년 있었던 최초의 발표회들 중 특별히 한 작품의 반응이 좋았던 이유는「그 작품이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의 정석적 의미를 느끼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종의 공포심 같은 감정을 느꼈다. 물론 직접적인 공포심은 아니었으나.......시간에 대한 중요한 것은......그 작품은 특수한 시간단위로 분할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 작품Root of Unfocus에서 스텝과 음악은 함께 시작하고 끝났다.(한 안무 단위 내에서) 그러나 그 중반부에서는 각자가 독립적으로 연행되었다. 「그것이 음악과 무용이 분리될 수 있다는 착상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양자의 이러한 유리는 그의 작업이 진전됨에 따라 더욱 심화되었다.
그는 뉴톤보다는 아인슈타인적인 물리학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 안무를 하면서 그는 스톱위치로 동작의 시간을 측정하곤 했다. 이는 카로린 브라운이 언급했듯이「리듬이 동작의 본질에서 유출되며 동작은 무용수의 개성적 본질에서 비롯된다.......시간의 정확성은 원하는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사공간을 변화시키면 이에 따라 동작도 변화하게 된다」만일 시간이 하나의 차원이라면 그것의 고려없이 공간을 측정할 수는 없다.
커닝햄은 매일 아침 그의 작업장에서 혼자 무용의 구상을 한다. 우선 하나의 동작을 구성하고 그로부터 다른 동작들이 연결되어진다. 그 다음에 단원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무용수들간의 공간 사이의 관계, 시간과 공간사이의 관계들을 설정, 발견하며 무용을 더욱 체계화시키기 위해 이러한 관계를 연구하게 된다. 그의 무용은 극도로 물리적이며 창작의 순간에 그의 개인적인 리듬과 감정을 표현하게 된다. 무용은 음악보다는 인간의 생체적 리듬에 의존한다.
「거리를 걷는 데 측량기구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커닝햄은 설명한다.「섰다가 가고 천천히 늦추었다가 속도를 높이는 걷기로부터 인간동작에 관한 규칙을 유출했다. 우리는 동일한 생체구조를 갖고 있으나 걷는 방식은 모두가 상이하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기법을 사용하지만 걷기만 보더라도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 각각 다르다. 무용은 넓게 보면 걷기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걷는 데 규칙적인 박자가 없다면 무용에도 박자가 불필요한 것이다」무용의 한 부분 연습에서 그는 박자를 세어 주며 다른 부분에서는 카운트를 하지 않는다.
커닝햄은 강렬한 지적 호기심을 갖고 있으며 그의 많은 무용개념은 과학적 발견과 기계의 발명, 간단히 말해서 주변의 세계에서 노출된 것이다. 그러나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지적인 관념이나 이미지들을 직접 이입시키지 않고 단지 동작의 원리에만 투영시킨다. 모든 스텝이 특정한 의미를 내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무용수가 동작에 어떤 의미가 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원치 않는다」고 회견에서 말했다. 「그것이 내가 마사 그라함과 함께 작업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원하지 않는 이유이다」
커닝햄에 있어서 동작의 의미는 동작 자체와 그를 행하는 연행자 내에 내재한 것이며 외적인 개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무용에는 항상 정서가 내개하는 데 이는「무용을 하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존재는 추상성이 아니다. 나는 결코 나의 무용이 추상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이 사람에 따라서 표현적이라고 생각한다」더욱이 동작의 감정은 우리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춤출 때 표현된다. 아무리 이상하거나 또는 관행적이든 아니든 간에 무용의 생명력은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커닝햄은 무용의 주제는 발레나 초기 현대무용의 주제는 서구문명에 의한 것, 또는 낭만적 사랑을 주로 취하였다. 발레의 여주인공은 보통 사랑의 배신을 당한 뒤에 미쳐버리거나 백조로 변하거나 키스를 받아 잠에서 깨어나기도 한다. 낭만적 사랑과 그 궁극적 표현인 사랑의 죽음에 의해 발레는 존재근거를 갖게 된다. 거의 모든 발레 안무가들은 남성이었으며 잠자는 숲속의 미녀Sleeping Beauty는 보편적인 은유라는 최근의 비평가 그리어 존슨Greer Johnson의 규정에도 불구하고-「누군가 우리에게 입맞추어 깨우기 전까지 우리는 모두 잠들어 있다」-고전들은 관계들을 역동적으로 제시한다. 현대무용의 변화는 현대무용의 많은 선구자들이 남성에 의해 변형되어야 하는 기능적 종속성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추구한 여성들이었다. 이사도라 던컨은 정열을 주제로 혼자 또는 일단의 소녀들과 춤추었다. 로에 플러는 주제를 무시하였다. 데니숀은 사랑의 주제로 복귀하였으나 험프리는 그것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변형시켰고 그라함은 다시 프로이드적 심리갈등으로 해석, 안무하였다. 커닝햄은 적어도 문자적 의미에서 그 주제를 무시하였다. 그의 애정어린 듀엣과 정열적인 만남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공작들은 한쌍에 의한 긴장이나 매력보다는 그룹내에서의 개인들간의 상호작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무용수들을 사회적 상황 내의 민중으로서 또는 개인들로서 간주하였다. 이것이「내가 군무를, 코러스를 택하지 않는 이유이다」라고 그는 설명한다.「때때로 우리는 함께 춤을 추나 사람들은 소풍을 가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들은 개별적인 행동을 할 때는 언제나 분리되어진다」이러한 분리감은 일부 작품에 참담한 소외감을 유발시킨다.
