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대담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음악현황




■ 대담자 : 정준갑 (길림예술대학 연변분교 부총장)

신대철 (본원 문화발전연구소 연구원)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음악현황

신 :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선생님의 약력과 이번 고국 여행의 목적을 간단히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 : 예, 저는 1941년 7월 3일 요녕성 무순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이 고향이된 조선민족이라 할 수 있지요. 저는 무순에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소학교(초등학교)와 초등중학교(중학교)를 마쳤습니다. 고등중학교(고등학교)는 당시에 무순시에 없었기 때문에 심양의 조선 중학교에서 필하였습니다. 그후 연변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업(전공)하였습니다. 연변예술학교 졸업 수는 장춘예술전문학교와 상행음악학원에서 수학 하였습니다. 전업은 역시 작곡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업여(취미, 혹은 과외로)로 음악을 즐기긴 했습니다만 음악공부는 늦게 시작한편이지요. 음악교육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때는 1962년으로 연변예술학교 졸업 직후였습니다. 그후 상해유학으로 잠시 중단되었지만, 음악교육사업은 지금까지 이어온 저의 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연변예술학교에서 처음에는 작곡교수로서 일을 하였습니다만, 지금은 민족음악(국악) 교학사업에 전념을 하고 있습니다. 흔히 줄여서 민악으로 우리 연변의 국악은 연변예술학교의 가장 기본적인 학과가 되어야 할터인데 지금은 끼살이(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형편이라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중국유일의 조선족 예술대학인 우리 연변예술학교에서 민악이 이러한 형편이라는 것을 정말 분통터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국에 머무는 동안 여러 국악학자와 관계기관과 접촉하여 무너져가는 연변의 민악전통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볼까 합니다. 그리고 또 도움을 좀 받았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합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신선생님께서 주선을 해 주시면 더없이 고맙겠습니다.

신 : 예, 한번 노력은 해 보지요. 저도 국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가슴이 찡합니다. 사라져가는 우리의 음악을 반드시 재건되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이 점은 우리 서로 지혜를 짜 보도록 하지요.

길림예술대학 연변분교의 성격과 선생님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 : 저희 학교가 길림예술대학 연변분교로 될 때는 작년('88년)6월22일입니다. 학교의 설립은 1957년 10월 5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설립 이후 작년까지는 대학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연변분교가 되면서 대학수준의 교육체제를 갖게 된 것이지요. 분교라고 하지만 실제 운영은 본교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된 운영체제를 갖춘 학교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원래 연변의 우리 동포들은 완전한 연변예술대학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북경의 중앙정부에도 그렇게 해주기를 수없이 간청을 했습니다. 여기 표현으로 한다면 로비활동을 활발히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결과는 길림예술대학의 분교가 되었습니다. 독립된 대학은 아직 곤란하다는 중앙정부의 이야기입니다. 중국에는 모두 56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소수민족들 중 상당수는 초등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그들의 학교를 가지고 있고, 또 예술대학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변예술학교를 포함해서 소수민족에 의한 70여 개의 예술대학 승격신청 혹은 설립신청이 있었습니다. 70여 개의 이러한 요구를 다 들어주기는 힘들었던 것이 중국 중앙정부의 속사정입니다. 그렇다고 선별해서 해 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중앙정부는 제외된 소수민족들의 불만을 무마시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편법으로 대학승격이 이루어진 것이 저희 학교입니다. 이미 연변예술학교는 30여 년간 존속해 왔었고, 인정받을 만한 상당한 업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중앙정부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렇다고 조선족을 위한 이 학교만 대학으로 승격시킬 수만도 없었습니다. 70여 개의 다른 신청들은 기각하고 유일하게 조선족의 것만 인정한다면 타 소수민족들의 반발은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중국인들은 길림성에 이미 중국인들의 길림예술대학이 있으니 이늬 분교형식을 택해서 인가를 해 준 것입니다. 조선인들의 예술대학을 인정하지 않고 중국인의 길림예술대학을 확장한 것이 되었으니까 대외적으로도 충분히 명분이 섰고, 또 우리 조선인들의 요구도 어느 정도 들어주게 된 것이 됐지요. 사실 이러한 결정에 저희들은 다소 불만이 있었습니다만, 이 정도의 성과도 사실 대단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이 얼마나 큰 땅입니까? 또 거기에 사는 소수민족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의 70여 개 요구 중 유일하게 우리 조선족의 요구가 이런 정도까지 성취되었다는 것에 대해 저희들은 때때로 자부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중국 내의 조선족 위치를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라고도 할 수 있지요.

