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기행

민중극의 메카, 아비뇽

― 그 場內와 場外




김화영 / 고려대교수

「죽은 사람들, 내가 사랑했던 옛 사람들, 난 그들을 내 마음속에 지니고 있어요. 그들은 매일같이 내 기억속에서 다시 태어나곤 해요. 그저 재미있다는 느낌이지요. 나는 산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 못지않게 죽은 사람들과도 어울려 살고 있어요. 내 마음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우글거리고 있거든요. 나는 처음에는 이를테면 그저 하나의 조그만 마을에 지나지 않았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적인 대도시가 되고 말았어요. 내 마음의 마을은 그만큼 인구가 불어나 버렸거든요…… 나는 내 과거를 안고 다녀요. 그러나 그 과거속으로 고개를 내밀고 들여다보진 않아요. 나는 그저 나의 과거일 뿐이랍니다. 반면 미래를 멀리 서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다가오기를 기다려요. 물론 그 모든 것 다 떠메고 다니자니 무겁기 짝이 없지요. 우리네 직업에 있어서 제일 끔찍한 일은 앞서 있었던 것을 항상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예요. 관계를 끊어야 하는거 말예요. 안도감을 주는 그 무엇에다가 우리를 비끌어 매어주는 그 모든 관계를 다 끓어버려야 해요. 지나간 세월동안 내가 연기했었던 그 모든 인물들이 어쩌면 내 방 커튼 뒤에 숨어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어요. 그런가 어떤가 한번 살펴보긴 해야겠어요. 그러나 극중인물들이란 어린 자식들과도 같아요. 뱃속에서 배어가지고 낳아서 다 키워놓고 나면 안녕! 이지요. 이제 그들은 각자 저 혼자서 다른 사람들, 즉 관객들 속으로 제 갈길을 가고마는 거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대배우 쟌느 모로다. 금년 여름 아비뇽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그 여자는 연극배우의 존재방식에 대하여, 그리고 그녀의 기나긴 예술적 이력속에 가로놓여있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추억에 대하여, 이렇게 감동적으로 술회했다. 그녀가 올해 정확하게 몇 살인지 나는 잘 모른다. 아비뇽 페스티벌이 처음 시작되던 해, 그러니까 1947년 여름에 교황청 뜰의 무대에 섰을때 쟌느 모로는 아직 파리 연극학교 학생이었다. 그리고 1951년, 1952년(아, 그때 우리는 6·25의 전화속에 파묻힌 채 굶주리고 있었다!)제라드 필립과 함께 그 유명한 「옹부르의 왕자」를 연기하면서 아비뇽 페스티벌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녀의 「기억속에서 매일같이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속에는 누구보다도 쟝 빌라르와 제라르 필립이 가장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 그녀의 기억속에서만이랴…… 그 쟌느 모로가 금년에 다시 페르난도 로하스의 극「라 셀레스틴느」의 주역으로 교황청 뜰의 무대에 섰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으니 가히 이 페스티벌의 산 증인이라 할만하다. 그 사이에 빌라르도, 제라르 필립도 갔다. 그러나 쟌느양은 빛나는 눈빛으로 아비뇽의 무대위에 돌아왔다.

