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 음악

진정한 미래지향적 음악을 꿈꾸며




황성호 / 작곡가

연초엔 보통 새해에 대한 희망찬 설계를 한다.

그 희망찬 설계란 말할 필요도 없이 늘 향상적이며 생산적이어서 설계 당사자는 미래의 어떠한 변화를 확신한다.

또 시간적으로 그 바로 직전이랄 수 있는 연말에는 지난해 설계의 진행과 결과를 돌이켜 반성하는 것이 상례이다. 물론 올해의 설계에 대한 반성은 다음 해의 설계직전에 하게 될 것이고…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듯한 이 순환이 어쩌면 우리의 단순하고 평범한 역사의 흐름일지도 모른다. 물론 예상치도 못했던 갑작스런 파격적인 변화의 역사도 있지만…

89년 상반기 음악계

어느덧 올해의 반이 지났다. 한 해의 반이 지난 시점에서 지나간 시간을 조명하는 것은, 앞으로 남은 절반을 생각할 때 의미있는 일이다. 연초에 우리는 실로 다른 어느 해와 비할 수 없는 많은 기대, 그 중에서도 남북간의 대화에 대해서는 더욱 이 한 해에 걸었으며, 그것은 또한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로 보아 실현 가능한 것 같이도 보였다. 사실 지난해의 몇 가지 사건들은 음악분야, 특히 창작음악에 있어서는 아주 고무적이었다. 분단시기의 창작음악계로 봐서는 무언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준비케 하는 중요한 전환기의 사건들이었다고 할까? 즉 그간 금기시 되었던 월북 작곡가들의 작품 세계가 공개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주장이 공공연한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남북한 음악인들이 모여 공동의 음악회를 갖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더니 올해 첫머리 즈음에는 난데없이 북의 음악방송이 들려오기도 했다. 한동안, 당시 우리 정부의「무반응의 반응」이 어떻게 본다면 우리측의 문화적 자신감(?)같이도 느껴졌고 또 남북한 개방의 한 면모라고도 착각할 수 있었던 이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반공교육을 통해서만 들어왔던 북의 독특한 음악문학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일이었다.

어쩌면 대남 선전용일지도 모를 이 짧았던 방송을 통해 북녘동포 역시 베토벤을, 또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은 물론「슬픔」까지도 듣고 있다는 사실(물론 다른 나라 음악이라는 단서를 꼭 붙이고 나서지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구사하고 있는 「솔소조」(사단조),「레대조」(라장조),「레내림대조」내림라장조)와 같은 낯선 음악용어와 「방창」과 같은 생소한 양식, 그리고 그들의 소위 독특한 사회주의(유교적 사회주의라고나 할까?) 사실의 증거로서 느끼기도 했다. 그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음은 미래를 생각할 때 아주 고무적인 일이었다. 느낌없는 반응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의 작업일 뿐이다.

그러는 가운데 또 하나의 서글픔은 북측 문화에 대해, 동족으로서의 호감보다는 이질감 내지는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음악적 동기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간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조건반사의 반응, 본능적 자기보호반응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북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양측의 조건 반사적으로 상호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양측은 조건 반사적으로 상호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연초 기대 걸어도 좋았던 남북의 관계가 오늘날 현 상황에 이르게 된 근본원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분명 이상의 지난 일들은 무언가 우리에게 남북의 만남 가능성과 더불어 우리 음악인들이 그때 무엇을 할 것이며 따라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책무감을 주었다고 본다. 또한 언젠가 우리의 앞날에 있을 통일의 만남에 있어서의 원대한 계획의 필요성도......이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역사의 필연적 한 진행과정이라고나 할까?

물론 일부인들이 이야기하듯 상호 교류의 그날, 우리가 행하고 있는 그 자체를 자연스레 보여주어도 되겠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지난날 한 차례 있었던 상호방문 공연 때의 일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그간의 소아적 정치가들의 덧없는 만남과 똑같은, 대립과 대결만의 평행선을 그리고 말 것이다. 우리의 만남은 단순한 문화교류가 아닌 서로 무지했고 증오만 했던 지난 시간의 회복, 더 크게는 민족 하나됨의 확인에 더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대국적 인식과 더불어 공통점의 발견, 그리고 그것을 통한 서로의 접근에 그 길이 있다고 본다. 물론 정치적 이유에서 작곡가들이 그러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떻게 본다면 이러한 인식은 적게는 우리 현 창작 음악계에 대한 냉정한 방식과, 크게는 그에 따른 새로운 좌표 설정에(궁극적 우리 음악이란)에 좋은 밑받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한민족의 음악에 있어 미래는 결코 서구의 첨단(?)의 전위적 기법이나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표현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와 다른 역사를 통해 그들이 습득한 또 하나의 폭넓은 경험은 우리의 관심 대사의 하나는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의 선급의 미래 음악은 서구인들을 대상으로 한 소위 세계적 음악이 아니라, 잊고 있던 우리 큰 민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인식 하에 남북의 제 음악현상을 냉정하게, 그리고 건전하게 연구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문화정책 역시 구체적 방향을 따라 수립,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상반기 음악 활성

지난 반년간 작곡계에는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많은 활동이 있었다. 생각나는 것으로 한국여성작곡가회의 정기발표회가 4월중,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있었으며 4월 14일에는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 홀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작곡동인모임「소리목」의 창립발표회가 있었다. 또한 20세기 작곡연구회의 제20회 기념행사와 창작곡 발표회가 5월 8일부터 10일까지 동숭동 아트센터에서 있었다.