현재 저희 학교는 재학생이 5백18명에 1백10명의 교수요원을 두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소학부·중등부·전과부·본과부로 나누어져 있고, 본과가 대학에 해당합니다. 소학부는 초등학교 5·6학년에 해당되고 중등부는 중·고교 6년 과정에, 전과부는 전문대학 과정에 해당하며 기간은 3년입니다. 중등부와 전과부에는 교사를 양성하는 과정이 개설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술대학이기 때문에 전공은 크게 음악·미술·무용·연극으로 나누어져 있고 과목에 따라 세분됩니다.

학생이나 교수들은 모두가 조선인으로 되어있고, 교육권·재정권·인사권 등이 본교로부터 완전에 가까울 정도로 독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만 분교지 조선인에 의한 완전한 예술학교인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 학교는 중국 전체에서 하나밖에 없는 조선인 예술학교입니다.

저는 부총장의 일을 보고 있으며 음악교육에 관한 전반적으로 책임지고 있습니다. 부총장은 저외에도 3분이 더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의 일은 거의 제가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여기 식으로 길림예술대학 연변분교라 했습니다만, 중국에서는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이 공식 명칭이지요. 그러니까 저의 직함도 부원장이 옳습니다. 그런데 여기 식으로 제가 이야기한 까닭은 여기서는 학원이라면 피아노 학원과 같은 사설 강습소로 취급한다고 이미 왔다 가셨던 중국의 동포들이 귀뜸을 해주셔서 그랬던 것입니다.(웃음)

신 : 예, 맞습니다. 구미 각국은 음악대학이나 미술대학보다는 음악원, 미술원으로 불리는데 그것과 비슷하군요. 선생님 말씀처럼 음악원장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피아노학원 원장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학교의 교육방침이나 선생님의 교육방침을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 : 중국의 교육방침은 덕·지·체가 겸비한 사회주의 노동자를 배양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여기에 미를 추가했습니다. 저희 학교는 이러한 교육방침에 우리 민족정신에 의한 예술의 이론과 실기능력의 배양을 교육방침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교육방침과도 상응한 내용입니다.

신 : 선생님께서는 조선족예술 교육기금회 일도 맡아 보시는데 현재 기금은 어느정도 적립이 되어 있습니까?

정 : 금년 4월 말에 기금회가 설립되었기 때문에 아직 이렇다할 성과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관심은 대단합니다. 길림성의 동포들 뿐만 아니라 흑룡강성·요녕성 그리고 북경의 주변 동포들도 가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중국 전체의 동포들에게 홍보를 통해 이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할 예정입니다. 여기에 재력있는 국내의 동포들도 동참해 주신다면 저희들에게는 큰 힘이 되겠습니다.

신 : 일반학교에서의 음악수업은 어떻습니까? 또 음악학교 진학 사정은 어떻습니까?

정 : 거기도 양악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됩니다. 음악교과서는 초등학교의 각 학년과 중·고교의 각 학년을 위해서 편찬되어 있습니다만 민족음악의 양은 아주 적은 편입니다. 그러나 민족음악을 많이 취급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고개를 들고 있어 앞으로는 달라질것입니다.

수업시간 외에 특별활동이 아주 활발합니다. 학교마다 악대가 조직되어 있고, 특히 화룡현에는 민족음악의 악대가 조직되어 있습니다. 이 악대는 피리독주, 새납독주, 가야금합주와 병창 등으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각 학교에서의 음악수업시간은 1주에 1∼2시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정도는 부족하기 때문에 음악대학을 지원하려는 학생들은 따로 개인지도를 받고 있으며, 그 대단히 열심히 합니다. 다른 전공보다 음악의 사회진출 기회가 보다 많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경우에는 아예 우리학교의 중등학교에 입학을 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가 아까의 경우보다 음악대학 진학이 보다 용이합니다.

