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논단

멋,맛 한마당의 예술인류학




박정진 / 세계일보 문화부차장

고백(告白)에 대한 인류학적 토론

인류학 방법으로서의 「고백」

사회과학(인문과학도 일부 포함되지만)은 「과학적」이나「객관적」이라는 이름을 획득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음을 사회과학사는 잘 말해준다. 이같은 업적 가운데 가장 눈부신 것은 실증주의positivism와 유물론materialism일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과학성, 객관성의 기초나 벽돌이라 할 수 있는 사회적 사실은 수많은 토론이나 논쟁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이중적 성격 때문에 사회과학을 결국 유명론(唯名論)과 실재론(實在論), 나아가 해석학과 계량사회학 등으로 양분시키고 있다.

사회과학에서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은 예술과 같이 표현함으로써 존재한다고 까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존재being나 사실에 대한 주관성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단지 사회가 「관계의 망」이니까 관계되는 당사자의 주관성을 동시에 인정하거나 당사자가 서로 소통해서 상호 이해하는 공통의 인식(공감대라 할 수도 있다)을 기초로 한다. 결국 사회적 사실은 물리적 사실과 달리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당사자의 소통(공감)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물리적 사실도 양자물리학에 이르러 보는 이(관찰자)의 입장이 강화되는 추세이고 보면 단순히 존재나 사실이라는 것이 모든 차원에서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차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어떤 한 차원(한 시각)의 사실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차원에서 인정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사회과학과 달리 미개·원주민 사회를 많이 조사하는 인류학은 더욱 「무엇이 사실이냐」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그래서 인류학은 현지조사field work나 현지 원주민언어folk language 습득 나아가 민속분류학folk taxonomy등을 기본적인 것으로 요구한다.

또 신민족지new ethnography 기술법은 에틱etic 에믹emic을 고안해냈다. 에틱은 조사자(방관자)의 입장, 에믹은 피조사자, 즉 원주민의 입장에서 사실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후자 에믹의 입장이 발전된 형태의 사실수집·기록방법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관찰자가 끝까지 에믹의 입장을 지킨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면 특히 감정이나 정서의 이해에 이르러서는 매우 무의식적이거나 체질적인 것까지도 포함되어 더욱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 관찰자가 철저한 에믹의 입장에 서야 할 현실적 이유 또는 효능의 결여로 거론되고 있다.

국 에틱-에믹의 상호가역반응(소통적 이해)이 최선인 것으로 의견이 좁혀지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조사자체가 단순히 존재나 사실의 규명이기 보다는 서로의 소통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소통이 목적이라면 조사자의 조사를 통해서-불확실한 말과 통계조작 등의 오류를 감수하면서-사실을 규명할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또는 문화담당자 스스로의 자기고백confess을 통하는 것도 매우 효과적인 것이 될 가능성은 높다.

물론 이같은 고백은 강요된 것이 아니어야 하며 고백자의 양심선언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인류학의 한 조사방법으로서 자기고백이 검토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백적 방법에는 장단점이 있다. 이것은 또 매우 예술적 표현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드러내는 (남을 조사하는 것에 반대되는) 방법의 개발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남을 알기 어렵듯이 자기를 아는 것도 여전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표현에 성공해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백적 방법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전인적(全人的) 전생활적(全生活的)이라는 문화총체culturalwhole에 접근하기 쉽다는 점과 감정의 기술·묘사에 탁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백 속에는 사회구성원(고백자)이 의식하지 못한 논리체계, 감정체계가 숨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고백적 방법의 가장 기대되는 점은 종래의 사회조사방법이 조사자의 시각을 유도하거나 강요하고 끝내 선입관적인 그들의 틀에 사실을 대입하는 병폐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초기의 인류학자들은 민족우월의식이나 서구중심주의, 자민족중심주의, 그리고 종교적 독선에 빠진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이와 반대로 고백적 방법의 가장 큰 단점은 과연 그같은 기록이 과학적 방법으로서 가치가 있느냐 하는 의문과 궤를 같이 한다. 기껏해야 심리인류학의 자료로서, 심리적 접근방법의 자료로서의 역할에 불과하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마치 문헌자료가 현지조사에 참고자료가 되듯이.

그러나 고백적 방법은 인류학이 타민족, 타문화other culture 연구에서 자민족 연구로 한 가지branch를 설정하고 있는 오늘날 심각하게 고려해 볼 만한 이유가 있다.

도대체 자기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짐짓 타문화연구를 위한 방법론으로 우회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비효과적이다.

또 자기문화를 연구하면서 객관자인 양, 가치중립적인 것인 양 거만을 떨고 심지어 참가자participant가 되는 것이 과학성을 훼손하는양 현실을 거부하는 것은 인류학이 학문을 위한 학문이냐, 사람을 위한 학문이냐에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학자는 흔히 현실에서 멀찍이 서 있기 마련이다. 과학적이라는 것이,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바짝 붙어서 현실을 잘 이해하고 인간을 보다 인간적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서 가치중립적으로 현실을 파헤치고 처방을 내리라는 것일 것이다. 즉 과정적 가치중립이지 결과적, 또는 윤리적 가치중립은 아닐 것이다.

또한 고백적 방법은 타민족 조사자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진지함과 열성으로 예민하고 내밀한 문화현상(부분)에까지 심층적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자칫하면 타민족조사자가 자료의 또다른 목적을 위해 사실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왜곡할 수도 있다는 점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물론 고백의 경우도 의식적·무의식적 자기미화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고백적 방법은 결국 문예사회학이나 문예적 사회학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적어도 에믹의 방법보다는 좀 더 주관적인 것에서는 효과적인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에믹보다는 고백적 방법이 보다 즉자적(卽自的)이며 어차피 타자적(他者的) 방법으로서 에틱이 있다면 중간의 어정쩡한 에믹의 대자적(對自的)인 방법이 신통치 못할 것이란 입장이다.

적어도 즉자적 방법으로서 고백적 방법이 새로 주목될 가치가 있으며 오히려 고백적 방법이 있음으로써 에틱-에믹도 상호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타민족연구가 많은 벽에 부딪히고 서구가 독점하다시피 하던 인류학자들이 지금까지 주로 피조사가 된 제3세계에서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제 「고백」은 자민족연구 인류학자에게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어쩌면 이미 조사할 필요도 없다. 그의 머리와 온몸에 체질화·습관화된 것들에 대한 개방과 양심선언만이 과제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슬픈 열대」「산체스네 아이들」보다 훨씬 풍부하고 진지한 작품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인제 한 나라, 한 문화에 대한 연구는 「에틱-에믹-고백」의 세가지 방법에 의한 연구성과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한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사회과학이 사물thing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어차피 집합표상collective repersentation이나 사회적 사실social fact, 즉 상징symbol에 대한 연구라면 그것은 한 가지 언어, 한 가지 방법에 대한 독점적 연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언어,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연구결과는 대표성을 얻을 것이다.

예술인류학과 고백적 방법

이같은 고백적 방법은 필자의 예술인류학과 어떤 관련을 맺을까. 앞에서 고백적 방법이 문예사회학적인 생산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심리적 표현에 학문적 유효성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예술인류학은 문화·사회현상을 심리적 연속체(예컨대 심정문화론(心情文化論))로 파악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고백」이야말로 심정을 디테일하게 묘사·기록하는데 적절한 방법이다.

흔히 고백이라고 하면 매우 주관적인 것이라는 선입감을 갖기 쉬운데 실은 그 속에 고백자의 인지-감정체계나 사회적 타성태(墮性態)로서의 각종 구조물들이 숨어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정신분석학자들이 탁월한 업적을 세운바 있다.

