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화도시로의 발돋움
조우성 / 시인, 인천신문문화부 차장
인천의 문화적 토양은 척박하다. 그것은 인천이 문화의 한 단위로서 비로소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 불과 1백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인천이 매소홀, 미추홀, 인주, 제물포 등으로 역사에 이따금 등장했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문화를 운위하기에는 거리가 있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 이 지역에서 출간된 향토사지의 일관된 기술이다.
향토사지인「인천읍지」「인천부사」「인천시사」「인천시사70년대편」「인천개항백년사」등은 모두 1백여 년 전만 해도 인천의 인구가 천 수백명에 불과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술만 봐도 타 지역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 전통을 인천에서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전국 어느 지역에나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유물, 유적을 유독 인천에서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에 속한다. 그만큼 인천의 문화형성기는 일천하다.
따라서 특유의 문화적 전통을 지니고 있지도 못하다. 그것 때문에 1883년 개항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던 신문화는 굴절된 채 그대로 수용될 수밖에 없었던 그것이 인천의 문화적 시발점이 됐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또 이 신문화의 유입은 전적으로 인천 거주 일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고 인천사람들은 충격속에서 이를 수동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8세기 말 인구 천수 백명에 불과한 한촌에 느닷없는 「인천영어학회」가 발족되고 「조선신보」라는 신문이 발행되었으니 그 문화적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아무래도 인천사람들에 의한 나름대로의 문화가 창출되고 수용되었던 시기는 해방 이후라 하겠다. 물론 그것은 식민지 치하의 문화, 그 연장성상에 놓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곧 인천문화가 안고 있는 아픔이기도 했다. 매년 벌어지고 있는 전국민속경연대회를 보면 그러한 사정은 쉽게 읽을 수가 있다. 이 대회는 각 지역마다 대대로 전승, 보존돼 왔던 민속을 보여줘 왔던 것이 통례인데 비해 인천팀은 인천 고유의 것이랄 수도 없는 프로그램을 그것도 이름만 바꿔 두 세 번씩 출전하는 해프닝을 벌여왔던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랄 수도 없는 이 해프닝은 한마디로 뿌리가 없는 문화, 그것도 일본을 통한 굴절된 서구 문화의 수용에서부터 인천문화가 출발했었다는 심각한 문제점만을 극명하게 노증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타 지역보다 모든 면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는 토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저열한 문화적 환경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이나 자생력이 전무하다시피 했다는 데서 인천의 문화적 위상은 어둡기만 했던 것이다.
등잔밑 문화의 실상
인천은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시설, 인적자원이 집중적으로 편재되어 있는 서울과 한 시간대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정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서울 문화의 종속적 성향을 아직까지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인천문화의 또 하나의 문제점인 것이다. 흔히 지역문화를 운운할 때마다 논자들은 인천의 지역적 특성, 예를 들어 「해양문화」를 집중적으로 활성화시켜 나갈 때 인천은 인천 특유의 문화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지역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문화를 가꿔나가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말이 「지역적 특성을 살린 문화」이지 정부가 지속적으로 서울 편중 문화정책을 펼치고 있는 이상 이런 말들은 「말의 성찬」에 불과하다는 것을 문화계 종사자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실례로 6·29선언 이후에야 비로소 인천에서 신문 발행이 허가(?)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문화정책의 뼈아픈 현실을 상징한다. 그뿐이 아니다. 인구가 1백50만이나 되는 직할시에 방송매체의 설치를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 정부다.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이 그간의 문화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형평의 원칙에도 크게 어긋나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구 50만도 안돼는 모 지역에다가는 AM, FM방송을 비롯해TV총국을 두 개씩이나 두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인천에서는 방송매체를 운영할 수 없게끔 정책을 펴 왔느냐는 것이다. 말인즉 동일전파권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는 모양이나 그렇다면 「동일전파권」에 상응하는 문화적 서비스를 서울지역 방송 매체들이 어떻게 인천에 베풀어 왔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천사람들의 의견이기도 하다. 사실 인천은 서울이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부로부터 소위 「지역적 푸대접」을 시종일관 받아온 대표적인 지역의 하나다.