대중예술은 감상성과 낭만적 사랑을 흔히 전달하는 반면 심각한 예술은 그렇지 않다. 금세기 들어 회화와 조각의 내용은 현격하게 변화했다. 즉 형식과 재료에 치우치거나 정염을 느끼게 하는 미술은 낭만주의적이며 그러한 주제를 탈피하는 것은 고전주의적 양식이다. 2차대전 이래로 미국의 예술은 공감의 형성이 위험하거나 쓸데없다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커닝햄의 무용 역시 감정을 내포하나 초기의 안무가들과는 달리 극적인 감정의 고양을 의도하지는 않는다. 특별한 감정적 결과를 창출하는 것보다 관객들 자신들이 목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하나의 이벤트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는「그들이 어떻게 느껴야 하는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무용정서는 구체적이지 않고 개인화된 것도 아니며 강화된 것도 아니다. 정서는 동작과 공간과 시간 내에서의 무용수들간의 관계와 형식을 통해서 전달된다. 그러한 정서는 성교를 하는 하룻밤보다는 공원을 산책하는 동안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에 보다 접근해 있다.
그의 예술은 개별적인 강렬한 감각보다는 체험의 다층성을 강조한다. 관객이 단일한 사건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동시다발적인 상황을 제시하는 것도 이러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시에 프로이드적인 과거의 탐구에 편향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의 작업은 언급의 행위가 아니라 즉시적, 직접적 행동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라함을 비롯한 여타 미국 안무가들의 작업에 있어서 의상, 음악, 안무와 무대장치 등은 단일한 경험에 관객의 반응을 집중시키도록 통합된다. 반면 커닝햄의 작업관은 작품의 각 요소들을 개별적인 경험 자체로서 분리된 공연행위로 구성시키는 것이다.
왜 그의 「열대우림Rainforest」(1968)이 앤디 와홀Andy Warhol의 헬륨으로 채운 베개들 사이에서 공연되었는가에 대한 구체적 이유는 없다. 또한 그러지 말라는 이유도 없다. 무용수들이 공연 중 베개들과 맞닥트리면 그들은 살짝 옆으로 치워놓는다. 만약 동작과 베개들이 관객의 내면에서 두 개의 구체적인 사념으로서 연결되고 양자가 서로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이와 반대로 관객이 베개와 무용행위를 분리시켜 감상할 수도 있고 또는 한 대상을 무시하고 다른 하나에 집중할 수도 있다. 커닝햄은 주제에 관해 우선 순위를 설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베개들은 정서적 효과의 창출에 직접적인 기여는 하지 않는다.
