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대담

무대를 지켜온 튼튼한 파수꾼




대담 / 서연호(고려대 교수)·고설봉(연극인)

면서기가 배우 되다

서 :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더위에 공연하시느라 어려움이 많으시겠군요.

고 : 연극협회 연기분과 회원들이 하고 있는 막심고리끼 작 「밤주막」에 출연 중인데 장 장 세 시간이나 소요되는 연극이어서 밤늦게까지 하고 있습니다.

서 : 77세의 고령이신데, 건강은 어떠십니까?

고 : 덕분에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젊은이들과 무대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 : 반세기 이상 연극무대를 지켜 오신, 우리 연극사의 산 증인이신 선생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 선생님을 모시고, 지난 시대의 연극이나 요즈음의 연극활동, 혹은 오늘날의 연극계 전반에 대해 선생님의 체험이나 의견을 중심으로 해서 좋은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만 후진들을 위해서 가능한 소상히 말씀해 주십시오,

고 : 이런 기회를 마련 해주신 「문화예술」지에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대로, 궁금하게 여기시는 사항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서 :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으신 시기는 언제입니까?

고 : 1937년 제가 24세 때 동양극장 연구생으로 들어간 것이 시초였습니다. 그전에는 경기도 고양군 승인면 면사무소(현 안암동 로타리 소재)에서 면서기 노릇을 한 3년 했지요. 연극이 하고 싶어져서 전향을 했습니다.

서 : 그렇다면 면서기 시절부터 연극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고 : 어려서부터 연극관람을 무척 즐긴 편입니다. 열서너 살 때부터 구파극, 신파극 가리지 않고 극장을 출입하였지요.

구파극과 신파극

서 : 구파극에 관해서는 남아있는 문헌이 드문 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요즈음의 사람들은 구파극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구파극에 대한 말씀을 좀더 해주시지요.

고 : 구파극 형태는 대략 세 가지 정도입니다. 대사로 된 단막극 형태, 그 당시에는 재담극이라고 했지요. 재담 사이사이에 장님타령, 창부타령, 같은 소리도 부르고 때로는 춤도 섞어서 공연하였는데 요즈음으로 치면 뮤지컬 같은 연극이었습니다. 또 열두마당의 순서에 따라서 하는 농악이 있습니다. 서곡으로 길군악을 치고 맨 마지막에는 상쇠의 고사반 가락을 하였는데 마당의 순서에 따라 정연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발탈춤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입으로는 소리나 재담을 하고 손으로는 장고를 치고 발로는 탈춤을 추는 형태였습니다. 당시 구파극장으로는 종로4가의 권상장 2층과 만리재에 있던 홍룡극장이 유명하였지요. 당시 유명했던 구파극 배우로는 박춘재, 이동백, 성경희, 임명월, 박옥화, 박옥도 등이 있습니다. 박춘재는 궁중배우 출신으로 고종에게 관직을 하사 받은 사람이고 이동백은 국창출신, 성경희는 궁중아악연구생 출신입니다.

서 : 구파극에 대해서 신파극이 흥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신파극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지요.

고 : 신파극은 1911년 임성구라는 배우에 의해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임성구는 일본인 극장에서 신파를 배웠는데 후에 자신이 극단을 만들어 공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신파극단이 많이 퍼졌지요. 당시의 신파극은 저녁 일곱 시에 개장하여 자정 무렵까지 무려 4∼5시간이나 공연하였는데 하루의 공연에는 인정극(30∼40분), 비극(30∼40분)이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인정극은 생활상이 소재가 된 작품이고 비극은 모성비극이니 가정비극이니 사회비극이니 하여 관객석을 눈물 바다로 만드는 신파 특유의 형태였고 희극은 요즈음 코미디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비극과 희극 사이에는 막간극이라는 것이 있어 단장이 나와서 인사도 하고 다음 작품의 선전도 한 후 유명한 배우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희극배우가 나와서 만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황성옛터」라는 노래는 이애리수라는 배우가 막간극에 불렀던 것이지요.

서 : 당시 신파와 구파 사정은 어땠습니까? 관객수라든가……

고 : 동양극장 이전에는 구파극의 관객수가 더 많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구파극이 총독부의 억압을 받으면서 상황이 차차 역전되었지요. 40년대 초에 구파극과 신파극은 명맥이 끊어졌습니다.