그런데 대학진학 후에는 공부를 열심히 안해서 걱정입니다. 졸업 후의 직장을 정부가 전원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심할 경우는 낙제를 면한 정도의 성적에 만족하는 경우도 상당히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교육을 담당한 우리들에게는 심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학업에서의 선의의 경쟁이 무시되니 전체적인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성적이 안 좋은 학생들을 취업할 수 없거나, 힘들게 제도를 바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효과가 아주 좋지요. 이제는 학생들이 학업에 열심히 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 학교 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 : 졸업생들의 활약도 대단하겠습니다.

정 : 예, 학교 설립 후 문화혁명으로 10여 년 학교가 거의 운영되지 못했습니다만, 졸업생들의 활약은 대단합니다. 우리 졸업생들은 북경이나 상해의 음악원에서도 우수하다는 평을 안듣는 경우가 드뭅니다. 작곡·연주·무용 등 두루두루 활약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요. 전 중국의 콩쿠르에서 1등을 수상한 졸업생도 꽤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는 중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설·악기·도서 등등이 부족해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우리 고국에서 도와주신다면 더욱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 : 예, 정말 안타깝군요. 도울 수 있는 좋은 방도는 분명히 나오리라 저도 믿습니다. 다만 시간이 문제가 되겠지요. 졸업생들은 대개 어떤 단체로 진출합니까?

정 : 길림에는 연변가무단·도문시가무단·화종현예술단·용정시가무단 등등의 연주단체가 많습니다. 대개 이러한 단체에 90퍼센트 정도가 취업을 하고, 나머지는 각 학교에 교사로 나갑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입학할 때 이미 공연단체나 학교로 취업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 외에는 입학시의 뜻에 따라 취업하게 됩니다. 이외에 상해나 북경에 유학을 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신 : 개인에 의한 음악회나 발표회도 가능합니까?

정 : 가능합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입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대개 정 부나 공공단체의 도움을 받아 몇몇이 발표회를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신 : 앞으로 대학원을 개설할 의사는 없으신지요?

정 : 그럴 뜻은 있습니다만, 아직 여건이 성숙되어 있지 않습니다. 솔직히 재정과 교수인원의 확보가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신 : 학생들은 외국으로 유학갈 수 있습니까?

정 : 예,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수는 아주 적습니다. 대학으로 승격되기 이전에는 북조선으로 적지않이 갔읍니다만, 성과는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북조선보다는 남조선에 보다 많이 유학을 시켰으면 합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이 남조선에 많이 보존되어 있어, 우리로서는 남조선의 예술적 도움이 아주 필요한 형편입니다. 중국인들은 미국에 많이 유학가고, 다음이 서독입니다. 그리고 불란서가 다음쯤 될 것 같습니다. 성악을 하는 학생들은 물론 이태리를 선호하지요. 모스코바로는 중·소관계가 과거에 안좋았기 때문에 별로 안갔습니다만, 앞으로는 많이 가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신 : 연변에서이 음악회장 풍경은 어떠합니까? 외국의 저명한 음악인이나 음악단체의 연주를 연변에서도 볼 수 있습니까? 입장료는 얼마나 됩니까? 그리고 평론활동은 활발합니까?

정 : 연변에서의 음악회 입장료는 아주 쌉니다. 물론 입장료는 개인이 부담할 수 있습니다만, 사회주의 국가체제라 국가에서 통제하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으로 음악감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연주회장은 꽉꽉 찹니다. 그러나 솔직히 여기와 비교하면 연주수준은 높지 않습니다. 외국의 연주가나 단체가 연변을 방문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리고 평론활동은 여기만큼 활발하지 못합니다만,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 이루어지고는 있습니다.

신 : 음악이나 예술에 대한 학술활동은 어느 정도입니까? 학술지나 전문잡지 등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정 : 학술활동은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학술잡지나 예술전문지 등이 아직은 없습니다. 대개 종합지 형식의 잡지로, 그 중 계간으로 발행되는 「예술세계」가 가장 많이 읽힙니다. 앞으로는 저희 학교에서도 「예술의 봄」이라는 제명으로 종합지를 발행할 예정입니다. 「예술의 봄」은 연변의 예술문제만이 아니라 중국의 전역과 외국의 예술문제도 다루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 고국인 남조선의 예술도 다루려고 합니다.

신 : 한글로 된 잡지겠지요?

