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춤문화와 예술의 발전
김태원 / 무용평론
곧 90년대를 맞게 되는 시점에서 지난 80년대를 되돌아 볼 때, 나의 개인적 견해로는, 여타의 예술장르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한 것이 춤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은 춤예술의 실제 공연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춤교육제도에 있어서도, 또 춤의 대사회적 위치에 있어서도 모두 그렇다.
가령 춤공연에 있어서도 불과 5년여 전만 하더라도 전통연회로서의 춤공연을 뺀 순수 무대공연은 1년에 총 1백회를 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86, '87년도로 접어들면서 춤공연의 횟수는 2백회를 훨씬 넘어 3백회에 육박하게 되었고, 춤계층도 다양해져서 원로, 중진, 신진의 구별은 물론 신진층 내에서도 20대 후반의 춤꾼들이 과감히 자신의 춤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사태도 생겨났다. 또한 춤교육적 측면에 있어서도 이른바 4년제 정규대학 내에 무용학과를 개설하고 있는 대학 수만 하더라도 현재는 30여 개 대학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70년대만 하더라도 전국의 무용학과라야 불과 손에 꼽을 정도였던 사실에 비해보면 엄청난 팽창이요, 증가다(그리고 앞으로도 무용학과는 전국에 걸쳐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한편, 춤의 대사회적 위상에 있어서도 특히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치르면서 국민들은 우리문화의 동질성을 확인시켜주며, 우리가 진정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 바로「춤」이구나 하는 인식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국민들은 춤이 고도의 신체훈련과 극장기술과의 조화를 필요로 하는 예술이란 사실을 소련과 동구의 무용단의 공연을 통해, 또 서방의 여러 무용단(런던 컨템퍼러리나 호주 시드니발레단, 미국 워싱톤발레단 등)의 공연을 통해 감지해 볼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그 결과, 이제는 춤이 나약한 여성들이나 하는 짓거리라는 안이한 생각은 식자나, 문화적 안목을 가진 국민들 사이에서는 많이 줄어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한 춤문화의 중요성-우리문화의 동질성 확보와 문화교류적 측면-과 변화의 양상을 생각해 볼 때, 현재의 춤계의 현황과 제도로서는 그 중요성을 고양시키거나 또는 그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만큼 모든 것이 준비되고 있다거나 갖춰지고 있다고 봐지지는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는 수동적으로 「떠밀려」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춤교육계는 교육계대로 변화되고 팽창되는 피교육자의 욕구나 교육적 필요성을 거의 수용치 못하고 있으며, 또 춤공연의 현장은 절실하고, 있어야 할 제대로의 제도적 뒷받침이 없이 그저 공연이 행해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90년대로 진입하기 이전에, 춤계로서는 필히 재고되고, 또 수정되어야 할 부분들을 몇 부분 지적해 둘 수밖에 없다. 그 부분들은 크게 봐서 세 부분인데, 우선 교육권 내에서 춤교육의 독자성 문제, 두 번째로는 국립의 두 춤단체를 비롯 전국 시립무용단이나 국립국악원무용단과 같은 직업 무용단의 체제와 방향정립의 문제, 그리고 세 번째로는 이른바 창조적 소주체(小主體)를 위한 정책과 제도의 개발에 대한 것이다.
춤이론 교육의 강화
현재 춤교육의 중심이 되고 있는 곳은 대학 무용과이다. 그러나 현재의 무용과는 춤의 이론과 실기간의 적절한 분할이 없이 대부분 실기 교수진에 의해 장악되어서 그들이 실기와 이론 거의 모두를 가르치고 있는 현실이다.
그 때문에 이 점은 여러모로 현 춤계에 피해를 미치고 있다. 우선 교육의 질에 있어서, 피교육자가 받게 되는 교육의 거의 대부분이 실기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예술교육과 인문교육의 일부로서 춤교육이 마땅히 할당해야 할 춤의 역사·이론·비평에 대한 교육을 등한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교육자가 바로 현장의 춤꾼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대학의 무용과가 어떤 특정 개인의(교수의) 개인 무용단과 같이 운영되기 쉽다.