동양극장 시대

서 : 동양극장 이야기로 되돌아가지요. 아까 연구생으로 들어 갔었다고 하셨는데 당시 연구생들의 생활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고 : 당시 동양극장에는 연구부라는 곳이 있어서 연극 희망자를 받아들였습니다. 실력보다는 연고나 배경이 많이 작용했지요. 그렇지만 연구생 중에는 연희전문 졸업생 같은 엘리트도 있었습니다. 연구생의 숫자는 남녀 가 십여 명 정도 되었구요. 연구생의 숫자는 남녀 각 십여 명 정도 되었구요. 연구생들의 일은 무대정리. 분장실 청소, 대본 베끼기, 소도구 운반 등의 허드렛일이 주류였습니다. 대본 베끼기는 때때로 검열용 일본어 대본 작성도 하였습니다. 신인은 6개월간의 연구생 생활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무대에 설 수 있었지요.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출연여부와는 관계없이,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연구생들도 분장을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서 : 동양극장에서 연기자들은 어떤 훈련을 받았습니까?

고 : 방금 분장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동양극장에서의 연기훈련은 철저한 실습위주의 훈련이었습니다. 그 분장 도구라는 게 극장측에서 한 달에 두 번씩 나누어 주는 거였거든요, 연구생들도 해보라고. 당시 대표이셨던 최독견 선생의 모토가 「천재가 아니면 연극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양극장은 연중무휴로 공연을 했는데 매공연마다 연구생들이 공연을 지켜보게끔 했습니다. 직접 보고 배우라는 것이지요. 분장실에서도 30분쯤 먼저 나와서 선배들이 하는걸 보고 흉내내보라고 하고 …… 참 진지한 분위기였습니다.

서 : 선생님 보시기에 요즈음 배우들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연극을 대하는 태도라든지, 특별히 반성해야 할 점이라든지……

고 : 연극은 관객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들의 시간을 빼앗으면서 그 대가로 무언가를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배우들은 좀 불성실하고 공부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란 작품의 이해, 인물의 성격파악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전준비가 없으니 겉으로 드러나는 연기가 어설프고…… 외국의 경우를 가져다 대서 안되었습니다만 그들의 연기를 보세요. 얼마나 맡은 역할에 충실합니까. 요즈음 연극인은 그런 점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서 : 동양극장 체제는 어떠했는지요?

고 : 청춘좌, 호화선 등의 전속극단이 있었습니다. 동양극장 이전에도 단성사에서 전속극단으로 신무대, 조선연극사 등을 운영했었습니다만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동양극장이 만들어진 이후 제구실을 하게 되었고, 많은 연극인들이 모여들었지요.

서 : 당시 배우들이 받은 대우는 어떠했습니까?

고 : 동양극장 이전에는 배우들의 월급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공연이 있을 때에만 일당을 지급 받았지요. 주연배우가 마이낑이라고, 전속금 비슷하게 돈을 받는 경우는 더러 있습니다만…… 일당의 수준은 주연이 1원, 다음이 80전, 연구생이 10∼30전 정도였습니다. 당시 쌀 한 가마에 7∼8원, 우동은 한 그릇에 5전이었으니까 화폐가치를 비교해 보세요.

서 : 동양극장 배우들의 급료는 어느 수준이었습니까?

고 : 동양극장은 설립시부터 월급제를 시행했습니다. A급 배우가 50원을 받았고 B급이 45원, 최하 연구생이 15원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스타 시스템 비슷한 것이 생겨서 황철같은 배우는 2백원의 월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군수의 월급이 90원이었으니 대단한 금액이었지요. 또 지방극단의 배우를 스카웃하기도 했는데 이 경우에는 배우가 진 빚을 대신 청산해 주기도 했습니다. 동양극장 이후 지방극장에서도 월급제를 실시했지요.