이러한 실례는 문화일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서울올림픽의 경우 예선전 게임을 비롯해 문화축전 프로그램 중 그 어느것 하나도 인천에서 공연, 전시된 바가 없었던 것은 놀라운 문화적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흔히 전국순회공연이나 전시 프로그램의 개최지는 부산, 대구, 전주, 광주, 춘천 등이 지목되고 있으나 인천만은 예외 없이 빠져있는 것이다. 인천을 서울문화권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데서 오는 결과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한 시간대의 거리라고는 하나 인천 사람들은 인천 나름대로의 문화를 형성시켜 가고 있고 「서울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질과 문화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울 문화권의 덤으로 넘어가기에는 인천은 이미 독자적인 문화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한 것이다. 말의 성찬인「지역문화발전」을 운운하기 전에 균형있는 문화정책을 펼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일 것이다.
문화의 뿌리내리기
문화적 뿌리가 일천하다는 인식은 인천사람들로 하여금 지역문화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하는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예술 행정가 및 그와 연계되어 있는 단체 또는 인천시의 지원금을 받고 있는 몇몇 개인들은 일종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있지도 않은 권위에 집착하거나 학원경영의 방편으로서 문화예술인연 하는 인상이 짙다. 각종 대회에서의 수상자 학원 안배가 그를 반증하고 있다. 마치 초·중·고교생을 참가시키지 않으면 문화예술 행사가 이뤄질 수 없다는 투다. 더 기가 막히는 일은 인천시 미술대전과 인천시초대작가전 등을 둘러싸고 이는 잡음들이다. 거기에 몇몇 지역대학교수들까지 합세(?)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걸 보면 답답하기만 한 것이다. 젊고 유능한 문화예술인들을 포용하지 못한 채 그들이 기존의 틀을 줄곧 거부하며 아무런 지원도 없이 독자적인 활동을 외롭게 펼쳐 나가고 있는 일단의 책임은 바로 난네리즘과 독선에 빠져 경직해 있는 문화예술 기성세대가 져야할 몫이다.
그런 와중 속에서도 보다 참신한 자세로 문화예술운동의 핵으로 등장한 곳이 전국 초유의 순수민간문화재단인 새얼문화재단(이사장 지용택)이다. 인천사람 2천3백13명(89년 5월 현재)이 이에 동참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펼치는 모든 문화사업이 일정한 수준을 견지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리고 작금에 번져 나가기 시작한 「내고장 사랑하기 운동」과 새얼문화재단이 꿈꾸는 목표가 맞아떨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약 20억원의 기금을 마련한 새얼은 시장에서부터 대폿집 아줌마에 이르기까지 인천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동참할 수 있도록 그 문이 열려있으며 그 목적이 「향토문화육성을 위한 학술연구 및 활동지원과 문화지 발간, 문화행사 등을 실시」하는데 있다고 밝혀 관심의 초점이 되어왔다.
새얼은 인천 최대의 장학사업을 위시해 인천지역 유일의 토론 프로그램인「아침대화」를 매달 둘째주 화요일에 개최하는 한편 새얼문예 발간, 가곡과 아리아의 밤, 번역사업, 미술품 구입사업, 새얼백일장 개최, 문학동인지 지원사업 등을 계속사업으로 펼치고 있고 올해 안에 계간지 「황해문예」(가칭)발간과 새얼문화상 시상을 준비중에 있다.
그 구체적인 활동사항을 보면 장학사업으로 75년 이후 3천2백79명에게 5억 8천여만원을 지급했고 「새얼문화상」은 「인천과 나라의 문화발전에 헌신한 참 인천인을 가려 찾아 그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지역인사 79명이 기탁한 2억 5천 2백만원(89년 5월 현재)의 기금을 마련, 금년중 1명에게 시상할 계획이다. 「아침대화」는 그간 40회 연 5천여 명이 참가해 지역문화발전에 대해 집중적 토론을 가졌고 일환으로 발행한 「영국노동 조합사」등은 국내 초판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밖에 활동 내역을 보면 △새얼회보=격월간(비매품)3천부발행 배포 △황해문화=계간지, 학술· 예술·종교·경제 등 제반문제를 다뤄 향토사회의 새로운 문화창조역을 자임, 금년중 창간, 4·6배판, 250면 예정 △개화기 인천의 모습, 풍습전=88.6.24 ∼30, 인천 제1공보관 1900년대 사진엽서 1백점 전시 △마르크샤갈판화전=88.11.6∼14, 인천문화회관 전시실, 전시작품 1백40점 △타피스트리특별전 =피카소, 마티스, 미로 등, 88.4.4∼23, 인천문화회관 전시실, 40점 △문학동인지 발간지원=「향토문학 진흥을 위해 5회이상 발간실적이 있는 문학동인지를 지원」, 내항문학회, 제물포수필문학회 지원 △장학생 수련회=1회 86.8.1∼2백제문화권, 제1회 87.8.14∼15 안동문화권, 제3회 88.8.13∼14 충남문화권 △새얼백일장=1회1백41개교 9백06명, 제4회 1백58개교 9백33명 참가 등과 같다.