프랑스 혁명 2백주년 기념행사들과 때맞춰 프랑스 외무성의 초청을 받은 10명의 교수단과 함께 내가 아비뇽에 도착한 것은 그러나 축제가 시작된 지도 열흘이 지난 7월 23일이었다. 그에 앞선 2주일을 엉뚱하게도 니스에서 보내면서 사실은 12일부터 이미 시작된 아비뇽 페스티벌의 순서가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아쉬움이 많았었다. 미리 전해받은 프로그램에 따르면 이 페스티벌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앙트완느비테 연출, 쟌느 모로주연의 「라 셀레스틴느」는 7월 12일부터 22일까지로 예정이 잡혀있었으니 그 기간동안 꼬박 우리는 니스와 그 근교의 미술관과 바닷가를 돌아다니느라고 그걸 고스란히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페스티벌의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는 8월 3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속도 빠른 TGV기차로 아비뇽역에 도착했을 때는 때아닌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순한 눈빛의 어떤 젊은 아가씨가 마중을 나왔다. 사미야라는 이름이 귀에 설다했는데 알고보니 알제리아출신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을 숙소로 안내해갈 대형버스는 우리를 태운 채 우람한 아비뇽 요새의 성벽을 따라 도시를 거의 완전히 한바퀴 돌더니 역에서 우측으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어느 성문앞에다가 내려놓았다. 성안의 구시가 길이 너무 좁아서 버스가 들어갈 수 없으니 여기서부터 숙소까지는 걸어가야한다는 설명이었다. 운전기사는 그 독특한 억양으로 보아 영국인이었다. 아랍태생의 안내원에 영국인 기사라! 축제의 아비뇽은 바야흐로 「국제적」이 되어 있었다. 마음씨 좋은 그 아가씨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한참 뒤에 우리들의 짐을 숙소까지 실어다줄 미니 버스 한 대를 구해왔다. 우리나라 봉고버스와 거의 같은 모양의 낡은 자동차 표면에는 각종의 그림과 글자들이 그려져 있어서 히피들이 타고 다니곤하는 그 친근하고 약간 불결한 교통기관을 연상시켰다. 어떤 극단이 사용하는 차를 잠시 빌렸다는 것이었다. 여름마다 아비뇽을 찾아오는 연극광들의 표현이 생각났다. 「7월달에 아비뇽역에 내리면 역 앞 광장에서부터 공기속에 연극냄새가 난다!」마냐낭 성문에서 숙소까지는 사실 걸어서 5분도 채 안되었다. 아비뇽에서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라는 콜레쥬 셍-죠젭의 기숙사가 우리의 숙소였다. 1백50년이나 묵은 우람하고 음침한 衁자 3층 건물, 넓은 마당에는 아람드리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플라타너스 나무밑에 연극연습을 이제 막 끝낸참인 듯한 일단의 젊은이들이 몰려 서 있었다. 그들이 우리들에게 미니버스를 빌려 주었던 것이다. 뜻밖의 일은 그 뿐이 아니었다. 그 일단의 아시아 연극인들 속에 땀을 흘리고 서있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따. 내가 이장호 감독의 영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의 제작과 관련하여 한동안 만나곤 했던, 그 영화의 남자주인공역의 김명곤이었다. 그야말로 「아비뇽!」이었다. 그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배우들로 구성된 혼성극단의 일원으로 아비뇽 페스티벌에 「아시아의 외침」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참가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김명곤씨 이외에도 눈빛이 서글서글한 또 한사람의 젊은 연기자가 더 있었다. 그 이튿날 그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길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산울림 극단」의 여러분들과 아울러 내가 2주간의 아비뇽체류동안에 자주 얼굴을 만나게 될 사람들이었다. 이리하여 초장부터 벌써 축제분위기는 급속도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금년으로 42번째에 접어든다. 이제 그 역사는 하나의 전설, 하나의 신화 혹은 하나의 「종교」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 종교의 신은 쟝 빌라르Jean Vilar요, 메시야는 제라르 필립Gerard Philippe 이요, 이제는 성인으로 추앙되는 사도들로 말하자면 마리아 카자레스Maria Casares 알렝 퀴니Alain Cuny, 미셸 부케Michel Bouquet, 모리스 베자르Maurice Bejart, 혹은 캐럴린 칼슨Carolin Carlson, 그리고 마돈나는 쟌느 로랑Jeanne Laurent이라고. 1963년 TNP(푸랑스 국립민중극장)의 극장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이 축제의 신 쟝 빌라르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고 소박하게 그 「전설」을 요약했다. 「아시다시피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옛날 옛적에 한 남자와 한 도시가 만나 서로 사랑을 하였고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어 아기를 낳았으니 그 이름을 페스티벌이라 하였다.」