춤의 이론교육적 측면에 대한 강조는 춤과 춤문화가 단순히 신체는 움직이는 운도에 의해서만 파악되거나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에 기인한다. 춤은 그것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의 극장예술로서의 발달에 이르기까지 이미 인류학적·역사적 산물로서의 속성을 배태해왔기 때문에, 또 현재에는 당대의 문화를 형성하는 미학적·교육적 기능을 훌륭히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춤문화적 측면뿐만 아니라 춤의 공연제작적 측면에 있어서도 그 부분들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먼저 전제되거나, 적어도 신체의 운동학적 측면과 함께 병행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만일 춤이 단순히 신체를 잘 움직이고, 이쁘고 매끄럽게 보이게 하는 방법이라면 궁극적으로 그것은 체육이나 신체미용법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현재는 춤이 체육이고, 신체미용법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분명 예술창조의 영역에 속해 있고, 춤은 단순 움직임 이상의 「인간적인 것(생명감이나 아름다움)」을 표출하는 행위임이 자명해지고 있다.
물론, 춤교육에 있어 실기의 영역이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대학에서의 춤교육은 대학 4년의 전과정, 혹은 더 나아가 대학원 과정을 통해서 신체운동법이나 구체적인 춤동작을 배우고 익히는 것만큼이나 춤을 둘러싸고 있는 제반 문화적 측면들에 대해 다양한 인문교육과 예술교육의 일부로서, 또 그 연장으로서의 춤교육이 대학의 아카데미즘 내에서 이뤄질 수 없다면 대학무용과는 단순히 육체적 트레이닝과 춤의 기술을 배워주는 개인 스튜디오나 학원과 별 다름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대학 무용과가 주로 실기위주의 교수진에 의해 짜여져서, 꾸려나가고 있는 것은 대학 무용과의 증가현상과 무관치 않다. 특히 사학(私學)인 경우는, 충분치 않은 운영자금에 의해 학교를 운영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재단 측에서 우선 손쉽게 실기선생부터 모집하고 있는 형편인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모집된 실기선생은 실기선생대로 이론교육에 대한 두려움과 교수진들과의 관계 및 학과의 운영을 둘러싸고 일종의 헤게모니적 의식에 싸여 충분히 이론교육을 강화시킬 수 있는 입장인데도 그것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실기위주로 학과가 운영되기 때문에 또한 무용과는 대외적으로 예술학과나 인문학과로 독립치 못하고, 체육이나 이학(理學)에 종속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현행의 무용학과는 과감히 실기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실기와 이론이 실제적으로 병행, 상호 보완될 수 있도록 그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 즉 실기 쪽은 서구춤(현대춤과 발레)과 한국춤(전통춤과 창작)을 각각 수용, 학교 나름대로, 그리고 교수나 학과 나름대로 독자성과 개성을 띠며 춤언어의 체계화를 꾀하거나 새로운 창작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고, 춤이론쪽은 초보적인 춤실기·교육·역사·이론(미학 및 비평)에 주안점을 두는 방향으로 커리큘럼이 짜여서 움직여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이런 춤이론과 교육에 대한 측면은 춤을 배우고, 춘다고 해서 피교육자가 모두 현장의 춤꾼이 되고, 안무가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이기 때문에(그들은 사실상 극소수이다)더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한편, 현재 이화여대를 비롯 전국 30여 개 대학에 무용과가 있다면 중·고등학교에서도 춤은 개별적 과목으로, 또 그것은 전문 교육자에 의해 가르쳐져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순되게도 중·고등학교에 있어 춤교과의 독자성은 제대로 확보되어 있지도 않은 실정이다. 춤교육자로서의 신분의 독립성은 접어두고서라도 춤교과목은 때론 「체육」으로, 또는 「율동」으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춤이 앞서 지적했듯 단순한 신체의 움직임이 아니라고 한다면, 즉 그것이 육체와 감정을 통한 인간적 정서의 표출(표현)과 그 균형미와 깊이의 발견이라고 한다면, 춤이 앞서 지적했듯 단순한 신체의 움직임이 아니라고 한다면, 춤은 성장기에서부터 미술이나 음악교육과 같이 독립성을 띠며 가르쳐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국민 정서적 차원에서, 춤이 그 속성상 내밀히 전파하고 있는 부드러움과 균형의 미학은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며, 어떤 측면 민주화를 지연시키기도 하는 가부장적 권위주위와 맹목정 남성숭배주의에 대한 훌륭한 대항적 기류를 형성해 줄 효과도 갖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대학교육에 있어서는 춤실기 위주의 교육 못지 않게 이론교육이 강화되어야 하며, 그리고 대학 무용과가 학문적·실천적 독자성을 가지고 중·고등학교의 춤교과와 보다 긴밀히 연결될 때에만 우리 춤문화의 근저를 마련해줄 교육적 환경이 보다 생산적이고 건강해질 수 있다 하겠다.