맨발로 뛰는 연극인들
지방으로서는 전국 최초로 세워진 소극장이 인천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중구 경동 싸리재에 자리잡고 있는 돌체소극장이 바로 그곳인데 연극인 최규호씨는 그의 아내 박상숙 씨와 함께 이곳에서 고군분투중에 있다. 건평 27평, 무대 8평, 좌석 1백30석에 200W의 음향 시설을 갖춘 돌체에서 그들 부부는 주로 판토마임을 공연한다. 마임을 전공한 이들은 금년 들어 극단「마임」26회 정기공연작으로 「반젤레스를 위한 최규호 판토마임」을 공연, 최장수 소극장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들이 치르는 대가는 너무나 엄청나다. 도대체 최저생계비적 타산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울의 극단들이 인천에까지 와서 포스터를 붙이고 표를 팔아 관객을 쓸어(?)가는 것도 한 가지 원인이기는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인천에서 하는 연극이 다 그렇겠지 하는 관객들의 선입관념에 있다고 보인다.
어찌됐든 관객을 모으자는 데만 혈안이 돼 어줍잖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풍토가 이들 부부를 더욱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극단에 입단한 지 몇 개월도 안돼는 초심자가 일약 주연배우가 되는가 하면 치졸하게 성을 파는 연극(?)이 횡행하는 현실에서 최규호의 본격마임은 속수무책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전에 연극인 정진 씨가 문을 열었던 「경동예술극장」이 경영난에 봉창, 폐쇄된 이후로 이러한 현상은 가속화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된 듯하다. 어설픈 목적극이 아니면 성을 팔겠다고 나서는 한 관객들이 인천연극을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면 연극인들은 보다 「연극다운 연극」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다.
또한 우수연극의 경우 인천시나 새얼문화재단 또는 향토대기업 등은 이들에게 제작비를 지원, 「연극다운 연극」이 제자리를 잡아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다. 현재 연극전용 소극장으로는 △돌체소극장=인천시 중구 경동 187소재, 27평, 무대 8평, 1백30석, 200W △미추홀소극장 = 인천시 중구 내동 2소재, 40평, 무대 8평, 80석, 100W △신포아트홀=인천시 중구 신포동 20-8소재, 50평, 무대 10평, 197석 △배다리예술극장=인천시 중구 율목동 1-24소재, 70평, 무대 30평, 1백50석, 220W 등이 있으나 시설 확충이 시급한 상황이다.
유일한 시문학동인지 「내항문학」
인천에 문학동인지가 등장했던 것은 해방 이후부터이나 모두 부침을 거듭했다. 60년대 초에 발행했던 소설동인지 「해협」(조수일, 김창황, 김창흡, 심창화)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동인지였다는 문학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 이외에는 「한국문학으로서의 문학」으로 기록될만한 작품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대로 인천의 문화적 토양과 연관이 깊을 성싶다. 해방 후 함세덕, 현덕, 김동석 등이 이곳에서 한 때 작품활동을 해왔으나 그 뒤를 이을 만한 역량있는 작가군이 나타난 것은 그 한참 뒤인 70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물론 김양수, 랑승만 등이 이미 등단해 작품활동을 하고는 있었으나 문인들이 대거 탄생됐던 시기는 지금의 40대가 등단했던 70년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흥규(평론), 조남현(평론), 신상철(평론), 조일도(희곡), 최원신(평론), 백승철(평론), 정승렬(시), 조우성(시), 김윤식(시), 우선덕(소설), 이완규(소설), 이석인(시), 이영유(시), 김연식(시), 김상렬(소설) 등이 그들이고 이에 그 아랫세대인 이창기(시), 운제림(시), 김영승(시), 장영기(시조), 박일(시), 황빈(시) 등은 70년대 초부터 80년대 중반기에 걸쳐 등단한 문인들로 비로소 문단을 형성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상경하여 소위 중앙문단의 일원이 돼 있다.