그 출발을 좀더 산문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1946년 12월 아비뇽 출신의 대시인 르네 샤르Rene Char가 쟝 빌라르를 찾아갔다. 당시 빌라르는 쟈크 프레베르, 마르셀 카르네의 콤비가 만든 영화 「밤의 문」으로 데뷔한 34세의 연극인으로서 10년간의 배우와 연출자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T.S엘리어트의 「대사원의 살인」을 비유, 콜롱비에 극장에 올려 무려 1백 50회의 공연기록을 세우고 비평가상, 연극대상을 받았다. 르네 샤르는 자기가 시나리오와 다이얼로그를 쓴 영화 「물의 태양」에서 빌라르가 역을 맡아주기를 청하기 위하여 찾아간 것이다. 그 기회에 그는 빌라르를 크리스티앙 제르보에게 소개했다. 제르보는 「예술 노트」지의 사장으로 마티스, 레제, 칸딘스키, 피카소 등 거장들의 작품을 가지고 아비뇽에서 3개월간의 「현대회화전」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발전되어 샤르와 제르보는 그 기회에, 즉 1947년 4월 아비뇽 교황청 뜰에서 어느 토요일 단 1회로 제한하여 「대사원의 살인」을 공연해줄 것을 요청했다. 빌라르는 우선 그 작품에 대한 권리가 자신의 손을 떠났는데다가 별로 신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안을 거절했다. 특히 그의 생각으론 교황청의 뜰이 극장으로는 적절치 않았던 것이다. 「그곳은 벽의 돌덩어리 하나 하나가 다 어떤 과거를, 아주 구체적인 과거를 말하고 있는 장소다. 우리가 그 뜰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벌거벗은 뜰에 발을 들여놓아보면 그야말로 아무런 형상이 없는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벽이 아니라 바닥이 그렇다는 말이다. 기술적으로 이건 연극이 불가능한 장소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연극을 하기에 나쁜 장소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역사가 너무나 웅변적으로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는 물론 지금부터 6세기 전인 13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교황 클레멘트5세는 당파싸움을 피하여 교황청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오늘날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40년 후인 1348년 교황 클레멘트6세는 이 도시를 시실리의 여왕으로부터 매입했다. 그사이 도합 18년에 걸쳐 이곳에 교황청이 건축되었다. 여섯 사람의 교황이 이곳을 거쳐갔고 1377년 그레고리11세가 마침내 로마의 교황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교황의 로마귀환에 불만을 품은 추기경회의는 또하나의 교황을 선출했으니 역사는 이를 참칭교황이라고 부른다. 이 교회분리는 마지막 참칭교황이 1403년 아비뇽을 떠나도 수습되지 않고 있다가 1499년에 이르러서야 이탈리아에서 막을 닫게 된다. 이러할진대 그 어느 연출자, 그 어느 배우가 여기에 깃들어있는 그 요란한 역사의 목소리를 눌러 잠재울 수 있을 것인가? 그 시대, 장소, 물적인 조건, 빌라르의 기질과 기분, 모두가 아비뇽 페스티벌의 탄생을 가로막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축제는 태어났다. 이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새로운 연극의 탄생을 의미했다. 빌라르는 제안을 수락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안을 스스로 내놓았고 그것을 성사시켰다. 세 편의 전혀 다른 연극을 제작하여 아비뇽 교황청 뜰에서 선보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950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부터 4년 전 내가 모리스 카즈뇌브, 그리고 쿠소노와 함께 파리의 리용역에서 기차를 탔을 때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들끓었다. 내게는 상당히 야심에 찬, 그리고 그럴사한 목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이었다. 연극에다가, 연극이라는 집단적 예술에다가, 꽉 닫혀진 곳이 아닌 새로운 장소를 다시 찾아주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들에게는 사르두, 바타이유, 앙트완느의 그것과는 다른 무대를 제공하고 골방과 지하실과 살롱에서 시들어가는 예술인이 속시원히 숨을 쉴 수 있게 하고 마침내 건축과 극적인 시를 서로 만나게 하자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난 뒤에는 이처럼 아름답게 회고할 수 있는 법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 그같은 계획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프랑스의 큰도시에서 작은 소읍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다 한 가지씩의 페스티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저 엄청난 예산을 움직일 수 있는 몇몇 도시의 특권인 음악 페스티벌이 몇 군데, 그것도 손꼽을 만큼 드물게 열리고 있을 뿐이었다. 바이로이트는 나치의 악몽에서 간신히 깨어나려는 참이었고 잘스부르그는 모차르트의 순수성을 회복하려고 모색하는 중이었고 엑상프로방스의 음악 축제는 나른하게 졸고 있었다. 반면 연극 페스티벌이라는 것은 아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즈음에 예산지원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이, 아무런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그것도 문화예술의 지방자치라는 개념이 아직은 낯설기만한 사정속에서 지방의 소도시에 배우들을 모아 가지고 하늘이 보이는 무대 위에다가 무려 3편씩의 연극을 선보인다는 것은 과연 모험중의 모험이었다. 「아비뇽? 아니 왜 타이티에 가서 무대를 차리지 그래요?」하고 비웃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모험은 시작되었다. 아비뇽시장이 시의 예산으로 50만 프랑을 대기로 했고 문화성의 공연국장 잔느 로랑이 50만 프랑을 대여했으며 쟝 빌라르 자신이 부족분을 구해 댔다. 이리하여 1947년 9월 4일에서 10일까지 「아비뇽 예술주간」이 막을 올렸다. 3개월간의 현대회화전 회에 고전 및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두 가지 음악회, 그리고 7회에 걸친 연극공연이 그 내용이었다. 세익스피어의 「리차드Ⅱ세의 비극」을 쟝 퀴르티스가 각색하고 쟝 빌라르가 연출하여 교황청 뜰에서 3회 공연, 폴 클로델의 「토비와 사라의 이야기」를 모리스 카즈뇌브가 연출하여 교황청「과수원」에서 2회 공연, 젊은 모리스 클라벨의 작품 「정오의 테라스」를 쟝 빌라르가 연출하여 시립극장에서 2회 공연.

오직 웅장한 고성의 벽과 이 지방 특유의 거센 바람인 미스트랄 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엄청난 것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건축가, 무대장치 전문가, 화가, 소설가, 여인숙 주인, 그리고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공병대가 다같이 힘을 합하여 무대를 만들고 조명장치를 했다. 그리고 알렝퀴니, 미셸 부케, 실비아 몽포르, 쟌느 모로 등 25명의 배우들이 악조건 속에서 싸웠다.

전체 7회 공연에 입장한 총 관객의 수는 4천8백18명, 그 중 유료관객은 겨우 3천명 남짓했다. 물론 상당한 적자를 냈다. 그러나 빌라르와 배우들을 위시하여 이 축제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은 「전에 없던 그 무엇」을 찾아내었고 창조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연기자들이 고정적으로 식사를 했던 「오베르쥬 드 프랑스」의 주인에세 빌라르는 입장료 수입으로 밀린 식사대금을 다 지불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하자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렇다면 더욱 내년에 또 와야 겠군요.」

극단은 곧 적자에도 불구하고 아비뇽 축제가 계속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1948년에 이미 「카르푸르」지의 르네 바르쟈벨은 다음과 같은 열광적인 기사를 썼다.