직업 춤단체들의 방향 설정
오늘의 춤계에서 앞서 춤교육의 문제 못지 않게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 전국의 시립무용단, 그리고 국립국악원 무용단과 같은 대형 직업 춤단체가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창작의욕을 잃고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현상이다.
이 직업무용단들은 대개 50명 내외의 인권을 확보하고 있고, 급료에는 차이는 있지만 모두 유급 단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직업무용단을 표방하고 나서는 보통의 민간 춤단체와 실제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유니버설발레단을 제외하고는 민간 전문춤단체는 거의 급료가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별하면 이 단체들은 그 규모에 비해 직업 춤단체로서의 자율성을 아직 충분히 갖질 못하고 있고, 그 예술적 방향이나 스타일의 구축에 있어서도 거의 모두 명확한 방향을 못잡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전자의 자율성의 측면에서는 춤단체들은 거의 대부분 극장이나 시의 행정적 지시나 관리속에 묶여 있어 스스로의 작업방향 및 예산이나 관객확보를 위한 자구의 노력을 꾀하기 힘들게 되어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물론 일방 통행적 행정적 지시를 적당히 수용하면서 한편으로 예술적 욕심을 부릴 수 있는 노련한 예술 감독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현재의 상황은 현 단체장들의 행정에의 예속, 그리고 적지 않은 패퇴감(敗退感)으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보다 솔직히 얘기해, 춤단체장에게 직업단체의 침체의 원인을 물으면 행정적 지원의 모자람을 얘기하고 있고, 또 행정측에 그 원인을 물으면 예술단체장들의 무계획성과 게으름, 또는 비타협성에 그 탓을 돌리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측면, 보다 근본적인 치유책이 따라주지 않으며 춤단체는 있되, 즉 형체는 있되 활동하지 않고 있는 휴화산이나 식물인간과 같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으로 봐서 직업 춤단체가 존재할 만한 이유는 다양한 레파토리의 축적과 작품마다의 창의성, 그리고 그것을 즐겨 봐줄 수 있는 관객의 수에 있다 할 것이다. 만일 작품은 우수한데 관객이 즐겨 봐주지 않는다면 그 무용단은 존재할 만한 가치가 없는 춤단체일 것이다. 또한 관객은 있는데 작품은 형편없는 수준이라 한다면 그 단체는 프로페셔널리즘을 획득치 못한 단체와 다름없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레파토리, 혹은 작품의 축적은 직업 춤단체의 유일한 자산이며 무기이고, 적당한 관객의 수는 꼭 있어야 할 부분인 것이다. 즉 직업 춤단체의 경우는 「레파토리의 축적」과「관객의 관리」로 그 모든 노력과 운영이 모아져야만 한다.