이석인, 정승렬 등이 73년에 규합한 경기시문학동인은 74년 이후 한동안 「時流」라는 제목으로 동인지를 발간해 오다가 80년 현재의 동인명칭 「내항」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최무영, 손문수, 정승렬, 신연수, 장정옥, 신월균, 박옥분, 허문태, 전방욱, 김동환, 박대산, 이은미 등으로 회원을 늘였으며 80년 12월부터 돌체소극장에서 시낭송회를 개최해 왔다. 그러다가 86년 이후 이들은 등단 문인인 김윤식(시), 박서혜(시), 나혁채(시), 조우성(시), 이영유(시), 이창기(시), 장종권(시), 박일(시), 이원규(소설), 문광영(평론), 김연식(시), 채성병(시), 정동수(소설), 조순입(소설), 김구연(동화), 최원식(평론), 김양수(평론)의 작품을 함께 수록하기 시작해 내용상 큰 변혁을 가져왔다. 이들은 이후 새얼문화재단 문예지 지원사업기금과 문예진흥원 출판보조금을 받으며 작년 11월까지 동인지 7집을 발간해 인천 유일의 시동인지로서 관록을 쌓아가고 있다.
산문 동인 「제물포수필문학회」
산문동인으로는 「제물포수필문학회」가 있다. 83년 조용란, 한상렬, 이부자, 임옥순, 김정효, 조남신, 최임순 씨 등 8명이 모여서 결성한 이 동인들은 그동안 「샘터의 표주박」「나뭇잎 사이를 지나는 바람」「머물다 갈 뿐이지만」등 동인지만 열네 권째를 펴내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회원은 창립동인을 위시해 임옥순, 김정옥, 안미영, 박희선, 임화자, 음정순, 한중희, 오병서, 임성자, 강정부, 김선자, 맹명희, 허수자, 김애자, 심문선, 정해천, 이재숙, 원영란, 장정숙, 이민순, 류선록 씨 등으로 대부분 여성들이다. 이들 중 이부자(예술계), 한상렬(시대문학), 안미영(우리문학), 심문선(동양문학)등이 문단에 등단해 동인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는 있으나 아마추어리즘에서의 탈피가 시급한 과제로 보인다. 특히 이 동인들은 여느 시낭송회처럼 「수필낭독회」를「제물포수필 문학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열고 있어 이채롭다. 작년 10월까지 네 번에 걸쳐 열었던 「수필낭독회」는 우리 문단에서도 흔치 않게 보는 작업이리라 생각된다.
실내악 보급운동의 선구 미추홀예술진흥회
인천은 비교적 일찍이 시립교향악단을 가졌다. 그것은 경인지구 육군정훈관현악단, 인천음악애호가협회관현악단, 인천필하모니관현악단 등을 모태로 한 것으로 창단 단원은 홍훈표, 김중석, 손관수, 강춘기, 정무남 씨 등 40여명이었다. 이들을 출발로 해서 발전을 거듭해온 심포니운동은 이제 어느 정도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한다면 실내악 보급운동은 극히 미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간혹 몇몇 단체가 있기는 했으나 부침을 거듭해 뚜렷한 성과없이 유명무실해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다가 일약 실내악보급의 선두주자로 나타난 것이 86년에 창립된 「미추홀예술 진흥회」다. 회장 전경화(全京華) 씨는 마땅한 공연장이 한군데도 없어 결국 인천올림퍼스호텔 회의실을 단골 공연장으로 사용하면서 일본고베실내합주단 연주를 필두로 김남윤바이올린독주회, 예음클럽연주회, 미국조지아금관 5중주단, 정찬우·서울윈드앙상블·한동일·김대원·김순영, 김금봉·김경민·한성환트리오, 데이비드 김 등의 연주회를 개최해 왔다. 국내 정상급 연주자들의 연주를 이만큼 지속적으로 청중들에게 선보였던 문화예술 촉매단체가 일찍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미추홀예술진흥회이 그간의 성과는 눈부신 것이다. 또 이들의 실내악보급운동을 지켜본 바로는 결코 인천사람들의 문화향수 수준이 저열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인천지역 실정으로 봤을 때 입장료 1만원은 적은 액수가 아님에도 미추홀예술진흥회의 연주회는 항상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 그 단적인 실례다. 좋은 연주 좋은 연극에는 언제나 관객이 몰려들고 있다는 평범한 진실을 문화예술 종사자에게 깊이 깨닫게 해 준 것도 「미추홀」의 성과라면 성과이리라 생각된다. 이들은 이밖에도 흔히 엄두를 내기도 어려운 공단근로청소년을 위한 순회음악회, 지방청소년을 위한 순회음악회를 열어 음악인구의 진정한 저변확대에 기여해 왔고 금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도서지방순회 연주에 나서기도 했다.