「이제부터 연극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아니 아름다움의 한 순간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일 년에 한 번씩 마치 집시들이 셍트-마리-드-라-메르를 찾듯이 성지 아비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부자들은 호화로운 자동차를 타고 그곳그로 가서 가장 비싼 좌석을 예약해야 한다. 그게 그들의 의무다. 경제적으로 중간층인 사람들은 부르타뉴나 노르망디로 가는 바캉스를 포기하고 아비뇽의 축제의 날짜에 휴가날짜를 맞추어야 한다. 그게 그들의 이익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보로든, 혹은 히치 하이킹을 해서든, 빵을 구걸하든 길에서 남의 집 닭을 훔쳐 잡아 먹으면서도, 서둘러 아비뇽을 찾아갈 길이다. 그들의 피곤과 배고픔 고통, 그 모든 고생을 아비뇽의 저녁은 씻어주리라.」

이 같은 느낌과 격려에 힘입어 1948년에도 축제는 계속 되었다. 이번에는 「예술주간」이 「제2회 아비뇽 페스티벌」로 승격했고 9월이 아니라 7월 후반의 2주간으로 시기를 바꿨고 모든 프로그램의 장소가 교황청 안으로 집약되었다. 이 같은 관습의 골격이 장차 40여년 동안 계속된다. 뷔흐너의 「당통의 죽음」, 쥘 쉬페르비엘의 「셰에라자드」, 세익스피어의 「리차드 Ⅱ세의 죽음」등 3편의 연극이 모두 빌라르의 연출에 의하여 막을 열었다. 도처에서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 들었다. 당시 「연극을 통한 교육」그룹이 연기자 지망생들 중 하나였던 도미니크 쇼탕-티리는 이렇게 회고한다.

「프로방스를, 그리고 거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 전쟁이 끝난지가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모든 아름다움이 눈앞에 폭발하듯이 전개된 겁니다. 그냥 닥치는대로 받아들였죠. 귀뚜라미 소리, 환하게 불켜진 건물들, 냄새, 색채, 정다운 돌들의 색깔들, 시프레 나무, 이런 모든 것 가운데서 옥외의 한밤중에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미풍에 실리는 연기자의 목소리, 하나 하나의 소리와 동작을 연장하는 바람, 그 모든 것들 위에 가득히 빛나는 별들과 끝이 없이 깊어가는 밤들, 나는 지금도 이런 세계를 새로이 발견하는 사람들의 행복이 부럽습니다.」

지금 다시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때 그 추억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당시 새롭던 프로방스 풍경의 발견과 서사시적인 연극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두 가지의 적절한 상관관계가 어우러져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연출가 롤랑 모노는 이렇게 회상한다. 「쟝 빌라르가 살아있을 때 나는 그저 관객이나 기자 자격으로 아비뇽 페스티벌에 갔었다. 내가 그곳에서 감동적인 체험을 하게된 것은 내가 아직 스무 살이었고 프랑스와 이 세계가 세계 제2차대전의 터널에서 막 빠져나오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초창기의 아비뇽을 찬미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청춘을, 역사의 예외적인 한 시대를, 예술적 사회적인 어떤 모험의 출발을 찬미하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내면에 죽치고 들어앉아 있거나 점령시대의 가정속에 갇혀 지내다가 다시 찾은 자유와 희망속에서, 그것도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모두 한데 모이게된 그 가슴 설레는 출발이었던 것이다.」

내가 아비뇽을 처음 찾아간 것은 1970년이었다. 벌써 페스티벌도 20여년의 역사를 쌓은 뒤였다. 특히 1968년 5월 학생혁명의 소용돌이와 때를 같이하여 미국에서 초청한 리빙 디어터Living Theatre의 충격과 소란이 막 가셔진 무렵이었다. 나는 엉뚱하게도 연극이 아니라 교황청의 그 어마어마한 홀을 가득 메우는 피카소 대전(유화1백67점, 소묘50점)을 구경하러 간 것이었다. 이 대전은 아비뇽 페스티벌의 역사에 길이 남은 전시회였다. 그러나 나는 당시 유학생활 초기여서 모든 것이 낯설었고 또한 모든 것에 다 무지했다. 그래서 막상 아비뇽을 찾아가고서도 어디가서 어떻게 표를 사야하고 무슨 구경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지금도 그대로인 아비뇽 거리만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도시에 기차로 도착하는 사람은 그 역앞 광장과 성문을 지나 똑바로 뻗은 길을 그저 따라 가기만하면 된다. 유명한 레퓌블리크 대로다. 불과 얼마를 걷지 않아서 길 오른쪽에 관광센터가 나타난다. 모든 여행자가 이곳에서 이 지방의 여행안내를 받고 지도를 얻을 수 있는 곳이지만 페스티벌 기간 중에는 공식 공연프로그램의 예약을 하거나 입장권을 사게 되는 곳이며, 예약이 다 끝나 표를 사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각종 공연정보와 인쇄물을 얻을 수 있는 유용한 장소다.