정 : 물론이지요. 곧 발행될 예정이니 기대해 주십시오. 지도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만……

신 : 예, 발행되면 저도 한번 기고할테니 거절 마시기 바랍니다.

정 : 거절이라니요.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다만 원고료는 기대마세요.(웃음)

신 : T.V와 라디오 방송에서의 민악의 방송 비중은 어떠합니까?

정 : 우리 동포가 운영하는 T.V와 라디오 방송에서의 민악의 비중은 작습니다. 문화혁명 이전에는 민악이 비중이 컸습니다만, 오히려 현재는 작아졌습니다. 특히 개방화 이후에는 양악의 비중이 아주 커졌습니다. 그리고 유행가의 비중이 또한 커졌습니다. 웬만한 우리의 흘러간 노래는 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자·조용필의 노래도 젊은이들이 따라 부를 정도로 유행가가 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곳도 마찬가지더군요. 이러한 두 곳의 음악현상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하겠습니다.

아까 미쳐 말씀드리지 못한 학술활동에 대해 한 말씀올리겠습니다. 엄밀히는 학술활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연변에서는 일찍부터 민족악기 개량사업에 착수했습니다. 전통적인 주법과 음량, 그리고 음색으로서는 새로운 음악의 표현은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악기개량을 우리들은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양금·단소·새납·가야금·피리·해금·대금의 개량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개량의 성과는 중국인들도 인정해 많은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음은 비록 서양의 평균율제도를 채택했습니다만, 주법은 우리의 고유주법을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개량된 악기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고, 이 악기들을 위해 새로운 작품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이 개량악기들은 북조선의 개량악기와는 다릅니다. 물로 일부 단체에서는 북조선의 개량된 악기를 사용하는 경향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으로는 민요나 판소리와 같은 민속음악의 발굴과 채보였습니다. ’50년대부터 시작한 이 작업은 상당한 결실을 보아 민요와 판소리의 상당량이 녹음·채보되었습니다. 저도 부끄럽지만 몇 가지의 실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노력의 흔적은 문화혁명기간 동안에 다 파기되었습니다. 무자비한 그들은 이를 봉건적·반동적으로 몰아 다 파기시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녹음 테이프와 악보들이 압수되어 파기되기도 했고, 원 소장자에 의해 파기되기도 하여 지금은 이들을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신 : 연변에서 부르시는 노래 가운데 남한에서 만들어진 것들 중 생각나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한음악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것이 있으면 좀 부탁드립니다.

정 : 아까 흘러간 옛노래와 유행가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지요. 그 외에 「반달」, 「고향의 봄」은 지금도 어린이들이 많이 부릅니다. 문혁 이전에는 「오빠생각」이 많이 불렸습니다만, 지금은 잘 안 부릅니다. 그 외「가고파」,「목련화」,「그네」등의 가곡이 자주 불립니다. 「선구자」는 예전에는 아주 인기 있는 곡이었습니다. 바로 연변의 용정을 무대로 한 애국적인 곡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한동안 잘 불려지지 않았습니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아주 좋았는데도, 작곡가가 남조선에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남조선음악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릅니다. 남조선의 유명한 교수들이 쓴 「국악개론」, 「한국음악사」「화성법」「대유법」,「곡식학」등에 관한 책은 연변에서도 많이 보았고, 가곡은 많이 부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파악은 가능했었습니다. 그러나 흘러들어 온 소식에 의해 남조선의 수준높은 음악상황은 약간은 짐작했습니다. 특히 작년 올림픽의 개막식에 보여준 민족적 음악의 모습은 우리들의 가슴을 찡하게 울렸습니다. 대부분의 우리 연변의 동포들은 T.V로 중계된 개막식의 모습을 보고, 「아, 남조선이 우리민족의 전통을 가진 곳이로구나!」하고 감탄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민족음악의 뿌리를 남조선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한 가지 추가할 것은 「비목」입니다. 「비목」은 우리학교의 성악전공 학생 하나가 학기말 실기고사에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신 : 선생님께서도 동요를 쓰신 적이 있습니까?

정 : 예, 좀 썼습니다. 그리고 저 외에도 여러 분들이 썼습니다. 최근에는 광복이래 지금까지의 우수 동요작품들을 모은 동요집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약 3백곡 정도를 수록한 이 작품집을 연변의 작곡가와 작사자들이 망라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작품집의 이름은 「소년아동가곡집」입니다.