서 : 요즈음 배우들의 급료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만족할 만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고 : 월급제를 시행하고 있는 극단이라고는 그나마 국립극단밖에 없는데 그 정도 대우로는 「국립」이라는 말이 무색하지요. 저도 국립극단 단원생활을 26년간 했습니다만…… 급료의 산정을 공무원이 한다고 하는 게 문제입니다. 급료상태가 전무한 일반단체는 말할 것도 없구요.

신파냐 아니냐?

서 : 동양극장 연극이 신파다, 아니다라는 논쟁은 아직까지도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 :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동양극장 이전에 체계 있는 연출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황금좌, 예원좌 등의 지방극단은 모두 신파극단이었고…… 토월회에서 리얼리즘 연극을 했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리얼리즘도 아니고 신파도 아닌, 절충의 연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극장은 영화인, 신파극인들이 모여서 만들어졌고 따라서 초기의 작품이 다수 신파조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정은 초대 연출부 책임자로 홍해성 선생이 부임하면서부터 달라집니다. 홍선생님은 일본 축지소극장에 7년간 리얼리즘 연극만 하신 분입니다. 이후로 배우들의 대사도 신파류를 버리고 자연스러운 어조의 리얼리즘연기로 바뀌었습니다. 분장도 정리되고요. 뒤에 역시 축지출신인 안영일이 연출부에 가세하면서 연극의 형태는 차차 리얼리즘으로 굳어집니다.

서 : 홍해성, 안영일, 두 분의 연극 활동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고 : 홍해성 선생이 귀국 후 처음 하신 작업은 극예술 연구회(극연)에서 「검찰관」을 연출하신 일입니다. 국내 연고가 없으셔서 아무 일도 못하고 계셨는데 당시 동아일보 기자를 하시던 서항석 선생이 이 분을 극연에 소개했습니다. 그 뒤에 조선연극사에 잠깐 계셨다가 동양극장 전속 연출가로 오셔서 6∼7년 간 활동하셨습니다. 안영일 씨는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유학을 한 사람입니다. 일본유학 시절에 부인이 「마네킹」이라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했다고 합니다. 축지에서 공부할 적에 당대 동양제일의 연출가라 불리던 무라야마에게 사사하고 「일본어 춘향전」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축지는 좌경색채를 띤 단체여서 안씨는 동경에서 피검된 후 추방됩니다. 안영일은 스타니스랍스키에 젖어 있던 인물입니다. 배우들에게 섬세한 감정표현을 요구했고 충실한 연습을 강조했습니다. 연습시에는 일초라도 시간을 어기지 않고 항상 정각에 연습을 시작하곤 했지요. 또 본인 스스로가 철저한 작품 분석을 해서 일단 지시한 동선을 다시 바꾸는 일이 없었습니다.

서 : 잠깐 토월회 얘기를 하셨는데, 토월회, 극예술연구회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어떠했는지요?

고 : 아마추어 연극이지요. 상업성도 없는 데다 일부 지식청년의 연극이니 극장대관이 되겠습니까? 일 년에 한 두 번 공회당 등을 빌어 공연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슨 영향력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제자신이 관람한 경우도 없습니다.

총독부의 연극 정책

서 : 당시 총독부의 연극 정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검열관계는 어떤 식이었습니까?

고 : 일제는 연극만큼 파급효과가 큰 예술장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극에 대한 제재도 대단했지요. 연극을 공연하려면 경기도 보안과에 가서 검열을 받아야 합니다. 검열이유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집회는 보안상의 이유로 검열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보안과는 교통, 숙박, 음식 등을 관장하던 기관이었는데 한 번 검열을 받으면 전국에 통용이 되었습니다. 함경북도의 경우는 소련과의 국경이 있다는 이유로 함경북도 관내공연을 위해서는 함경북도 보안과에서 다시 검열을 받아야 했습니다. 만주에 가려면 만주 현공소에서 다시 검열을 받아야 했고, 검열을 받아도 공연시에는 극장 안에 마련된 임검순사석에서 다시 검사를 합니다. 대본대로 공연하나 안 하나를 감시하는 것이지요. 항간에 고등검찰에서 검열을 했다고들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서 : 그렇다면 고등검찰에서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습니까?

