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반아 비평에 비친 한국시
산띠아고 데 미겔 로뻬스(한국외국어대 교수)
이원영 역
이 글은 한국시에 대한 하나의 시각을 제시코자함이 목적이나 기존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로 인해 한국시문학에 취해진 개념상의 변화 또한 없을 것이다. 다만, 구체성을 벗어난 개괄적인 조망이 우리의 의도이기에 비평의 범위를 서반아어로 출간된 한국시에 국한시키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비평논문이 실질적으로 부족한 까닭에 이러한 조망이 포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자료들은 최근의 비평기사나 출판물의 문예비평 또는 개괄서들로 깊이 있는 분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전문적인 연구성이 결여되어 있으나 취해진 자료들이 논리의 자연스러움을 지니고 있어 이해하려는 노력을 저해하는 맹목적 편견에 젖어들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에 대해서는 적절한 시점을 통해 평가가 내려지게 될 것이다.
서반아어권 내에서 한국시의 인식은 번역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평가의 활동범위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고 있다. 그러기에 엄밀한 관점에서 주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문학적 장르나 시연의 구조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지니고 있다 하여도 비평가의 관심은 우선 형식은 차치하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제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한국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시가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인가? 또한 한국문학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월렉과 워렉은 한 민족속의 문학작품들을 규정함에 있어, 다시 말해 민족문학을 언급할 때 의문을 제기한다. 구체적인 예로 몇몇 작품들은 영국식민지 문학으로 또는 북미 민족문학으로 규정함에 있어 이들은 어려움을 보이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요인이 때로는 심각한 문제까지도 관여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상대적인 경계와 가변적인 영역에 대한 언급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관심을 가질 경우 인종적 동일성과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이 보다 우월할 것 같다. 한국민족은 자신들이 세계에서 가정 오래된 국가들 중 하나에 속한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자신들이 전통에 긍지를 느끼고 있다. 물론, 그들의 학자와 문인, 특히 시인들은 이러한 전통에 젖어 있으며,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이들은 자신들을 형성해 온 교육원칙에 충실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쩔 수 없이 거대한 세계적인 추세가 한국문학에도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추세의 원천과 활동성, 영향력 그리고 경향은 어떠한가? 깊이 있는 지식의 결여와 문학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위의 문제에 대해서는 문학연구에 상당히 밀착되어 있는 역사주의 경향을 가능한 배제해야 할 것이다. 물론, 때로는 주변적 사항을 이용하는 것도 합리적이나 이를 논문의 동기로 삼아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이용한 자료는 총 4권의 시집으로 구성된다. 이들 중 가장 최근의 것은 나머지 시집들보다 야심적이고 종합적인 성격은 띠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루고자 한다. 나머지 세 권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현창교수가 모아 번역한 「한국시선집」이며 후에 번역된 두 권은 민용태교수의 「한국시선」과「한국현대시선」이다. 「한국현대시선」은 순수하게 현대시인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두 권은 고전시와 현대시의 두 시기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세 권의 시집을 내용상 비교하면 대단한 차이를 보게 된다. 「한국시선집」과 「한국시선」의 고전시부분을 비교하면 공통적으로 실린 시는 단지 3편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비록, 두 권의 시선집에 실린 작품수가 많지는 않지만 작품의 선택과 번역상 나타난 다양성은 대단히 의욕적이다. 각기 저자들은 자신들의 개별적인 시적 취향에 따라 움직이며 따라서 선택성을 띠고 있다.