특히 고백자가 사회문화적인 적절한 분석개념과 틀을 가진 경우 고백(기록)은 더욱 과학사(실이나 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는 의미에서)을 높이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심리적 표현물로서의 고백에는 사회문화적 내용물이 담겨있다. 문화학자들, 특히 레스리 화이트와 같은 문화결정주의자들은 문화를 상징물symbalate로 규정하고 비신체적인 맥락extra somatic임을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신체적인 심리학과 구별을 꾀한다. 물론 상징의 독자성(독립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같은 학설이 유의미하다. 그러나 그같은 이분법dichotomy은 상징과 감정의 연결부분(경계영역)에 대해 해명할 힘이 없다.

따라서 감정(정서)이 긴밀하게 작용하는 사회, 문화영역이나 매우 개인적인 영역(문화의), 나아가서 감정이 크게 작용하는 문화적 특성을 가진 문화의 연구에는 상징과 감정을 연속적(연동적)으로 파악하는 설명들이 필요하다.

이같은 연속체(비심리적)의 양극에는 매우 신체적인 것으로 본능이 있고 비신체적인 것으로 상징(양심 또는 종교체계)이 있다. 이것은 도식화해서 심정문화체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능은 상징의 굳어진 형태이고 상징은 본능의 가장 자유분방한 형태이다.

이같은 주장의 배경에는 개인과 우주적 질서를 조건적인 것에서부터 계열적으로, 즉「우주/지질/생태/심리/사회/문화/상징」으로 파악, 앞의 것이 뒤의 것을 규제하는 조건condition이 아니라 담는 그릇과 같은 바탕(매트릭스matrix)으로 존재한다는 사상이 깔려 있다.

위의 각 단계마다 그 분야 전공자들은 나름대로의 결정론을 갖고 있다. 예컨대 생태는 심리의 바탕이 되지만 심리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그같은 생태에 이미 심리적인 것이 스며 있다는 주장도 깔려 있다. 다시 말하면 각 단계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가역적인 관계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각단계가 시퀀스를 이루는 것은 극단적으로 「우주⇔상징」의 가역반응을 상정할 수 있고 따라서 가장 광범위한 실체라 할 수 있는 우주도 한낱 상징에 불과할 수 있으며 상징도 우주적 표현, 그리고 우주, 그 자체임을 말해준다. 비록 그것이 비가식적인 것일지라도.

따라서 상징의 가장 창조적인 부분은 흔히 매우 혼란스러워 보이는 것도 일종의 「무질서(속)의 질서」,「역설의 질서」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적 소여를 바탕으로 살고 있지만 그 문화적 속성은 자연을 배반함으로써 자연에 또다른 균형감각을 요구한다. 인간은 자연을 재건축reconstruct하고자 하고 그것도 변화무쌍한 건축적 질서(이것은 중력을 무시한 무질서의, 역설의 건축일 수 있다)를 요구하며 살고 있다.

필자의 예술인류학은 우주의 구성을「사물⇔언어⇔상징⇔氣」의 요소로 보고 이것을 서로 가역적으로 봄으로써 광의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으로 문화·사회현상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위의 네 축을 서로가 서로를 나타내는Represent 것으로 봄으로써 상징symbol을 중심으로 사물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 구체적인 모델은 「상징-의례」이다.

이러한 예술인류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고백」이라는 방법은 상징을 여러 형태로 내보이는 한편 그것이 매우 의례적ritual, carnival양상을 띠게 한다. 또 의례를 상징(언어)으로, 보다 분석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준다. 그것은 매우 변화무쌍한 건축에서의 곡예 (曲藝)처럼 보일 것이지만 그러한 문화의 부면(部面)을 조명하는 데는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다.

예술인류학의 모델에서 언어-사물-상징이 모두 기(氣)의 표현물이라고 할 경우 그것은 시적 환타지, 역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극단적인 것은 공존, 세트화(음양)로 비쳐질 것이다. 그것은 또한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非) 유클리트의 위상적(位相的)공간학이다.

문화의 총체성과 고백적 방법

끝으로 고백적 방법은 민족지기술ethnography이상으로 문화의 총체성을 그대로 옮겨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문화는 원래 문화복합물culture-complex로서 이성과 감정의 복합물이다. 또 그 결과로 이데올로기와 과학체계, 물질문화 등을 갖고 있다.

고백적 방법은 무엇보다도 이같은 복합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밝혀준다는 장점이 있다. 고백이라는 것은 다른 사회과학, 심리과학적 연구와는 달리 그 학문적 방법이나 수단이 경성적(硬性的)이라기보다는 연성적(軟性的)이다. 말하자면 전반적인 감정이나 정서라는 조명(분위기)속에서 상징적으로 표출된다.

상징이야말로 총체성을 비추는 그릇이다. 물리적·언어적인 세계에서는 내용과 형태가 서로 다른 것도 상징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하나가 되거나 하나로 통한다.

끝으로 고백이야말로 필자의 예술인류학이 단순한 족보학(고고학), 또는 해부학적 분석이 아니라 생리학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훌륭한 해부학자는 우리 몸의 일부 뼈나 기관을 보고서도 생리학을 알아낸다. 그것으로부터 생명현상을 유추해낼 수 있는 것이다. 고백을 통해 알려진 온갖 정보들이, 때로는 무의식적인 것까지, 때로는 예감적인 것까지도 판단에 도움을 주는 재료가 된다. 나아가서 고백자 자신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는 방법, 이데올로기, 세계관(종교관)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고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을 외부세계에 개방하려는 마음가짐이다. 개방한다는 것은, 행위자체가 이미 진실(사실)을 규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총체적인 인간과 인간문화에 대해 고백적 방법은 매우 유용한 것이다. 그것은 대상을 살아 움직이게 하면서 성취하는 해부학이다. 또 고인이 된 고백자를 부활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고백적 방법은 인류학의 질적 연구방법의 하나로 발전시켜 볼 가치가 있다.

미술과 일상의 만남으로서의 퍼포먼스performance

퍼포먼스의 다의미

연행, 퍼포먼스performance라고 하는 말은 현재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는 음악·무용·연극 등 공연예술을 말한다. 둘째는 소위 행위미술, 행위예술로 불리우는 독립적인 예술장르로서의 그것이다. 셋째, 연극적 요소가 짙은 정치행위를 나타내기도 하고 넷째, 대수롭지 않은 일상행동 모두를 퍼포먼스라 부르기도 한다.

필자가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둘째 행위미술, 행위예술로서의 퍼포먼스와 일상행동으로서의 퍼포먼스이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두 종류의 퍼포먼스에 대한 비교분석이다.

미술행위 또는 종합예술로서의 퍼포먼스와 일상행동으로서의 퍼포먼스는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퍼포먼스작가와 퍼포먼스 인류학자는 서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

전자가 의도한 의미(개념 또는 사상)를 행위로써 나타낸다면, 특히 기존의 여러 조형예술의 형상성 치중과는 달리 행위의 현상에 만족하면서, 후자는 행위 속에 숨은 의미, 문화적 의미를 찾는다.

결국 전자가 의미에서 행위로 진행한다면(의미→행위) 후자는 행위에서 의미를 찾는(행위→의미) 정반대 방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둘 다 의미를 표시하거나 찾는다는 점에서 의미의 소통communication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미술(예술)로서의 퍼포먼스와 일상으로서의 퍼포먼스. 양자는 여러 가지 기준에 의해 대비될 수 있다. 예컨대 예술/일상, 의도적/무의도적……등.

