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연극평론

독자를 관객으로 만들 수 있는 평론 나와야




김우옥 / 연출가, 서울예전교수

연극평론가의 역할과 문제점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발행하는「劇評회보」 8·9합병호(1989. 7. 1)에 새로 회장직을 맡은 이태주 교수가 「공연평의 전달템포」라는 글을 싣고 있는데 그 글 속에서 그는 극평에 관한 몇 사람의 의견을 인용하고 있다. 그 중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극평란을 44년간 맡았다는 죤 보포르의 인용은 이 글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 여기에 다시 적어 본다. 보포르는 극평가의 역할을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1) 독자에게 공연작품의 성질과 특성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전달한다.

(2) 새로운 작품, 난해한 작품을 분석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3) 연극예술에 관한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북돋아 준다.

(4) 공연작품을 연극계의 일반적 추세와 문학적 맥락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평가해 본다.

극평가의 역할에 대하여 죤 보포르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평론이 일률적으로 어떻게 해야 된다는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극평가의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이 다르다 하더라도 이태주 교수가 인용한 네 개의 역할이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들일 것이다. 여기에 그것을 인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우리의 극평이 어떠하였으며 지금은 어떤가를 살피는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항목중 (1)과 (2)는 공연작품에 대한 분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의 기능중 가장 보편적인 것이며 어느 비평가나 비평의 첫 번째 기능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극평은 공연된 연극에 관하여 어느만큼의 분석을 싣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변을 하기에는 우리의 대부분의 평론은 너무도 빈약한 분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연극평론의 커다란 문제라고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거의 모든 극평이 연극의 평이 아니라 대본의 분석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첫째 극평가들의 안일한 작업태도와 둘째 극평가들의 연극에 대한 무지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희곡은 연극을 구성하는 일부에 지나지않는다. 연기, 배우의 동작, 무대장치, 의상, 분장, 조명, 음향, 소품 등 여러 다른 요소들이 모두 합쳐져 연극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합쳐져서 연극적 시간을 형성하고 있는가가 평론가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줄거리란 대본에 기록된 평면적 사건들이 아니라 무대라는 특정한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요소의 유기적 결합 즉 입체적 시간을 뜻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극평은 거의 모두가 평면적 줄거리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러한 평이라면 구태여 극장에까지 가서 관극 체험을 하지 않더라도 집에서 희곡만 읽고도 쓸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평면적 줄거리로만 극평을 끝내버리기도 한다.


평론의 기능

여기서 우리는 극평의 기능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극평가들은 자기들이 쓰는 극평이 연극의 발전을 가져 온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우리의 경우처럼 줄거리만 옮겨 적는 안일한 극평이 연극계에 어떤 발전을 가져다 줄지는 의심스럽기만 하다. 극평은 앞에서 말한 이태주 교수의 글 속에서 인용되고 있는 헤럴드 클러만의 말「지성적이며, 양식이 있는, 그리고 지식이 풍부한 관객들을 만들어 내는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 극평은 존재합니다」처럼 일차적으로 관객들을 위한 작업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제작자들을 위한 것이든 관객을 위한 것이든 중요한 것은 그 극평이 문자로 기록되어 남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극평의 특성이 하루살이 목숨밖에 되지 않는 연극을 위하여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연극평이 희곡의 줄거리만 전달하는 것으로는 연극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정도를 알기 위해서는 문자로서 남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인 희곡을 보면 되기 때문이다. 희곡이 채 무대화되지 않은 연극탄생 이전의 기록이라면 극평은 연극제작 이후의 연극에 관한 기록이다. 극평이 그런 기능을 충족시켜 줄 때 제 기능을 다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극평이 연극공연의 정확한 기술(記述)을 많이 갖고 있을수록 기록의 가치와 역사적 중요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우리의 선배들이 그러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서 1908년에 공연되었다는 「은세계」의 공연이 창극이었다는 설과 신파극이었다는 설이 팽팽하여 전문학자들간에 크게 논쟁을 벌인 일도 있었다. 불과 80여 년밖에 안 된 공연에 관하여 우리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몇 백년 전에 일어난 공연에 대하여는 전연 알길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비교적 기록이 많다는 서양에서도 연극에 대한 기록이 기술방식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극의 진행에 관하여 알길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세계연극사중 연극의 대중흥을 이루었다는 세익스피어시대에도 그러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배우들의 연기술이라든지 무대운영방식에 관하여 아직도 추측만이 난무할 뿐이다.