고 : 아닙니다. 극장임검은 보안관계 경찰이 했지만 고등경찰은 임검에 관계없이 작품이 「이상하다」싶으면 공연도중이라도 배우들을 연행해 가곤 했습니다. 분장도 못 지우고 끌려갔던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고등경찰에 피검되었다 나오면 고문으로 몸을 버리기 일쑤였고 요시찰 인물로 찍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으니 그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보안과 검열보다 더 엄중했었다고 할 수 있지요.

서 : 그 외의 상황은 어떠했는지요? 총독부의 직접 지시 같은 것 말입니다.

고 : 일제 시대 말기에는 총독부에서 직접 검열을 했고, 일본어 상용을 강요했습니다. 또 대사 끝에다 반드시 「귀축미영(鬼畜米英)을 몰아내자!」라는 말을 붙여야 했고 등장인물이 죽는 장면에서는 무조건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죽어야 했습니다.

서 : 일제 말기 연극협회 창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총독부에서 강요하기 전에 연극인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했다는 설에 대해서도 해명해 주시구요.

고 : 연극협회 결성 동기부터 말씀드려야 되겠군요. 당시 중앙의 연극계는 무척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방 최대의 흥행극단의 황금좌나 예원좌는 서울에 오더라도 극장을 얻지 못하고 변두리에서나 공연을 하곤 했지요. 그래서 지방극단의 중앙진출을 용이하게 하고자 조합결성을 모색했던 겁니다. 황금좌, 예원좌에서 자금을 내고 중앙의 청춘좌, 성군, 현대극장, 고협, 아랑 등 5개 단체가 협력해서 총 7개 극단을 회원으로한 조선연극협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초대회장에는 이서구 씨, 상임이사에는 김관수 씨가 선임되었지요. 그래가지고 대표들이 총독부 경무국을 방문하니 이게 총독부 정책하고 딱 부합된단 말입니다. 현장에서 구두승인을 받아가지고 무교동에 사무실을 개설했습니다.

서 : 그 뒤에는 단체가 어떻게 운영되었습니까?

고 : 뒤에 연극협회로 확대·개편되었습니다. 회원에게는 자격시험을 보게 했어요. 자격시험이라는 건 총독부가 주관해서 연극을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치른 건데 연극계를 정화한다는 것이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었습니다. 당시 연극계에 건달이나 아편쟁이가 몇몇 있기는 했습니다만……

서 : 시험내용은 대개 어떤 것들 입니까?

고 : 처음에는 논문시험을 보고, 다음에 구두시험과 상식문제를 치릅니다. 그리고는 대본 낭독을 시키고 성분조사도 합니다. 논문의 제목으로 준 것이 「연극이 가야할 길」이었는데 응시자 천여 명 중 약 절반 가량이 일본어 실력이 없어 탈락했습니다. 이 시험 이후 자동 해체 극단이 속출했지요.

서 : 자동 해체의 이유는 무엇인지요.

고 : 시험의 합격자는 명단이 총독부에 보고되어 협회장의 명의의 신분증을 발급 받았습니다. 총독부에서 만든 법령에는 합격자가 14인 이상 있어야 극단 설립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또 공연 허가가 나려면 그 중 일곱명 이상이 무대에 서야하고…… 응시자의 절반이 떨어졌으니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극단들이 다 해체된거지요. 낙방자 중엔 극단대표, 원로배우 등이 끼어 있었는데 6개월쯤 지난 후 제 다섯 분을 특별회원이란 명목으로 구제했습니다. 구제라는 표현을 쓴 것은, 협회 회원이 아니면 일체의 연극행위를 할 수 없었거든요.

친일 연극의 실상

서 : 그 뒤의 정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고 : 앞서 말씀드린 중앙 5개 단체는 총독부의 공식 추천단체가 되었습니다. 추천단체라는 건 어용극을 교사할 목적으로 총독부에서 선발한 것인데 순회공연시 자금이라든가 교통편의 등을 총독부에서 돌봐주었지요. 그때 연극인 대우가 좋았던 것은 총독부가 연극을 선동, 위안의 선봉으로 삼은 까닭입니다. 이즈음에 조선연극협회가 조선연극문화협회로 확대·개편되고 산하에 무용부, 음악부 등을 거느리게 됩니다.

