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특집/ 90년대의 전망

미술계의 각성과 90년대의 힘찬 도약




김인환 / 미술평론

국제주의 다원화시대 미술의 국적정립을 위한 기반조성

90년대는 80년대의 정치적 격변으로 얼룩진 시대와의 교차선상에서 안정을 추구하며 선진문화권으로 진입해야 할 시점이다. 80년대의 정치적 황폐화가 인출한 정신문화의 동공화(洞空化)현상에서 깨어나 그 자립적 입지를 모색해야 할 계제이다.

90년대 우리 미술의 정책방향은 외부로 돌린 눈을 첨예하게 확대시켜 개방화시대와 국제주의의 다원화시대에 걸맞는 이념을 도출해 내는 쪽으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한 미술의 국적정립을 위한 기반조성이 불가피하게 요청된다. 이와같은 양면적인 시각에 포커스를 맞춰 중지(衆智)를 모은다면 미래는 낙관적일 수 있다.

그간 우리 미술이 표방해 온 국제주의의 지나친 선진권 미술 의존도가 일방적인 서구편향주의로 흘렀음에 비추어, 이에 대한 자아각성이 근래 미술계의 보편적인 성향으로 대두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민족적 주체성을 고양하는 범위 안에서 조심스럽게 선진문물에 접근해 들어가야 한다. 88서울올림픽을 통해 홍보적 측면에서 신장된 국위를 더욱 확산시켜 동구권과 제3세계 문화권과의 교류를 증대해가는 정부차원에서의 정책지원이 따라야 할 것이다.

미술육성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하여 수도권에만 집중되어 있는 미술문화의 지역적 배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리라는 전망 아래 90년대에는 거기 병행하여 지방미술의 특성개발을 위한 다각적인 문화정책이 검토되어야 한다. 현재의 정부예산에 반영된 문화비지출로서는 그 수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문화정책 주무당국이 우선적으로 시행해야 할 과제는 무엇보다도 정책기반조성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일이다.

모든 문화관계 종사자들이 염원하여 마지않는 「문화부」의 신설에 때맞춰 정부는 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문화정책을 수립해 나가야 할 것이고, 또한 문화투자에 인색해서는 안된다.

권위주의·관료주의로 일관되어 온 문화정책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해야 한다. 문화정책 실무의 경험이 있거나 적어도 예술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해당 인사들(전문가)을 주무부서의 중추적 위치에 앉혀서 실효를 거둘 수 있는 계획이 선행될 것을 당부한다.

현재의 문예진흥원은 명실상부한 문화예술 지원기관으로 전환시키고 도심의 외곽에서 떨어져서 미술의 대중향수권에 대한 능률적인 기능을 수임하지 못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도심의 시민생활영역으로 다시 끌어들여야 한다. 모든 미술문화의 공간은 시민의 생활 및 휴식공간 속에 들어 있어서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대중적인 문화매체로서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40년대 이후의 미술이 단순한 신구양식의 바뀜과 점증하는 미술인구에 편승하여 겨우 면모를 유지해 왔다면 60년대 이후 다른 한편에서 제고되기 시작한 미술의 국제주의적인 상승기류가 제법 활력을 열어 놓는 듯도 했었다. 산업사회로의 변모에 따르는 상업주의 바람이 미술계를 강타한 70년대를 넘어서서 80년대에는 의외의 복병이랄 수 있는 「민중미술」경향이 미술계에 쟁점을 몰아왔다.

국제적인 다국적 미술의 균등한 가치 미술의 질량면에서의 획기적 진전

그 어떤 흐름이건간에 종내는 획일적인 모습으로 똘똘 뭉쳤던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흑백논리의 이원적 양식의 간극 사이에서 몸살을 앓아야 했던 것이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정치풍토이다. 정치풍향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것이 한국의 사회현상이기도 하다. 문화 역시 사회현상에 포박되어 있는만치 그 가닥을 헤아려 방향을 가늠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세계가 온통 유례없이 발전적 진로의 몸부림으로 진통하고 있는 현금의 상황에 위한을 얻을 수 있기는 하다. 결국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아픔의 증상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고 그런 관점에서 조망되는 90년대란 비관적이지만은 않은 때문이다.