양자는 과연 그렇게 대비만 되고 만나는 접점이 없을까. 어쩌면 같은 것인데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 때문에 다르게 보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일상을 미술(예술)적 안목에서 볼 수 없을까. 또 미술행위도 인간이 행동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 중 하나이며 압축된 행위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미술은 캔버스에서 나와 조각이나 행위가 되려고 하고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자연이나 공간이 캔버스화하고 있다. 또 미술의 매체도 점차 인공적인 것을 떠나려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미적(美的) 행위의 발견, 또는 발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행위보다는 무위(無爲)를 지향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고대예술이 벽화에서 뛰쳐나왔듯이 판널에서 뛰쳐나오고 있고 그것에서 조각으로, 또 조각은 건축과 결합하면서 적어도 건축(집)자체가 되거나 집밖으로 나왔다. 이제 자연이라는 무위적 공간만이 위대한 미술가 앞에 있다. 이것은 미술이 생활(生活-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술의 생활로의 확대이다. 반대로 일상(一常)은 어떤가. 흔히 우리는 일생을 메마른 것, 「그저 그렇고 그런 것」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일상적이고 하찮은 것이 얼마나 살아 움직이는 것의 진솔한 일면인가. 일상, 그것은 가장 진실일 수 있고 아름다움일 수 있다.

「미술의 생활로의 확대」와「생활 속의 아름다움이 발견」은 사실 음양적 만남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에서 이분법dualism이나 에널로지analogy, 대칭(또는 비대칭)등이 주요내용을 이루지만 생활도(인간의) 이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단지 미술은 시각적 조형언어이지만 생활은 개념언어를 통해 행동(행위)으로 결과된다. 생활은 행동언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미술이 행위미술이 될 때 일상과 매우 근접하게 된다.

도대체 자연스럽지 않은 일상이 어디 있는가. 또 최고의 행위미술은 자연스러움과 무위(無爲)이다.

미술행위와 일상의 만남

퍼포먼스 작가는 예컨대 2분법적 무수한 선택과정을 거쳐 행위의 맥락context을 정하고 행위를 펼친다. 관중이 그같은 행위의 의미해독을 그대로 다 하기는 그리 쉽지 않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공감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반드시 관중이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관중, 즉 보는자의 자유, 관광적(觀光的) 참여가 행위의 의미를 더 자유분방하고 풍부하게 할 수도 있다.

반대로 퍼포먼스 인류학자는 한 문화권의 구성원의 행동 속에 숨은 의미와 맥락의 해독자이다. 그같은 의미의 결정성을 보증해줌은 물론 사회·문화적, 즉 집단적 결정구조의 존재성에 있다.

개인적 창작행위인 퍼포먼스가 지극히 의식적이면서 개인적임에 따른 자유분방한 것인데 반해 인류학자의 퍼포먼스 분석은 무미건조한 편이다. 그러나 문화적 특성이 매우 드라마틱하고 연극적인 경우는 간단히 그렇게 치부할 수만은 없다.

더욱이 일상의 퍼포먼스 분석이 정치행위나 페스티벌과 같은 제의(祭儀)에 해당될 때는 그것이 갖는 원시성primitivity 때문에 미술행위로서의 퍼포먼스와 접근하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의 미술행위로서의 퍼포먼스는 현대의 제의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인간의 일상행위 속에도 어딘가에 미술행위로서의 퍼포먼스 요소가 숨어있음을 생각게 한다.

자연과학주의는 언어(관념적 결정론)와 시각(경험주의)에 의한 합작품인데 그것은 인간의 삶을 물리적으로 환원시킨 점이 많다. 인간의 삶은 물리현상 또는 화학현상으로 죄다 해명될 수 없다. 우리 몸에 무기물이 있고 화학반응이 있으며 물리적 중력(重力)에서 우리가 예외적 존재가 될 수 없지만 그 이상의 생명의 근본과 관련되는 것이 있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든 퍼포먼스는 이 생명현상과 긴밀한 관계 위에 성립한다. 그것이 미술행위이든 일상의 것이든.

생명현상, 그것은 무엇이며 또한 그것은 그 자체가 미학적 운동이란 말인가? 또 그것 자체는 의미의 소통(교환)이란 말인가. 자연과학자는 이같은 소통을 물리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문화학자는 그것을 의미로 본다. 의미는 인간두뇌의 상징작용의 결과인데 상징체계에 의한 물질현상을 구명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그것에 구애되지 않고 상징체계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예술이며 언어체계도 닫혀진 상징체계의 하나이다.

미술행위로서의 퍼포먼스는 매우 자유로운 상징인데 반해 한 문화의 퍼포먼스는 언어체계와 같이 닫혀진 체계이기 때문에 과학적 상징과 예술적 상징의 중간이 된다.

미술행위로서의 퍼포먼스와 일상으로서의 퍼포먼스는 「의미」를 통해 서로 만난다.

퍼포먼스의 역사

미술행위, 즉 행위미술로서의 퍼포먼스는 196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예술가들이 자신의 신체를 표현매체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완결된 작업으로서의 생산적 예술을 거부하고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표현을 주장하고 있다.

퍼포먼스는 신체, 공간, 시간이 예술가의 내부감정과 맞아떨어져 표현되는 매우 상황적 예술이다.

현대미술의 미래파운동과 다다이즘, 액션페인팅, 팝아트, 누보리얼리즘, 정크(폐품)아트 등에 이어 행위미술로서의 해프닝이 등장한다.

행위미술의 장르는 해프닝, 이벤트, 플럭서스fluxus, 보디페인팅, 퍼포먼스 등으로 나뉜다.

해프닝은 50년대 말 팝아트의 전개과정에서 탄생했는데 예술가가 일상적 삶의 요소를 가지고 전혀 다른 의미, 즉 시적인 의미를 창조한다. 해프닝은 즉흥성과 우연성이 많이 지배한다. 이벤트는 우연성을 많이 배제한 의도된 것으로 절제된 행위 속에서 논리성을 추구한다.

플럭서스는 에스프리 존재현상으로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혼합된 채 하나의 세계world로 문명비판적인 이념의 공통성을 갖고 있다.

퍼포먼스는 시각예술의 창조적 프로세스와 풍자성, 음향적 요소를 결합하여 미술, 음악, 무용, 연극 등의 구분을 없애 버리려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오늘날 행위미술은 우발성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편 인류학에서 퍼포먼스 연구는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됐다. 그것은 인류의 고대 원시문화primitive가 종합예술적 성격과 함께 제정일치적(祭政一致)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페스티벌이나 올림픽 등 현대사회에 대한 연구로 계승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것이 특정한 페스티벌이나 올림픽을 떠나 일상생활연구로 확대된 것은 특히 상징인류학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한 문화속의) 행위 속에 숨은 의미를 다차원에서 해독함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발리섬과 같은 극장식 문화사회에서는 퍼포먼스적 접근이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이제 개념에서 이미지, 행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퍼포먼스」라는 개념 아래 통일이 되고 있다. 또 일상과 예술이 이 개념을 통해 서로 교차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의미의 벽이 깨어지고 보다 나은 소통이 이루어질 영토가 마련된 셈이다. 남은 문제는 삶과 소통의 궁극적 핵심인 기(氣)의 문제일 것이다. 우주는 기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이다. 이것은 물질의 운동일 수 있다. 또한 언어와 상징의 재구성일 수 있다.

퍼포먼스적 관점에서 보면 우주는 존재도 아니고 구성도 아니고 오로지 소통일 따름이다. 그것은 때로는 운동dynamics으로, 때로는 의미meaning로 보여진다.