서 : 최독견, 박 진 선생의 행적에 대해서는 항간에 오해의 소지가 많은 것 같은데……

고 : 이 분들이 연극협회 이사를 지낸 것으로 기록에 나오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긴 거겠지요. 이 분들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총독부에서 조르다 조르다 못해 이름까지 걸어놓고 몰아대니 최선생은 황해도 구월산으로, 박선생은 북경으로 잠적해 버리셨지요. 박선생님은 1946년에 귀국하셨습니다. 박선생님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박선생님의 부친이 박기석 씨라고, 구한말 함경감사를 지내신 분입니다. 이 분도 반일을 하신 분인데, 일본에서 회유용으로 남작 작위를 내렸습니다. 박 진 선생이 협회 관선이사 자리를 거부하니까 당시 총독부 사무원으로 있던 호시데라는 일본인이 박선생님에게 술대접을 하면서 회유했습니다. 박선생은 취중에 「알았다. 알았다」하시고는 남대문 네거리에다 대고 방뇨를 하신 겁니다. 박선생님께서 협회에 출근을 안 하시니까 연극협회 내에서는 방뇨죄와 관선이사 취임 거부를 연계시켜 협박을 해보자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총독부에선 귀족의 아들이라고 함부로 하지도 못하고 일은 거기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서 : 대동아전쟁 막바지에 총독부에서는 소위 국민극을 하라, 일본어를 상용하라는 등의 칙령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내세운 대의명분이나 연극을 장악해간 과정이 무척 교묘했는데, 거기에 관한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고 : 총독부에서 먼저 미신타파운동을 합네 하더니만 전연극인보고 앞장서서 신사참배를 하라고 하더군요. 일본어 상용은, 처음에는 대본의 3분의 1쯤만 일어로 하라고 그래요. 뭐 장려라나? 조금 후에는 그 비율을 3분의 2정도로 높이라 하고 그 뒤에 완전히 일본어로된 단막(당시 명칭 국어극)을 하라고 합디다. 이게 소위 말하는 일본 국민으로서의 국민극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분장실에서도 일본어 상용을 강요했습니다. 사담도 일본어로 하라는 거지요. 아까 말씀드린 만세를 부르고 죽어야 한다든가 하는 원칙은 물론 그대로이고 연극 시작 전에 관객을 기립시켜 동방요배를 시켰습니다. 이게 황민화 연극의 초보입니다. 연극배우들에게는 「배우들은 이제 황민이 다 되었으니 그 정신대로 신체제 연극을 하라」고 그러더군요.

서 : 연극 내용 자체에 개입한 경우는 없었는지요.

고 :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들겠습니다. 총독부에서 영국과 미국을 증오하는 연극을 해야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준 소재가 선교사를 비방하라는 것이에요. 교회당은 조선 젊은이들의 사상을 나쁘게 만드는 장소이며 선교사는 영미를 위해 간첩노릇을 하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등 그릇된 행위가 많으니 고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사실은 연합국에 대한 일본군의 승리를 고취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송영 작 「삼대」가 바로 이 얘기를 극화한 작품입니다.

연극경연대회

서 : 1942년의 연극경연대회는 친일적인 연극의 대표적인 행사였습니다. 직접 참여하셨던 분의 입장에서 대회의 상황을 정리해 주시겠습니까?

고 : 연극경연대회는 총독부가 주관하고 조선군 사령부가 후원한, 말하자면 관주도의 문화행사였습니다. 전국 41개 단체중 현대극장, 청춘좌, 성군, 아랑, 고협 등 다섯 단체가 일주일씩 공연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러한 사실들을 반년 전에 통보해서 각 단체가 6개월이라는 충분한 연습시간을 가지고 대회에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서 : 작품 하나 하나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고 : 첫 작품이 청춘좌에서 공연한 송영 작, 나웅 연출의 「산풍」입니다. 과부가 아들과 화전민 생활을 합니다. 이 주변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아들이 도회지 사람인 관광객들의 영향을 받지요. 아들은 땅을 팔아 도시로 가자하고 어머니는 대대로 내려온 옥토이니 아니 된다 하고, 세대간의 갈등을 모자간의 갈등으로 축약시켜 상징적으로 표현한 명작입니다. 아주 짜임새 있게 만든 수상작 후보였지요.

