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SP판을 통해 본 명창의 세계(제6회)

곰삭은 탁성으로 휘감는 소리




유영대 / 전주우석대 교수

이번호에서는 정정렬의 토막소리를 채록하여 그 내용을 검토하고 감상하기로 한다.

정정렬 명창은 1876년에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리에 소질이 있다고 하여 일곱 살부터 여러해 동안 당대 서편제의 거목인 정창업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정창업이 죽자 다시 당대의 명창인 이날치에게서 소리를 배우지만 2년만에 이날치도 타계하자 정정렬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독공하여 소리를 연마하였다. 그 후에도 동편제 소리의 거두인 박기홍, 전도성 등에게서 소리를 배워서 역량을 키웠다.

그는 5명창 가운데 한 분으로 위치하지만 40이 되기 전까지는 목이 궂어서 한 십분 가량 소리를 하면 목이 잠겨버릴 정도였다. 무대에 나섰다가도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여러 차례 절망도 하면서 그럴 때마다 오랫동안 절에서 소리공부를 하면서 공력을 많이 들였다. 그가 명창으로서의 명성을 얻은 것은 1920년대의 일로서 그의 나이 50이 가까워서라고 한다. 그는 서울로 와서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등과 함께 조직을 이뤄 판소리를 육성해 나갔다.

그의 소리는 워낙 궂은 데다가 상성을 내지를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소리의 부침새를 세밀히 하는 등 기교를 다양하게 하면서 소리를 연출하였다. 또한 이면 연출이 뛰어난 것이 그의 소리의 특징이다. 그의 소리를 듣고 있자면 현실의 구체적인 현장에 이미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는 것도 그러한 정확한 이면 연출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곰삭은 탁성으로 그늘을 드러내거나 우조의 웅장함을 한껏 보여주는 것이 그의 소리의 맛이라고 하겠다.

정정렬은 공력을 들여서 소리를 연마한 다음에 다시 판소리를 자신의 스타일로 짰다.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을 다시 짠 것과 마찬가지로 '정정렬제'를 창안한 것이다. 여러 가지를 짰지만 그 가운데서 『춘향가』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에 정정렬이 새로 짠 「춘향가」가 나오니까 세간에서는 "정정렬 낳고 「춘향가」다시 낳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이 작품이 높이 평가되었다. 정정렬은 『춘향가』외에도 『심청가』를 새로 짰다고 하는데, 심청가는 김여란이 부른 것으로 「묘창해지」 한 대목만 전할 뿐 나머지 부분은 확인할 수 없다. 『홍보가』와 『적벽가』『수궁가』도 정정렬 특유의 소릿제가 1920년대에는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승되지 않고 있다. 그외에도 정정렬이 짠 작품으로 『숙영낭자전』몇 대목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그의 소리는 김연수와 김여란에게 전해졌는데, 김연수는 정정렬의 소리에 다시 자신의 스타일을 덧보태어 「김연수제(동초제)」를 창안한다. 그러므로 순수한 정정렬의 소리는 김여란이 온전히 이어 받았으며, 김여란은 다시 그 소리를 최승희와 박초선에게 전승시켰다.

현재 정정렬의 목소리로 남아있는 토막소리는 『춘향가』가 가장 많으며, 창극 스타일로 부른 전집음반으로는 빅터에서 출반된 『춘향가』와 폴리돌에서 출반된 『심청가』,『적벽가』도 있다. 특히 빅터에서 간행한 전집 음반 가운데서 「신연맞이」와 「어사출도」대목은 압권이라 할만하며, 「난향이 춘향의 훼절은 강권하」는 대목과, 「박석티」대목도 뛰어난 연출이 돋보이는 좋은 음반이라 하겠다. 그밖에 「삼고초려」와 「강상풍월」이 있다. 먼저 『춘향가』가운데서 작품의 진행 순서대로 그의 소리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천자뒤풀이」