신화(神話)는 살아있지 않으면 기록되지 않는다. 역사는 기록되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퍼포먼스는 때로는 운동으로 살아 있어야 하고 때로는 의미로 분석되어야 한다. 퍼포먼스의 제의성(祭儀性)(이것은 상징·氣이다)과 언어성(言語性)(이것은 언어·사물이다)을 말한다. 불확실하면서도 확실해야 하고 확실하면서도 불확실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한민족 미학의 원형

멋, 맛, 마당 그리고 한마당

문화를 구체적으로 보면 의·식·주와 언어, 그리고 각종 예술장르로 볼 수 있다. 이때 언어라는 것은 물론 문학적·사회적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포함한 보다 광의의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같은 분류마저도 매우 편의적인 것이고 서로 상통(相通)한다는 입장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예컨대 「의(依)」는 개인적·사회적「언어」이며 그것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점에서 「주(住)」이다. 또 모든 예술활동의 필수품이다. 더욱이 그것 자체도 예술이다.

식(食)은 몸의 바탕이 되면 그런 점에서 「주」이며 개인적·사회적 언표가 된다는 점에서 「의」이다. 이것 또한 다양한 예술적 표현이다.

주는 공간의 「의」이며 보다 안정적인 「식」의 공급원이다. 이것 또한 예술이며 개인적·사회적 언어이다.

결국 문화는 상통하는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어떤 의미에서건 상징하는 것이 된다.

이같이 문화의 하위항목이 서로 통한다고 가정할 때 거기엔 반드시 통하게 하는 정신적·물질적 매개(媒介)가 있을 것이고 정신·심리복합적인 상호작용interaction을 예상할 수 있다. 나아가서 이들 항목간의 보다 역동적인 기제(機制)mechanism도 밝힐 수 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한 문화one culture에는 반드시 형태학morphology이 아닌, 여러 형태로 분화된 역사적 맥락에 따라 변형transformation을 만들어 내는 원형(原型)prototype같은 것이 있다.

한국(한민족) 문화의 원형은 무엇일까. 철학보다는 미학이 관념과 물질, 또는 실천을 포용한다는 점에서 문화를 대표한다고 볼 때 문화의 원형은 미학의 원형이 된다. 이것은 문화의 심층적 의미론semantics이 된다.

흔히 원형을 찾는데는 어원학적etymology인 방법과 고고학(인류 이하 고고학이라 칭함)archaeology적인 방법이 있다. 여기에 고고학이 단순히 유물체계(해부학과 마찬가지로)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생활」(생리학과 마찬가지로)을 복원한다면 금상첨화이다(필자는 이런 점에서 예술인류학을 주장했다)

인간이 목소리를 글(문자)로 정착시키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표음문자(表音文字)와 표의문자(表意文字)가 그것이다.

우리 한글은 표음문자이다. 그런데 표음문자권 언어의 특성 가운데 한 가지 공통점으로 아버지, 어머니를 나타내는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글은 「엄마」「아빠」, 영어는 「마마」「파파」이다.

인간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냥 입만 열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말이 위의 말이다. 이것은 자모(字母)가 달라도 어쩔 수 없이 같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목과 발성구조가 크게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갓난아기 때 가장 필요한 말이 「엄마」,「아빠」이고 보면 그러한 말 형성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갓난아기의 음식을 「맘마」라고 하는 것도 「먹어야 산다」는 본능적인 것에 대한 원초적 말의 부응이라 할 수 있다. 한글의 「밥」이나 영어의 「푸드」food도 같은 현상이다.

「ꁁ」,「ꑁ」,「챁」은 입술소리로 혀놀림이 거의 없이 입술만 열면 생성되는 소리다.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야만 되는 인간과 목과 발성 구조 사이의 절묘한 연결commection이다. 이것은 매우 결정적인 것이기도 한다.

자음의 입술소리(脣音)인 「ꑁ,챁,ꁁ」과 모음의 혀의 후반부 소리「葡,蓡,薡」등이 합쳐서 내는 소리는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편한 소리이고 그런 점에서 매우 자연적이다(자연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문화의 대표적인 특징은 「자연주의」라고 할 때 위의 자모(子母)에 의한 순수 우리말을 토대로 우리문화를 논해야 할 당위성이 내재하고 있다.

<표1>을 보면 우리문화의 의식주와 언어의 순수 우리말의 미학적 원형은 「멋」,「맛」,「마당」,「말」이라는 단어가 하나같이 위의 자모에 해당한다. 또 이들 물질문화(의·식·주)와 정신문화(언어)는 손(手)의 범주에서 그 동사적 표상을 하고 있다. 즉 「짓다」,「그리다」가 그것으로 특히 글(文字)은 「그리다」의 명사화로 짐작된다.

글(文字)이 그리는 것(요즘의 美術)에서 추출되었고 그것은 생활과 예술일반의 보편적 표현수단으로 발전했다.

왜 한국인은 이같이 가장 발음하기 쉬운 것으로 문화의 핵심적 항목의 언표(言表)를 채택했을까.

그것은 그만큼 한국인이 순수하면서 자연적 심성과 원시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옷/멋」,「밥/맛」,「집/마당」,「글/말」에서 전자(옷)가 이론(전통)을 말한다면 후자(멋)은 실천(변형)을 말한다.

말하자면 「옷」을 입되「멋」이 있으려면 간단치 않다. 즉 후자는 그만큼 현재적으로 활용·실천performance·praxis되어야 하는 것의 의미가 있다(종교는 「무(巫)/불(佛)」, 또 음양오행의 「물(水) 불(火) / 물(物)」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이같은 생활문화의 항목을 축제를 통해서 묶어왔다. 축제는 바로 「마당」으로 표현되고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의미와 함께 공간(空間)개념의 의미로 발전한다. 이러한 축제를 영위하는 공간개념은 서구의 「스페이스space」와 달리 하나의 컨텍스트context로서의 공간개념이 된다. 즉 상황적 공간contextual space이 된다.

한국인은 흔히 「마당」이라고 할 때 접두어로 「한(韓)」을 붙인다. 즉 「한마당」이 된다. 「한」은 「一one」또는 「多many」,「中middle」,「同same」,「不正about」등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셀 수 있는 countable」것과 「셀 수 없는uncountable」것을 모두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도가니」로서의 「한」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사계가 뚜렷한 기후의 산을 중심으로 한 촌락형성이 「평지(平地)에서 대상을 추구하고 바다로 진출한」서양(서구)과 다른 「한문화」를 형성케 했을 것이다.

평지는 그것을 가르는 기준과 대상을 확실히 해야만 하는 시각의 빛, 그리고 새로운 평지로서의 바다를 장악하게 된다.

이에 비해 산지(山地)는 그 속에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고 사계도 갖추어져 있어 시각보다는 청각의 화음, 그리고 산을 중심한 자족적인 삶을 구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풍토학이다.

예술인류학적으로 본 한국예술

필자의 예술인류학 모델은 「언어⇔사물⇔상징⇔氣」이다. 이것을 음악, 연극, 미술, 무용에 대입하면 음악(기호=상징), 연극(말=언어), 미술(대상=사물), 무용(몸=氣)이 된다. 예술인류학 이론에 따르면 각 예술장르는 서로 가역적으로 통하는 것이다. 예컨대 음악도 연극이나 미술, 무용과 긴밀한 상호관계에 있고 실질적으로 음악적 표현이나 그 내용에 있어서도 내밀한 관계에 있다.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다.

특히 시·서·화(詩·書·畵)의 전통으로 볼 때 이것은 음악-미술의 연속체continuum상에 있다. 즉 시는 매우 음악에 가깝다. 또 서는 그 중간이다.

음악은 연극과 무용사이에 있다. 즉 연극의 「말=언어」(이것은 일상적이고 보다 묘사적이다)와 무용의 「몸=氣」(이것은 보다 생명감과 리듬감이 있다)보다「기호=상징」(이것은 보다 추상적이며 상징적이다)으로 변한 것이다.