근대와 현대시에 있어서 위에 언급한 두 시선집을 비교하면 김교수의 시선집 2부에 실린 23명의 시인들(71편의 시)중 11명만이 민교수의 시선집 2부에 실려 있음을 보게된다. 그리고 실린 시자체의 분량은 단지 6편에 그치고 있다. 그밖에 5명의 시인이 양자간에 공통적으로 실려 있으나 시의 선택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대조는 민교수의 「한국현대시선」으로 비교영역을 넓혀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민용태교수는 김현창교수가 선별한 시인들이 번역된 시에서는 전혀 일치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민용태교수의 두 작업에 있어 두 번째 시선집 「한국현대시선」에는 「한국시선」에 발췌된 시인들 중 8명만이 포함되어 있으며 같은 시가 실린 경우는 한 편이다. 김교수의 「한국시선집」과 민교수의 「한국시선」을 비교할 때, 양자는 많은 한국시의 예를 보이고, 이로 인해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일치점을 보이고 있다.
민교수의 두 번째 시선집에는 김교수가 다루었던 시인들 중 3명만을 뽑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양자의 목적이 분명히 다르다는 점에서 납득할 수 있다. 김교수는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폭넓은 시형태를 제시코자 했으나 민교수는 근래에 쓰여진 가장 최근 시의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후자의 시선집에 포함된 모든 시인들이 생존 시인들인 것이다.
민용태교수와 더불어 우리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1977년 2월 28일 마드리드에서 발간된 「한국시선」서문에 실린 「한국은 언제나 시인의 나라였다」라는 내용이다. 이점이 시인을 선택코자 하는 또는 선택해야 하는 두 교수의 노력을 어렵게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선택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시인들의 명단이 불완전하다는 느낌속에 또다른 시인들을 추가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처럼 선택상 거의 일치점을 잃고 있는 것이 보다 광범위한 시각과 시적 특성을 확인키 위해 보다 많은 시를 접할 수 있는 우리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잇점이 되고 있다. 그밖에 네 번째 시선집인 김현창교수의 「한국시문집」은 앞서 밝혔듯이 보다 야심적이고 종합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이러한 양상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그러면 위의 시선집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자.
한국시선집
이 시집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자연에 대한 시인들의 특별한 태도를 관찰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자연에 대한 명상은 소유의 욕구로, 자연자체 속에 희생코자 하는 갈망으로 변모된다. 아마도 이 점에 대해서는 역사와 사회적인 즉, 불교와 도교의 영향에 대한 설명이 불가피할 것이다. 민용태교수는 「한국현대시선」의 사전 연구에서 위의 사항을 언급하고 있으며 김현창교수는 「한국시선집」에서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규정하기 위해 우주성과 영원성이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현실의 삶에 대한 무관심이 한국에 깊이 뿌리를 내린 후기의 조류인 유교와 전적으로 상반되는 그것들의 특징이다. 유교의 영향은 애수와 슬픔을 그 특징으로 한다.
주목할 점은 어떻게 시인들이 자연을 사색하고 자신들의 감정에 동화시키는 가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는 자연이 삶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등장하며 자연을 잃어버림에 대한 두려움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이점에 대해서는 외국인인 필자가 한국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잘못된 평가이다. 이처럼 잘못된 비평이 나오게 된 것은 필자가 앞에서 주장한 문학연구에 있어서는 역사주의적 경향을 가능한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계열의 기타 시인들은 자연과의 알레고리를 통해 자신들의 감정을 보이고 있다. 김소월의 경우 자연의 모티브에서 영감을 얻은 시를 많이 보게 된다. 대략, 「진달래」,「달」,「바다」,「눈이 내린다」,「개미」,「구름」,「산」,「뻐꾸기」,「산유화」등 몇 가지 제목만 보아도 위의 내용이 분명해진다. 시인은 이와 같은 자연의 요소들을 찾고 동경하며 이들 속에서 삶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일종의 은둔적 욕구가 두드러진 가운데 자연적 요소들과의 회우가 절실하게 나타나곤 한다.
건너서서 저 편은 다른 나라이라
가고 싶은 그리운 바다는 어디에?