<중중모리> 자시생천 불언행사시 유유피창의 하늘천(天). 축시어 생지허여 금목수화를 맡어서 양생만물 따지(地). 유현미묘 흑정색에 북방현무 감을현(玄). 궁상각치우 동서남북 중앙토색으 누르황(黃). 천지사방 몇만리 팔우광활 집우(宇). 연대국토 흥망성쇠 왕고래음으 집주(宙). 우치홍수 기자추연 홍범구주 넓을 홍(洪). 전원장무 호불귀라 삼려충의 거칠 황(荒). 요순성덕 장헐시고 취지여일 날일(日). 억조창생 격양가 강구연월 달월(月). 오거시서 백가어는 적안영상 찰영(盈). 세상만사 생각을 허니 달빛과 같은지라, 십오야 둥근달이 기망부터 기울 측(仄). 이십팔수 하도낙서 지류정광 별진(辰). 가련 금야 숙창가로다 원앙금침으 잘 숙(宿). 절대가인의 좋은 풍류 만반지수으 벌일 열(列). 어허월색 삼경야 탐탐정희 베풀 장(張)……이러헌 고운 태도 일생 보아도 남을 여(餘). 백년동락의 짚은 맹세 산과 해에 이룰 성(成). 이리저리 노니다가 갑오 세월 해세(歲). 조강지처를 박대 말어라, 대전통편으 법중률(律).

이 음반은 콜롬비아에서 박아낸 것으로 앞면에는 「천자뒤풀이」, 뒷면에는「기생점고」대목이 실려있다. 광한루에서 춘향이 그네 뛰는 것을 보고 반해버린 이도령이 밤에 춘향집을 찾아간다고 약속해 놓고는 책방으로 돌아와서 밤되기를 기다린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여 『맹자』도 읽어보고 『사략』도 읽어보다가 급기야는 『천자』를 읽게 된다. 그러나 옆에 있던 방자가 이도령을 「거꾸로 되어간다」고 놀린다. 이도령은 『천자』에도 깊은 뜻이 숨어있다고 하면서 이「천자뒤풀이」를 노래하는 것이다.

이 토막소리는 사실 한자어의 성구와 시어가 너무 많아서 노랫말을 한자로 밝혀주거나 주석을 달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에 다소 어렵다고 하겠다. 원래「천자뒤풀이」는 철종때 김세종이 지은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판소리사를 검토하여 보면 판소리는 원래의 출발이 민중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런 점에서 사설도 질박한 민중의 언어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경에 이르면 판소리의 향유층이 양반으로 확대된다. 그러면서 기왕의 질박한 판소리 사설 가운데로 유식한 한문성구와 고사성어 및 한시 구절들이 들어와 혼재된다. 판소리 사설이 세련되고 전아한 모습을 갖춘 것은 이같은 청중층의 변모를 겪은 후의 일이다.

판소리 사설을 우아하고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바꿀 수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바로 신재효와 정춘풍, 김세종, 박유전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전통사회에서 어느 정도 한문을 수학하여 교양을 갖춘 이들이면서 판소리의 문법도 잘 아는 이들이었다. 바로 이「천자뒤풀이」도 그같은 양반의 취향에 기인하여 생겨난 하나의 중요한 변모의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정정렬이 부른「천자뒤풀이」는 김세종이 원래 만들었던 것과 비교하여 볼 때 그 넘나듦이 그다지 크지는 않다. 원래,「천자뒤풀이」에는 베풀 장(張)자 뒤에도 한래서왕(寒來暑往) 추수동장(秋收冬藏)등의 글자에 대한 풀이가 있는데, 이 음반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SP음반에 담을 수 있는 양을 고려하다 보니까 그 부분을 짤라낸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경경정회(耿耿情懷)를 탐탐정회(耽耽情懷)로 읽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신연맞이」

<아니리> 구관 올라가고 신관이 내려오는디 신연 절차가 이렇겠다.