커닝햄은 장치를 통해 작업을 할 때에도 디자이너와 협의한다거나 다른 안무가들이 그렇듯이 요구사항을 강요하지 않는다. 커닝햄은 극장에 함께 도입되는 모든 예술분야들이 상호 독립적 관계를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각 분야의 예술가는 전체 공연의 다른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창조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극장 내에서 각 요소들은 관객들의 경험 행위에 상호 영향을 미친다. 「발걸음」(Tread, 1970)을 위한 브루스 노만Bruce Mauman의 디자인은 장대 위에 설치한 선풍기를 울타리처럼 무대 전면에 배열한 것이었다. 선풍기 바람이 객석 앞줄의 관객들에게 미쳤으며 장대들의 동작의 범위를 한정시켰다. 때때로 무용수의 머리는 장대 한편으로 신체 나머지 부분은 다른 쪽으로 배치되었다. 무대를 가로지르는 커닝햄은 전진동작은 금속제 기둥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잠시 후에 그러한 방해는 짜증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놀이로서 즐기게 된다. 무대를 가로지르는 커닝햄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마치 차를 뚫고 거리를 가로지르는 사람을 찾을 때처럼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커닝햄은 안무를 하고 노만은 그 동작을 관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장치를 통해 제공해 주었다. 그의 무대장치는 경우에 따라 분산요인이 되기도 하고 증폭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안무와 함께 동일한 시, 공간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장치는 완전한 독립적 요소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양자는 독립적이지 않고 상징성을 공유한다.
커닝햄은 공연에서 음악은 장치보다도 더욱 현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How to Pass, Kick, Fall and Run」(1965)에서 작곡가인 존 케이지John Cage와 동료 한 사람은 옆줄에 앉아 1분동안 한 이야기를 읽는다. 「Can-field」(1970)에서는 포린 올리브로스Pauline Oliveros의 반주에 따라 케이지, 데이비드 튜더David Tudor, 골든무마Gordon Mumma가 워키토키로 계속 교신하는 동안 이와 별개로 무용이 행해진다. 커닝햄은 무대 디자이너와 마찬가지로 작곡가와도 상의하지 않는다. 단지 공연 시간만을 작곡가에게 알려 주며 따라서 음악은 개별적 요소로서 독자성을 띤다.
커닝햄의 이러한 표현형식은 특정한 논리성을 갖추고 있다. 무용 창작은 일단 단순히 육체적 행위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특별한 관념과 그가 읽은 글이나 개념, 기술의 발전 또는 세계에의 반응에 있어서 그가 감지할 외부적 내면적 변화 등을 반영하고 있다. 과학자처럼 그는 호기심을 행위로 풀어내는 과감한 시도를 즐겨한다. 하나의 실험은 의도 추론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도출했다고 해서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나는 그 생각들이 유용하고 해볼만한 가치가 있기에 이러한 작업을 한다」고 그는 말한다.
「Canfield」에서처럼 전자음악이나 전자교신의 사용은 극장 밖에서의 세계의 일부인 만큼 최신의 기술을 극장내에 도입시켜 그것을 공연의 일부로 침입시킨다.
「How to pass」에서 케이지의 이야기하는 방식은 삶의 실체가 그렇듯이 분열적 성격을 보여준다.「겨울나무가지」Winter branch, 1964 에서는 확성기를 통해 라모트 영La Monte Young의 두 개의 레코드를 크게 틀어댔다. 한편 로버트 라오쉔버그Robert Rauschengerg의 조명은 무대 대부분을 암흑 속에 남겨두었다. 무대에는 아무 장치도 없었으며 조명과 음향만이 직선적 예각적 동작과 완만한 착지에 적합한 헤어나올 수 없는 혼돈의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이 작품에서 안무와 조명, 음악이 따로 다로 창작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동일한 시, 공간내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상호 영향을 미쳤다. 길거리에서 듣는 소리와 보는 동작들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각 요소를 인지하는 방식에 상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들의 우연적 병존성에 있다고 커닝햄은 말한다. 또한 관객은 다층적인 사건들과 대면하게 된다. 「How to pass」에서 관객들은 커닝햄이나 케이지에 주목하거나 양측을 번갈아 보거나 동시에 양자에 의해서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어쨌든 관객은 스스로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을 선택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커닝햄도 케이지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실제보다는 이론적으로 더욱 효과적일 때가 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무용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가며 결국 부조화스러운 음악은 일종의 소음이며 동시에 폭행이다.
케이지는1937년이래 커닝햄과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가 시애틀 워싱턴에 있는 무용교실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때 커닝햄은 수강생이었다. 데니숀에서 루이 호스트Louis Horst가 그라함의 첫 강의에서 연주했던 이래 이는 가장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커닝햄이 혼자 솔로를 안무할 때 그는 케이지에게 음악을 작곡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이후 그는 커닝햄의 음악 반주자이자 지휘자, 후원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특히 케이지의 제자 중에는 화가와 조각가들이 많았기 때문에 호스트보다는 훨씬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1952년 케이지는 노스 캐롤리나의 블랙 마운틴칼리지Black Mountain College에서의 강의를 통해 제자들로 하여금 삶과 예술 사이의 간격을 철폐시키도록 유도하였다. 그는 모든 순간들이 동일한 중요성을 갖는, 극적인 클라이막스가 없는 새로운 예술을 요구하였다. 당시 커닝햄은 그 대학에서 무용을 하였으며 다음 해에 무용단을 조직하여 안무가로서의 제2의 단계를 구축하였다.