그 레파토리의 축적은 확실히 춤단체장, 혹은 예술감독이 할 수 있는 몫이다. 이 때 춤단체장은 그 목표-레파토리의 축적-를 달성키 위해서 극장 행정측과, 필요하다면 외부하고도 다각적인 교섭을 벌여야 한다. 자신이 모든 작품을 스스로 안무하기보다는 외부에서 재능있는 안무가를 초청하는 것도 그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또한 행정측은 예술 감독의 발상과 아이디어를 호감을 갖고, 뒷받침해 주어야 할 의무감이 있다. 그 다음, 관객의 수의 확보문제는 극장측의 기획에 의해 계획적으로, 또 단계적으로 추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국·시립의 활동은 낭비의 측면이 많다. 레파토리의 측면에 있어 국립무용단의 경우 「도미부인」이 계속적으로 올려지는 것 빼놓고는 제대로 정착된 창작 레파토리가 없다시피 하며 서울시립무용단의 경우는 전 단장 문일지의 노력으로 「멩가나무 이야기」,「벼락아, 아느뇨」와 같은 작품이 레파토리로서의 그 개발의 가능성을 엿본 것 빼놓고는 그 활동은 거의 시 행사에 기울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국립발레단도 별개 고전(클래식컬) 레파토리의 개발을 시도해보고 있으나 지속적 노력이 기울여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사정은 서울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 속에 있는 부산·인천·대구·광주·목포 등의 시립 춤단체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로서는 일단 규모를 갖추고, 인원수를 확보하고 있는 상기 직업 춤단체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몇 가지 제도적 제안을 제시해 볼 수밖에 없다. 우선 그 첫째는, 조기 레파토리의 개발과 비축을 맡아야 할 단체장(예술감독)에게 적당한 임기(일차로 5년)가 주어져서 그의 노력이 객관적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그 결과에 따라 그는 연임할 수도 있다), 둘째로는 단체장의 선임시 인간적 관계에 얽매여 개인적 능력을 과소 평가하는 일이 없도록 신중함이 기울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그 셋째는 현재의 단체장이 그 권한에 있어서나, 경제적 수준에 있어 쉽게 비교될 수 있는 무용과 교수의 수준을 훨씬 웃돌 수 있도록 배려(연구·조사비 지급 등을 통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극장이나 문화회관 내에 레파토리의 자문과 평가를 할 수 있는 전문 자문위의 설치도 고려해 봄직하다.
한편 그 예술적 방향에 있어, 발레를 추구하는 국립발레단이나 광주시립 그리고 현대춤을 추구하는 대구시립을 제외하고, 이른바 한국춤을 전문으로 하는 기타의 시립은, 전통과 창작춤과의 명확한 활동경계를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점점 창작춤 쪽으로 기울이고, 전통은 국립국악원무용단 쪽으로 집중시켜주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나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전통춤의 지나친 분산은 오히려 전통춤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용하지 않나 싶다. 만일 국립국악원무용단 쪽으로 전통춤의 세력이 더 집중된다면 전통은 더욱더 무게를 가지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역으로 말해, 이 시대의 춤꾼들이 해야 할 것은 오늘의 전통을 만드는, 즉 창작작업일 것이다라는 점이다. 물론, 발레나 현대춤도 장르를 다변화시켜(발레의 경우는 특히 네오 클래식이나 현대발레 쪽으로)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흡수하면서, 동시에 시대의 감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일을 연구하고, 그것이 춤실천으로 적극 옮겨져야만 할 것이다.
창작소주체를 위한 지원정책
오늘날 생성되는 예술춤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창작소주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작은 춤그룹들이다. 앞서의 시립이나 국립과 같은 큰 춤단체가 다수의 관객과 맞부딪혀, 그들에게 예술적 즐거움을 주고 또 관객을 좀 더 춤과 폭넓게 친근하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소임이라면 창작주체는 작은 단위에서부터 창작의 싹을 키워나가는 작업을 꾀하고 있다고 보겠다. 그들의 춤은 물론 미숙한 춤일 수도, 경우에 따라서는 실험의 남발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들 중에서 주목받는 춤꾼들이 나오고, 또 그들 중에서 미래의 춤단체장이 탄생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춤계의 현실은 척박한 것이어서 현재에는 그들을 위한 배려가 전혀 없다시피 한 형편이다. 전국에 거쳐 그들을 위한 적절한 춤공연장이 없는 것이 그 한 예이고, 두 번째로는 그나마 있는 춤지원정책이 거의 대부분 큰 단체나 제법 알려진 중견 춤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례적으로 있는 대한민국 무용제도 오래되고, 규모를 갖춘 춤단체를 우선 뽑고 있으며, 또 각 춤협회(현대무용협회, 현대춤협회, 한국무용연구회 등)가 주관하고 시행하고 있는 국내, 혹은 국제무용제적 성격의 페스티벌도 그 세력권의 범위 안에 들어온 이들에게(자신의 제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젊은 창작 소주체의 활동은 우리 무용사의 그 어느 시기에서보다 활동적이고 또한 생산적이다. 