그러나 사실 아비뇽 페스티벌은 그것이 축제인 만큼 「직업적」으로 연극구경을 하는 것 못지 않게 아비뇽의 축제 분위기에 젖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 우선 역에서 내린 사람은 아주 한가하게 그 레퓌블리크 대로를 걸을 일이다. 바로 역 앞 거리에 가득히 진열되어 있는 헌책판매대를 기웃거리며 오래묵은 채색판화들을 감상하고 1950년대에 나온 대가들의 희곡집과 낡고 싼 포켓북들을 뒤적여 보는 것도 프로그램의 일부다. 대로변에는 축제의 깃발이 펄럭인다. 미스트랄 바람이 부는 날에는 그 깃발이 소리까지 내면서 흔들린다. 다리가 아프면 그 흔한 카페의 테라스 의자에 가 앉아 엽서를 쓴다. 무엇보다도 아비뇽은 페스티벌 일색인 만큼, 우선 페스티벌 공식포스터가 찍힌 그림엽서를 고를 수도 있고 유명한 교황청이나 끊어진 아비뇽다리의 그림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조금 더 걸어갈 필요가 있다. 도보로 10분을 채 걷지 않아서 온통 쾌적한 의자와 탁자들로 가득찬 시계탑 광장이 나타난다. 여기에 이르면 비로소 「아! 내가 축제속으로 들어왔구나」하는 실감이 나게 된다. 광장 입구 여기 저기에 세워진 공연선전 입간판들.

이번 제42회 아비뇽 페스티벌속으로 당도한 첫 날 우리들의 발걸음 또한 자연히 시계탑광장을 향했다. 니스같은 큰 도시에서 자동차도 없는 여행자 신세라 가물에 콩나듯 오는 시내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뙤약볕 속을 진이 빠지도록 걸어다녔던 우리에게 조그만 고도 아비뇽이야말로 「작은 것은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좁은 도시, 좁은 골목길이라 걷다보면 어제 본 연극의 배우도 만나고, 모퉁이를 돌다보면 산울림극단의 임영웅 선생도 만나고 조선일보의 정기자도 만난다. 서울서도 만나기 어려웠던 숙대의 임교수와도 마주친다. 아기자기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면서 전에 찾아왔던 이 도시의 지형을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떠올리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가득찬 광장으로 나섰고 그 자욱한 카페들 저 너머로 거대한 교황청의 한 모퉁이가 보였다. 밤에도 잔치는 한창이었다. 광장 한구석 시립극장 정문 계단 앞에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섰고 구성진 플라멩고 가락이 신명을 돋구고 있었다. 널빤지를 땅바닥에 깔아놓고 양손에 굵은 쇠줄을 빙빙돌려 판때기를 쳐 그 소리로 박자를 맞추면서 춤을 추는 더벅머리 청년과 날씬한 검은 머리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거운 쇠줄의 강한 힘과 유연한 몸의 동작이 유별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춤이었다. 공연에 못지 않게 아비뇽에서 훌륭한 것은 관객이다. 아무런 울타리도 없고 입장료도 없는 공짜 구경이지만 그 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거리의 관객은 언제나 연기자가 손에 들고 도는 모자속에다 삽시간에 동전을 가득 채워 주는 것이었다. 아비뇽축제가 다름아닌 프랑스 국립 민중극장(TNP)의 책임자 빌라르에 의하여 태어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하는 광경이었다. 좁은 공간에 갇혀잇는 연극을 거리로, 뜰로, 하늘이 보이는 광장으로, 파리의 거만한 무대로부터 프로방스의 여름밤 속으로 끌어낸 빌라르의 정신은 바로 거리의 보통관객과의 참으로 살아있는 「만남」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아비뇽의 첫 날밤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했다. 북으로는 론느강, 남으로는 뒤랑스강을 끼고있는 이 도시의 특수한 지형 덕분으로 이곳은 모기떼들의 천국이기 때문이었다. 밤새도록 피투성이의 싸움을 치루고 나서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우리의 체류문제를 챙겨주는 아비뇽언어교육센터(CELA)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로베르 브느와씨를 만나게 되었다. 오랫동안 코메디 프랑스세즈나 그밖의 극단에서 배우로 활약하다가 지금은 극본과 시나리오를 쓰며 지내는 직업적 연극인이었다. 그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현황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페스티벌 기간중 아비뇽에서 하루에 수백 편씩 막을 올리고 있는 그 공연물의 바닷속에서 귀중한 길잡이 구실을 해주었다. 특히 쟝 빌라르에 의하여 40여년 전에 개막한 이른바 공식「페스티벌IN」(이른바「場內」)에 못지 않게 지금은 그 중요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게된 「페스티벌 OFF」(이른바「場外」)에 대한 안내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우선 금년도 「페스티벌IN」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이미 언급한 앙트완느 비테 연출의 「라 셀레스틴느」를 비롯하여 소포클레스의 「외이디프스」와 아리스토파네스의 「새」를 연결시켜 3부작으로 만든 쟝-피에르 벵상 연출의 작품, 죠엘 주아노의 해학적인 희극「르 부리숑」등 25편의 연극 외에 알렉시스 그뤼스의 서커스단 공연, 「도시에 온 시인」이란 프로그램 속에 묶어 마르티니크의 대시인 에메 세제르를 소개하고 그의 작품을 낭송하는 10여개의 프로그램, 소련의 위대한 감독 아이젠슈타인의 고전적인 영화 「10월」에다가 영국의 노던 신포니아 오브 잉글랜드의 연주로 원래의 작곡가 에드먼드 메이셀의 음악을 재생시켜 대형 스크린에 비추는 영화의 밤 등이었다. 그 밖에 수많은 음악, 춤, 전시회, 토론회 등을 일일이 소개하기엔 지면이 모자란다. 7월 12일에서 8월 3일까지 2주간에 무려 52개의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때가 때인 만큼 금년의 프로그램 속에는 프랑스 대혁명과 관련된 연극이 많았다. 아르튀르 슈니츨러의 「녹색의 앵무새」나 하이너 뮐러의 「사명」은 둘 다 대혁명을 바로크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수선스럽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쟝-피에르 벵상 연출의 「외이디프스」3부작 역시 민주주의의 탄생과정을 겨냥한 것으로 대혁명 정신의 연장선상에 놓인다고 하겠다. 특히 금년에 주목되는 사람으로는 현재 한창 떠오르는 극작가인 발레르 노바리나Valere Novarina다. 그의 작품이 아비뇽의 무대에 오르는 것은 물론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금년에는 알렝 티마르 연출의 「이동식 아틀리에」, 주베와 불가코프의 텍스트를 섞은 것이긴 하나 극의 바탕이 된 「배우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특히 극작가 자신이 무대장치, 의상, 연출을 맡은 「말로하는 여덟가지의 춤」등 한꺼번에 3개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다수 작품들의 예약이 끝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황처의 뜰에서의 「라 셀레스틴느」를 놓친 것은 심히 유감이었다. 작품 자체도 중요하지만 교황청 뜰의 공연은 아비뇽 페스티벌의 무게중심이기 때문이다. 이장소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광대해서 무려 3천여명의 관객을 「한데 모은다.」이 한데 모은다는 개념은 적어도 아비뇽 페스티벌에 관한 한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에 한데 모였던 대규모 관객들은 나중에 다른 수많은 형태의 창조행위들이 이루어지는 다른 극장들로 흩어지고 그 흩어졌던 관중들이 다시 교황청의 뜰에 별빛을 받으며 한데 모인다. 교황청의 뜰은 동시에 「민중의 것」으로 변하는 위대한 극작품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는 기회이기도 하다. 교황청의 뜰은 세계「초연」을 기록하는 발견의 장소가 아니라 이미 알려진 실험적인 작품을 대중에게 결정적으로 가깝도록 만드는 곳이다. 내가 1978년 교황청 뜰에서 본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런 의미에서 베르나르 도르의 표현대로 「우리시대 연극사에서 중요한 한 단계」였다.

