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부터
전봉초 / 예총회장
문화부 발족에 따른 문화예술정책의 전환과 전망에 대한 의견을 부탁받고 문화예술계에서 종사하는 단체의 대표자로서 한마디 소회를 개진하고자 한다.
먼저 지난 1월 4일 대망의 문화부가 출범한 것을 마음으로 축하하며 또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주시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문화부가 독립, 신설되어야만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문화발전을 기하리라는 데에서 우리 문화예술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될 날을 학수고대한 것이다. 물론 문화공보부 시절도 문화예술정책을 나름대로 펴온 것은 사실이지만 솔직히 지적하자면 공보행정이 문화행정보다 우선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문화공보부가 정부의 정치, 행정을 대변하는 대변인의 입장이라고 볼 때 당장 가시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것이 정치행정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쪽이 우선이 아니될 수 없고 또한 그러한 함수관계로 인해 문화공보부의 최고 책임자도 언론인 출신이 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더욱 문화쪽의 행정이 제2순위로 밀려났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문화라는 것은 일반 행정과는 달리 행정위주의 개념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화라는 보이지 않는 관념형태를 다루고 처리해감에 있어서는 문화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파악하고 임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문화의 개념 파악이 사전적인 해석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문화는 정신적인 가치인 동시에 생명을 지닌 것이어서 어느 일부분을 놓고 문화라고 지칭하거나 여길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화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생활정신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내가 누구인가를 인식하고 생활화함이 문화의 실체라고 생각된다는 것을 나는 기회있을 때마다 누누히 주장해온 바 있다.
이제 신생 문화부에 바라는 것은 창조적 측면에서 각 예술장르들을 지원하는데 인색치 말아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화정책은 참새 눈물 정도의 문공부 예산에서 전통문화로서의 문화재들을 보존하는데만 치중하고 창작적 측면의 예술장르를 지원하는 데는 소홀한 감이 없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 살아숨쉬는 문화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물론 전통문화 보존사업이 잘못 되었다는 주장은 아니다. 문화유산으로서의 전통문화를 발굴하여 보존하고 계승시키는 작업은 지금까지의 활동보다도 더 활발히 전개되어야 한다고 보지만, 그것을 현재 일반적인 창조적 측면에서의 예술장르를 지원하는 일과 동일 위치에 놓고 판단하는 일은 옳지 않다. 문화유산으로서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계승시키는 일은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일인만치 그것이 어디까지가 진면목이냐 하고 가려내는 일만 분명해진다면 힘을 기울이는 일은 예산 뒷받침쪽만 남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활동하고 있는 창조적 측면의 예술장르를 지원하는 일은 가시적인 대상이 드물기 때문에 눈으로 파악하기가 막연하여 재정적인 지원대상으로 바라볼 때 기준을 세우기가 힘든 측면이 없지 않겠지만 문예창작 지원의 기준선을 과감하게 세워 창작인들의 의욕을 북돋아 주는 일이 문화부의 우선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년생 화훼가 아닌 삼림으로서의 문화를 생각할 때 묘목에 물을 제때에 주고 가꾸는 일을 소홀히 말아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창작분야 지원은 솔직히 말하자면 현상유지만 억지로 하고 넘어가자는…… 마치 미니싸이즈의 양복을 자꾸 성장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밖에 없으니 이 양복에 몸을 맞추라는 식의 지원방식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따라서 문화예술진흥원도 이제까지의 실태로 보아 과감한 의식전환이 없는 한 현상유지 기관으로 자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날이 갈수록 목적이 불분명한 상태로 떠밀려가고 있는 인상마저 느끼게 한다. 문예진흥원의 존재가치를 확실하게 하는 일은 전 최병렬 문공장관이 천명한바 있는 국고지원을 지체없이 실행에 옮겨 지원 사업에만 전념하도록 해주는 일이다. 앙드레 마르로는 20세기 프랑스에 문예부흥의 봉화를 높이 올렸다. 정부예산의 0콤마선에 머물고 있는 문화부예산을 대폭 늘리는 일에서부터 갖가지 유토피아적 구상의 실천과정, 그리고 문화예술진흥원 존재이유 재조명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문화계 인사들의 따가운 시선이 집중되어 있음을 느껴 주었으면 한다.