이 연주회는 젊은 연주가들의 열정과 과감한 기획이 맞아 떨어진 참신한 프로그램이었다. 연주장 시설이나 개런티 문제 등으로 연주가들을 쉽사리 초청할 수 없는게 지방음악계의 현실이지만 이들은 청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연주를 하겠다는 뜻을 표명하고 있어 주위사람들을 흐뭇하게 하기도 했다. 물론 이 연주회가 용유도(龍遊島 인천시 중구 용유동) 현지 사정에 의해 「한여름낮의 음악회」라는 이변을 낳기도 했고 연주장이래야 시골예배당과 다를 바 없는 시설이었다고는 하지만 연주가나 청중들 모두가 무더위 속에서 땀을 흘려가며 연주회를 진지하게 맞아들이고 있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김영준(바이올린), 이혜경(피아노), 한성환(첼로) 씨 등은 「미추홀의 뜻도 좋았고 후배 학생들에게 음악이 재미있는 예술이란 것도 알리고 싶어 섬까지 찾아왔다. 어려운 길을 나섰지만 추억에 남을 연주회였다」고 연주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현재 미추홀예술진흥회가 추진하고 있는 일련의 실내악운동은 어느 모던보다 관심의 초점이 되지 않을 수 없는데 특히 지방에 뿌리를 둔 문화예술촉매단체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전국적인 성과를 얻기 시작했는가는 하나의 연구대상일 수도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미추홀…」의 연주 주체는 하나같이 인천의 음악인이 아니라는 점이 눈에 띤다. 그렇다고 해서 인천에 소규모 음악단체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문화향수권자이 시민들을 찾아나서지 않고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천시향, 인천시립합창단, 인천시립무용단이 그래서 지탄을 받아왔고 시민들이 기타 음악 단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그들의 고답적이고 폐쇄적인 연주활동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인천청소년교향악단, 린나이관악합주단, 인천소년리코더합주단, 인천남성합창단, 인천여성합창단, 호산나합창단, 인천교향취주악단 등이 민간 음악단체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은 각기 연 1회에서 3회 정도의 정기연주회를 열어 왔을 뿐이며 대부분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인천 사람이 관심을 갖고 이들의 연주에 동감하기에는 아직도 그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면도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어쨌든 인천지역의 예술인들, 특히 음악인들은 이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인천사람들에게 그들의 예술을 선보이고 비판받고 그리하여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뿌리있는 예술인」들이 돼야 하겠다. 주어진 현실을 탓하기 전에 왜 인천사람들이 인천사람들의 공연을 줄곧 외면하고 있는가를 뼈아프게 성찰하지 않는다면 이는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인천사람들의 문화예술 감상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인천사람들이 무엇이 훌륭한 연극이고 무엇이 엉터리 연극이며 말도 안되는 무용인지를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증거는 관심을 가지고 보면 도처에서 읽을 수 있는 일이다. 지역문화예술 단체가 지역인들을 찾아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은 어쨌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오소회(五素會) 그 이후의 미술활동
인천지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정립하고자 고심했던 미술인들의 모임으로는 「오소회」(五素會)를 꼽을 수 있다. 물론 광복 이전의 미술활동이 인천지역에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은 대부분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인천출신으로 특출했던 이로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와 우석(雨石) 장발(張勃)이 있었다. 이당은 구한국 어진(御眞)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기도 했으나 광복 후 이른바 7명가(名家)의 한 사람으로 후진을 많이 길러냈다. 그는 특히 인물화의 세기(細技)에 뛰어났고 설채(設彩)를 주로 다룬 북종화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선 장발은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운 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학과 디자인을 공부, 후에 서울미대를 창설하고 후진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들이 인천화단에서 활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전(鮮展)을 통해 활동하기 시작한 인천출신의 한국인 화가로는 이무영(李茂榮), 김영건(金永健), 박응창(朴應昌), 최석재(崔錫在), 김종태(金鍾泰) 등이 처음으로, 특히 이무영은 이곳에서 「낙랑다방」을 경영, 미술활동의 본거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 이후 동경(東京)미술학교 출신인 조소의 조규봉(曺圭奉), 서양화의 김순배(金舜培), 이남수(李南壽), 와세대 출신인 건축전공의 최석재(崔錫在), 법률과 출신인 이경성(李慶成) 등이 속속 귀국하여 발판을 굳혀 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전쟁말기 인천미술의 메카였던 「낙랑다방」도 문을 닫았고 더불어 활기를 띠던 인천미술활동도 동면기에 들어갔다.