80년 전의 공연은 고사하고 5년 전, 10년 전의 공연을 알아보기 위해 극평들을 뒤졌을 때 과연 어느만큼 그 공연에 관하여 알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선배들 때문에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우리 후배들이 또 다시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의 극평은 바뀌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좋은 예가 1973년에 초연된 「초분」의 경우이다. 이 공연은 초연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 연극사에서 우리연극이 리얼리즘연극에서 본격적으로 탈피하는 획기적인 공연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제 그 공연을 보지 못한 젊은 연극인이나 연극학도가 그 공연에 관하여 알고자 하였을 때 어느만큼이나 알 수 있을지? 그 작품이 73년 초연에 이어 75년에 재공연되었고 국제적으로 국내적으로 큰 화제를 일으킨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을 다루는 극평이 많지 않았으며 그 얼마 되지 않는 극평들도 한결같이 그 작품에 대한 막연한 인상과 줄거리로 엮어져있다. 더욱이 그 작품은 여러 연출기법이 동원되어 연기와 무대와 조명이 어울리는 역동적인 작품이었다는 여러주장을 고려할 때 그 작품에 대한 극평은 당연히 그에 대한 상세한 언급과 기술이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는 연극평론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못하였고 극평을 실을 지면이 지금처럼 넉넉하지 못하였다는 구실을 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극평이 당시의 극평을 능가하리 만큼 개선된 것도 아니다. 그 증거로서 최근에 나온 「한국연극」지의 극평란을 보면 공연된 작품의 희곡상의 줄거리와 막연한 인상을 구태의연하게 기록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줄거리나 적은 극평은 보포르가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있는 「새로운 작품, 난해한 작품을 분석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라는 기능을 충족시켜 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극평가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용어의 남용으로 어려운 작품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경우를 흔히 보기도 한다. 예리한 관찰력과 직관력을 갖고 난해한 공연작품을 풀어 나가는 명석함이 극평가들에게서 요청된다 하겠다.

극평의 대상은 독자다. 앞에서 인용한 해럴드 클러만의 이야기처럼 극평의 목적은 독자를 관객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보포르도 그의 글중 (3)항에서 말하고 있듯이 연극예술에 관한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북돋아 주기 위한 것이다. 연극평이 연극에 대하여 갖는 관계는 비판의 방법으로 연극의 수준을 향상시킨다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관객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공연을 소개하고 해설함으로써 관객들의 흥미와 이해를 촉진시키며 그 결과 보다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찾게 한다는 목적이 바로 연극평의 목적이 될 것이다. 물론 그와 역행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작품에 대한 소개와 해설이 오히려 관객을 극장으로 가지않도록 하는 역기능을 발휘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악평을 할 경우 그 공연이 갑자기 문을 닫아야 되는 경우까지도 생길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극단적인 경우는 상업주의 연극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관객에게 줄 수 있는 극평의 영향에 관하여 신경을 쓰기는 상업연극이나 다른 연극이나 다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비평의 이러한 기능은 세계 어디서나 커다란 문제로 논의되지만, 만일 평론의 그러한 기능이 본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 평론가의 책임은 더욱 커진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능은 바로 평론가 개인의 취미와 기호에 의하여 결정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연극평에서 많은 논쟁과 논란을 가져오는 부분이 된다. 한 작품을 보고 나서 평론가가 그 작품에 대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한 작품을 평하면서 이 작품은 좋다 나쁘다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긍정, 부정, 양쪽의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평론가 한 사람의 개인적인 판단이 본의아니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고 할 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보다 조심스럽게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론가가 내리는 판단이 극장으로 가는 관객을 감소시켜 결국 극장문을 닫게 한다는 그런 차원의 영향만은 아니다. 평론가 한 사람의 취미와 기호 때문에 그와 충분히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많은 관객들에게서 관극의 기회를 빼앗아 버린다는 점도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도 그 동안 극단의 많은 증가가 있었고 서울의 경우 하루에도 많은 공연이 일어나고 있다. 공연이 많아질수록 관객들은 어느 공연을 가볼까 하는 결정을 평론가들에게 맡기게 된다. 아직 우리의 경우 평론가들의 극평이 관객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은 갖고 있지 않다고 하지만 머지 않아 그런 영향을 끼칠 날이 올 것이다.

평론가의 가치판단은 잠재관객의 관극체험을 박탈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연극공연에 대한 그릇된 평가를 후세까지 남길 위험성마저 갖고 있다. 이것은 평론가 개인의 오류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계에 범하는 도의적 범죄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책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인용한 보포르의 네 번째 항목이 바로 그것이다.