1953년 테아트르 드 바빌론이라는 아주 자그마한 극장에서 초연된 이 실험극을 교황청 뜰의 3천여명에 달하는 관중에게 선보인다고 했을 때 모두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라고 만류했었다. 그러나 아르망 델캉프는 마치 하나의 도전처럼 이 꿈을 실현했다. 1978년 어느 여름 밤, 미스트랄 바람에 씻겨진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오토마르 크레이카 연출로 죠르쥬 윌송, 미셸 부케, 뤼퓌스, 죠제-마리아 플로타 등 호화배역이었다. 벌거벗은 교황청의 벽 앞에 세운 아무것도 없는 타원형의 무대, 가냘픈 나뭇가지 하나가 무대 한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서 있었다. 「나는 아비뇽에 잠시 들르신 나의 아버지의 친구분을 「고도」에 초대했었습니다. 그분이 연극구경을 하신 것은 그분의 일생에 처음이었습니다. 그분은 극이 상연되는 동안 줄곧 고도를 기다리고 계셨지요. 그러다가 모든 관객이 일어서서 요란스럽게 박수를 칠 때 그분은 연극에 정통한 어느 관객보다도 더 진한 감동의 드라마를 체험하셨습니다. 그와 연극 사이에는 아무런 울타리도 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은 감격을 가누지 못했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감격이 제 눈에는 당신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살아 숨쉬게 만들고 계신 유토피아를 정당화해주는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해 20세 되는 어떤 관객은 페스티벌의 대회장 폴 퓌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도 아비뇽의 교황청 뜰에서 「고도」를 통해서 연극의 「첫 세례」를 받았었다. 우리들의 기립박수 속에 프로방스 하늘의 별떨기들이 후두두둑 감동의 불이 되어 떨어지고 있는 듯 했다. 그 이튿날 아비뇽 시내의 모든 서점에서 베케트의 텍스트는 단 한 권도 남아나지 않았다. 교황청의 뜰에서 가진 「고도를 기다리며」의 공연(1978)은 상징적으로 하나의 전환점을 기록했다. 크레이카가 연출한 「고도」는 벤노 베쏭이 연출한 「코카서스 분필위원」에 이어 상연되었다. 그곳에서라고 해서 그 극이 낯설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 반대였다. 그 뜰에서 「대중적」인 관객들을 앞에두고 미셸 부케나 죠르쥬 윌송같은 스타들이 연기하는 「고도」는 새로운 차원을, 즉 크레이카의 말대로 「근원적인 조건과 가장 일상적인 체험속에 드러나는 삶의 메타포어로서의 연극」이 가진 차원을 획득했다.」라고 르 몽드는 격찬했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1951년 모든 청년들의 우상 제라르 필립의 등장으로 그 한 절정에 달했고 아비뇽과 파리의 TNP라는 쌍두마차로 연간 5만의 관객을 동원했다. 1958년에는 공연이 아비뇽 성곽안에 제한되지 않고 론느강을 건너 빌뇌브의 수도원 안으로까지 무대를 확장했다. 그후 60년대 말까지는 교황청 뜰이라는 장소, TNP라는 그단, 빌라르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중심으로 유례없는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프랑스 민중극의 메카로 군림하던 아비뇽은 1971년 5월 28일 쟝 빌라르의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제 아비뇽은 결코 뒤로 물러설수 없게 되었다. 이 작은 도시는 문자 그대로 연극에 「점령」당해 버렸다. 공식 페스티벌이 전개되던 10여군데의 장소로부터 이제는 무려 백여곳의 지하실, 창고, 마당, 학교강당, 뜰에서 막이 오르게 되었고 론느강을 건너 라 바르틀라스 섬과 빌뇌브-레스-아비뇽으로, 그리고 그 보다도 더 먼 채석장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여기에다가 1969년부터는 이른바「페스티벌OFF」가 가세하여 공연의 수는 몇배로 불어났다. OFF는 정확하게 언제부터 생겨나기 시작했을까? 인간의 문화적 모험이란 그 정확한 태동을 짚어 말하기 어렵다. 본래 페스티벌이 벌어지는 아비뇽의 광장과 거리에는 이 도시에 밀려드는 군중에 편승하여 밤이면 집시들이 춤판을 벌렸었다. 그리고 곡예사들과 어릿광대, 아마추어 악단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자생적인 욕망, 창조의 욕망, 보여주고 싶은 욕망, 만남의 욕망, 직접적인 접촉의 욕망, 틀속에 박히지 않고 장외에서 잔치를 벌리고 싶은 욕망―요컨대 저 「원초적인 연극」의 욕망이 거리거리에서 불붙은 것이다. 이제 아비뇽에 왕도는 없어졌다. 우리는 연극의 정글속에서 길을 잃기에 이르렀다.