연극은 음악과 미술의 사이에 있다. 음악의 「기호=상징」과 미술의 「대상=사물」(이것은 보다 물질적이며 형태적이다)이 「말=언어」로 즉 이것은 상징과 사물이 적당히 일상화된 것이다.

미술은 연극과 무용사이에 있다. 즉 형상도 연극과 무용 사이에 있다. 즉 형상도 언어라는 점에서 연극적이고 그러한 현상에 기운(氣運)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무용적이다.

이와 똑같은 논리로 무용은 음악과 미술사이에 있다. 몸짓이 하나의 형상이고 그것은 음악적 리듬감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음악·연극·미술이 이루는 삼각영역은 언어적 영역인데 반해 음악·무용·미술의 삼각영역은 매우 비언어적(몸=氣)이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전자는 연극에, 후자는 무용에 환원되기 때문이다.

연극·미술·무용의 삼각영역은 매우 사물적이고 음악·연극·무용의 삼각영역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연극과 무용의 상호관계이다. 연극이 말을 줄이게 되고 무용이 말을 도입하면서 가까워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즉 말과 몸(언어와 비언어)의 상호보완성이 미술과 음악(형상과 비형상)의 상호보완성과 마찬가지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연극은 우리말로 굿·놀이, 그림, 소리, 노래·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동작(그리다=긋다, 놀다, 추다)의 단어들이다.

굿은 평면이 아닌 공간의 그림 그리기=긋기=굿이며 소리는 음악의 가장 평범한,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춤은 「추다」라는 수직적인 동작(율동적으로 뛰는 동작)의 명사형이다.

즉 평면, 입체, 율동의 그림과 놀이,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목소리의 율동인 소리 등 각 예술장르에 붙여진 이름도 너무나 기본적인 동작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도 한국문화의 원초성을 느낄 수 있다. 평면, 입체, 율동이 한곳에 있으며 이것은 가장 입체적인 굿에서 한꺼번에 모아진다. 한곳에 통합된 「한마당의 굿」, 이것이 한민족 미학의 종합이며 원형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입장에서 본 주술과 무교(巫敎)

동종주술·감염주술 / 학문·예술·종교

흔히 현대인은 인류가 원시대에서 지금에 이르는 동안 매우 발전(진화)했다는 생각을 갖곤 한다. 이것은 과학의 이름으로 체계적으로 증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발전이라는 것은 보기에 따라 평가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예컨대 인류의 조상이 1천만년 전의 라마피테쿠스라는 학자도 있고 2백50만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학설도 있다. 또 현생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은 네안델탈인(호모 사피엔스 네안델탈렌시스)이라고 하기도 하고 크로마뇽인(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라고도 한다. 문제는 분류학 상의 위치(상)론에 따라 정도의 차이로 규정지어진다. 위치나 정도는 일종의 구조structure로 이것을 동적으로 보면 진화 아니면 퇴화가 되고 굳이 진화양상을 띠는 것을 추구하면 진화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적어도 크로마뇽인 이후에는 인간이 진화했다는 큰 증거는 없다. 진화-생태학적인 사소한 적응adaptation의 문제는 제외하고.

원시인과 현대인은 두개골의 용량이나 직립보행설bipedalism에 있어 별 변화가 없다. 기껏해야 종species 내부의 변이variation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원시인과 현대인의 사고나 행위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음은 당연하다. 현대인은 너무 존재론적ontological 시각에서 사물을 보는 데 익숙해 있다. 그래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느냐에는 상당한 지식을 축적하고 존재와 존재사이에 내재한 법칙성을 많이 발굴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존재와 존재의 관계에 대해서는 파악의 최대치가 함수관계에 머물고 있다. 「존재와 운동」이 인식의 한계이다.

존재에 대한 인식의 발단은 사물에 대한 대칭되는 개념에서 출발하는데 개념의 조합에 의한 법칙의 발견이 최종목표가 된다.

이러한 법칙이 실천되는 것은 사물이다. 사물을 이성이 아닌, 감성(감정)의 차원에서, 다시 말하면 지각과정에서 파악한다면 이것은 존재적인 시각이 아니고 생성적이거나 과정적인 시각이 되며 법칙의 발견(발명)보다는 느낌의 교환·교류가 중대하게 대두된다.

과학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느낌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면 오늘의 과학·예술·종교는 원시·미개인들의 주술magic에 비교될 수 있다. 주술연구의 대가인 J. G 프레이저는 그의 주저인 「황금가지」에서 주술을 유사법칙law of Similarity과 접촉법칙law of Contact 또는 감염법칙law of Contagion으로 나누었다.

전자는 또 동종주술Homoeo pathic magic 혹은 모방주술Imitative magic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종주술은 「유사(類似)가 유사를 낳는다」혹은「결과는 그것의 원인을 닮는다」에 기초하고 있으며 감염주술은 「한번 서로 접촉한 것은 실제로 그 접촉이 떨어진 후에도 여전히 계속 서로 작용한다」에 근거하고 있다.

주술사는 유사법칙과 접촉법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인간행도에 제한되지 않는다고 암암리에 긍정한다.

실지로 많은 주술은 양자의 법칙이 동시에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주술은 자연법칙 체계, 즉 우주현상이 차례를 결정하는 법칙의 서술로 보았을 때 「이론적(理論的)」주술이라고 불러도 좋고 또 인간이 자기들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지키는 일련의 계율로 보아서 「실천적(實踐的)」주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프레이저는 동종주술은 유사(類似)에, 감염주술은 연속에 인한 관념연합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따라서 동종주술은 서로가 닮은 사물이 동일하다는 가정의 오류를, 감염주술은 서로 한때 접촉했던 사물이 언제나 접촉하고 있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동종주술은 홀로 실천되는데 감염주술은 대체로 동종원리(모방원리)의 응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아가서 동종주술과 감염주술은 대체로 동종원리(모방원리)의 응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아가서 동종주술과 감염주술은 공감주술(共感呪術)이라는 유(類)개념으로 묶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물이 어떤 신비로운 공감, 즉 일종의 에테르ether와 같은 것의 매개를 통해서 이것에서 다른 것에로 옮겨지는 충동에 의해서 작용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프레이저는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빼고는. 그는 진리를 발견하는 현대과학자의 입장에서 동종주술이 서로 닮은 사물이 동일하다는 것과 감염주술이 한때 접촉한 사물이 언제나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오류라고 했다.

그러나 「닮음」과 「접촉」에서 기초한 사물에 대한 이해는 왜 오류일까? 필자는 단호히 그것은 오류가 아니고 인간의 사물이해의 두 다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닮음」과「접촉」에 대한 의지 없이는 인간은 어떠한 활동도 하지 못한다는 주장과 함께 그것은 적어도 우주의 본질은 아닐지 몰라도 인간의 특질임에는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의 삶은 「닮음」과「접촉」의 왕복운동에 불과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인간문화의 대종을 이루는 예술이 「닮음」에 대한 인식 없이 어떻게 출발할 수 있고 학문이 「닮음」과 「접촉」의 부단한 가역반응이 없으면 존재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원시의 주술을 오늘의 과학적 입장에서 논할 수 있다면 오늘의 문화를 주술적 입장에서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이 감염주술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동종주술에서 출발하여 감염주술에서 완성된다면(<감염>→동종→감염) 과학은 동종주술에서 개념을 재빨리 얻어내고 감염주술에서 출발하여 다시 동종주술로 향하는(<동종>→감염→동종)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마찬가지로 종교는 동종주술과 감염주술의 부단한 가역반응(동종⇔감염)으로 볼 수 없을까?(<표2>참조)

<표2> 주술과 학문·예술·종교의 상관관계

샤먼(巫)

/

종교(氣)

동종주술

Homoeopathic magic

메타포

metaphor

시미레리티

similarity

예술

상징

↑↓

경제

(생태)

감염주술

Contagious magic

메토니미

metonymy

컨텍트

contact

학문


프레이저가 오류라고 지적한 것을 필자는 그것을 인간의 보편적 지각원리로 보고자하며 오늘의 인간문명도 원시의 주술적 원리의 합작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프레이저는 중요한 지적을 했다. 그 중에서도 동종주술은 독립적일 수 있는데 감염주술은 동종주술의 응용을 포함하고 있어 동종주술에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점이다.