<자진모리> 신연맞어 나려올제 별연맵시 장이 좋다. 모란 새김 완자창네 활개 쩍 벌여 일등 마부 유랑달마 덩덩 그렇게 실었네. 키큰 사령 청창옷 뒷채 잡이가 힘을 주어 별연 뒤 따랐네. 남대문밖 썩내다라 칠패 팔패 청패 배다리 아야고개를 넘겼구나. 좌우산천 둘러봐. 화락춘성 만화방창 버들잎 푸릇푸릇 양류청청 녹수진진 만산화 경좋아, 흐늘거리고 내려온다. 이방 수배 형리 통인 급창 나졸이 옹위하여 권마성 벽제소리 태고적 밝은 날에 요순제 닦은 길로 각자 제비가 말을 타고 십리에 닿았네. 마부야, 네길로 각자 제비가 말을 타고 십리에 닿았네. 마부야, 네말이 낫다 말고 내 말이 좋다 말고, 경마 손 잡아들고 채질 척척 굽일어 일시 마음을 놓지 말고, 경마 손 잡아들고 채질 척척 굽일어 일시 마음을 놓지 말고 든든히 자조 그어라.

신연급창 거동 보소. 키크고 길 잘 걷고 맵시있고 어여쁘고 영리한 저급창. 김제 망건에 대모 관자 자지당줄 달어 써, 가는 양태 평포립 갑사 갓끈 넓게 달아서 한잎 기울어 비씩 써 전배자 전토수 보래 동옷에 방패철육, 앞자락 맵시있게 뒤로 돌쳐 잡아매어 비단쌈지 전주머니 은장도 비식 차 흐늘거리고 내려와.

전배군로 호사 봐. 들너른 벙거지 남일광단 안을 올려 날랠 용자 떡 붙여 둥글짓체 공작미 복포깃을 달아서 성성 전진도리 주먹같은 밀화주 양귀 밑에가 빛나네. 천은맥이 검은 등채 삼색 수건 달아서 바람결에 펄렁. 소리 좋은 왕방울, 걸음 따라서 왱그렁 덩그렁, 꼭두부채 깃은 햇빛에 번듯번듯 위엄을 돋우 걸어「에이 찌르어」이놈 저놈 나지마라.

통인 한쌍 착전립 마상태 그뿐이로다. 경기 충청도 지내여 전라감영을 들어가 객사에 연명하고 영문에 얼핏 다녀, 노구바위가 중화하고, 오수역을 다달아 집사 사서 지경포 꿍―, 별감 일인 색인 일난 부검을 올리거날 「고을로 대령하라」청파총 좌수 집사 수교까지 후배허고 병방집사 거동봐. 외올방건을 주어맺어 옥관자 자지 당줄 앞을 맺어서 둘러싸 세모립 금패갓끈 호수입식 옳게 붙여 게알 탕건을 받쳐 썼다. 남원읍에를 들어가 쿵쾡 처르루.

이 음반은 빅터에서 간행한『춘향전』전집19장 가운데서「신연맞이」대목(Victor 1119-A)으로 이부사의 후임으로 변학도가 신관이 되어 벌리는 남원까지의 부임 행차를 웅장하게 보여주는 소리이다. 1936년 경에 출반된 것으로 보이는데, 도창을 정정렬이 맡았으며, 임방울, 이화중선, 박녹주, 김소희 등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이다. 이 음반은 특히 인기를 누려서 1969년대에는 LP판으로 복각된 바있다.

정정렬이 부른 이「신연맞이」대목은 변학도의 부임 행차를 사령이나 급창 등의 옷맵시와 활기찬 위용에서부터, 서울에서 남원에 이르기까지의 행렬의 노정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연출하는 장단이 자진모리로서 그 너울대는 인물들의 면모가 훨씬 생동감이 넘친다. 주변의 형색, 급창의 모습 등이 당당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급창의 면모를 소개하는, 「키크고 길잘걷고 맵시있고 어여쁘고 영리한 저급창」을 연출할 때의 목구성이 뛰어나다.

「기생점고」

<진양> 「행수기에 월선이」월선이가 들어오는디, 채의로 단장허고 멋지고 사뭇찬 기생이라 추마자락을 거둥거둥 걷어서 세류흉당에다 내려서 갈고, 가만가만이 걸어서 댓돌 앞으 내렷이 앉으며 「예 등대 나오」점고 받더니마는 좌부진퇴로 물러난다.