오늘에는 장내속에 장외가 있고 장외속에 장내가 있게 되었다. 확실한 차이가 있다면 「페스티벌IN」은 주최측의 예산지원을 받아 자체경비를 들이지 않고 공연하는 반면 OFF는 오직 입장수입과 자체 경비에만 의존해야 한다. 흥행이 시원치 않으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금년의 OFF가 내년의 IN이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1989년 여름 OFF본부가 배부하는 화려한 안내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면 아비뇽OFF의 테두리 속에서 하루에 공연되는 작품의 수가 무려 2백 60여편이다! OFF는 아침 10시부터 자정까지 성문안과 밖 도처에서 막을 올린다.

다행히도 아비뇽 도착 다음 날에 만난 로베르 브느와씨는 이미 파리나 기타 지방공연에서 그 중 2백여편을 관람한 경험에 따라 약 40여편의 작품을 추천해 주었다. 그길로 나는 교황청 광장 건너편에 위치한 「아비뇽-퓌블릭-오프Avignon-Pnblic-OFF」(음악학교건물)로 달려가 체류가 가능한 동안 최대한의 좌석예약을 했다. 인근 지방으로 여행을 하는 날을 제외하고 하루 평균 2회(오후공연과 밤공연) 정도를 예약하니 거의 20편이 가까웠다. 1982년에 OFF협회가 가동되면서 해마다 충실한 서비스를 해주고 있는 「아비뇽-퓌블릭-오프」사무실은 매우 기능적이다. 이곳에서는 OFF에 관한 모든 공연 정보를 얻게 되고 50프랑짜리 회원카드Carte Public Adherent를 사면 모든 공연에 대하여 30퍼센트의 할인을 받을 수 있고 각종의 공연정보 서비스를 받게된다.

한편 OFF의 테두리안에서 참가하고자 하는 극단은 늦어도 매년 4월 이전에 신청을 완료하여 6월에는 전체프로그램이 찍혀 나올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급적이면 사전에 아비뇽 현지방문을 전하고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아비뇽-퓌블릭-오프18Rue Buffon-Avignon」으로 수개월 전에 공연장소 목록을 요구한 다음 공연장 책임자와 연락 및 계약절차를 밟고 체류할 거처를 마련하고 다시 OFF와 최종접촉을 함으로써 참가할 수 있다고 안내한다. 참고로 공연장의 시간당 사용료는 우리돈으로 최하 10만원 정도에서 25만원 정도 사이라고 한다.