(「바다」, 위의 책, p.57)
저기 저 구름을 잡아타면
……
구만리 긴 하늘을 날아 건너
그대 잠든 품속에 안기렸더니
(「구름」, 위의 책, p.6)
「길」또는「고랑」에서는 이육사와 동일하게 자연의 주제가 형이상학적 분위기를 띠고 있다. 사회적 성격으로는 유치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생과 사」를 통해 그는 군인의 함성이나 계급과도 같은 분명한 어조로 죽음에 대항하고 있다. 기타 「나의 어린이들에게」와 「야생화처럼」도 같은 시풍을 따르고 있다.
그밖에 시인 조병화의 두드러진 점은 비판정신이다. 시「인간 기생충」은 대단히 신랄한 작품으로 그의 고발정신은 작금의 싸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이르고 있으며 인간이 착취와 기생적인 성질을 인간에 대한 시적인 해석처럼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경우, 그의 고발정신은 건전함과 소박함이 가득한 전원 생활을 노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오월 축제, 단오」와 「봄」의 경우처럼) 단순한 문체, 더 나아가 문체론적 수사법상 가장 단순하게 하나의 동사가 동일한 형태의 반복속에 나타난다. 이러한 주제상의 특성을 비교할 때, 조지훈의 「산의 대화」는 우리에게 프란시스코 안또니오 데 게바라의 작품「궁중의 경시와 전원의 찬사」에 나타나는 서반아 르네상스상의 유사란 느낌이나 전원의 한적함을 노래하고 물질적인 부의 공허함을 배격하는 서민시 형태의 초기 공고라를 생각나게 한다. 한국시에 있어 자연적인 요소의 존속은 인간이 사회로부터 물들지 않은 상태인 원래의 순박함을 그리워하는 감정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셈이 된다.
한국시선
이 시선집에는 「불타는 수목Arbol de fuego」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인 베네주엘라 여류시인 쟝 아리스떼기에따의 헌시가 실려 있으며 이를 통해 「그처럼 잊을 수 없게 매력적인 시가 우주론적 시각에 대한 이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감사의 말을 표하고 싶다」라고 하면서 계속하기를 「이 시집을 읽는 것이 분명한 이해를 위한 실마리가 된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윤리적, 미학적 상황의 정도를 밝힐 때, 한국의 시인들은 자신들의 표현상의 조화에 스스로 매료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즉자적으로 한국시에 담겨 있는 단순미를 간파하여 「한국시란 기본적이고도 세련된 순수함이 가득한 글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상상력이 증오, 비열 그리고 범용의 상태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내적인 표현을 들여다보는 매력의 장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처럼 적은 내용으로 그녀는 사물에 대해 날카롭고도 본질을 파헤치는 성격규정을 내릴 줄 안다. 즉, 명백하게 단순한 형태로 인해 시의 주제들이 위대성을 갖게 되는 한국시의 본질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있다. 모색된 단순함, 신선하고도 맑은 분위기야말로 세련미와 더불어 얻어진 순수함인 것이다.
한편, 콜롬비아의 오스카 에체베리 메히아는 「모래시계 Reloj de arena」라는 신문기고란에 쓰기를 「이 시에서 먼저 느낄 수 있는 점은 동양적 성격으로 섬세함과 낭만성이다」라며 한국을 「전설적인 나라」로 특징 지우며 한국시적 특성이 두드러진 세 편의 시의 일부를 싣고 있다.
거의 유사한 형태로 칠레의 안드레스 사베야는 「한국시는 부드러운 서정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며, 이에 대한 충분한 증거로서 작자미상의 시 몇 편을 보여주고 있다. 후에 덧붙이기를 「한국시들의 어휘는 정감이 넘치는 것 같으며 인간의 마음과 자연이 투명함과 섬세함 속에 합치되는 경지에 다다르고 있다」며 12세기의 최치원을 예로 들고 있다. 그는 형식 설명에 이어 장르로서 시조를 강조하고 일본의 단가와 하이꾸와의 유사점을 지적하며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관대한 태도에서 인간의 존엄성 위에 태양과 옥수수가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시인과 인간은 동질화 된다」는 것으로 이러한 시들을 읽고 난 후에 얻게 되는 우주론적이고 형제애적인 자세이다.