<중중모리> 「조운모우 양대선이, 우선옥이 춘홍이, 사군불견 반원이, 독자유황에 금선이 왔으냐?」「예, 등대하였소」「팔월부용 군자용 만당추수 홍연이 왔느냐?」「예, 등대하였소」「작월비상에 월학래 취땅에 흔들 비취가 왔느냐?」「예, 등대허였소」「삼월춘풍의 호시절 만개 화관의 수화가 왔느냐?」「예, 등대허였오」「당 팔자 갖은 매답화거올림에 금단이 왔느냐?」「예, 등대하였소」

이 음반은 콜롬비아에서 출반한 것으로 유명한 「기생점고」의 대목이다. 변학도는 남원에 도착하자마자 기생점고부터 치르겠다고 아우성이다. 신관이 부임하면 마땅히 관속의 인계, 인수 절차가 따르게 마련이다. 기생점고도 순서에 있는 것이고 응당 치뤄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변학도는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의 점고는 미뤄둔 채로 기생점고부터 먼저 하겠다고 나선다. 이같은 삽화는 변학도의 무분별함과 호색성을 보여주는 특징적인 것이며, 이조사회의 관료들의 행동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춘향전』마다 「기생점고」대목은 그 나름대로 해학과 풍자로서 당대를 반영하였는데, 정정렬이 짠 이 대목은 특히 풍자성이 돋보인다. 아주 느린 장단으로 유장하게 점고하는 것이 첫대목의 월선이를 점고하는 부분이다. 그의 차림새와 발걸음, 물러나는 모습까지가 철저하게 정돈되어 있으며 아주 다소곳하다. 지금 위에서 채록한 자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정정렬의 『춘향가』사설에는 보이는 것으로 이 진양 장단에 바로 이어지는 대목은 기생 이름만을 숨가쁘게 부러 제키는 휘모리 대목이 이어진다. 이같이 느리게 점고하다가는 해가 다갈 것 같아서 빨리 하자고 재촉하는 변학도의 험악하게 인상 쓴 얼굴이 보이는 듯 하다. 그러면서 그같은 빠른 장단의 이면에는 변학도가 춘향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감추고 있다. 사실, 기생점고의 목적 자체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춘향을 빨리 보고싶어 하는 변학도의 내심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너무 빨리 이름만 불러 대다가 다시 관장의 체면을 생각하여 제대로의 속도로 돌아간 것이 인용한 중중모리 대목이다. 이리하여 변학도의「개성 점고대목」이 완결된 하나의 틀을 갖추고 짜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아주 느릿한 점고와, 빨리 하라는 재촉, 그리고 체면을 위하여 다시 속도를 늦추는 과정이 하나의 두루말이 그림처럼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러한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변학도를 풍자하는 판소리의 여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진양-휘모리-중중모리까지 이어지는 기생점고 대목이 독특하다고 하겠다.

「박석티」

<진양> 박석티를 올라서서 좌우를 바라보니, 산도 보든 산이요 물도 보든 물이다마는, 물이야 그 물이 있겠느냐? 광한루야 잘 있드냐, 오작교도 무사허냐? 동림숲을 바라보니 춘향과 나와 둘이 서로 꼭 붙들고 가느니 못가느니 우든 곳이요, 선운사 종성소리 예 듣던 소리로구나. 북문안을 들어서니 일락 서산으 황혼이 되야 집집마두 밥을 짓노라 저녁 연기가 자욱허여 분별헐 길이 전혀 없구나.

한 곳을 당도허니, 서리 역졸이 모아섰다 문안허거날 어사또 분부허시되, 「명일사 거행을 여차허고, 관장일일사」분부허시고, 춘향집을 찾어가 문전으 들어서 동정을 보니, 이때야 춘향어모는 후원으 단을 묻고 두손 합장 무릎을 꿇고 앉어, 「비나니다, 천지지신 일월성신 화위동심을 허옵시요」

이 대목은 콜롬비아 40131-A면에 실린 유명한 「박석티」이다. 이 도령은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 땅으로 내려온다. 박석고개는 물론 남원에 들어가는 어름에 있는 고개로 오리정이 있는 그 부분이리라. 춘향과 이별하였던 바로 그 장소에 이제는 당당한 어사가 되어서 나타나 남원 땅을 굽어보고 있다. 한 사나이의 여러가닥의 심사의 복잡함을 보여주는 소리대목이다.