이것은 학문보다 예술이 우선이며 미학이 철학에 우선하는 것을 말한다(물론 동졸주술도 감염주술 특히 접촉성의 믿음 위에 출발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지만 이것은 거의 무의식적이라는 점에서 일단 현상학적으로 판단정지의 대상이 되어도 좋다). 학문의 개념도 일종의 비유metaphor에서 출발한 것이니까. 물론 예술은 철학(과학) 이상으로 부단한 접촉감염의 대상을 통해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학문이 동종주술에서 개념을 생산하지 않으면 안되듯이. 학문과 예술에서 동종주술과 감염주술은 상호보완적이다.

주술을 종합적으로 보면 바로 종교적이다. 종교 그 자체이다. 종교의 영원한 과제는 탄생과 회귀(죽음)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다. 이것은 존재와 지각을 넘어선 세계이다.

주술magic이 바탕이 된 종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무교Shamanism이다. 종교는 우주내에 보이지 않는 매개체를 가정하고 인간이 죽으면 태어났던 곳으로 영혼 회귀한다는 대전제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회귀처가 때로는 과거보다 더 좋은 곳이 되기도 하고 나쁜 곳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점에서 무교는 종교의 원형적인 성격이 강하다. 주술은 보이지 않는 매개체를 설정하고 있다. 주술은 그러한 점에서 존재being보다는 어떻게 느껴지는가라는 소통communication에 중점을 두고 있다. 프레이저는 그 소통체를 에테르ether라고 명명했는데 그가 주술을 공감주술(共感呪術)이라고 한 것은 감성을 기초로 한 커뮤니케이션시스템에 맞아 떨어지고 있다.

결국 동종이든 감염이든 공감이 최종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느끼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성립시키며 「말이 있으면 존재가 있다」라는 명제에 반명제가 된다.

서양인들이 에테르라고 한 매개체를 동양인들은 기(氣)라고 한다. 에테르에는 다분히 물질적인 어감이 있지만 기는 물질과 정신의 중간체적 성격을 갖는다. 기는 자연의 본질이다. 자연에는 사물도 있고 형상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형태화되기 이전의 힘·기운이 있다. 다시 말하면 기는 사물로도 나타날 수 있고 상징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또 언어로 나타날 수도 있다.

종교의 중심주제는 신(神)이다. 신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신학이 있지만 신이 무엇인가에는 이론(異論)이 많다. 신은 우주의 본질적인 힘이다(또는 본질적인 힘으로 규정해 놓았다). 또 우주 그 자체이다. 신은 기의 강한 응집체이다. 그것이 언어로, 상징으로, 사물로(물리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차원을 달리한다.

무당Shaman은 빙신(憑神)상태에서 엑스타시ecstasy에 이르러 최고의 신명(神明)에 도달한다. 무당은 엑스타시의 기술자이다. 신(神)에 접한다는 것은 우주의 힘(본질)을 나누어 갖는 것이다. 흔히 신을 말할 때는 절대적인 것을 상정하기 쉬운데 실은 말을 하는 것도 신을 주고 받는 것이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신을 주고 받는 것이고 사회생활 모두가 신을 주고 받는 행위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포함한 행위가 신의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신을 통해서 서로를 공유하고 하나가 되고 소통communication을 하게 된다.

또는 부분과 전체가 하나가 됨을 느낀다. 여기서 흔히 원시·미개사회에 있었던 희생(犧牲)이나 「왕의 살해(殺害)」의식이 생겨났다.

이러한 의식은 언어와 상징, 사물과 기, 신의 교류(교감)이면서 또한 혼동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역으로 혼동을 희생이나 살해로써 치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후면 새로운 질서가 잡히게 된다.

이것은 오늘의 인간이 언어(상징)를 희생하거나 살해하는 정도를 원시·미개인들은 동물이나 사람(사물과 기)을 그 대상으로 했으며 희생·살해당하는 그 대상에게는 당시 기가-어떤 종류의 것이든-집결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적 분위기이며 때로는 광기(狂氣)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상사나 계절적인 일이기도 하다.

상징 / 생태, 천(天) / 왕(王)

아즈텍족들은 신의 몸으로서의 빵을 성찬으로 먹는 관습을 가졌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성체와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때때로 「머리로 먹거나 입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동종주술과 감염주술의 교차와 같다. 이것은 흔히 의례를 유발한다. 왜냐하면 머릿속의 생각(언어나 상징)을 「실천」하거나 「사물」을 실질적으로 접촉함으로써 생각(언어나 상징)에 지속적인 힘을 주기 때문이다.

미개인들은 일반적인 동물 또는 인간의 살을 먹음으로써 동물이나 인간의 육체적 성질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동물이나 인간의 특성이 되어있는 도덕적 자질이나 지적 자질까지도 획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때때로 생산주기, 즉 농업과 목축의 계절적 주기와 일치한다. 재앙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 혹은 구체적인 물질적 형태로 구체화되느냐 하는 것은 단지 어떤 민족을 해치고 있는 모든 재앙을 완전히 소탕하려는 의식의 주요한 목적이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동일하다.

어떤 농경사회의 수확기나 파종기에 악마를 추방하는 의식이 거행되기도 한다. 또 악마를 추방하기 위해서 방종의 기간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의식은 때때로 매우 연극적이어서 실지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오히려 그러한 일을 예방하기도 한다.

즉 이러한 의식의 특징은 이중성에 있다. 의식의 내용이 현실이 되어도 괜찮고 현실이 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의식은 생산(풍년)과 사회질서유지에 또는 비생산(흉년)의 책임과 새로운 사회질서 모색이라는 이중의 몸짓을 하게 된다.

따라서 언제라도 의식은 계속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주술의 경제적 기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문화의 양대 기능이자 요건인 상징과 적응을 주술로 훌륭히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록 과학(학문)·예술·종교도 독자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 서로 다른 원리에 의해 운영되는 것 같지만 실은 동종주술과 감염주술의 새로운 변형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원시·미개인들과 현대인이 다른 것은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삶의 운동축과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원시·미개인들은 대체로 우주의 생성변화에 순응하면서 계절적 주기성에 의존하며 집단적 생존을 꾀한다. 또 신체적 느낌과 우주적 소통에 주안점을 두어 「소통하는 것이 진리다」라는 입장에서 특정개인의 희생을 강요했다.

그 희생은 동물과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고 왕의 살해, 악마쫓기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문화양태는 오늘의 종교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왕의 살해나 악마쫓기 등은 매우 사회학적인 측면이 강한 것이다.

반면에 현대인들은 대체로 과학기술로 자연의 개발을 통해 인과관계를 따지면서 개인적 자유를 확대하는 삶의 양태를 보인다. 또 객관적 진리(사실)와 존재의 규정에 주안점을 두어 「진리는 소통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수많은 환경문제를 낳았다.