케이지는 음악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으나 청중을 즐겁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예술은 논쟁적이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중 하나는 소음의 찬미였다. 이미 1937년에 그는 「어디에 있거나 우리가 듣는 것의 대부분은 소음이다.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때 그것은 우리를 방해하고 괴롭힌다. 대신 그 소음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그것이 매혹적임을 깨닫게 된다」고 썼다.
커닝햄을 무용에서는 어떤 동작도 배제될 수 없다고 생각했듯이 케이지 역시 음악에서 어떤 종류의 소리도 모두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케이지는 이런 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외부의 소리가 파고 들어올 수 있게끔 음악의 구성에는 구멍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소음이라고 부르는 외부적인 음향들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귀를 기울이게 된다. 쇠망치 소리와 바하의 음악이 공존하도록 작곡가는 수정작업을 해야 한다. 케이지는「나비」라는 작품에서 객석으로 진짜 나비들을 날려보냈다. 또한 연주회에서는 22분 동안 연주를 한 다음 역시 22분 동안을 연주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기도 했다. 그는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연주회의 선입관을 깨뜨리고 일상적인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게 하였다.
「침묵silence」이라는 책에 수록된 그의 강의를 통해 그의 이러한 원칙들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환경의 한정된 부분을 탐구하기보다는 환경자체를 체험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며 시공내에서 단순히 존재하기 보다는 모든 순간을 완전히 경험하는 것에 흥미를 가졌다. 1958년 그는 「나의 작품은 질서의 세계에서 벗어나 무질서의 세계를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으며 특히 「심리학은 이제 그만......」이라는 카프카Kafka의 말을 즐겨 인용하였다. 케이지는 선(禪)의 수련자였으며 선철학에서는 과거나 미래에 지배받지 않고 사는 것을 가르쳤다. (선사는 「배고플 때 먹으며 피곤할 때 잔다」라는 말로 선을 정의하였다)선 종교는 1960년대에 부모의 윤리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진보적인 젊은이들에 의해 유행하였다. 특히 1963년 쿠바미사일 위기 이후 그들이 영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 널리 보급되었다.
선(禪)의 가르침에 사용하는 한 기법은 공안(화두)이라고 하는 논리적 대답을 초월하는 수수께끼이다. 공안은 논리를 포기하게 하며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바꾸게 한다. 케이지의 강의에서처럼 이러한 공안은 초연한 우월감을 내재한 목소리로 가르쳤다. 때때로 스승은 제자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자만심을 가질 수 있다.
케이지의 이론은 기존음계에 비해 각 음보의 동등한 중요성을 인정하는 쇤베르그Schoenberg의 12음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다. 화음에서는 각 음이 그 단위내의 가장 중요한 음에 대한 종속적 관계를 갖는다. 더 나아가 케이지는 12음계 음악 역시도 완벽하게 조직되어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하나의 체계는 각 음보들의 조절통제이며......그 안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각 음표가 동등하게 중요하므로 특별히 중요한 음표도 없으며 이로부터 모든 것이 완전히 평등하다는 그의 관념이 도출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 예술작품의 주인공이라는 기초개념이 타파되었다.
최종적인 민주주의는 결국에는 궁극적인 실망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태양은 결국 차디찬 별로 변할 것이며 그때가면 예술, 쾌락, 영웅주의, 지배적인 과거 등 모두가 종말을 고할 것이다.
커닝햄의 이론 역시 케이지와 유사한 데가 있다. 그러나 커닝햄의 경우 예술이 이론을 초월하는 데 반해 케이지는 예술보다 이론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커닝햄의 민주주의적 무용은 모든 연행자로 하여금 자신의 극하적 능력을 발휘하게 하며 모든 관객에게 흥미있는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다층성 이론을 가능케 한다.