광복 후 이경성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그는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에 재직하면서 46년 「인천초등학교 전람회」, 49년에 「8·15해방기념전」등을 여는 한편 평필을 휘둘렀다.
동호인으로서의 첫 단계는 47년에 결성된 「인천미술동인회」였다. 이건영(李健英), 최석재, 김순배, 김찬희(金燦熙), 임진순(任眞淳), 김기택(金其澤) 등 인천거주 미술인들이 망라된 이 단체는 그러나 6·25동란으로 와해된다. 6·25동란 중에 「전쟁전람회」등에 간여했던 작가로는 김찬희(金燦熙), 김학수(金學洙), 윤기영(尹岐泳), 김진명(金鎭明), 이병태(李炳泰), 우문국(禹文國), 이명구(李明久) 등을 들 수 있다.
52년 문총산하 대한미술협회 인천지부가 조직돼 김영건(金永建), 박응창(朴應昌), 윤기영(尹岐泳), 최석재(崔錫在), 박흥만(朴興萬), 한흥길(韓興吉), 장선백(張善柏), 유희강(柳熙綱), 박세림(朴世霖), 장인식(張仁植), 이경성(李慶成) 등이 회원전을 갖지만 일부 미술들은 「자유미술동인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김기택(金基澤), 안현주(安賢周), 이달주(李達周), 이일(李一), 최진우(崔鎭宇), 한봉덕(韓奉德)들은 이후 인천미술협회로 통합되고 朴瑛星, 황추(黃秋) 등도 이에 가담한다.
인천지역 작가들이 망라된 전람회에는 59년에서 결성한 「인천앙데팡당전」이 있다. 64년까지 계속된 이전람회는 인천화단의 활력소가 되었으며 이때 이재호(李在鎬), 이평휘(李平彙), 이규선(李奎鮮), 김상유(金相游), 김종휘(金鍾輝), 정상화(鄭相和), 황용엽(黃用燁), 조용익(趙容翊), 김대우(金大羽), 이철명(李哲明), 김인환(金仁煥), 이언구(李彦求), 김옥순(金玉順) 등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60년대 이후 인천출신의 미술인들로는 이부웅(李富雄), 이순만(李淳滿), 홍용선(洪勇善), 선학균(宣學均), 황만영(黃滿泳), 최명영(崔明永), 이반, 최대신(崔台新), 고정수(高正守), 강찬균(姜燦均) 등이 있다.
이 중 「오소회」멤버는 미술인들이 대거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겨갔던 60년대에 인천에서 미술발전이라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가졌던 이들이 만든 미술동인이다. 박응창, 김영건, 이경성, 윤갑로, 우문국 등은 당시만 해도 변변한 전시장이나 화랑이 전혀 없었기에 신포도, 은성다방을 본거지로 삼고 이곳에 모이고 이곳에서 미술전을 개최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분히 아마추어리즘을 바닥에 깔고 있었다. 이경성은 이미 미술평가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오소회전에는 추상적 경향의 크레파스화를 출품하였고 당시 인천시장이었던 윤갑로 씨도 작품에 열중했다. 창립멤버 박응창은 이 중 가장 연장자로 선전에 네 차례나 입상한 바 있고 김영건씨 역시 3회 입상을 하면서 화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같은 멤버인 우문국은 광복 이듬해 검여(劒如)와 같이 중국에서 귀국, 50년대까지 서양화가로 활약하다가 이후 동양화에 전념했으며 한때 조개 껍질을 재료로 한 「패분화(貝粉畵)」를 개척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검여, 유희강은 제2회 국전부터 서예작품을 출품해 서예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갔으나 반추상계열의 서양화를 출품,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난 이후 완전히 서예에 귀착해 「추사(秋史) 이후 지금까지 존재치 아니하였던 서가(書家)」라는 평을 받는 대가가 되었다. 특히 좌수서(左手書)를 개척한 것은 그가 오소회에 들어와서 활동하던 무렵이었다. 후에 서예의 정재홍(鄭載興), 장인식(張仁植), 동양화의 오석환(吳錫煥), 서양화의 황병식(黃秉植) 등이 이회에 참여하나 오소회의 활동은 제8회전을 끝으로 중단된 상태다.