구미의 선진제국이 예술문화의 선도적 입장에 섰던 과거와는 달리 90년대에는 다양하게 분출되는 민족의 각기 다른 목소리가 미술분야에도 반영되어 균등한 가치로 통용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따라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동안 우려해 온 외세주의의 예속적 틀은 점차 벗겨지고 민족의 고유성과 주체적 의식을 작품에 접목시키려는 미술가들의 노력이 넓은 공감대를 얻고 양식화 것이다. 「반외세주의」라는 구호는 조만간 사라질지도 모른다.

미술에 있어서의 민족적 총량(總量)의 결집이란 한반도 남쪽만으로는 안되면 북쪽과의 제휴를 통해 그 지향점을 넓혀야 한다.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라는 문제에서 폐쇄주의 일변도인 북한이 그 차단의 벽을 어느 정도 허물 때에 상호 이질적인 요소가 극복될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동화될 수 있는 소지가 생길 것이다. 한국미술 국적성 회복의 귀결점이 거기에 있다.

체육문화에 온통 관심을 쏟았던 80년대의 상황이 반전(反戰)되어 예술문화에 대한 일반의 적극적인 향수열이 고조되리라는 전망 아래, 90년대는 미술의 질량면에서 획기적인 진전이 이뤄질 공산이 크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예술민족인 우리 민족이 갖춘 잠재적 예술역량이 이 시기에 가서 포괄적으로 성숙된 단계에 접어들 것임이 틀림없는 조짐들로 지금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진단할 수 있는 전망이다.

미술사회의 피라밋형 상향구조 세계미술의 현장에 도전할 능력배양

정부차원에서 문예중흥을 표방하고 나선지는 오래다. 그 구체적 방도로 설치한 기구가 문예진흥원이다. 미술분야에 있어서의 지원금 지급, 전시회장 대여 등 여러 면에서 지원사업이 이루어져 왔다.

미술의 가장 바람직한 발전전망은 미술인구의 저변확대를 통해서 기초토양을 넓게 굳히고 상향적으로 점차 폭을 좁히며 질적 향상을 꾀하는데 있다. 일종의 피라밋형으로 구축되어진 미술사회의 상향구조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패턴이라 할 것이다.

미술의 하층구조를 이루는 미술향수자(대중)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미술관이 확충, 각종 미술전람회의 유치, 그리고 계몽적인 미술사업의 시행 등을 정부주도로 운용하되 민간기업차원의 자금 조달의 유인(誘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투자를 축적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각기 기업이 다투어 스포츠팀을 만들어 많은 물량을 투입하면서도 정신문화의 영역에 속하는 미술분야에 대한 투자는 지극히 소극적이다.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운동은 각 도시에서 부를 거머쥐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정치적·경제적 실력자들이 예술의 후견인으로 나섬으로서 가능했던 전례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만큼 미술학원이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이는 물론 「대학입시」라는 교육방편의 부차적이고도 이변적인 형태가 가져온 기현상이기는 하지만 「미술인구의 저변확대」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소지는 있다. 이 잠재적 힘이 기틀이 되는 한, 그리고 모든 정신적 환경여건이 건전한 쪽으로 흐를 수만 있다면 우리 미술은 질량적으로 높은 수준에 오르리라는 신념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80년대에 특히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열렸던 각종 문화올림픽의 여러 행사를 치루면서 우리의 미술입지를 되될아 볼 기회는 많았다. 세계의 유수한 미술가와 미술작품이 서울로 밀려드는 상황에서 해외통로의 미술창구는 넓어졌다. 이 과정을 거쳤기에 90년대의 우리는 보다 포괄적인 국제적 시각을 가지고 세계미술의 현장에 도전할 능력배양에 전력투구할 기회도 얻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90년대의 우리 미술은 구미 선진제국 미술 조류에 편승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체의 자생적인 힘과 주체적 자각으로 단련된 미술가치로서 국제무대에 서게 되리라고 본다.