기존 무용형식에 대해 커닝햄이 혐오하는 것 중의 하나는 무용수들 사이에 미리 관계를 설정하고 이를 강요하는 관행성이다. 다면적인 무대 위에서 무용수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커닝햄의 작품은 일면 대도시의 소외감을 연상케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수법을 동작의 스피드에서 비롯된 일종의 분리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따로따로 행동하지만 「다음순간 돌아서서 함께 화합한다」
1947년 발란쉰과 컬스타인Lincoln Kirstein의 발레단체the Ballet Society는 커닝햄의 안무, 케이지의 음악, 노구치의 무대장치에 의해 「계절The Seasons」이라는 작품을 공연하였다. 발레를 위해 현대무용 안무가가 작품을 만든 것은 발란쉰과 컬스타인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독창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컬스타인은 그 작품이「흥미롭고 우아하지만 예술적 흥미를 유발하기에는 부족하며 발레훈련을 받은 무용수들이 하기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4세기에 걸친 논리적 훈련 방식에 기초한 기예적 숙련미가 없이는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컬스타인은 무용에 관한 예리한 관찰자였으며 대중을 매료할 수 있는 커닝햄의 능력에 관한 그의 평가는 정확한 것이었다. 그러나 발레에 대한 일방적 옹호로 인해 커닝햄의 무용이 고도로 숙련적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것은 착오였다.
비록 커닝햄은 뛰거나 건너뛰기Skipping 같은 비정규적 동작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나 항상 기술적 측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신체를 강건하게 지속력있고 유연하게 하는 방법을 추구하였으며 흔히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방법들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동작의 모든 요소와 형태를 적용하려 하였으며 무용에서는 걷기Walking이든 관행적 동작이든 모든 것이 가능한 바 이는 무용이「에너지의 증폭」이며 기술은 일종의「요가yoga」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커닝햄은 「무용수는 동작을 자신의 아름다움과 내치 의미성과 연결시키는 사람이라고 간주했다. 그에게 있어 기법과 숙련성 자체보다는 그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려는 경향이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숙련성은 스케일을 축소시키며 인간의 다양한 잠재력을 국한시킬 수 있다......대부분의 무용가들이 하나의 스텝을 익히면 그것으로 만족하나 진정 위대한 무용수는 그것을 초월한다. 당신은 그것을 벗어나서 소위 실수를 저지를 수 있으나 동시에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그는 말한다. 물론 고위로 실수를 저지르라는 말은 아니며 훌륭한 음악가가 가끔 한 음보를 틀리면서도 전체적 음악의 효과는 더욱 높이듯이 그렇게 파격의 미를 살리라는 말이다. 그는 숙련성 이상의 그 무엇을 추구한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으로 단지 구부리거나 펴는 두 가지 동작밖에 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무용수이며 실제로 다리를 펼 때「그것을 편 것처럼 흉내내지 말고 그것을 곧게 펴라!-그러면 관객들은 당신이 발레 무용수임을 인정할 것이다. 다리를 구부릴 때 깊은 Pile로 구부리면 그들은 당신이 중국무용을 공부했다고(배웠다고) 말할 것이다」진정한 다리를 뻗치는 동작은 커닝햄에 따르면 기술적인 묘기라고 할 수 있다. 기술에 대한 그의 비법은 모든 동작이 충분한 완성도를 지녀야 하며 모든 정지자세는 완전한 휴식의 순간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의 무용수들은 단지 신체의 형태를 구성하거나 직각으로 방향을 급격하게 전환하는 것뿐만 아니라 음악과는 독립적으로 스텝을 행하고 리듬과 완전히 결합된 안무를 한다. 「Canfirld」가 부룩클린Brooklyn음악학교에서 공연될 때 워키토키의 조작권에 대한 음악가들과 무대장치가 조합간의 분쟁 때문에 완전한 침묵(무음향)안에서 행해졌다. 그 공연은 재미있었으며, 커닝햄 무용의 리듬은 동작자체의 패턴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커닝햄이 케이지와 공동작업을 할 때는 일반적 방법으로 작곡을 하였으며 대부분의 경우 미리 만들어진 안무작품에 곡을 붙이는 형식을 취했다. 두 사람은 정해진 시간 내에서 단지 음악과 무용이 접맥되어 부분만을 규정할 뿐 독립적인 창작을 하였다. 처음의 음악은 피아노의 줄string사이에 이물질들을 삽입시켜 독특한 타악기 음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후로 두 사람은 다른 종류의 음향과 음악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커닝햄은 2차대전 이후 발명된 녹음기가 음악에 공간개념을 유발시키면서 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최초의 작품은 피에르 세이퍼Pierre Schaeffer과 피에르 헨리Pierre Henry에 의한 「Symphonie pour un homme seul」이란 곳이었는데 이 곳은 1952년에 무용곡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기존적 방법으로는 이 곳을 무용화시킬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는 「언제나 그 리듬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결국 그는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음악은 7분30초 동안 연주되었기 때문에 우선 그 시간에 맞는 무용을 안무한 다음에 일정한 음표와 동작을 결합시켜 구성하였다. 측정된 시간이 아니라「임의로 구분할 수 있는 일정한 길이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방법이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류는 수 천년의 시간을 특정한 규격으로 분할하는 방식에 길들여져 있으나 이것이 곧 절대적인 구분방법임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1961년까지 그는 전통적인 음악 비전통적인 음악 또는 양자를 다른 여러 음향들과 혼합시킨 음악들을 사용한 다양한 양식적 실험을 행하였다. 그의 최초작품 중 극히 일부는 무음악으로서는 효과를 거둘 수 없는 양식들이 포함된다.