신 : 북한음악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 : 북한음악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접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북한방송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기처는 많습니다. 가끔은 우리학교에서도 성악교재로 북한작곡가의 곡을 사용합니다. 선율이 아름다운 곡들이 꽤 있더군요. 그리고 같은 민족의 곡이라서 그런지 쉽게 익숙해 지더군요.

그런데 그들의 노래는 국가원수를 찬양미화한 것이 많더군요. 중국에서도 예전에는 그런 방식의 곡이 많았습니다만, 이제는 자유스럽게 창작활동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음악에 그렇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는 민악에 보다 관심이 컸기 때문에 북한 음악을 의도적으로 접촉해 보지 못했습니다.

신 : 북한의 김순남·이건우·안기영·이면상과 같은 작곡가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들의 작품을 연주해 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정 : 듣기는 했습니다만, 잘은 모릅니다. 그들의 작품은 연변에서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연주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신 : 선생님의 작품을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 : 저는 작곡을 전공했습니다만, 작품활동은 별로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교학(교육)사업에 보다 시간을 많이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중적인 가곡을 약 8∼90곡 작곡했고, 이 가운데는 방송과 출판물을 통해서 소개된 것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품의 질을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졸작들이었지요. 저는 성악곡을 주로 썼기 때문에 기악곡은 별로 없습니다. 생각나는 기악작품은 85년의 미국 순회공연을 위해 만든 목금과 실로폰을 위한 곡이 하나 있습니다만 모두가 변변치 못합니다.

신 : 작곡자들의 개인작품발표회는 연변에서는 자주 있습니까?

정 : 자주 없는 편입니다. 개인적인 발표회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성이나 음악단체 등에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신 : 지금까지 몇 번이나 개인작품발표회를 가지셨습니까?

정 : 단독으로 한 적은 없습니다. 여럿이 어울려서 한 경우는 있습니다만……바이올린 연주자인 제 아내도 혼자하는 독주회는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신 : 사모님께서 연주하신 곡목들이 대개 어떠한 것들입니까? 그리고 한국의 바이올린 연주자들에 대해서는 알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정 : 차이코프스키, 라토 등의 협주곡과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소나타를 많이 연주했습니다. 그러나 문화혁명기간 동안에는 연주를 거의 못했기 때문에 기량이 오히려 많이 떨어졌습니다. 남조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는 정경화·김남윤 등에 대해서 좀 압니다. 특별히 김남윤 선생을 꼭 만나보고 싶다는군요.

신 : 사모님의 신상에 대해서 몇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 : 1944년 12월 21일 길림성 용정에서 태어났고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연변예술학교 졸업 후, 상해로 유학 상해음악원을 졸업했습니다. 이후 연변예술학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며, 중국아동 바이올린의회의 회원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바이올린에 소질이 있는 어린이들을 조기발굴하여 교육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전국적 조직입니다. 성과는 아주 좋으며, 연변에만해도 약 2백명의 어린이들이 지도를 받고 있습니다. 중국어린이들도 가입되어 있습니다만, 연변에는 우리 조선족 어린이가 훨씬 많지요.

신 : 우리동포 중에서 바이올린을 두각을 나타낸 이들도 있습니까?

정 : 예, 언젠가는 중국의 전국 콩쿠르에서 조선족이 청년조와 소년조에서 1등을 차지한 적도 있습니다.

신 : 연변사람이었습니까?

정 : 아닙니다. 북경의 중앙음학학원 출신이었지요. 연변출신 학생은 4등을 했는데, 제 아내가 지도한 학생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연주솜씨는 그렇게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상해음악원 교수들로부터 좋은 평을 듣고 있습니다.

신 : 중국이나 연변의 작곡조류는 어떠합니까?

정 : 중국에서는 문화혁명이라는 암흑기를 가졌었기 때문에 모든 문화예술이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많이 뒤져있습니다. 서양음악 작곡계에서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입니다. 등소평 집권 후 현대음악에 눈을 떴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이나 연변이나를 막론하고 낭만파적인 악풍을 넘는 경우가 드뭅니다. 물론 상해와 북경에서 활약하는 젊은이들은 12음기법이나 현대적 기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연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급변하는 초현대적인 세계음악 주류에 어둡습니다.