두 번째 작품이 아랑의 김태진 작, 안영일 연출의 「행복의 계시」입니다. 한 무의촌에 미국 유학을 갔다온 의사가 들어와 의학의 혜택을 준다는 내용인데 제가 동네유지 최주사 역으로 출연했던 작품입니다. 가장 못했고 당시에도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았었습니다.

세 번째가 극단 현대극장에서 공연한 유치진 작, 서항석 연출의 「대추나무」였습니다. 대추나무 한 그루가 두 집 경계에 걸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데 좁은 땅에서 이럴게 뭐냐, 만주로 가서 살자하고 두 집이 화해하는 데서 극이 끝납니다.

네 번째가 박영호 작, 이서향 연출, 극단 성군의 「산돼지」입니다. 광산에서 덕대가 금맥을 발견하고 그것을 독점하려 합니다. 덕대는 채굴된 금을 훔쳐 가지고 달아나는데……, 이 작품도 수준작이란 평가를 받았었습니다.

다섯 번째가 임선규 작, 전창근 연출의 「빙하」, 극단 고협의 작품입니다. 소련으로 이민간 조선인들이 노일전쟁 발발 후 핍박받는 것을 그린 작품입니다.

경영대회가 끝나고, 모두들 「산풍」이 최우수작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작품상은 엉뚱하게도 「대추나무」에 돌아갔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대추나무」의 수상이유는, 작품의 내용이 총독부의 이민장려정책과 맞아 떨어지는, 국책연극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서 : 「산풍」이 개인상을 휩쓸었으면서도 작품상을 타지 못한 데는 까닭이 있었군요. 당시 개인상 수상자 중에 연극제와 무관하게 공로 명목으로 수상한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고 : 개인상 수상자는 연출상에 「산풍」의 나웅, 무대미술상에 「산풍」의 원우전, 연기상에 「산풍」의 김선초, 「대추나무」의 김양춘, 「산돼지」의 서일성, 유경애, 「빙하」의 박학 등입니다. 극단 아랑의 황철 씨하고 안영일 씨도 상을 받았는데 이 두분이 연극제 이전에 공연한 다른 작품으로 공로상을 수상한 것이지요. 황철 씨는 당대의 일급 배우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선교사 때려부수는 연극, 송영 작 「삼대」에서 주연을 하셨거든요. 한 달 동안 인사동 교회에 나가서 선교사 억양을 연구하기도 하고, 그래서 공로상을 받은 겁니다. 「삼대」는 그해 봄, 여름에 공연되었고 경연대회는 가을에 있었으니까요. 이 분은 나중에 상탄걸 수치스럽게 여겨 가지고 고민도 많이 하고 음주상태로 무대에 오르는 등 번민도 많이 했습니다.

안영일 씨가 공로상을 탄 것은 좀 길게 설명을 해야 됩니다. 당신 경성제대 교수로 있던 가라지마라는 사람이 연전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조선연극문화협회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대동아 전쟁 때라 일제의 강압 정책이 기승을 부릴 때지요. 민족 교육을 억압하려고 총독부에서는 사립학교의 대부분을 접수하고 교명도 바꾸고 아예 학교 자체를 폐쇄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법령이나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총독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결정나는 판이니 학교에 관계하던 양반들이 얼마나 전전긍긍했겠습니까. 당시 이전(梨專)교장이 김활란 선생이었는데 가라지마의 부인하고 친분관계가 있었습니다. 그 부인이 동경제대 총장 딸이었거든요. 그래 김활란 선생이 학교 문 닫는 것은 막아야 되겠다 싶어서 개인적으로 청탁을 한거지요. 그때 '일어상용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일본어 단막극(소위 국어극)을 공연했습니다. 공연장소는 부민관이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김선생이 관객을 대상으로 「일어를 사용합시다. 우리는 이렇게 솔선수범해서 이 연극을 공연합니다」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설 때문에 김활란 선생이 친일을 했네 안 했네 말이 많았지요. 이때 연출을 맡았던 사람이 안영일이었습니다. 일어 상용 연극을 연출한 공로로 상을 받은 거지요.