커닝햄의 양식은「Sixteen Dances for Soloist and Company」란 작품이 상연된 1951년에 와서 두 번째의 전기를 겪게 된다. 다음해에 그는 케이지가 강의하고 있던 대학에서 무용을 배웠으며, 1953년에는 6명의 무용수와 2명의 음악가를 규합, 무용단을 설립하였다. 우연성의 사용은 임의적 무정부주의나 즉흥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커닝햄에 따르면 그가 창작한 부분들의 순서들을 대체로 따르며, 중요치 않은 부분에서는 동전을 던져 그 부분을 구성하는 수법을 택하는 것이다. 우연의 효과는 무용의 순서상 어느 부분이 먼저 제시될 것인가 이상의 사항을 결정할 수는 없다. 최근에 커닝햄은 무작위 추출 방법이 과학적 실험의 타당한 절차로서 채택된다는 사실을 읽고 그 우연적 효과의 과학성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우연적 방법의 비효율적, 오류적 가능성에 대해 그는「나는 그러한 행위에 어떤 판단도 우선시키지 않는다. 무엇이 결과하든 간에 단지 그것을 해 볼 뿐이다. 때때로 물리적 의미에서 효과가 없을 수도 있으나 실제로 해봄으로써 기대하지 않았던 그 무엇을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은 당신이 이미 아는 것으로서의 선험적인 결정론에서 탈피하며 마음을 개방할 수 있는 즉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커닝햄의 친구들은 미술가나 조각가였으며, 현대 미국 미술의 형성의 이러한 우연의 기법은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1930∼40년대에 걸쳐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했던 초현실주의자들은 프로이드적 자유연상기법을 심리적 자동기술법psychin automatism으로 변화시켰다. 미술가는 종이위에 손을 임의로 이동시켜 의식적인 작품의 기초로서 적용될 수 있는 자발적, 즉시적인 형태들을 창조해냈다. 이런 기법을 통해 그는 의식을 초월하여 잠재의식을 외화(外化), 형상화 시킬 수 있었다.
예술에 있어서의 우연적 기법은 이 세대에 특히 적합한 양식이다. 한 그리이스 철학자는 「발생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건은 당신에게도 역시 발생할 수 있음을 인식하라」고 경고하였다. 이러한「우연」은 수백만의 인명피해를 가져온 1차대전, 스탈린 시대의 피의 숙청, 독일공화국 Third Reich의 죽음의 수용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피해 등에서 고스란히 실현되었다. 당시의 혁명과 폭력은 역시 우연의 효과를 반증했으며, 분명히「왜 하필이면 내가 Why Me?」를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확률의 연구를 통해 보면 우연이라고 하는 현상에서 일정한 질서가 내재한다는 이론적 근거가 있다. 동전을 백번 던져보면 신기하게도 앞면과 뒷면이 각각 한번씩 나오는 경우가 많다. 더욱 계속해서 20번 앞면이 나왔다고 해도 21번째에도 역시 앞면에 나올 가능성은 50대 50이다. 종(種)모양의 분포도는 확률의 상징이며 이 철학자가 경고한 바의 도표상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우연의 작용은 시간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며 커닝햄은 그의 영역을 구성하는 모든 사항들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우연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이 화가들과 다른 것은 사실이며, 존 케이지가 음악에 적용한 방식과도 차이가 있다. 결국 제임스 크로스티James Klosty가 지적했듯이 케이지가 우연성을 「개성이나 개인적 취향을 배제시키는 방법」으로서 사용한 반면 커닝햄에 있어서 우연성 자체가 철학적 사념보다는 실증적이고 강력한 수단으로서 적용하였다.