보포르는, 원문에 보다 가까운 번역으로 바꾸면, 「공연작품을 그 자체로서 그리고 연극제작의 추세와 관련지어서 평가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평론가들은 평가가 평론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론가에게서 평가의 기능을 제거하기란 어렵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그 작품에 대한 자기의 개인적 의견을 말하려고 한다.

그러면 평론가들의 그러한 습관을 약화시키거나 대치시킬 방법은 없는 것인가? 관객개인을 위해서도 해가 될 소지가 있고 연극계의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도 이로운 것만은 아닌 가치판단의 관습은 어떤 식으로라도 지금의 관행에서 탈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것을 고치는 첫 번째 방법으로서 평론가 자신들이 자기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나의 기준은 무엇인가?」「그 기준은 어느정도의 객관성과 신빙성을 갖는 것인가?」「그 기준으로하여 생기는 오류에 대하여 나는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평론가들에게 겸허한 자세를 갖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연의 가치판단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반대한 마이클 커비는 가치판단이란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것이며 이 주관적인 가치판단이 결국 취미의 표준화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평을 미리 읽고 공연을 관람할 경우 관객의 관극체험은 이미 평론가의 주관적인 가치판단의 영향을 받게 되어 관객자신의 순수한 체험을 박탈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가치판단이 주가 되는 평론을 「원시적이고 어리석으며, 거만하며 부도덕」한 것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두 번째 방법은 평론가가 어쩔 수 없이 가치판단을 내려야 한다면 그 판단을 입증할 충분한 근거를 대라는 것이다. 우리의 평론가들이 범하는 과오중에 중요한 과오가 바로 이 점이다. 많은 우리의 극평들이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채 좋고 나쁘고를 결정지어 버리고 있다. 물론 지금 연극평을 수용하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충분한 지면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있다. 특히 신문의 경우 겨우 6,7매의 원고지에 평을 싣자니 설명이 충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면의 문제만은 아니다. 6,7매보다 더 적은 지면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평론가가 내리는 가치판단에는 짧은 대로의 이유가 주어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가치판단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주기 위해서는 평론가는 연극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 지식이란 연극의 이론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연극제작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미국의 연극평론가 중 가장 원만한 비평작업을 하였다는 헤럴드 클러먼도 미국의 극평가중 연출자나 배우의 임무는 말할 것도 없고 연극의 제작과정을 아는 평론가는 참 드물다고 개탄하였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만들어진 연극에만 열중을 하지 연극의 과정도 모른 채 연극에다 등급이나 메기려 든다고 불평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연극평론가들이 연극이 어떻게 작용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며 그들의 극평 속에서 제작의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고 비난을 하기도 한다.

평론가가 자기가 내리는 판단에 대하여 충분한 이유를 밝히게 되면 그 가치판단에 대하여 독자 자신이 다시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판단에서 오는 피해를 경감할 수 있다. 한 평론가가 펼치는 이론을 읽음으로써 그 평론가의 논리 자체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고 또 그 평론가의 신빙성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이로울 뿐 아니라 연극을 제작한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연극평론은 기본적으로 독자를 위한 것이지 연극인들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타당성을 갖는 평론가의 이론은 작품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극평의 또 한 가지 문제점은 극평을 독자보다는 연극인들에게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물론 겉으로는 신문이나 잡지의 독자를 위해 쓰고 있지만 그 내용 중에는 연극제작들에게 주는 충고와 꾸지람이 들어있다. 희곡은 어떻게 고쳤어야 했고 연출은 어떤 점을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쉽고 연기는 좀더 대담했어야 했을 것이라는 등 이것은 평론가가 그 평을 왜 쓰는지 그 목적자체에 혼란이 온 것이 아닌가 의심케 한다. 연극평론은 연극 그 자체와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연극과 관객을 연결시키는 중매역할을 할 뿐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독자라고 생각할 때 그들에게 연극을 어떻게 만들었어야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물론 평론가에 따라 연극인들에게 충고를 주기를 좋아할 수도 있고 그것을 자기 평론의 특징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평론가 개인의 취향일 뿐이지 평론의 정석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많은 평론가들이 연극인들을 향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연극인들의 전문성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보포르도 그의 글 속에서