서 :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연극인들에 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고 : 극작가로는 함세덕, 임선규, 박영호, 송영 등이 기억에 남고 연출가로는 홍혜성, 안영일 두 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서향 씨도 생각나는군요. 배우로는 여배우에는 차홍녀, 지경순, 남궁선, 김선영, 김선초, 김양춘, 박영신, 임효은 등이 뛰어났고 남자배우는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황철 씨를 비롯해서 서일성, 양백명, 변기종, 박제행, 한일송, 배 용 등이 있었습니다.

광복 이후의 연극계

서 : 광복이후로 이야기의 무대를 옮겨 보겠습니다. 우선 해방 후의 혼란상과 좌·우익의 세력다툼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고 : 해방이 되니까 우후죽순처럼 극단이 난립하더군요. 제 생각으로는 그게 연극의 저질화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검열이 없으니 아무 작품이나 마구 상연하고, 아무튼 무척 혼탁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연극단체로는, 새로 연극건설본부라는 단체가 결성되었습니다. 지금 YMCA 맞은 편에 기독교 회관이라고 있었는데 그곳에 사무실이 있었구요. 이 단체가 처음에는 이념하고 무관한 단체인 듯 하였는데 뒤에 좌경화 되었습니다. 좌익에서 말하자면 푸락치를 넣고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좌·우익 연극에서 좌익 연극을 주도한 집단입니다.

서 : 기록에는 연극동맹이라는 연극단체로 보이는데……

고 : 김남천이라고, 당시 서울사대 교수를 하던 사람하고 심인화란 사람 둘이서 계열별로 연극인들을 포섭했습니다. 연극건설본부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은 연극동맹 산하로 흡수·통일되었습니다. 사상적 배경이 불분명하던 많은 연극인들이 이 단체에 의해 포섭되었습니다. 후에 월북도 많이 하고……

서 : 미군정 하에서 곤란한 점은 없었습니까?

고 : 두어 가지 됩니다. 하나는 미군정에서 우리나라 실정을 몰라 가지고 생긴 것인데…… 재원확보를 위해 극장에 입장세라는 것을 신설했거든요. 세율이 백 퍼센트였으니 누가 연극 구경을 오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입장료가 두 배로 오른 셈이지요. 2원하던 입장료가 4원으로 올랐습니다. 연극인들이 군정청으로 찾아갔었는데, 포고된 법령을 고칠 수 없다는 답변만 듣고 왔습니다. 또 하나는, 북쪽에서 압록강 수풍 발전소로부터의 남한 송전을 중단 해버린 사건입니다. 전력량의 대부분을 공급해주던 선이 끊어지니 일상생활에서의 불편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조명이나 음향효과는 엄두도 못내고 촛불이나 칸킨데라불을 켜놓고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미군 폐품 발전기를 구해다가 쓰기도 했구요. 사상적 배경이 불분명하던 연극인들이 많이 월북을 했다고 말씀드렸는데, 남쪽 사정에 비해 북쪽의 사정이 훨씬 좋다고 선전이 되었거든요. 일본인이 지어놓은 기존 극장의 운영을 연극인에게 맡긴다고 하고 전력도 풍부하고 극장 시설도 많은데 사람이 없어서 공연을 못하고 있다고, 이렇게 소문이 퍼졌습니다.