오소회 이후 동인들
현재 활동중인 미술동인을 살펴보면 과거 50·60년대와는 달리 상당한 양적 팽창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예인회(회장·이형재)=한국화, 서양화, 조각, 회원24명 △ 인천여류작가회(회장·김옥순)=한국화, 서양화, 조소, 공예, 회원20명 △ 일수회(회장·이지훈)=한국화, 회원13명 △ 경인수채화회(회장·정용일)=수채화, 회원19명 △ 인천미술형상전(대표·조덕호)=한국화, 서양화, 조각, 회원30명 △ 치경희(회장·임종각)=한국화, 회원6명 △ 지평전(회장·이종구)=서양화, 회원5명 △ 청년작가회(회장·김진희)=한국화, 서양화, 조각, 회원25명 △ 표현회(회장·최천수)=한국화, 서양화, 서예, 회원8명 △ 삼락동인회(회장·김재은)=한국화, 서양화, 서예, 회원 10명 △ 인천사생회(회장·노희정)=서양화, 회원14명 △ 인천조각회(회장·노용래)=조각, 회원12명 △ 인천향토작가회(회장·이철명)=한국화, 서양화, 공예, 조각, 회원50명 △ 현대수채화작가회(회장·이종무)=수채화, 회원11명.
이상의 동인들 말고도 학원별, 대학별, 동문들의 모임도 상당수에 달한다.
청람묵인회, 예원화우회, 연당서우회, 추인회, 한빛회, 경서이묵회, 대동한묵회, 한림묵연회, 정암묵연회, 월요화우회, 일소회, 자묵회, 도화전, 현정 묵연회 등이 바로 그들이다.
단체의 숫자만 언뜻보면 인천미술은 바야흐로 개화기에 이른 듯 보인다. 그러나 이들 동인들의 88년도 활동 실적은 90퍼센트 이상이 회원전 1회를 개최하는데 그쳤고 이름만 걸어놓고 아예 개점 휴업상태인 동인들도 있다는 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연2회의 회원전을 가진 동인들로는 인하전문대미술반 출신 모임인 「월요화우회」 한곳뿐이었다는 것과 함께 이들이 경우에 따라 동인회에 복수로 가입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현상중의 하나다.
이러한 현상은 인청미술동인들이 동인들로서의 보다 선명한 색깔을 지니고 있지 못한데서 오는 결과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인천미술인들은 감내하고 있고 그래서 환경이 월등히 나은 서울로 간 작가도 어림잡아 20여 명은 족히 넘는다. 문제는 발표의 장이 부족할뿐더러 거의 작품이 팔리지 않는다는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들은 터무니 없는 그림값을 매겨 미술애호가들을 지레 겁먹게 할 것이 아니라 우선은 구매자들이 보다 손쉽게 그림을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질적 수준을 향상시켜야겠다는 것이다. 미술은 작가들만이 아는 세계가 아니라는 평범한 진실을 이제는 좀 깨달아야겠다. 그림같지도 않은 그림을 그림이라고 떼를 썼떤 작가들은 없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인천 사람들에 의한 인천문화
인천지역 문화의 딜레마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서울종속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반면에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에 오히려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를 이제부터라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지니고 있다고도 보인다.
이제 인천지역을 서울문화권으로 쉽사리 치부해 버릴것이 아니라 인천지역의 문화지표조사라도 해서 이 지역 주민들이 문화적으로 무엇을 어느 수준에서 요구하고 있는가를 파악해야 하겠다. 또한 그것으로 바탕을 한 문화정책이 시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인천지역 방송매체 설립허가 요구와 함께 공연장다운 공연장, 전시장다운 전시장 등 제대로 된 문화시설을 가져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의 「문화적 지역감정」으로 이를 어떻게든 승화시켜나가야 하겠다. 그때 비로소 더욱 활기차게 인천의 문화예술은 꽃을 피울 것이다.