정정렬의 소리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압권으로 평가되는 대목이 바로 이「박석티」이다. 노래는 두 대목으로 짜여져 있다. 앞부분에서는 유장한 우조로 당당한 어사의 회포를 노래한다. 「산도 보든 산이요, 물도 보든 물이다마는, 물이야 그 물이 있겠느냐?」라고 그의 여유있는 심사를 토로한다. 창자에 따라 이 대목의 사설이 좀더 길게 술회되기도 한다. 특히 이동백이 이 대목을 잘 부른 명창이었다.

다음 대목에서, 이어사는 서리 역졸에게 다음 날의 계획을 분부하고 바로 춘향집을 찾아 간다. 이 면에 뒤이어서 바로 어사와 장모가 만나는 대목이 이어진다.

「어사와 장모」

<중중모리> 「허허 이 걸인아. 눈치없고 재치없고 야마리 빠진 이 걸인, 이 골서 동냥을 허며 내의 소문을 못들어? 칠십당년 늙은 년이 무남독녀 외딸 하나를 옥중으다가 넣어두고 명재경각이 되았는디, 동냥은 무신 동냥. 동냥 없네 어서 가소」어사또 이른 말, 「어허 늙은이 망령이여. 나를 모르나, 나를 몰라? 어허 자네가 나를 몰라? 경세우경년 허니 자네 분 지가 오래여. 세거 인두백허니 백발이 반연이 되야 자네 일이 말이 아니로세. 나를 모르나. 어허 자네가 나를 몰라?」춘향어머 답답하야, 「내라니 긔 누구여? 말을 해야 내가 아지. 해는 져 저물어지고 명부지 성부지허니 내가 자네를 알 수 있나?」「나를 모르나, 나를 몰라? 어허 이 사람 나를 몰라? 내가 왔네, 나를 몰라? 어허 이 사람 날 몰라? 자네가 진정 몰라? 이가래도 자네 모르겠나?」「이가라니 어떤 이가여? 성안 성외 숱한 이가, 어느 이간 줄을 내가 알어? 말을 해여야 내가 아지」「자네가 진정 몰라? 어허 이 사람 몰라? 우리 장모가 망령이여, 장모 자네가 망령. 어허 이 사람 망령일세」춘향어머 홰가 나서, 「장모라니 웬 소리냐? 남원읍내 오입장이 놈덜 아니꼽고 더럽더라. 내 딸 어린 춘향이가 외인 상대를 아니허고 양반 서방을 허였다고, 공연히 너그가 미워하야 명재경각이 되뒶으되, 내 문전으로 지내면서 빙글빙글 웃으며, 여보게 장모」

이 토막소리는 앞의 「박석티」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어사가 춘향집에 도착하여 장모인 월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토막소리로, 그 구성이 아주 뛰어나다. 월매와 이어사의 대화는 서로 곡조를 달리하여 교차된다. 이어사는 서울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대화 대목은 경조(경토리)로 진행된다. 월매는 계면 가락을 주로 하여 자신의 심사를 보여준다.

월매는 어떻게 그려져 있는가? 오직 딸 생각만 하느라고 사람이 와도 몰라보거나 박대한다. 위기에 처하여 경황없는, 약간 탐욕스러운 촌 아낙네의 이면을 잘 그려내고 있다. 어사가 「장모」라고 부르자, 남원 읍내 오입장이 한량들의 공연한 야유인 줄 짐작하고 「내딸 어린 춘향이가 양반 서방을 하였다고 빙글빙글 웃는 것이 아니꼽고 더럽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계속하여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이어사를 향하여 마치 딴전을 피우듯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 이어사는 바로 자신의 존재와 신분을 장모에게 밝힐 만도 하건만, 그 나름의 여유를 가지고 능청을 떨면서 천천히 대화를 이끌어 간다. 이 딴전과 능청에 의하여 이대목의 극적 긴장감과 넉넉한 여유가 확보되는 것이다.