원시·미개인들은 「소통과 전체(집단)」현대인은 「존재와 부분(개인)」에서 삶의 실마리를 풀어왔다.(<표3>참조)

<표3>

원시·미개시대

문명시대

주술(소통)

신화(순환)

무질서caos

무의식(신체)

천(天), 신(神)

한(韓), 무(無), 기(氣)

무(無), 선(仙)

학문(眞), 예술(美), 종교(善)

역사(진화)

질서cosmos

의식(머리)

왕(王), 민(民)

도(道), 물(物)

법(法), 연(然)

상징 ⇔ 의례 (예술인류학)

컨텍스트 인류학 Context Anthropology


전자의 「소통」은 신(天)과 인간(人) 또는 인간과 인간(社會) 사이에 이루어지며 후자의 「존재」는 물리적 우주(天)와 인간 또는 인간과 인간(社會)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양자는 결국 인간집단(부족, 국가)의 사회적 왕(天)을 등장시킴으로써 종(琮)과 지(地)를 설정(인간)하여 자신의 입지를 만들고 균형(심리적·사회적·생태적)을 유지하며 스스로 신(神)이 되려 하고 있다. 우주의 기(氣)는 인간에게 모이고 있기 때문이다. 천상의 상징과 지상의 음식을 통해 지금도 종을 늘이고 있다. 그러나 주술이 누렸던 환경의 적응과 보존 기능이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또 소통적 관점에서 인간과 문화를 보아야 적당한 평가를 할 수 있다. 주술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 볼 때 예술인류학은 컨텍스트contaxt 인류학Anthropology이 된다.

한(마당)사상과 (예술)인류학

상징과 문화

문화에 대한 개념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가장 최근의 정의는 인간의 개체적 능력인 상징이 집단적(사회적)인 타성태(일종의 관습)로 공유되어 사회적 언어가 된 것이다.

그 사회적 언어의 종류는 다양하다. 관념, 행위양식, 인지(認知)구조, 정치·사회적 제도, 과학·기술체계 등등.

또 이같은 문화는 매우 신체외적인extrosomatic 맥락의 것이지만 신체적인 또는 심리적인 것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심리적이라는 말은 물론 신체적인somatic 것이지만 또한 정신적인mental 것과 상부구조에선 확연히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심리복합psychomental complex이라는 영역이 있긴 하지만 문화의 추상적인 부분, 상부구조에 체질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상부구조의 원형질matrix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말하자면 문화가 문화의 내용이나 구조(유형)자체는 체질이나 환경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의 형성에는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문화와 환경(신체)을 별개로 취급하는 극단적인 문화결정론자와는 다르다. 문화와 환경 사이는 단절된 것이 아니고 단지 양자 사이의 매커니즘을 우리가 모를 따름이다.

그렇다고 문화를 환경 또는 생태에 종속시키는 환경-생태론자의 환경결정자는 더더욱 문화를 단순화시키고 만다.

지금까지 문화의 개념규정의 약점은 극단적인 이분법에 따른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것은 상징작용이라 할 수 있다-과 신체·환경 사이에 매커니즘을 하나의 연속체continuum로 보지 않으려는 것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하면 문화는 정신과 물질의 계속적인 교체(마치 전기적 전도처럼)의 결과라는 사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건축이라는 문화형태는 인간의 사고와 환경의 만남의 소산이다. 이것은 매우 물질적인 것(물질문화)이지만 이미 하나의 훌륭한 언어인 것이다. 건축은 물질이면서 언어인 것이다. 또 그것은 인간과 환경 사이의 일종의 체계system인 것이다. 그것은 불가분의 것이다.

문화가 하나의 복합체complex이지만 복합체의 구조와 기능structure and function을 형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체계이다. 그러한 점에서 문화를 문화복합culture complex에서 문화체계로 보는 체계적 이론, 체계적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문화가 인간의 상징능력과 환경과의 대화라고 가정할 때, 또 양자 사이의 매커니즘을 체계적으로 연구한다고 할 때 문화는 물질이라고 보기 보다는 언어-상징체계로 부는 전략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문화를 연구하는 수단은 언어이고 물질은 대상으로서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와 상징은 무엇인가. 상징에 대한 논의를 먼저 시작하자.

상징·언어·사물

상징은 문학이나 철학, 그리고 인류학의 주요 연구주제이다.

문학에서의 상징은 크린스 브루크스의 정의가 대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상징은 원관념이 생략된 은유」이다. 이 말은 다시 풀어보면 은유는 그 과정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일단 유추가 끝나면 심상(心像)의 테두리(틀)가 떠오르지만 상징의 경우 그것이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상징은 확장된 은유이며 그것의 반복형태이다. 이것은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e의 반복과 같으며 또한 동종주술Homogeneous magic과 감염주술Contagious magic의 반복은 같다.

이것은 상징이 언어의 기호작용과 다름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상징은 이중의(또는 그 이상의)의미, 이중의 기호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의 상징은 캇실러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그는 철학 자체가 「상징형식」의 하나이며 동물은 수용계통과 운동계통 등 해부학적 구조에 의해 살지만 인간은 「상징체계」라는 제3의 연결물에 의해 산다고 주장했다.

여기서의 상징체계는 단어, 신화, 예술, 역사, 과학 등이 포함된다. 이들 상징체계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체계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쓰는 언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물질적 존재로서의 기호와 기능적 가치로서의 상징이다.

캇실러는 추상적 사고, 곧 상징적 상상력을 발성적 사고와 동격으로 다루었다. 즉「인간이 부동(浮動)하는 감각적 현상의 흐름의 어설픈 전체 속에서 어떤 고정적 요소를 떼어내어 그것에 주의를 집중하기 위해서 그들을 추출해내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사물인식의 척도가 되는 시간과 공간도 상징형식의 하나에 불과하다.

흔히 점이나 선, 평면 등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실은 물리적, 심리적 세계도 반영되지 않는 허구상인 것이다. 캇실러는 이를 「공간지각」 또는 「상징적 공간」이라고 했다.

공간은 근본적으로 추상의 공간이 되고 상징의 양상을 띠는 것이다. 이것은「유기체적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상징의 특성 때문에 상징은 직관과 결합되고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간에 다음과 같이 특징지워진다.

「이미지들과 관념들이 보다 좁고, 보다 직관적인 관계들로부터 끌어내어져 그 만연성과 이념성 때문에 직접 표현될 수 없는 보다 보편적이고 관념적인 관계들에 대한 표현물로서 사용되는 것은 모든 상징들의 특징이다.」

심리학에선 상징화 기능을 「열등한」기능들의 대리물로, 특히 원시적인 것, 「위대한 자연의 신비」에로의 역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상징체계는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이고, 비이성적인 성격과 함께 의식적이고 반성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을 포함한다.

이상의 여러 분야에서이 상징논의를 종합하면 상징의 일반적 원칙을 끌어낼 수 있다.

「모든 상징은 무엇인가를 대변한다」(제1원칙)

「모든 상징은 이중적 지시의미를 갖는다」(제2원칙)

「모든 상징은 진실과 허구 둘다를 포함한다」(제3원칙)

「모든 상징은 이중적 적합성을 갖고 있다」(제4원칙)

이상은 미학적·종교적·과학적인 분야에 적용되는 일반원칙이다.

상징의 해석에는 「축자적인 것」the literal과 「확장으로서의 해석」(상징적 의미)등 두 가지가 있다.

상징의 기본적 두 유형, 즉 「관습적 상징 = 대체적 기호」,「직관적 상징 = 표현적 기호」중 전자는 수학적·논리적 상징의 해석에서 볼 수 있고 항상 언어적이고 정의의 성격을 갖는 반면 후자는 직관적 상징으로 언어적인 동시에 비언어적이다.

더욱이 상징의 「행동적 확장」은 언어적 확장과 대조된다. 예컨대 동전은 교환의 상징이고 깃발은 애국심의 상징이며 십자가 혹은 다른 징표는 종교의 상징이다. 이런 종류의 상징들은 행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넓은 의미에서 행동의 기호로서 작용하므로 효능적 상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달리 말하자면 「행동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징은 정말 행동을 위한 기호로 작용할 수 있고 근원적인 정서적·의지적 유형의 의사소통에 유효할 수 있다.