스페인의 경우, 루이스 히메네스 마르또스 또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지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진솔성을 그러나 노력만의 결과가 아닌 「지성과 감성의 합일에서 태어나는 투명한 신성함」임을 강조한다.
특히, 날카로운 관찰력을 보여주는 것은 프란시스꼬 인두라인 교수의 「한국시2천년」이란 글로 텍스트에서 언급되지 않을 수 없는 「한국시선」저자와의 관계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는 위의 책이 인간내부의 필요성에서 생성된 시의 보편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보편적으로 생성되는 독창적이고 자연스러우며 무의식적인 현상을 외면적으로 증명코자 기원과 영향 그리고 출처를 찾는 데 현혹되어 있다. 인두라인은 말하기를, 「나는 서구 유럽에서 〈이국적〉이라고 불리웠던 것은(……중략……) 공통적으로 지닌 것으로 간주되어 우리는 차이점을 인식하면서도 그 차이점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러한 차이점도 본질적이라기 보다는 부차적인 성격을 지닌다」즉, 시상의 보편성을 다루는 것이다. 인두라인의 견해로 이국적 필치란 편협성을 띠고 있으며 그래서 덜 중요하다. 말하자면 하나의 시군이 아무리 이국적인 색채를 띠었다 하나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며 나머지 시들과 공통적인 기원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경이적인 사실로 보이며, 이로 인해 그는 「모든 운율상의 소재에는 독특한 표현수단의 창출이라는 구별되는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은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문학에 유효한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사항인 것이다. 그는 보다 주제의 핵심에 접근하며 계속하길, 「민박사의 번역에 의해 서반아화되어 우리에게 제공된 한국시를 읽노라면 한국의 독자들이 이미 자각하고 수용하고 있는 것과 한국과 한국민들의 본질적인 문화와 경험 그리고 한국어의 독특한 색채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한다. 이것은 원어뿐 아니라 자국의 독자들의 문맥에서 번역될 때 시가 잃게 되는 것으로 고통에 해당한다. 그러나, 인두라인은 이태리어로 번역된 공고라는 작품을 대조하면서(여기서 꼬르도바의 시인은 거의 모든 자신의 시적 개성을 잃고 있다) 기타 번역과의 차이점을 인식한다. 그리고 덧붙이길, 「하지만, 이미 읽어본 위의 한국시들을 통해 밝힐 것은 피상적인 점일 수도 있으나 서정시의 본질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한국시의 압축미와 짙은 간결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시각이나 정서적 긴장의 효과는 미국의 시인 에드가 알렌 포우가 말했듯이, 또한 실제로 내가 알고 있는 문학에서 드러나듯, 그것의 효율성의 손실없이는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인두라인 교수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정서적 긴장을 전달하며 기타 번역의 경우 소멸되어 버리고 마는 감동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민교수의 번역을 높게 평가한다. 또한 그는 자연지향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서정적 소재를 중심으로 그렇게 막연하지 않은 한국서정시의 고유한 압축미를 돕고 있다고 말한다.