「아무튼 평론가의 관심은 독자에 대한 봉사이다. 그는 작가, 연출가, 배우, 그리고 다른 극장예술인들에게 그들의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는 외국의 많은 평론가들이 보포르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빌리지 보이스에서 평을 쓰는 쥴리어스 노빅도 에릭 벤트리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배우들을 위하여 평을 쓰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연기자에게 너는 이렇게 했는데 그것은 이렇게 했어야 되었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작가에게 당신은 이렇게 썼는데 그것은 이렇게 썼어야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평을 쓰면 독자들을 남의 이야기나 엿듣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평론가는 독자들에게 이야기하여야 하며 무슨 이야기를 하던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그 독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평론가의 독단적인 가치판단을 완화시키는 또하나의 방법으로 관객의 반응을 기록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공연에 있어 배우와 관객간의 생생한 교류는 특별한 주의를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극속의 인물들간의 관계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배우와 관객과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평론가는 무대위에서 일어나는 일뿐 아니라 그것이 관객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기록하여야 한다.

이처럼 평론가가 어떤 공연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면 그것은 또한 역사적 사실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관객전체의 반응뿐 아니라 관객 개개인의 의견이 흥미있을 경우 그것을 기록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한한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기록된 것이 한 평론가의 권위주의적인 평가보다 더 객관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처럼 관객의 반응이 극평속에 포함되었을 때 평론가의 위험한 가치판단이 대치되거나 약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연극의 발전에 한 몫하는 평론활동

지금까지 지적된 우리연극평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극계는 연극평론의 도움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연극평론가들은 70년대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펴기 시작한 이후 끊임없는 연극평론 활동을 통하여 공연활동을 알리고 좋은 연극이 나오도록 여러 가지 노력을 해 왔다. 우리의 연극평론가들이 대부분 대학교수라는 조건은 이러한 작업을 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을 하기도 하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존심이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꿋꿋이 외롭고 힘든 작업을 하여 왔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 , 연극평론가들은 서울 극평가 그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우리 연극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일년내내 성실한 관극과 평론작업을 마친 뒤 한 해의 공연중 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선정하여 시상하기도 하였다. 몇 개의 신문사나 다른 단체들의 시상제도에 대한 불신도 불신이지만 뭔가 연극평론계의 순수한 정열과 애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이 제도를 시작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거진 10년을 지속해 온 이 활동을 알게 모르게 우리 연극계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연극평론은 연극공연을 대전제로 한다. 따라서 좋은 공연들이 터져 나왔을 때 평론도 활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연극계의 활동이 저조할 때 평론계도 저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연극계는 거의 언제나 저조하고 침체된 활동을 해 왔다는 이야기를 들어 왔다. 또 사실 어떤점에서 그 말이 맞는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속에서도 연극평론계는 끊임없이 움직였고 꾸준히 평론활동을 해 온 것은 매우 주목할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연극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극단도 엄청나게 늘었고 새로운 얼굴들도 많이 등장했고 작품들도 다양해졌고 공연도 많이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연극평론계는 어떻게 대처하며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지켜온 연극평론계의 모습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 시대의 변쳔에 따른 평론계의 움직임은 평론가들만의 관심꺼리가 아니라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 그리고 이 나라 문화계 전체의 관심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새 시대를 맞이한 지금, 우리 나름대로의 연극평론계에 대한 요청이 없을 수 없다.

첫째, 지금 서울에만도 극단이 2백개가 넘는다. 그리고 일시에 공연되는 작품의 수효도 하루에 20개가 넘는다. 공연장도 많이 늘어서 서울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이 넓은 지역의 많은 공연들을 고루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극평계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한정된 공연만이 평론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식이다. 어떻게 지금의 활동을 확대시켜서 보다 많은 공연이 평론의 대상이 될 것인가가 시급한 문제로 부각된다. 한정된 공연에 집중되는 현재의 평론을 확산시켜 나가는 방법이 모색되어져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시대가 복잡해지면서 연극을 통한 인간의 표현도 다양해지고 있다. 우리가 종래 해오던 연극 이외에도 판토마임, 행위예술, 퍼포먼스, 일인극, 인형극 등 여러 가지 형태의 공연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속에서 연극평론은 익숙한 연극의 평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상응하는 폭넓은 활동이 기대된다. 그래서 여러 다른 형태의 공연들이 가능한 한 많이 연극평론가들의 기록에 의하여 보존되었으면 한다.