그동안 꾸준히 발전궤도에 오른 우리의 경제력이 허무하게 무산되지 않는 한 그것은 미술중흥의 간접적 보탬이 될 것이다. 문제는 거기 못미치는 정치풍토의 퇴행성이다. 몇 정치지도자로서 무리가 형성되어 끊임없는 분쟁요인을 격발시키는 오늘의 정치변동상황이 모든 분야의 지향적 가치에 변수가 되며 걸림돌이다.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것은 미술가들의 개별적인 창의적 노력이다. 예술은 일차적으로는 개인인 예술가의 창의적 노력의 소산임이 확실하며 그 테두리를 결정하는 시대적 환경 또한 창작요인의 하나다. 90년대 시대환경의 변전은 미술가들의 표현영역에 변화의 물결을 줄 것이다. 남북 정치판도의 변화와 함께 남과 북의 미술교류가 어떠한 형태로든 성사되리라는 사실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의 템포로 유추하기 어렵지 않다. 미술에 있어서의 문단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물리적으로 강요될 수 없고 북측도 부분적으로나마 미술의 개방적 추세를 방임하는 입장이 될 것이다. 국토분단이 가져 온 오랜 정치적 단절은 일차적으로 문화교류를 통해서 화해의 실마리가 얻어지리라는 가정도 가져본다.

80년대의 미술파쟁과 엄청난 물량의 폭 보인 국제교류

80년대 초입에 정치적 전환을 겪은 한국은 그러나 위정자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정치의 정체성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 악순환의 되풀이가 계속되면서 미술문화가 직면한 새로운 움직임은 지금까지 거의 금기시 되어져 온 체제에 대한 도전이다.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되어 나온 듯 미술계 일각에서 달갑지 않은 군사체제에 정면으로 맞서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계층간의 갈등과 부조리를 직접 작품발상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태동되고 있었다. 민중미술그룹으로 일컬어지는 이들 일단의 미술경향이 내세운 선택적 이념은 미술계에 분쟁의 불씨를 심기도 했었다. 미술평단의 분열을 시발로 미술계 전체가 분쟁의 와중에 말려드는 둣한 양태를 보여 왔다.

결국 80년대의 이 민중미술운동의 여파는 그 진말이 어떻게 되었건간에 미술계에 중요한 몇 가지 문제제기의 여건을 제공하고 있다. 예술창작의 표현에 있어서 그 자유로운 한계를 어느 선까지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 정치의 불신과 반목이 야기시킨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미술분야에까지 파급된 점, 미술이 핍박받는 자의 아픔과 무관해서는 안된다는 주장과 정치권에서의 일을 작품에 수렴하여 대중을 향한 메시지의 선동수단으로 삼는 일은 옳지 않다는 주장, 현대미술운동의 국제주의가 무분별하게 서구사조의 범람을 자초하여 외세주의로 지탄받게 된 데에 대한 각성, 상업주의미술에 대한 지탄과 새로 제기된 민중미술운동의 이론적 허구성-등 다양한 문제제기가 도출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사안들이 미술에까지 침투되어 상당한 파란을 일으켜기도 했던 80년대의 미술파쟁의 과도기적인 사회격변기가 낳은 필연적인 부산물이기도 했을 것이다. 민주화의 열망이 달아올라 국민의 결속된 힘으로까지 발전하면서 발전적 전망이 보이기 시작한 80년대 후반 이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납북 내지는 월북미술가의 해금과 북한 미술서적의 부분적인 허용이 몰고 온 개방화의 물결이다. 이것은 길고도 험난한 남북통일의 민족적 숙원을 달성하기 위한 진일보의 정책적 결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0년대 이후부터 미술의 국제전 출품이 현저해졌거니와 이 80년대 기간에 걸쳐 있었던 국제교류의 규모는 실로 엄청난 물량의 폭을 보이고 있다. 이제까지는 참여쪽에 기울여졌던 일방적 추세가 국제전의 유치쪽으로 방향선회를 함으로써 외래문화수용의 국제적 환경여건이 많이 확장되었다. 화염병이 나르고 최루탄가스가 터지는 불안한 정정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여러 유명미술가와 미술작품 국내나들이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88서울올림픽 주경기장 주변에 조성된 조각공원은 80년대가 거둔 주요한 미술실적을 마무리 짓는 상징적 기념물임에 틀림없다. 이제까지 접하기 힘들었던 소련과 동구권의 미술이, 중국과 동남아의 미술이, 아프리카와 남미의 미술이 서울에서 선을 보이고, 복제품으로만 보아왔던 구미 현대미술가들의 작품 실상을 직접 대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대단한 진전이다.