인두라인의 관심을 끄는 또다른 면은 「우리보다 더욱 세련되고 섬세하며 감각적인 자연과의 절묘한 교감능력」인 한국시와 시인들의 감수성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이 깊이를 더함에 따라 비교적인 관점에서 서반아시는 한국시와는 달리 전원의 소재를 다루어 후자가 주제에 대해 대위법으로 또는 시인의 감정의 테두리로 택하는 모든 소재에 전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서반아시의 획일성이나 의도는 한국시가 바탕을 두고 있는 형태의 자연에 머물지 않는다. 서로 다른 환경속의 시인들의 시각은 상이한 감각능력을 발전시켜왔다. 이와 같은 경우,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전통을 존중해야 하나 포괄적으로 언급하여 한 민족의 기질, 특히 삶의 형태를 존중해야 함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요소도 있어 비교의 관점에서 서반아시를 언급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인두라인은(「우수와 그리움, 향수 그리고 고통과 갈망을 동반하고 있는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두 시집단의 감성체계에 대해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일치점은 동일한 기원에서 발생한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시인과 민족이란 동일한 고통에 대해 괴로워하기에 기쁨과 사랑,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주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그는 「시인이란 태어난 사회에 대해 예외적으로 영원한 증인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그렇다. 그러기에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예리하게 수용하는 감각적 시각을 형성하는 것이다. 어쨌든, 가장 분명한 점은 이미 인두라인이 자신의 글을 마무리하며 강조한 것으로 시란 민족간을 가깝게 하며 시의 번역을 통해 문화와 사상에의 접근이 보다 쉬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현대시선
민용태교수의 두 번째 시선집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때로는 명상이나 때로는 일체감 또는 비유와 같은 지속적인 자연의 주제이다. 이것은 서정주의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바, 몇몇 세부적인 자연의 주제들이 시적 분위기를 이루고 있으며, 일단 주제가 설정되면 지속적이고 농축된 모습으로 전개된다. 박두진의 시「도봉산」도 같은 양상을 띠어 전체적인 향수가 풍경속에 베어 있으며 마지막 두 행이 시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박양균이나 때로는 김윤성, 박성용 또는 이탄과 같은 시인들도 마찬가지로 풍경에 대한 사색과 자연의 매력속에 젖어 있다. 구상의 「강」처럼 시인들은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노래하며 「무지개 나라의 물방울」의 정현종이나 「어느날」의 허영자에게 있어 자연은 슬픔에 대한 해독제이며, 평화가 있는 곳에 나타난다.
더러는 실존주의의 영향일 수도 있으나 생각건대 도교와 불교 그리고 당연히 유교의 뿌리깊은 전통에 의해 박남수의 염세주의적 시「손」이나 황금찬의 「고속버스안의 나비」와 같은 향수, 피로 그리고 슬픔으로 가득찬 형이상학적 시들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시에서는 완전히 삽화적인 것이 삶과 삶의 최종적인 의미에 대해 단순한 비유로 깊이 생각하게 한다.
복원된 일부 주제들은 이와 같은 전통적인 가치관에 그 기원을 둘 수 있다. 세 가지의 예를 든다면, 첫째, 외형상으로도 드러나는 사물에 대한 순환적 시각 둘째, 삶을 한 장의 종이로 비유하는 태도 셋째, 풍경이나 자연의 요소와 일체화하려는 환생의 욕구가 그것이다.
첫 번째 실례로는 서정주의 「내가 돌이 되면」이라는 시가 있다.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위의 책, p.36)
위와 유사한 경우는 박두진의 「돌의 노래」나 김남조의 「촛불」등으로 후자는 초-기름-수증기-기름-초로 이어지는 구조를 지닌 사물의 순환적 의미를 보이고 있다.
우리가 지적한 두 번째 양상에 대해서는 정한모의 「춤의 환상」이라는 시를 볼 수 있다. 그는 삶을 조금씩 글로 써가는 백지의 연속으로 비유한다. 그밖의 예로는 김윤성의 「태양은」이나 문덕수의 「너는 가고 남은 한 장의 백지」를 들 수 있다. 한편, 세 번째의 경우, 김윤성의 「나무」, 김남조의 「바람」등을 예로 들 수 있으며 보다 불분명한 것은 박제천의 「장자시」가 있다.
위의 작품들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들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소한 작품에 대해 엄밀하게 살펴보는 것도 때로는 관심을 끌기도 한다. 예를 들면, 김춘수의 「곤충의 눈」그리고 정한모의 「새벽, 5」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동 시선집에 형이상학적 성격이 두드러진, 보다 현대적인 분위기가 없지 않다. 이러한 특징을 여러 시인들 중 전봉건이 잘 나타내고 있다. 관심을 끄는 예로는 마리네띠와 그리고 그와 동일한 유럽의 시파인 기계주의와 유사한 문덕수의 「전화」나 아폴리네르의 그림시처럼 새를 모방한 박남수의 「종달새」가 있다.