1953년 발표된「변화에 의한 조곡Suite by Chance」에서 커닝햄은 등장한 무용가의 수와 공간, 순서, 상이한 신체부분에 의한 동작과 그 외의 안무의 여러 요소들을 정리한 차트를 몇 달에 걸쳐 작성하였다. 그 다음에야 그는 그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결합될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동전을 던져 결정하였다. 그는 동작, 공간과 시간의 모든 것에 숙달해 있었으며 그가 작성한 차트는 안무적 독창성으로 충만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신체와 마음에 직접 시험을 통해 일련의 창작을 하였다. 따라서 그는 부분들이 결합되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우연적 작용의 통제에 대해 신뢰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한 가지 문제가 단 하나의 정답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해답들을 인식할 준비가 되어 있고 보다 넓은 시야를 갖추기만 한다면 무한한 가능성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Suite by Chance」다음에 그는「한무더기 춤Dime a Dance」라는 작품에서 소위「개방된 형식」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공연에서 작곡을 분리시키려는 현대작곡가들에 의해 개방된 작곡기법이다. 「작곡과 공연, 청취는 각각 별개의 것이다. 그들 상호간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고 케이지는 묻는다. 개방형식에 있어서 작곡이 행진 다음에 어떤 부분을 연주할 것이가, 어떤 순서로 어떤 악기들을 사용할 것인가 등을 선택한 것은 연주자들이다. 「Dime a Dance」에서 커닝햄은 여러 부분들을 창작하여 단원들과 연습하였으나 공연의 순서를 미리 결정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관객중 몇 사람이 카드를 뽑아 그날 저녁의 공연 순서를 정한다.
케이지와는 달리 커닝햄은 작곡(구성), 공연과 관람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갖는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는 그들 요소가 상호 영향을 미침을 알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상관성 때문에 반듯이 동일한 공연을 반복해야 할 필요는 없다. 동작이 그 연행자에 따라 상이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커닝햄은「우리의 팔꿈치가 각각 다르고 관절이 다르며」동작 역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모든 공연이 항상 동일해야 한다는 기존관념에 집착할 필요는 없으며 그 차이를 즐기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1953∼54년 겨울에 커닝햄과 그의 새로운 무용단은 오프 브로드웨이off-Broadway의 라이스 극장Theatre de lys에서 일주일간의 공연을 가졌다. 이후 1954년에 그는 Guggenheim fellowshi을 수상함으로서 존 케이지로 하여금 그의 경력이 밝혀지게 되었다. 누군가 케이지에게 커닝햄이 수상금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었을 때 그는「먹는다」고 답변했다. 1955∼1964년에 걸쳐 그는 브룩클린음악학교, Jacob`s Pillow, 노트르담대학과 UCLA에게 강의했다. 1958년에는 코네티컷대학의 무용프로그램에 참가요청을 받고 몇 년 여름을 그 곳에서 일했다.
이 기간동안 커닝햄은 매우 독창적인 군무작품을 계속 창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설명도, 인과관계도, 성격구축도, 감정발전도, 중심점도, 주인공도 제시하지 않는다. 기법의 탁월함이 돋보였던 커닝햄과 케롤린 브라운Carolyn Brown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용단은 주인공과 단Corps의 위계적 조직체가 아니라 개별적인 솔로들의 집합체였다. 그의 작품에는 핵심적 행동이나 사건의 구조가 없으며, 대신 여러 곳에서 동시에 행해지는 흥미로운 행위들로 구성된다. 이미 언급한 다층성과 연행자와 관객의 상호관계의 원리에 따라 관객은 그가 원하는 행동을 선택, 감상할 수 있다.