이제 끝으로 내가 찾아가 본 OFF공연물을 소개해야겠는데 어느새 정해진 원고의 분량이 초과되고 있다. 산울림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아비뇽의 「아르모니」극장에서 막을 열고 있는 이 유명한 극을 나는 결국 파리에 올라가서야 볼 수 있었다)와 김명곤과 다른 아시아 연기자들이 고등학교 교정에서 보여준 도전적이고도 야심만만한 「아시아의 외침」에서도 특히 나는 「연극의 사랑」과 「네번째 벨소리가 울리면……」을 인상깊게 보았었다. 극장 「담배 피우는 개」의 1백여석 남짓한 모든 자리가 완전히 가득차고 불이 어두워지면서 이제 막이 열릴참인데 입구의 문이 열리더니 부부인듯한 젊은 남녀 두 사람이 들어서서 한참을 망설이며 두리번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바로 막에 코가 닿을둣 가까이에 가져다 놓은 보조의자에 가 않는다. 가장 앞 열에 앉아 있었으므로 내게는 그들의 등이 보였고 막에서 너무 가까이 앉게된 그들이 내 보기에는 아슬아슬했다. 남자가 슬그머니 등으로 팔을 내밀어 여자의 허리를 껴안자 여자는 움찔하며 노골적으로 화를 낸다. 필경 공연시간에 늦은 이 부부는 밖에서 한바탕 다투고 들어온 모양이다. 남자가 재차 껴안으려고 시도, 여자가 노골적으로 거부, 화가난 남자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린다. 혼자 남은 여자가 관객석을 돌아보며 「저는 사실 남들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는 걸 제일 싫어하는 성격이예요.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해요……」하고 울먹이며 긴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는 사이에 막이 열리고 무대위의 남자배우(잠시 전에 벌떡 일어나 나간 남자)가 이제나 저제나 여자관객이 진정하기를 기다린다. 어디까지가 연극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연극의 사랑」은 연극속의 사랑인 동시에 무대와 관객사이의 기이한 사람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살라고 만들어진 것일까? 여기에 놀라운 대답을 마련하고 있는 극이다」라고 「누벨 옵세르바퇴르」지는 평했다. 로베르 브느와씨 덕분에 며칠 후 나는 「연극의 사랑」이 끝난 바로 다음에 상연되는 「네번째 벨소리가 울리면……」을 보러가서 다른 관객보다 더 일찍 입장할 수 있었다. 그 기회에 하나의 연극무대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철거되고 다음 연극의 매우 복잡한 무대가 얼마나 신속하게 가설되는가를 목격했다(그짓이 매일 되풀이 되는 것이 아비뇽이다).「네번째 벨소리가……」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 모두가 자동화되어 있는 어느 대형 스펙타클에서 주연급배우가 예기치 않은 일로 출연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그 길고 우렁찬 대사를 외워놓고 그 복잡한 의상을 차려입은 채 분장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두 스페어 배우의 드라마다. 따라서 막이 열리며 나타나는 무대는 그 대형 스펙타클의 무대 뒤쪽, 즉 분장실이다. 여기서도 대혁명이 주제이므로 한 사람은 로베스피에르, 다른 한 사람은 당통의 대역이다. 진짜 배우가 무대로 나가면 이들은 신속히 병정이나 농부나 하인 복장 등으로 의상을 갈아 입고 단역배우로 무대와 분장실을 미친 듯이 드나들어야 한다. 까딱 순서를 바꾸거나 실수를 하면 무서운 무대감독에게 벌을 받는다. 마침내 참다 못한 스페어 주역들이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복장으로 무조건 무대로 뛰어나가 그 감동적이고 웅변적인 대사를 쏟는다. 혁명속의 혁명이요 연극속의 혁명이다.

그밖에 모파쌍에서 따온 독창적인 인형극「오를라」, 담백하면서도 내면으로부터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안녀, 체홉선생」, 그밖의 많은 노래극들, 그리고 무엇보다고 그 음탕한 이야기를 천하지 않게 들려주는 「14세기 아랍의 에로틱한 꽁트」(그 우아하고도 해학적인 여배우는 앞줄에 앉은 내개 다가와서 두귀를 붙잡더니 「이 귀를 보면 당신의 바지속에 담긴 물건이 비둘기를 닮았다는 걸 잘 알수 있답니다」하고 속삭이며 정력에 좋다면서 말린 살구를 한 개 입에 넣어 주었다).

8월 초순에 접어들자 페스티벌은 파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저녁바람은 서늘해졌고 극성을 부리던 모기떼들도 다소 고요해졌다. 오오 축제의 끝은 서글펐다. 하루가 다르게 거리는 한산해졌다. OFF사무실 광고판에는 직업을 구하는 연기자들의 메모가 하나씩 둘씩 나붙기 시작했다. 이제 소란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떠났던 아비뇽의 원주민들이 하나씩 돌아올 때다. 「쟝 빌라르의 집」마당에 가득 널린 연극서적들의 가격이 할인가격으로 바뀐다. 골목의 옷가게는 「50퍼센트 할인」을 광고한다. 오, 신이여, 지나간 여름은 위대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