문화논단 / 문화부의 신설과 역할
신설 문화부에 바라는 마음
전숙희 / PEN회장
우리들의 오랜 숙원이던 문화부가 신설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흐믓하고 감격스럽다.
게다가 초대장관이 우리 모두에게 오랫동안 그의 글과 말과 신선한 아이디어를 통해 앞서가는 문화계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 이어령교수가 되었다는 일 또한 모두가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이렇게 문화부가 독립되었다는 일 자체가 그렇고, 그 초대장관을 이어령교수가 맡게 되었다는 두 가지 충격이 우리들 모두를 신선한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채워준다.
따라서 TV는 물론 신문지면마다 신설 문화부에 바란다는 요망사항을 연재해 오기도 했다.
그 커다란 기대에 오히려 앞서갈만큼 신설 문화부의 이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29가지의 계획안까지 선명히 밝혀 놓았다.
이 설계도야말로 그가 장관으로서의 즉흥적인 계획이나 발표가 아니라, 평소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서 끓고 있던 이 나라 문화창달에의 정열이요 꿈이었으리라고 믿는 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좋은 아이디어와 조언을 연재한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의 말씀을 참고하고 또 이장관 자신의 꿈과 뜻을 펼치는데 말없이 뒤에서 도와주는 일만이 필요한 것이지 더 이상 같은 말을 되풀이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이미 수차례 사양했으나 국제 펜 클럽이라는 문화계의 한모퉁이를 책임지고 있는 관계로 같은 뜻이라도 좋은 일이라면 되풀이하는 것도 격려하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 나의 입장에서 4가지 일만 중점적으로 더 말하고 싶다.
1. 지방문화 활성화에 나는 깃발을 들고 싶다. 만인이 공유하고 향유해야 할 문화를 도시인들만이 누리고 도시에 와야만 천재도 둔재도 빛을 보고 농어촌 방방곡곡에서는 땀흘리고 일만하고, 문화라는 특권행사는 참여는커녕 구경도 할 수 없다는 이 나라의 문화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가. 방방곡곡에 지방문화원이나 서원이나 도서실(관)을 설립해 각자가 자기고향의 전통문화를 지켜나가고, 발굴하고, 또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임으로 삶을 위해 땀흘리며 일하는 마을에도 문화의 기쁨과 감격속에 잠겨들게 하고, 또 한편 우리의 미풍양속이던 주경야독의 건전한 풍토를 회복해 나가기 바란다. 한 줄의 글, 한 권의 책이 주는 어둠에서의 빛과 구원의 기쁨, 삶의 진실과 가치는 활자문화의 영원하고도 위대한 힘이 아니겠는가. 기타 각종 순회공연, 순회독서실등 더 구체적인 안은 문화부에서 이미 성안되어 있으리라고 믿는 바이다.
2. 다음은 국제적인 문화흡수와 문화홍보를 좀 더 다각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실천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래도 무용이나 국악 등 언어나 활자의 장애를 받지 않는 부문은 현재까지 상당한 실효를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미술이나 음악, 연극, 특히 번역을 필요로 하는 문학의 교류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지의 상태에 있음은 실로 문화선진국으로서의 길이 멀고도 아득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번역사업에 투자를 하고 육성해 언어의 장벽부터 헐어 나가고 우리의 고유문화와 선진문화 등을 모두 활발히 섭취하고 홍보해 나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아시아권과 구미각국은 물론 이제는 동구권 각국의 문도 열려 우리의 문화와 문학을 받아들이려 갈망하고 있다. 한국문화의 세계화는 남북통일의 길도 빠르게 하는 촉매작용을 할 것이다.
3.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마을을 만드는 것도 환영하는 바이고 그 모든 계획이 성취되기를 바라지만 우선 문학인들의 발표지면인 최소한도의 문학잡지만들이라도 살아나갈 길을 열어주기 바란다. 문학이 쓰는 사람들의 것만이 아니라 읽고 공감하는 독자들이 있으므로 그 생명과 가치가 있다고 볼 때 원고료 지원을 중단한 대신 방방곡곡 도서관에 구독지원을 해 주는 것도 이 나라의 문학의 길을 열어 주고 정신의 양식을 채워주는 획기적인 문화정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위 문예중흥기에 이르러 모두가 흥분하고 있는 이때 지금껏 그 나마 유지해 오던 문학잡지마저 몰살되어진다면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을까.