「어사출도」

<자진모리> 동헌이 들썩들썩 각청이 뒤놓을제, 본부수리 향관창색 진휼감색 착하뇌수하고 거행형리 성명을 보한 연후에, 삼행수 부르고 삼공형 불러라. 우선 고량신칙허고 동헌 수차례로 감색을 차정하라. 공형을 불러 각고하기 재촉, 도서원을 불러 결총이 옳으냐. 전대동색 불러 수미가 줄이고, 군색을 불러 군목가 감하고, 육직이 불러 큰소리를 잡히고, 공방을 불러 재물을 단속, 수로를 불러 거회도 신칙, 사정이 불러 옥수를 단속하라. 예방을 불러 공인을 단속 행수를 불러 기생을 단속. 그저 우근우근 남원 성중이 뒤눕는구나.

좌상의 수령네가 혼불분신하여 앉았들 못하고 이리저리 다니는데, 그때에 어사또는 삼문밖에서 들어오며 사면을 둘러보니 서리역졸 수십명이 구경꾼 함께 섞여 들어서 어사또 눈치를 보는디, 청포역졸 바라보며 눈한번 꿈쩍 발한번 툭 구르고 부채 끝 흔들고 나가니 청포역졸 수십명이 해같은 마패 달같이 들어메고 달같은 마패를 해같이 둘러메고 사면에서 우루루 삼문을 와닥딱 「암행어사 출두야, 출두야」두세번 외치는 소리, 하날이 답싹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는 듯 백일백력 진동허고 공중에 불어붙어 가슴이 다 타진다.

각읍수령 겁을 내어 탕건바람 보선발로 대숲으로 달아나고 역졸들이 장난한다. 이방 딱- 공형 공방 딱-「아이고 아이고. 사대독신이요 살려주오」불쌍하다 관노사령. 눈빠지고 코떨어지고 귀떨어지고 덜미치어 엎어진 놈 상투쥐고 달아나며, 「난리났네」깨지나니 북장구요 동구나니 술병이로다. 춤추던 기생들은 팔벌린 채 달아나고 관비는 밥상 잃고 물통이고 들어가며, 「사또님 세수 잡수시오」공방은 자리 잃고 멍석말아 옆에 끼고 「아따, 이 놈의 자리는 어찌 이리 무거우냐」사령은 나발 잃고 주먹쥐고 흥앵 흥앵 흥앵.

이 토막소리는 빅터에서 출간된 「춘향가」가운데서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어사출도」(Victor 1128-B)대목이다. 이 대목 또한 자진모리 가락으로 어사 출도 장면의 위용을 재현하고 있다. 이 대목은 특히 흥미로운 연출 수법이 돋보인다.

이 소리는 세 부분으로 짜여 있다. 첫부분은 '어사출도 직전'의 긴장된 분위기이다. 여러 담당자들을 불러 단속시키면서 해야 할 역할을 숨가쁘게 일러서 되뇌이게 한다. 일을 맡은 이들의 긴장된 손놀림과 큰 보람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어서 분주한 모습이 한결 건강해 보인다. 특히 이 대목의 직전에 유장한 시창으로 불리는 이어사의 출도를 예감케하는 시구절이 읊어진다.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 촉루낙시 민누락이요, 가성고처원성고라」 탐관오리라면 누가 들어도 가슴 섬뜩한 구절이며, 당대의 민중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시구절이다. 그러길래 이같은 긴장감 다음에 자진모리 가락의 대목이 더욱 신바람이 난다.

둘째 부분은 바로 '어사출도'상황이다. 상황이 벌어지고, 여기저기서 나졸들이 몰려와 일을 척결한다. 이어서 출두 후의 요지경 같은 장면을 흡사 사진을 찍듯이 그려보이고 있다. 관장들이 허둥대며 도망하는 모습도 가히 웃을만 한데, 역졸들이 장난삼아 그동안 자신들에게 군림했던 고약한 이방이며 공방 형방을 방망이로 머리를 쳐버린다. 관비가 물통을 이고 들어와서는 「사또님, 세수잡수시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포복절도할 만하다. 여기서는 빠졌지만, 원래 이 대목에 이어 운봉이 바삐 도망하느라 말을 거꾸로 타고 달아나려 하자 옆에서, 「사또님, 말을 까꾸로 탔으니 다시 내려 옳게 타시오」라고 말해 준다. 그러자 운봉은, 「인제 언제 옳게 탈꼬. 말 모가지를 쑥 빼어다 엉덩이에 둘러 꽂아라」라고 대꾸하는 장면도 있다.