필자의 예술인류학이 정서의 의사소통communication과 교감sympathy에 역점을 두어 「상징=의례」symbol=ritual로 모델을 잡는 한편(보다 확대된 일반 이론으로는 「역동적 장(場)의 개폐이론DSCO 이지만)종교적 해석이 과학(학문)적·예술적 해석을 통합하는, 상위의 해석으로 택한 것도 종래와는 역(易)의 방향이며 위의 근시적 의사소통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되지 않은 지시의미는 언어의 확장과 해석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표현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며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의사소통이 궁극적으로는 언어학적 용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언어와 상징의 가역반응(언어⇔상징)을 의미한다.

위의 「축자적 해석」은 언어우선주의에 의해 자연주의(자연과학주의) 또는 물리학적 맥락의 우선권에 해당하며 매우 분석적인 입장을 취해 허구를 분해시키고 환원주의·퇴행주의로 궁극적으로 상징들을 해소시키게 된다(이것은 필자의 예술인류학 모델 중「언어=사물」또는「언어⇔사물」에 해당한다).

반대로 「확장으로서의 해석」은 상징우선주의에 의거 종국에는 초월주의를 보이게 된다.

초월주의는 항상 상징을 상징에 의해 의미된 대상의 측면에서 해석한다. 다시 말하면 대상(사물)은 바로 상징인 것이다(이것은 필자의 예술인류학 모델 중 「상징=사물」,「상징⇔사물」에 해당한다).

이것은 상징사용자가 비록 불완전할지언정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안다고 가정한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가정은 상징적 의식의 기본전제에 다름 아니다. 초월주의 이론은 상징을 공식화한 것이다.

과정철학자, 과정신학자로 잘 알려진 화이트헤드는 양립불가능한 두 경향들, 즉 자연주의적 경향과 초월주의적(또는 관념주의적) 경향을 융합시키려고 했다. 나아가서 이들의 관계를 「생성적」으로 보려 했다.

상징은 한마디로 이중적 의미, 양가성, 다차원성 등을 의미한다.

상징과 한(韓)사상

상징의 다차원성과 한사상의 불확실성은 매우 공통적 기반을 갖고 있다.

문제는 상징의 의미 중 가장 확장된 의미가 한사상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물론 가장 축소된 의미마저 한사상을 갖고 있다.

한사상의 「한」은 한국, 한겨례, 한글, 한식, 하느님, 한얼의 의미와 함께 한자로는 「韓,漢, 汗, 旱, 寒, 咸, 桓, 丸」등으로 쓰인다. 다시 말하면 국가, 민족, 사상, 생활전반에 관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 쓰이는 말히다. 「한」의 사전적 의미는 「一」one, 「多」many, 「同」same, 「中」middle, 「不正」about 등 다섯 가지 뜻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한」의 개념은 종래 서구중심의 철학사상이 제일원인이라 충족이유를 설정, 거기서 다른 존재들을 유추하는 시원적 방법들에 의존한데 반해 비시원적으로 사고하고 사물을 생각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한사상은 다양한 의미를 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상징이다.

그것은 「축자적 해석」(一)이면서 「확장으로서의 해석」(多), 그리고 그 사이의 불확실성과 「중간(中)」「같음(同)」등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상징의 다차원성과 다름이 없다. 「한」은 특히 고정된 상징(이것은 언어이다)보다 상징작용, 즉 역동적 상징이다. 서양철학이 시원적 사고특정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어떤 관념이나 개념에 결정성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다름이 아닌 서양문화의 「언어-사물」중심의 사고틀과 맥을 같이한다.

이에 비해 결정성을 부정하는 「한」은 동양문화의 「상징(氣)」중심의 사고틀과 상통한다.

상징이야말로 지시적 의미전달 기능을 하면서도 개인(詩人)과 집단(민족)이 특별히 부여하는 의미를 싣고 시각적으로 독립성을 보이는 사물과 언어가 하나가 되게 하는 주술적 기능을 한다.

「한」은 우리민족의 집단상징의 원형이다.


상징(한)과 기(氣)

기는 동양적 우주관의 본질이다. 기는 또한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을 용납하지 않는다. 정신과 물질이 모두 기로부터 연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는 사물(氣←사물), 또는 상징(氣←상징)등의 이중적 관계를 갖고 있다. 흔히 기를 유물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서구적 결정론(관념적·물질적인)의 소산이다.

우리는 해명하지 못한 우주의 매커니즘(신비)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기보다는 상징적인 것으로 가정해 놓고 이같은 가정의 조건으로서 또 하나의 본질로서 기를 가정하여 현상학적인 탐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사상이 일(一)과 다(多)를 동시에 포용하는 것을 결정성을 끊임없이 부정하며 부수어버리는 존재(또는 비존재)를 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일종의 구축construction과 해체destruction의 반복이며 특히 해체 쪽에 비중을 더 두는 것이 된다. 물론 이같은 해체는 생성적becoming 세계관을 전제한다.

설사 어떤 결정성(그것이 언어이든, 사물이든)을 분석할 경우에라도 상징은 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가 물질적·정신적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기는 본질이면서 수단이 된다. 조선조의 이기(理氣)논쟁,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도 바로 이(理)와 기의 가역반응의 결과이다(이것은 필자의 「언어⇔氣」,「사물⇔氣」,「상징⇔氣」에 해당한다).

「한」은 기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 「한」은 사실체와 상징체의 개념을 동시에 포함하는 「존재-생성」철학의 개념이다. 이것은 이가 기일분수(氣一分殊)로 기가 이를 포함하고 나아가 무(無)와 궁극적으로 통하는 것과 같다.

「한」이 개체(부분)와 전체를 망라한 개념이라면 결국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망라한 개념이다. 기도 마찬가지이다.

상징은 기로부터 나오며 기의 표현이다.「한」이 상징이라면 「한」도 역시 기의 산물이다.

한마당과 예술인류학

「한」사상은 사실 「한마당」등으로 「마당」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굳이 「한」사상이 아니라 「한마당」사상이라고 한 것은 「마당」이라는 공간적 개념의 도입과 함께 「한」의 관념성이나 추상성을 행위성이나 구체성으로 확대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한」이 내용이라면 「마당」은 그것을 담는 그릇이다. 즉 「한」이 구체화되는 장소이다.

필자는 「한마당」개념을 「역동적 장(場)의 개폐이론DSCO」으로 구체화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마당을 고정적으로 계량화된 장소로서가 아니라 가변적이고 비계량적인 상징적 공간contextual space으로서 일종의 상황적 공간으로 본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은 시간적 개념으로서 텍스트적 성격을 가졌다면 「마당」은 공간적 개념으로 컨텍스트적 성격을 가졌다. 그러나 「한」도 비시원적 개념이고 「마당」도 물리적 공간이라기보다는 「空」에 가까운 개념이기 때문에 서양철학적 의미의 시간과 공간이 아니다.

「한마당」철학을 기조로 한 인류학이 필자의 예술인류학인데 이것은 말하자면 「텍스트사회학」에 대한 「컨텍스트 인류학」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현대물리학의 「장이론」과도 맞아 떨어진다.

예술인류학은 사실fact과 실체reality를 일종의 「상징」symbol으로 보며 한 사회를 상징이 난무하는 드라마사회로 본다. 모든 사회현상은 본질의 표현으로서 일종의 증후symptom이며 또한 가변적이다. 사물이나 경직된 언어가 아니며 해부학적 구조라기보다는 생리학적인 작용이며 변하고 있는 「상징의 한 형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