국립극장 폐지론의 전말

서 : 1950년에 국립극장이 설립된 후에, 존폐여부를 놓고 파란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의 사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고 : 서항석 선생이 2대 국립극장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당시 국립극장의 직제는 서울에 중앙극장을 두고 각 도 마다 지방 국립극단을 두는 것으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방의 국립극단은 설립되어 있지 않았으니…… 말하자면 자리는 만들어져 있고 기구는 아직 없고, 그런 상황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장관이다, 국회의원이다 하는 사람들이 취직부탁을 받고는 빈자리가 있는 국립극장으로 보내는 겁니다. 그때 국립극장의 전속 배우가 14명이었습니다. 배우들은 월급 없이 출연 수당만 받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행정직원 수는 50명이 넘어요. 그 사람들은 월급 받고 근무했습니다. 직원들 월급이 이렇게 나가니 막상 연극할 돈이 없는 겁니다. 국립극장 존폐여부가 국회에서 논의된 데는 또 곡절이 있습니다. 당시 임화수가 하던 반공예술단에 이해랑 씨 등의 연극인이 부단장으로 있었는데, 이 양반들이 신문에다 기고를 한 겁니다. 「국립극장이 예산만 까먹고 연극은 안하고 있다. 그 예산은 모두 국민이 낸 세금에서 나온 것이니 세금만 까먹는 기구를 더 두어 무었하겠는가. 국립극장을 없애 버리자」라고. 기사 제목이 「입장료 만원」이라는 것이었는데 국립극장 예산을 입장객 수로 나누면 그만한 액수가 나온다나요. 이 글이 발단이 돼서 국회에서 국립극장 폐지를 결의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회를 보던 윤제술 국회 부의장이 당사자 이야기나 들어보고 결의하자고 일단 통과를 유보시켰습니다. 서항석 선생이 국회에 출석해서 열변을 토한 것 유명한 얘기인데…… 서선생님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연극이 잘되면 왜 국가의 지원을 받겠는가. 연극이 스스로 설 여건이 돼지 않으니 불가피하게 국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국립극장이 이제 없어지면 다시 만들기란 무망한 일이다. 국가 기관의 설립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여러분이 더 잘아는 일 아닌가. 길이 후손들에게 물려줄 문화하나다」고 연설을 하신 겁니다. 윤제술 부의장이 그때도 사회를 보았는데 그 분이 연단 아래로 내려와 서선생님의 손을 잡고,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 불덩이요」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래 국회에서 진상조사단이 나오고 청탁으로 들어간 사람들에 대한 내막이 폭로되었습니다. 이것이 또 국회에서 쟁점이 되어 정치 문제화되기도 했구요. 이때 한 30명을 해고해 버렸습니다. 이 사람들 월급을 연극 예산으로 돌려놓으니 돈이 남아서 공연을 두 차례나 더 했지요. 서선생님은 국회에서 연설하시기 전에는 풀이 죽은 모습으로 거리를 다니셨습니다. 국립극장을 없애자는 대세였거든요. 극장의 존속이 결정된 다음 날 근심스럽게 결과를 물었더니 「연극은 전쟁입니다. 전쟁은 이겨야 합니다. 나는 이번 전쟁에서 철저히 이겼습니다」하시면서 득의양양해 하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서 : 오늘날 정부가 문예진흥원과 같은 기구에서 시행하고 있는 연극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연극의 미래를 위하여

고 : 지원의 근본취지는 환영합니다. 단, 지원의 방법과 형태가 형식적인 예산과목의 지출로부터 탈피해야겠지요. 직원들이 다분히 「서류 꾸미기」위주로 행정을 처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원의 대상이 편중되어 있다는 생각도 들고 …… 지원 대상을 선정할 때는 먼저 연극인들에 집착하기 보다는 「연극위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연극의 상품가치가 세계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연극은 누가 뭐래도 그 나라 문화의 모체가 아닙니까? 이제 우리나라도, 경제력 있는 단체나 기업체들이 대승적인 견지에서 연극을 후원해주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필요합니다. 과거 연극계를 주도하던 몇몇이 본인들만의 영달에 빠져 연극계 전체의 현실을 외면하고 그러한 악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명동예술극장을 매각할 때 양심적인 연극인들이 나서서, 「매각에 찬성하는 연극인은 무대 예술의 반역자다」라고 결사 반대했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서 : 끝으로 우리 연극의 발전과 미래상에 대하여 선생님께서 지니고 계신 소망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고 : 연극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의사 전달의 수단입니다. 연극은 인간 행위의 본질이며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연극은 그 나라 문화의 척도입니다. 우리나라는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고 고유한 연극소재도 많은 나라입니다. 제가 젊었던 시절에 우리의 연극은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었고 형식도 종속 당했었습니다. 요즈음은 서양연극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 연극의 미래를 무척 낙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지금이, 외국의 조류가 우리의 연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의 막바지의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연극에 한국적인 것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에 대한 철저한 공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 중에 아름답고 멋있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이걸 제대로 살려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 : 좋은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영원한 현역으로써, 앞으로도 계속 후배들의 귀감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고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