추상의 반대급부로서의 사실 미술의 다원화 현상

미술의 양식논쟁에서 가장 큰 대립을 보인 것이 「구상」대「비구상」이었다. 즉 사실주의와 추상미술의 대극적 개념이었다. 오랫동안 국전에서조차 이 두 개념은 이분법적 대립을 보여왔다. 60년대 이후 현대미술운동의 표면에서 새로운 사조로 부상한 추상미술은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위적 실험성을 띠고 미술운동의 헤게모니를 잡아왔다. 이 유파에 있어서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시(視)형식에 더 치중한다. 「컨템퍼랄티즘」이라고 불리우는 극단의 현대적 상황을 대변하는 둣한 그간의 다양한 유파들은 80년대에 들어서서 거기 반발하는 세력들에 의해 도전 받게 된다.

추상의 반대급부로서의 사실, 화면에 다시 소재적 형상의 세계를 개입시키려는 경향이 70년대 후반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치밀한 사진적 묘사를 근간으로 한 하이퍼 리얼리즘 경향이 대두되는 듯 하다가 소멸하고 80년대에 들어서서는 일종의 신표현주의적 경향이라고 볼 수 있는 양식유파의 파생을 보고 있다. 거기에 특정한 내용의 주제가 들어서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민중예술」의 개념으로 굳어진 새로운 유파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70년대에 극성을 떨었던 추상미술에 있어서의 미니멀아트경향은 다소 퇴조하는 듯 하다. 집체된 세력에 의해 구심적으로 결속된 집단을 중심으로 항용 기치를 높이 들었던 그 무개성한 작품들의 일회성 유희는 일회성으로 끝나고 잠적된 둣도 하다. 미술계에 있어서의 80년대의 세대교체는 민중미술경향만을 빼고는 집체된 모습으로가 아니라 다원화된 양태로 나타난다.

경직된 권위주의 시대의 미술이 다만 획일화로 치우쳐 충분한 양식적 수확을 거두지 못한 채 망각의 늪 저쪽으로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처럼 떠들썩하게 무리를 지어 동분서주하던 그들이 집단이 와해되고 나서는 각자 힘을 잃고 있다. 「집단개성」이라는 적절하지 못한 불명료한 개념으로 무장되었던 한 집단의 임종을 보는 듯 하다.

80년대의 미술이 거둔 성과를 한마디로 재단하기는 곤란하다. 80년대란 지금도 진행중인 상황을 뜻한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에 붕괴된 권위주의와 그것을 대체하는 자유화의 시대적 물결이 미술의 활력적인 디딤돌이 되고 있는 한에 있어 그 결과에 대한 검증은 더 뒤로 미루고 볼 일이다.

80년대란 그 전반과 후반을 각각 분리하여 유신체제의 지속과 민주화의 쟁취라는 각기 상이한 정치상황의 동일선상의 놓임이다. 이 기간에 있어 정부의 문화정책이 기조도 앞과 뒤를 달리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미술의 흐름도 그 기폭 가운데서 상호 이완적인 면이 많다. 언론자유화의 추세에 따라 미술출판의 영역에서도 다변적인 개방화가 성취되었음을 부언해 둔다.

현행 미술교육이 내재하고 있는 문제점 기타의 문제점

미술의 인력수급에 따르는 미술교육의 당면문제가 시급하다. 현행대학의 미술교육이 내재하고 있는 문제점은 입시자체부터 비롯된다. 수동적인 석고데생에 의존하는 효율적이지 못한 입시제도의 미비점과 구태의연한 교과과정의 실시, 교육제도 자체의 비능률적 구조에 대한 개혁의지가 부족하다. 비등하고 있는 미술교육 개선의 문제를 정부의 주무당국자는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기능뿐만 아니라 미술정보의 유통센터, 자료의 보관창고, 미술향수자를 위한 선무적 교육기관의 역할을 분담해야 하고 학술연구의 중추적 기능도 겸하면 좋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너무나 미진한 현재의 실정은 소장작품을 거의 기증작에 의존하고 있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부끄러운 일이다.

미술창작에 있어 표현의 자유는 신장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국책적으로 금지된 사항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관심을 쏟으면서 작품속에 수용하려고 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자율적인 표현자유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작태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80년대에 일어났던 일부 화가들의 수모는 물론 예술작품에 대한 관의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 점이 많았을 것이겠으나 미술가들 자신의 자의적인 충동이 결과한 잘못인 경우도 더러 있었던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