그런데 현대적 성향중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사회시적 경향으로 구체적으로는 이성부를 들 수 있다. 「노래」라는 시에서 잃어버린 행복을 회상하며 과거지사는 이미 현재시자가 아니라고 말하게 된다.
이 시는 아마도 자신의 사회적 속성에 대해 의문시하는 것 같으나 앞의 시가 전조로 여겨지는 다음의 시에서는 그렇지 않다. 「눈뜬 밤」,「마을」그리고 「이 볼펜으로」등에서는 고발, 인간의 분열 그리고 사랑의 결핍에 대한 슬픔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봄」이라는 시처럼 항상 자연의 평화에 대한 느낌과 행복스런 다가섬에 대한 갈망을 회상하곤 한다. 다시 말해, 아무리 다양성을 보이는 경향이라 할지라도 그 위에는 전통과 현대성을 잇는 무의식의 끈이 존재하며 얇을지언정 결코 끊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옛 시라 하여도 현실화되고 현대시에 옛 것의 맛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사랑이다. 이와 같은 특성은 한국시를 대단히 독특한 방식으로 성격화하고 우주적 시간속에 인간의 독특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제까지의 평가는 마드리드의 아테네오에서 열린 도서전시회 중 일간지 「야ya」에 실린 기사의 내용이다
이 기사는 짧으면서도 내용이 풍부하다. 이 글을 쓴 호세마리아 베르메호는 「한국시 내지는 한국적 삶의 첫 번째 특징은 완벽의 전형으로 이해되는 자연과의 융화이다. 한국인은 산이든 하늘이든 또는 강이든 오르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사이의 깊은 골을 넘어 이들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자연이란 영혼과 상징 그리고 실질적인 은유의 척도인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자연에 대한 선호인 자연적 감성이 대단히 깊다는 사실과, 예를 들어 서반아시의 여러 시기적 단계속에서 접하는 시인들의 비유적 수단으로서가 아닌 순수한 명상을 통해 상징과 은유를 추구하는 것 이상으로 한국시인들이 자연속에서 자연의 구성요소들을 언급하고자 함을 위의 비평가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거대한 현대문학운동의 영향을 언급하는 바, 이의 흐름은 한국시도 마찬가지로 젖어들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와 같은 교호성과 사색은 몽상에서 자연스러움까지 또는 고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여러 풍부한 양상을 띤 매혹적인 시를 낳는다」라고 말한다. 끝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인식한다. 「서구는 문화에 대해 어떤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왔으며 세상 저 편의 거대한 지혜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덧붙여 이 책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바, 하나의 단편을 넘어선〈우주적 혼〉의 확인이자 구원의 미의 확인인 것이다」라고.
호세 마리아 베르메호의 이러한 말은 앞에서 본 인두라인교수의 주장과 유사한 점이 있다. 모든 것이 인식되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다행히 이들 번역에서 덕분에 시의 보편성이 분명해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감각과 시각상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항상 암시적일 뿐이다.
한국시선집
김현창교수는 자신의 「한국시선」을 바탕으로 하여 앞서 언급 한 대로 다른 판본인 새로운 시선집을 펴냈다. 한국시의 역사, 변동, 장르 그리고 시적 사상에 대한 풍부한 소개와 더불어 「한국시선」에 실린 81수의 시가 1백37수로 늘었으며 시인들의 숫자 또한 증가하여 서반아어로 쓰여진 미적 자료가 풍부해진 셈이다. 또한 , 1967년 다마소 알론소가 「한국시선」의 서문에 적은 것처럼 발췌한 작가들의 신상을 기록하기 위해 하나의 장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점은 원어시를 그대로 싣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2개 국어로 쓰인 동 시집은 한국 서정시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참고도이다.