민족음악 작곡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량된 악기를 위해 새로이 작곡되는 작품은 거의가 전통적 수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적이라는 말은 남조선에서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우리는 서양의 평균율체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이라는 위미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요즈음의 젊은 작곡가들은 민족음악에도 현대적 기법을 어느 정도 도입하고 있습니다. 민족음악은 때로 한·양합주도 합니다.

특기할만한 것은 우리는 피아노나 서양의 관현악곡에도 음악정신을 의도적으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장단에서 보이는 음악정신과 음악미술 피아노곡에 담아 전국 콩쿠르에서 1등을 한 적도 있습니다. 권길호의 「장단묶음」이란 이곡은 인상파적인 기법과 현대적인 기법에 한국적인 음악미가 가미된 뛰어난 작품입니다. 또 우리 민요에 기초한 피아노곡도 있지요. 우리는 서양음악에도 반드시 민족적인 것을 언제나 가미합니다. 중국에는 중국 거주의 각 민족을 위한 작곡 콩쿠르도 있는데, 우리의 민족기악 중주곡이 3등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 콩쿠르에는 중국인들도 참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가 있었지만, 아직은 초창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신 : 혹시 윤이상 선생을 알고 계십니까? 여기서는 일반인들도 그를 알고 있습니다만, 연변에서는 어떠합니까?

정 : 학교에 계시는 분들과 음악하는 이들은 잘 압니다만, 일반인들은 잘 모릅니다.

신 : 윤이상선생의 작품이 더러 소개되어 있습니까? 「나의 조국, 나의 민족이여」와 「광주여 영원하라」에 대해서 아십니까?

정 : 그의 작품이 더러는 소개됩니다만, 접촉할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광주여 영원하라」라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은 압니다만,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신 : 그외에는 한국인 연주가들은 모르십니까?

정 : 정경화는 아주 많이 알려져 있고, 다음이 윤이상 그리고 김난윤 등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신 : 남한의 금난새는 카라얀콩쿠르에서 입상한 유능한 지휘자입니다. 북한에서도 카라얀콩쿠르에 입상한 유능한 젊은이가 있다고 하는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정 : 금난새도, 북한의 음악가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신 : 북한음악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으시군요.

정 :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윤이상 선생이 평양에서 상당기간 북조선 학생들을 지도해 그들의 음악 수준을 어느정도 향상시켜 놓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민요식의 음악을 꽤 가지고 있더군요. 피아노협주곡「조선은 하나다」를 조금 들어 보았는데 괜찮은 듯 싶더군요. 성악곡을 개편(편곡)한 이 곡은 통속성이 돋보이지요.

신 : 산조와 판소리의 사정을 좀 이야기 해 주시지요. 그리고 민요에 대해서도 몇 말씀 부탁합니다.

정 : 산조는 평양에서 배운 안기옥류가 조금 연주되고 있지요. 그러나 완전하지 못합니다. 판소리는 박정렬(朴貞烈·女)에 의해 전수되어 불려지고 있습니다. 언니로부터 8세에 판소리를 시작한 박여사는 충청남도 출신입니다. 아깝게 금년 봄에 67세로 세상을 떴습니다. 그래서 판소리가 단절될까 우리는 염려하고 있습니다. 박여사는 중국의 중앙정부로부터 조선족 민족가수의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서도민요를 하는 이로는 조종주(趙鍾周·女)·김문자·신옥화 등이 있습니다. 「황계사」와 같은 가사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남아 있고, 「관산융마」, 「영변가」와 「배뱅이굿」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타령」, 「양산도」와 같은 경기민요는 아주 인기 있는 곡입니다. 그 외에 「창부타령」, 「노들강변」, 「도라지」등도 인기 있는 곡입니다. 「아리랑」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특히 「노들강변」은 남녀노소 모르는 이들이 없을 것입니다. 함경도 민요「신고산 타령」, 경상도 민요「쾌지나칭칭나네」,「울산아가씨」,「밀양아리랑」, 강원도 민요「정선아리랑」,「강원도 아리랑」도 불리고, 제주도 민요 「오돌또기」도 불립니다.