우리의 춤세대로 보아 4∼5세대에 있음직한 이들은 교직에 몸담고 있기보다는 독자적으로, 또한 큰 춤단체에 속하고 있으면서도 독립된 작은 그룹을 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그룹은 이젠 비단 서울뿐만 아니라, 특히 부산과 같은 도시에 있어서도 많이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서울에서 활동중인 강송원, 김삼진, 춤패 아홉, 최테레사와 같은 이들, 그리고 부산의 현대무용단, 짓, 춤패 어울림, 줌과 같은 단체들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현장적 경험에 의하면, 이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좌석수 3백 석 내외의 혹은 좌석수 7백 석 내외의 소극장이거나 중극장과 같은 춤 공연장이고, 또 만일 그들에게 재정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다면 창작지원비와 같이 천2백50만원이란 큰 액수의 단발형의 지원이 아니라, 2백∼4백만원 규모의 「지속적인 지원」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의 문예진흥책은 그 어느 것도 충족시켜 주지 않고 있다. 서울에만 거의 유일하게 문예대·소극장이 있어 춤공연장의 갈증이 해결되고 있을 뿐(그러나 춤꾼들이 애호하는 문예대극장도 대관이 예의치 않고, 춤에 할당된 날짜도 총 대관수의 4분의 1∼5분의 1이다), 지방은 거의 전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창작지원비도 합리적으로 그 개념에 맞게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창작지원 활성화 기금의 경우는 무조건 작품당 천2백50만원씩이라는 식으로 일관 집행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실로 현재의 문예진흥책은 변화하고 있는 문화의 기류를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 무감각증을 드러내고 있다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전통이나 문학에 비해 춤을 비롯한 현대적 공연예술에 대한 지원의 빈곤은 문화를 역동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안이한 지원책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겠다.
창작 소주체가 여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바, 즉 적절한 규모의 공연장과 그들에 대한 현실적 지원책이야말로 문화를 위해서가 아닌 「밑에서」, 그리고 「현장의 가까이서」북돋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와 함께 앞으로 생성될지 모를 춤전용극장과 일련의 춤기획프로그램에도 지원은 필요하다고 본다. '88년 사이에 존속하였던 창무춤터나 현재 「안무와 즉흥시리즈」를 통해 전국에 걸쳐 신인을 계속 발굴해 내고 있는 「공간 사랑」의 경우는 그런 지원 프로그램에 해당될 수 있는 경우의 것이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90년대 우리 춤예술의 위상을 보다 견고히 하고 문화계층이나 국민들 사이에서 춤이 보다 진지하고, 포괄적으로 수용·인지되기 위해서는 특히 대학과 중·고등학교에서 춤교육의 독자성 확보, 직업 춤단체들의 제 방향잡기, 그리고 창조적 소주체에 의한 춤활동의 융성함이 도모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 대학의 커리큘럼과 교수진은 춤의 역사·이론·비평의 강화에 의해 아카데미화의 정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현재처럼 실기위주의 교육은 일종의 「춤문맹증」(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말과 글로서 제의사를 제대로 개진치 못하는 경우)을 낳을 우려가 농후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음, 직업춤단체들은 그 규모와 질에 맞게 적극적으로 레파토리를 축적하고, 또 그 직업춤단체가 속하고 있는 문화수용층에 맞게 무용단의 체제와 예술적 방향을 변화시켜 가야만 할 것이다. 그런 변화에 대한 능동성과, 작품을 통한 승부걸기의 의욕이 없다면 이미 그 춤단체는 직업무용단으로 존재할 수 없는 운명에 빠지게 된다. 그런 뜻에서 각 국립이나 시립, 국립국악원 등의 큰 직업 춤단체장들은 스스로의 권리와 권위를 찾아야만 할 것이고, 그들에 대한 예술행정적 지원은 임기제와 평가제의 도입에 의해, 파격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국립이나 시립의 단체장들이 실제, 대학 교수보다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해서야 말이 되겠는가). 마지막으로 우리춤의 미래는 항상 홀로 일어서려고 하는 춤꾼과 소규모의 춤그룹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들에 대한 지원은 형식상의 자문이 아닌, 전문 평가제나 자문위원회의 설치에 의해 현실적이고, 지속적이며, 짜임새 있게 지원되어야 한다. 현재의 지원제도는 춤문화와 춤공연의 현실성을 무시한(일반적 지원금과 창작활성화 기금과의 갭이 너무 크다), 즉 달리 말해 임기응변과 문화적 허세를 부리는 단발형의 지원제도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