『춘향가』가 가지고 있는 맛을 잘 나타낸 것이 특히 정정렬이 만든 것이라 하겠다. 이번에는 『심청가』가운데서 한 대목을 감상하기로 한다.

「곽씨부인 영면」

김창룡 : <아니리> 곽씨 부인이 패깍질 두세번에 숨이 덜컥 끈어지니 심봉사가 죽엄을 보

고 야단납니다.

정정렬 : <아니리> 마누라, 마누라, 아이고 마누라 죽었네. 마누라, 아이고 마누라, 우리 마 누라가 죽었네. <도섭으로> 죽은줄을 알았으면 약지으러 가지말고 마누라 옆에 앉어…죽은 줄을 몰랐으니, 아이고 여보 마누라, 여보시오 동네 사람들.

이동백 / 김창룡 : 예.

정정렬 : 우리 마누래가 죽었네. 아이고 어쩌리.

이동백 : <아니리> 여보 동네 영감… 우리가 은관곽 젱히 허여 냅시다.

김창룡 : 생여를 해서 부인을 게다 넣고 동네를 보고 하직허니 생여군들이 발이 떨어지지 아니하거날 심청이를 포단에 싸서 생여 뒤에 맺으니 그제야 생여꾼들이 발이 떨어져 나갈 적으, 심봉사는 지팡이를 덮어집고 웁니다.

정정렬 : <중모리> 아이고 아이고 어쩌리, 흐윽. 여보 마누라―. 아이고 여보 마누라. 나도

가지, 나도 가지. 마누라 따라서 나도 가지. 여보시오 마누라. 평생의 원한이 사생 동거 하잤더니 황천이 어디라고 날 버리고 혼자 가. 아이고 마누라. 그대 살고 내가 죽어야 저 자신을 살리지, 그대 죽고 내가 사니 저 자식을 어찌 허며, 앞못보는 죽을 나는 어쩌라고 혼자 가오.

이 음반은 폴리돌에서 간행한 『심청전』전집 가운데서 601-A면의 내용이다. 당대의 명창인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등이 참여하여 만든 이 음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 하다. 최근 이 전집이 LP음반으로 복각이 진행 중이다.

창극식으로 진행된 이 노래는 특히 심봉사 역의 정정렬의 소리가 압권이라고 하겠다. 특히 정정렬이 맡은 심봉사 역은 그것이 『심청가』의 한 사설을 연행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아내의 죽음을 맞이한 한 촌 사내의 재현인 듯한 착각을 준다. 사실 정정렬이 창한 부분은 창이라기 보다는 울부짖음이다. 이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대목은 가난한 데다가, 갓난 아이만 남긴 채, 아내가 죽고 만, 한 눈먼 늙은이의 적막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공감하여 울음을 울던 당대의 청중들의 현실이기도 하며, 그같은 민중의 현실을 대변한 것이기에 더욱 호소력이 강하다고 하겠다.

「약 구하러 가는데」

<중모리> 흔들거리고 천태산을 찾어갈제, 옥류동은 기이하야 앞서간 들어가니 옛집은 있다마는 주인은 없어 간고기산을 넘어가니 망망창해 당도해, 임자 마대 없거늘 그렁그렁 올라가니, 후장내어 뱃머리에 묶어노니, 팔월이라 부울(?)같다. 가는대로 놓아 갈 제, 망망한 탕해며 탕탕한 물결이라. 백반주 갈매기는 홍요로 날아들고 삼산의 기러기는 한수로 돌아든다.

낙양루는 들어가니 어떠한 부인네가 상산으 배를 매고 덜그르르 노래를 헌다. 강남으로 바라보니 삼오산 높은 집은 낙양의 거루이다. 눈앞의 보이는 풀은 소상반죽 이 아니냐. 한곳을 당도허니 어떠헌 늙은 어옹 일엽편주로 이리저리 어깨 새로 ○○노래, 세상은 더도 말고, 되면 잘도 말건마는 안되게 갈 리 없고(?), ○○일 갈리 없네. 이리 저리 양짓는 곳에는 천태산이 올리 없건마는, 말이 말이 없고.