신 : 우리의 8도민요가 다 있군요. 민요채집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변질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정 : 자세한 변질 정도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변질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 자신이 원형을 모르니까 무어라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아무래도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의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경상도·충청도·전라도 민요 등은 많이 변질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연변의 우리동포들은 출신지역을 가리지 않고 조선민요를 부르지만 타도 출신이 부르는 노래는 완전할 리가 없겠지요.

신 : 혹시 연변동포들 가운데 직업적인 가수출신은 없습니까?

정 : 김문자 ·박정렬과 같은 이는 직업적 가수출신이라 할 수 있지요. 이 두 분 외에도 동북 삼성에 몇 분의 직업적 가수들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문화혁명의 여파로 대부분이 활동을 하지 않고 묻혀있습니다.

신 : 연변에서의 국악활동에 어려움은 없으십니까?

정 : 우리의 예술학교는 중국에 하나 뿐인 조선족에 의한 학교입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라져 가는 민족음악에 대한 관심은 지대합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우리는 종자(자질)가 좋은 학생이나 선생님을 이곳 남조선에 보내 제대로된 민족음악을 배우게 했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거리상으로나 외교적으로는 북조선이 가깝지만, 거기에는 이제 민족음악이 없어요. 판소리도 못부르게 하는 곳에서 민족음악을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특히 연변에는 거문고 음악은 아주 단절되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대금·해금·가야금·판소리·서도소리·무용의 문제도 시급합니다. 이들이 연변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아주 만족할 만한 상태가 못됩니다. 더구나 문화혁명기간의 10년 세월은 이러한 음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폐해는 막심하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는 파괴된 민족음악을 일으키려고 해도 그 원형을 모르기 때문에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므로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유학생을 받아주시기도 하시고, 또 가능하다면 좋은 선생님을 보내주시기도 한다면 원이 없겠습니다. 저희들은 배우려는 모든 자세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마음이 실망으로 변하지 않게 많은 도움이 있기를 간청합니다.

신 : 예, 도움이 될 수 있게 서로 지혜를 모으도록 하지요. 그 외에 또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정 : 저희들 학교에서는 악기도 사실 태부족이고, 악보와 악서도 마찬가지 형편입니다. 민족음악이나 서양음악이 똑같은 형편이지요. 연주홀에 그랜드피아노도 없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고국의 삼익피아노와 영창피아노의 제품이 우수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랜드피아노를 하나 기증 받을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외에 바이올린·첼로·전자오르간·신디사이저·기타·관악기와 같은 악기들이 태부족입니다. 민족악기는 말할 것도 없구요. 그리고 학생들 학습에 필수인 음악사전·국악사전·각종 음악전집·악보 등 저희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녹음기·전축·음반 등 음향자료와 영상자료도 부족합니다. 특히 콤팩트디스크라는 말을 여기와서 처음 들었으니 저희의 형편이 어떠한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말씀드리기 거북하고, 부끄럽습니다만, 이러한 모든 것을 다 지원받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너무 죽는 소리만 했습니다. 그러나 고국에 와서 죽는 수리 안하면 어디서 하겠습니까? 중국 전체에 하나뿐인 우리 연변예술학교를 위해 고국의 뜻있는 기관과 선생님들의 많은 도움을 모쪼록 기대할 뿐입니다.

그리고 객석·음악동아 등과 같은 음악전문잡지도 요청을 합니다. 그외에 무용·미술·연극의 전문잡지도 보내주신다면 참 고맙겠습니다.

연변의 저의 동포들은 어떻게든지 조선의 정신과 얼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연변의 모든 동포들은 우리말을 사용하지요. 어린아이들도 다 우리말을 사용합니다. 말에 민족정신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말 다음은 예술에 민족정신이 담겨있다고 저는 봅니다. 다시 한번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저희의 뜻에 관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껏 외부의 도움없이 이정도 꾸려왔습니다만, 조금만 도움이 있게 된다면 연변의 조선족정신과 그 예술은 더욱 꽃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 : 예, 장시간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안타까움이 해결될 수 있도록 서로 힘을 합쳐 보도록 하지요. 연변의 우리 동포가 잘되는 것이 여기있는 우리 동포가 잘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면 분명히 좋은 해결책이 모색되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정 : 예,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