초기에 시선집의 선별에 있어 나타난 다양성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면, 지금에 있어서는 이러한 다양성이 희석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앞의 시선집에서 상호간에 제외되었던 시와 작가들이 이제는 공통적으로 실리고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기호와 기준상의 차이는 여전히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시의 양상과 성격이 대단히 광범위하여 국한된 시의 선택에 맞지 않음을 보여 준다. 말하자면, 각 시선집들은 서로를 보완하기에 모두가 소중한 것이다.
김현창교수의 「한국시선집」은 아직 비평적 평가가 내려져 있지 못하다. 단지, 우리는 동 시선집의 독자로서 그리고 학자로서 가장 뛰어난 비평가인 마누엘 알바르의 의견에 의지할 따름이다.
김현창교수의 「한국시선집」은 아직 비평적 평가가 내려져 있지 못하다. 단지, 우리는 동 시선집의 독자로서 그리고 학자로서 가장 뛰어난 비평가인 마누엘 알바르의 의견에 의지할 따름이다.
그는 몇몇 모티브의 동일성에 주목하고 기억, 시간의 흐름, 그리고 향수 등 인간 감성의 보편성을 생각한다. 고대로부터 위대한 시인들이 다루어 올 정도로 보편적인 공통점들을 알바르는 한국 시인들에게서도 부각시킨다. 초기의 무명시들과 16세기의 김상헌, 현대의 이은상이 그 예가 된다. 이 외에 기타 시인들이나 시들은 꽃, 나무 그리고 열매를 바탕으로 한 상징적 인상주의를 창조하며 릴케, 후안 라몬 히메네스, 호르헤 기예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 저자는 자연으로의 그리고 꽃에 함축되어 있는 감각과 회상의 캬라반으로의 복귀를 고집한다. 이처럼 끝없이 되풀이되는 내용이나 항상 새로움을 낳고 있다. 이에 덧붙여 사회시, 순수시, 형이상학 등 새로운 경향의 대두와 존속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하였으며 나머지 시들도 독특한 형식을 빌어 인간의 보편적인 모든 감성과 향수, 공포, 갈망 그리고 사상을 풍요롭게 하는 현재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이제 페이지가 지남에 따라 결론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시의 풍요함과 생채적 측면에서 완전한 결론인지는 불확실하다. 여기서 인간적인 것은 항상 관계 속에 놓이기에 모든 점이 수용가능하며 언제든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라는 세월에 걸친 창조적 노력을 단 몇 줄의 문장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유일하게 분명한 것이라면 한국민족의 감정체계를 인식하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지켜보고 다가서려는 의도이다.
어쨌든, 시선집을 다루어옴에 따라 몇 가지 두드러진 점을 이미 지적해 왔다. 이들 중 보편성과 더불어 자연과 소박함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관심을 끌어온 특징이며 극히 밀접한 실체를 시로 표현하는 측면인 것이다.
우리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견해가 대조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흥미있는 비전을 제시하거나 상당히 시사적인 자료를 제공하리라 믿는다. 이를 위해서는 서어로 된 한국시의 보급에 있어 또 다른 노력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로는 번역활동에 몸담고 있는 장선영교수를 들 수 있으며, 문학비평가로서의 활동이 덧붙는다. 그의 논문들 중 상당수가 한국문학의 몇몇 위대한 작가들을 서어권에 소개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 이들 논문 중 「한용운과 그의 시세계」와「이육사의 시세계에 대한 재조명」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여전히 주목할 점은 민용태교수의 서반아어 창작시이다. 그런데, 민족시의 범주 내에서 선별한 시인들을 다룸에 있어 그 합리성에 대한 초기의 의구심이 소멸되었으나 이처럼 특별한 경우 민족시의 범주가 과연 그의 작품들에 적용될 수 있는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그는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여러 서반아어 시집을 펴냈다. 이와 같은 리얼리티로 인해 그에 대해서는 별도로 각별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의 서반아어시는 필연적으로 완전히 뿌리째 변모된 미개척 분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그의 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상, 후에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