둘째, 민족극이라고 새로 이름 붙여진 마당극은 우리나라에 서양식 신극이 도입된 1910년대 이후 힘들게 탄생한 유일한 우리식 연극이다. 주로 젊은이들에 의하여 명맥을 유지해 온 이 연극은 아직 거칠고 서툰 데가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작품의 주제 설정이라든지 연기 내용이라든지 무대운영 등에 있어 미숙하고 매끄럽지 못하긴 하지만「우리식」이라는 점에서 가꾸고 키울 중요한 공연양식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대한 임무가 연극인들만의 것이 아니요 평론가의 몫도 있음을 고려할 때 그 동안 우리 평론가들의 관심과 애정이 흡족한 것이 아니었음을 고언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연극계는 제도권 연극과 마당극 계열의 연극으로 이분되어 있다고들 한다. 서로가 서로를 백안시하고 배타하는 사이는 아니라 해도 소원한 관계임은 틀림없다. 이 2개의 연극을 하나의 장에서 서로 배우며 서로 도우며 서로 보아주는 관계로 만든다는 것은 우리 연극계의 힘찬 발전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 극평계의 활발한 참여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지금 다소 침체되어 있는 마당극 계통의 공연도 대폭 평론의 대상으로 수용하여 이 분야가 좀더 활성화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줄 안다.

셋째, 현재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극평가들의 수효가 앞서 말할 극단수와 공연작품의 증가를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연극 공연평을 위한 지면은 잡지의 증가로 인해 늘은 것은 사실이나 몇 명되지 않는 극평가들이 어떤 경우에는 겹치기로 쓰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증가된 공연을 고루 취급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에 대비해서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극평가 워크샵을 개최하여 신인 극평가 양성을 위한 노력은 하였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70년대부터 평론활동을 계속해오던 평론가들이 현재 극평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적은 수의 극평가들을 더욱 적게 만들고 있으며 경륜과 체험을 축적한 평론가 대신 신진 평론가들로만 연극평론계가 구성되어 있다는 아쉬운 상황을 이루고 있다. 활동을 중단한 평론가는 각자 그럴만한 이유를 갖고 있겠지만 우리의 연극계, 그리고 평론계를 위해 그들이 다시 일선에 복귀하여 왕성한 활동을 재개하였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넷째, 반복하지만 연극평은 독자를 위하여 쓰여진 것이며 독자를 관객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극평은 연극 또는 공연단체의 훌륭한 대변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변인이란 연극이나 극단을 옹호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좋은 공연일 경우 그것을 충실히 알려 주었을 때 관객을 모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그런 점에서 평론가의 교육적 역할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극단과 공연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수효는 별로 변동이 없는 이 딱한 상황에서 잠재관객들에게 평론가의 교육적 역할이 충분히 발휘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고 급기야 극장을 찾게 되기를 기대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 물론 모든 공연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관객이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공연이 있을 경우, 관극이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판단될 경우, 평론가들의 교육적 역할이 더욱 분명히 이루어져 연극열이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평론가들은 극장에 관객이 오지 않는 이유를 연극이 재미없거나 잘못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관객이 없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연극인의 책임이다. 좋지 않은 연극에 평론가가 관객을 오도록 할 이유도 없고 설사 그런 노력을 하더라도 관객은 안 올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 좋은 경우, 정성스럽게 만들어졌고 관객이 볼 만하다고 생각될 경우 우리의 평론계는 관객에게 그 잘 만들어진 연극을 체험할 기회를 갖게 하기위해 어느만큼 자기의 교육적 역할을 발휘하였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특정한 극단이나 공연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독자에 대한 봉사로서 그들을 위해 길잡이 역할을 성실하게 행사했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이제 우리의 극평계는 초기의 동호인의 집단성격이나 아마추어적인 기호의 차원에서 벗어나 좀더 전문성을 띤 활동으로 발전하였으면 한다. 아무라도 연극평을 하나 쓰기만 하면 곧 연극평론가로 둔갑해 버리는 우리의 상황이 안타깝다. 평론가의 극평을 놓고 극단과의 유착에서 나온 글이라고 설왕설래하는 모습은 더욱 그러하다. 권력있는 매스컴이 주최하는 행사에 시종 극찬만 늘어 놓는 평을 써 내는 평론가를 비양거리는 세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사태들이 평론가의 전문성과 윤리성을 파괴하는 경우들이다. 평론가 각자가 투철한 소명감을 갖고 안이한 매너리즘에서 탈피하여 성실하고 창의적인 비평작업을 할 때 비로소 전문성이 발휘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전문성이 발휘될 때 우리 연극계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