저기가는 저 노인네 천태산 가는 길이 어디쯤 있나니까? 외쳐 묻건마는 장난이라 허는 거둥 목소린줄 알려므나. 한곳을 다다르니 물가운데 있는 새는 산하를 고였는디 ○○을 매고 안으 올라 풍감하게.

이 토막소리는 『숙영낭자전』의 한 대목이다. 원래 『숙영낭자전』은 판소리 열두마당 가운데 하나라고 하지만 19세기에 와서는 실전되었던 것인데, 정정렬이 곡조는 사라지고 소설로 된 채 남아있던 『숙영낭자전』을 가지고 판소리로 새로 짠 것으로, 그 가운데서 「약구하거 가는 대목」이다. 현재 이 소리는 전체 바탕이 박녹주와 그의 제자인 박송희에게 이어져서 전승되고 있다. 정정렬이 소리짜는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89년에 들어서 지금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서 「sp판을 통해서 본 명창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이 글을 연재해 왔다. 이 연재는 우리 판소리사에서 명창들의 존재양태와 그들의 음악성을 음성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시기의 유산이면서도 아직 본격적인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은데 대한 안타까움으로 시작하였다.

이 연재의 앞부분에서 필자는 먼저 sp음반의 출반 상황을 개관하고 목록을 소개하였다. 그때 소개한 목록은 몇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우선 음반의 목록을 작성함에 있어서 고음반을 수집해온 분들이 작성한 목록과 이곳저곳에 단편적으로 소개된 것들을 모았다. 그러므로 잘못 정리된 것도 많으며, 목록에서 빠진 것도 많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목록의 작성을 위하여 당시의 각 레코드 회사의 목록 전반을 확인하려고 했는데, 이 일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어떻든 필자가 그 목록을 소개한 후, 다시 목록의 오류를 지적해주고 빠진 목록을 소개해준 분들이 있어서 몇 가지 목록의 오류를 고칠 수 있었고, 빠졌던 부분을 채워넣을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고음반 애호가협회의 도움과 문예진흥원 자료관에 소장된 르네상스 고음반을 검토하면서 목록의 일부를 수정할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보완된 자료는 다음 기회에 밝히고자 한다.

이번 호까지를 포함하여 네 차례에 걸쳐 일제 때 명창들의 토막소리를 채록하여 감상했다.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을 소개하고 나니 벌써 1년이 되었다. 사실 후기 5명창이라고 칭하는 김창룡이 채록의 대상에서 빠진 것이 가장 아쉽다. 다른 자리에서 반드시 소개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선유와 심상건, 오태석의 자료도 상당수 남아있는데, 이들은 반드시 검토하여 정리할만한 가치가 있는 명창들이다. 아울러 임방울, 이화중선, 김연수, 김초향, 박녹주 등도 지금이 정리해야만 될 시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차근차근 정리할 계획이다.

이 글을 마치면서 다시금, 매우 중요한 제안인 음향자료실Archives의 설립을 요청한다. 구비문학, 구전예술의 작품들을 대중이 쉽게 접하게 할 수 있는 제도로서 음향도서실이 많이 생겨나서 마음대로 우리의 유산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그 음향도서실의 주요한 목록은 물론 지금까지 소개한 sp음반이다. 문화재관리국에는 조사를 마친 자료들이 아무나 쉽게 이용할 수 없는채로 보존되어 있다. 그것은 음향자료실의 가장 중요한 자료목록이 될 수 있다. 현재 정신문화원에는 우리의 설화와 민요를 조사하고 녹음해 둔 테이프가 몇만 개 있다. 그 녹음테이프도 음향자료실의 귀중한 작품이 될 것이다. 우리가 공공 도서실에서 책을 빌리기 쉽듯, 그렇게 손쉽게 음반이나 테이프를 구할 수 있는 그러한 도서실이 지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