1961∼64년에 걸쳐 로버트 라오쉔버그가 무용단위예술자문 역할을 했는데 그는 의상, 조명, 장치 등 모든 공연요소들을 디자인하며, 단체와 고락을 같이했다. 그는 극장에 따라 때로는 공연 때마다 새로운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그는 커닝햄의 안무에 내재한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 예술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1966년 케이지는 사직한 라오쉔버그 그 대신에 재스퍼 존스Jasper Johns라는 젊은 예술가를 채용하였다. 존스는 그의 조상들처럼 방랑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으며 디자인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무용을 하는 도중에 무대상에 물체를 배치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나는 무대장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으며…모든 무용은 성격에 적합한 독특한 의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다름이다. 한 무용을 다른 무용과 구분지어 주는 시간적 효과만이 제시되면 된다. 그러나 나는 과연 이것이 필수적인 것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존은 극장에서 작업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단원들을 위해 다른 예술가들을 초빙하였다. 그 중에는 앤디 와홀Andy Warhol,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가 포함된다. 존은 자신은 마르셀 두챔Marcel Duchamp의「The Larg Glass」를 「Walkaround Time」(1968)의 셋팅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중요한 현대 미술가들은 커닝햄의 작업을 했으며 그의 공간처리는 몇 가지 면에서 미국 회화의 발전과 병행하여 왔다. 프랑스에서 주축을 형성하여 미국에 유입된 양식은 추상적 표현주의(뉴욕파)였다. 전쟁 전 유럽이 주류가 되었던 초현실주의와 입체파Cubism에서 주제를 추출하여 종합시킨 형식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잠재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몽상적 이미지들을 회화속에 형상화시키려 하였다. 프로이드의 이론들이 지나치게 이성적임을 느낀 미국의 미술가들은 신화를 추구하여 의식적, 무의식적 이미지들을 혼합시킴으로써 융의 심리학에 따른 집단 무의식과 원형archetype들을 표현하는 데 더욱 치중하였다.(신화와 꿈을 표현한 마사그라함의 작업은 그녀를 초현실주의자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작품은 그 상징적 이미지의 활용이 초현실주의적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체계적으로 구성되었고 구체적이었다) 입체파는 구조와 관점의 문제와 관계되어 있다. 입체파적 그림은 하나의 물체를 모든 방향의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입체파 화가는 공간을 기하화적으로 다루며 재현적인 회화의 관점을 무시한다. 그들은 캔바스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특수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선택을 수요하고 거기서부터 작업을 하였다. 커닝햄이 무용의 체계를 재고려했듯이 회화의 체계 역시 세기를 걸쳐 재고되었다.
뉴욕파는 화가들에게 다양한 기법과 이론을 주입시켰으나 대부분의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의 강렬한 개성적 표현과 대상을 주체적으로 구성, 표현하는 입체파적인 경향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화가들은 또한 하나의 과정 또는 이벤트로서의 예술행위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물방울로 캔바스를 채우는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의 그림은 커닝햄의 무용의 무대를 채우는 필적Calligraphy과 적잖은 공통점을 지닌다. 양쪽 모두 개별적인 사건들이 한정된 공간내에서 서로 얽혀지면 전체가 시작도 끝도 없는 에너지로 충만되며 공간을 통해 지속적으로 흘러갈 뿐이라는 점이다.
커닝햄의 우연성 안무는 근본적으로 안무가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우연적 진행에 기반을 둔 그의 움직임, 시, 공간의 상호관련에 대한 연구 및 그 실천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어떤 움직임도 무용의 제재가 될 수 있다.
②어떤 진행도 가치 있는 구성 수단이 될 수 있다.
③육체의 어떤 부분이나 부분들도 사용될 수 있다.
④음악, 의상, 무대장치, 조명, 그리고 무용들은 그 자신의 독립적인 논리와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⑤무용단의 어떤 무용수도 솔로Solo가 될 수 있다.
⑥어떤 공간도 춤추는 장소가 될 수 있다.
⑦무용은 어떤 것이라도 표상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발걸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인간육체와 그 움직임에 대한 표현이다.
이러한 무용 개념의 자유화의 영향 아래 포스트 모던댄스를 추구한 무용수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술은 극적 무용의 주관성에 대한 바람직한 교정 수단인 객관적인 힘과 방법론에 대한 관심의 논리적 확산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무용의 형태적 특징들이 안무의 충분한 근거가 되며 관객들이 움직임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기본 틀을 마련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무용 이론을 공식화하고 증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포스트 모던댄스는 스스로 첫째 무용가에게 필수적인 기법에 대한 거부, 둘째 필요한 구조로서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거부, 셋째 정서적이고 극적인 제스츄어의 부재, 넷째 다차원적인 표현과 다중소통, 여섯째 관객과 연기자 사이의 거리 해소 등과 같은 특징을 표방하게 되었다. 포스트 모던댄스는 무엇보다도 예술로서의 무용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함축하며 동시에 예술의 가치를 시험하는 양식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