그리고 6월9일에는「제3세대」의 제10회 발표회가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있었으며 6월 13일에는「창악회」의 발표회가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있었다.

이상의 여러 발표회(서울에만 한정시켰지만)를 통해 이 땅에 새로이 태어난 곡은 거의 70곡에 가깝다. 이는 결코 땅에 새로이 태어난 곳은 거의 70곡에 가깝다.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하나의 작품은 그것이 발표되는 순간 사회 속에서 생존 여부가 결정된다. 우리는 그 동안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태어나 사라져 간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자연스런 일로 믿고 있다. 기대하지도 않는 작품의 양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품의 생명력 부재, 원인에 대한 무관심은 그가 작가정신이 너무나 진지하고 순수해서일까? 어찌 본다면 우리는 허공엔 빈 소리만을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창작곡 발표장의 느낌은 공허와 낭비일 뿐 어떠한 상호교감이나 소통의 언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는 단지 감상자뿐만이 아니라 연주자의 연주모습에서도 느껴지는 것들이다. 공연장에서의 오가는 인사 역시 단순한 우호적 인사일 뿐이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들 작품 대부분이 30대의 젊은 작곡가들에 의해 발표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음악을 짊어질 이들의 생각에 따라 이 땅의 창작음악의 향방이 결정됨은 말할 것도 없다. 단순히 작곡하고 발표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이들 거의 모두가 대학 강단에서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이들의 공인적(共人的) 자각과 행동이 절실하다고 본다.

또한 주한 독일문화원에서 비엔나 악과 이후 오늘까지 한국과 서구에서 현대음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연구하고 토론하기 위한 기획 프로그램, 「새마당」Forum Neue Musik이 3월9일 칼 하인즈 쉬톡하우젠의 작품과 국내작곡가들의 작품 연주 모임으로 시작됐다. 이 기획물은 외국 문화원에서 제공하는 것인 만큼 그들의 관점이 주된 것이기는 하지만 국내 작곡가들의 작품이 소개되며 논의되는 중요한 장으로서 우리의 창작음악계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더욱 뜻깊은 것은 4월 6일에 있었던 안두진에 의한 「음악,‘소재’ : 전자음향과 그 기능」이었다. 일천한 우리의 전자음악사를 정리하면서 강석희를 비롯하여 국내 유일의 전자음악단체인「던롱패」(電弄輩)의 장정익, 황성호, 진규영, 안두진 등의 작품을 들어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획물이었다. 우리는 미래지향적이란 점에서 앞서 이야기한 것 외에 사회변화에 따른 새로운 예술 형태와 표현 방식에 대한 관심 역시 늘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래지향적 예술은 그 성격 자체가 값비싼 시설과 많은 시간의 실험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개인의 관심만으로 이루어지기는 매우 힘들다. 따라서 자연 이러한 미래지향적 예술은 기업, 문화기관이나 정부기관의 정책적 지원 하에 꽃을 피우는 것이 외국에서의 상례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은 이에 미치지를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관심이 요사이 정보문화센터에 의해 고무되고 있음은 다행이라고 하겠다. 정보문화센터가 6월 23일에서 27일까지 KOEX에서 주관했던 행사중 「던롱패」에 의한 컴퓨터 음악회를 개최한 것은 이미 있었다고 본다. 이인성과 황성호, 진규영이 참가한 이번의 음악회는 비록 대중적 모임을 위한 음악회였으나 많은 젊은이들에게 컴퓨터의 문화적 가치를 보여준 좋은 행사였다.

우리에게 있어 최신에 대한 감각은 항상 남들-소위 선진 서구사회를 추종하는 것에 불과했다. 미래지향 목적으로 잘 계획되어 건설중이라는「예술의 전당」만 보더라도 진정한 미래의 예술을 겨냥한 시설을 찾아보기 힘들다. 즉 미래의 예술이랄 수 있는 전자음악, 컴퓨터그래픽, 홀로그래피 등을 위한 준비는 전무한 상태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기대는 아직까지도 개인들의 마음 준비에서나 찾아볼 수 있지나 않은지.

올해의 반, 무언가 미래의 큰 준비의 때가 되길 다시 기대하며 희망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