인천소재대학 관련학과 현황
학 교 |
학 과 |
입학정원 |
비 고 |
4개교 |
|
290명 |
|
인하대학교 인천대학교 인전전문대 인하공전 |
미술교육과 미술학과 공예디자인과 공예과 |
50명 40명 80명 160명 |
|
인천지역 홍보매체 현황
매체별 |
업체수 |
비 고 |
TV방송국 |
없음 |
|
신문사 |
2개사 |
인천신문사, 기호신문 |
유선방송 |
8개업체 |
가입가구수 10만세대, 허가업체 : 4개업체 |
지방라디오방송국 |
없음 |
|
지방잡지사 |
1개사 |
월간인천 월발간부수: 5000부(130면) |
연극전용소극장
극장명칭 |
위치 |
규모 |
'88공연실적 |
전화 |
비고 |
계 |
5개소 |
196평527석 |
36작품1,090회 |
|
|
돌체소극장 |
중구경동 |
38평 77석 |
8작품 230회 |
72-7361 |
79. 2 |
미추홀소극장 |
중구내동 |
40평100석 |
6작품 240회 |
763-5234 |
88. 1 |
신포아트홀 |
중구신포동 |
48평200석 |
19작품 500회 |
762-8944 |
87. 6 |
배다리예술극장 |
중구율목동 |
70평150석 |
3작품 120회 |
72-8983 |
88.12 |
민간음악단체
단체명 |
회원수 |
대표자 |
'88활동실적 |
전화 |
설립년도 |
인천청소년교향악단 |
50명 |
정무남 |
정기연주회3회 |
427-1395 |
88 |
린나이관악합주단 |
45 |
김정수 |
정기·임시연주회6회 |
883-5501 |
84 |
인천청소년리코더합주단 |
30 |
박문식 |
정기연주회2회 |
522-6115 |
85 |
인천남성합창단 |
45 |
윤영진 |
정기연주회3회 |
83-3761 |
71 |
인천여성합창단 |
35 |
없 음 |
정기연주회2회 |
762-1738 |
77 |
호산나합창단 |
40 |
이희복 |
정기·임시연주회4회 |
762-1738 |
57 |
인천교향취주악단 |
80 |
서정화 |
정기연주회1회 |
763-3101 |
75 |
인천지역 전시장 현황
전시장명 |
위치 |
규모 |
전화 |
비고 |
문화회관전시실 |
남구 숭의동 |
254평 |
427-0065 |
|
제1공보관전시실 |
중구 사동 |
42평 |
72-5271 |
|
한서화랑 |
남구 주안4동 |
55평 |
424-8151∼6 |
한서상호신용금고 |
나라갤러리 |
중구 신포동 |
50평 |
763-9404 |
다방겸업 |
석정화랑 |
중구 내동 |
60평 |
74-3366 |
|
대한화랑 |
남구 주안6동 |
30평 |
493-2221 |
|
정우화랑 |
중구 신포동 |
30평 |
72-5111 |
정우상호신용금고 |
몽마르뜨화랑 |
중구 답동 |
90평 |
72-9798 |
다방겸업 |
극 단
극단명 |
단원수 |
대표자 |
'88공연실적 |
전화 |
소유소극장명 |
미추홀 |
80명 |
김종원 |
6작품240회 |
763-5234 |
미추홀소극장 |
엘칸토 |
30명 |
송인혁 |
3작품120회 |
82-5596 |
배다리예술극장 |
중앙극회 |
20명 |
이진성 |
6작품200회 |
762-8944 |
신포아트홀 |
마 임 |
30명 |
최규호 |
5작품180회 |
72-7361 |
돌체소극장 |
인천소재대학의 문화예술 관련학과 현황
분 야 |
학 교 |
학 과 |
입학정원 |
비 고 |
계 |
4개교 |
|
1,100명 |
|
어문학 |
인하대학교 인천대학교 |
문과대 인문계어문학과 |
480 210 |
|
미 술 |
인하대학교 인천대학교 인천전문대 인하공전 |
미술교육과 미술학과 공예디자인과 공예디자인과 |
50 40 80 160 |
|
무 용 |
인천전문대 |
무용과 |
8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