4. 신설문화부장관은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또 해야 할 일도 많고, 따라서 이사람 저사람, 이단체 저단체에서 요구조건도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기는 누구의 요청이건 다 이유있는 요구일터이니 괴롭더라도 일단 남의 말을 잘 들어 준다음 소화하고 선택해,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못하더라도 성의만은 고루 베푸는 진정 우리들의 문화장관이 되어주기 바란다.
문화부가 신설되고 이장관이 임명되자 항간에서는 불란서의 드골대통령이 작가인 앙드레말로를 문화상으로 임명해 불란서문화를 보다 더 높고 멋진 차원으로 이끌어 올린 데 공헌한 바를 상상하는 분위기들이 농후하다. 그러나 물론, 불란서는 불란서의 전통이 있고, 한국은 한국 나름대로의 할 일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한가지 대표적인 공통점은 요구한다면 나는 이장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앙드레 말로는 문화상이 되자마자 파리시장도 아니고 청소부도 아닌데 파리시내의 수 백년 묵은, 거무죽죽 회색으로 변해버린 건물들부터 때를 벗겨 버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도 벗길 수 없으리라던 빠리시내의 때를 말끔히 벗겨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장관에게 서울시의 울긋불긋 마음대로 서있는 건물들의 때를 벗겨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차라리 우리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가난했을 때, 그 전후의 판자집 속에서도 좋은 글을 쓰고 좋은 그림을 그리며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아끼며 인정하며 사랑하던 우리들 문화인들의 마음이 백년도 되기 전에 왜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욕망의 때들로 더러워졌는지, 이 장관의 그 예지와 능력으로 우리들 마음의 때를 말끔히 먼저 벗겨 주실 수는 없을까요?
즉 문화계는 베풀기 전에 먼저 깨끗이 텅 비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위에 참된 가치로 채워 주십시오."
일전에 나는 어느 사설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우리는 이장관이 29개 사업을 벌이면서 구체적 재원방안없이 돈이 필요하기보다는 관·민 협력이 필요하다고 막연히 대답한데 대해 우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읽고 <관·민의 협력>이란 실로 그 단합이 이루어질 때 어떤 예산보다도 더 크고 확실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보았다. 이 장관은 그 생각과 그 스타일대로 무언가 해내리라고 믿으며 신설 문화부의 후원부대들이 이토록 튼튼히 서있는 이상, 소신껏 새집을 완성해 주길 부탁드린다.
문화논단 / 문화부의 신설과 역할
문화정책의 과제
김여수 / 서울대 교수
민족사적 영욕으로 점철된 한 세기를 마무리하고 새 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90년대의 새벽에 출범하는 문화부에 대해 거는 우리의 기대는 자못 크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우리사회가 과연 경제발전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냐? 할 수 있다면 그 형태는 어떤 것이 될 것이냐? 우리 사회가 과연 번영을 위해 필요한 국민적 화합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냐? 그리고 과연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냐? 또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선진국>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분명치 않다.
우리가 한때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대답들이 이제는 그 적실성과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한 때 모방의 대상으로 삼았던 서구의 산업주의적 발전모델 자체가 지금 중대한 변혁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거 수십년간 모방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여러나라들과 여러 분야에서 경쟁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으며, 앞으로의 발전 방향에 대하여 저들이 줄 수 있는 교훈과 영감은 그리 많지 않다. 90년대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21세기의 문화적 주도권은 20세기 후반의 구도 그대로 유지될 수도 있고, 다시 유럽으로 되돌아 갈 수도 있고, 또 우리의 삶의 터전인 동북아시아로 옮겨올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부의 출범은 지난 20여년간의 경제발전에 따른 생활수준의 향상에서 오는 이른바 <문화생활>에의 국민의 증대된 욕구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전환기적 과제들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화란 한 공동체로 하여금 그것이 직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들에 적실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편과 도구, 관념과 가치들을 제공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오늘 문화부가 출범한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이 우리의 문화정책에 부과하는 일차적 과제임은 명백하다. 그것은 문화정책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이제 우리의 문화정책은 한갓 <문예진흥>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의 문화정책은 종래의 장식적이고 체제홍보적 종속적 위치에서 탈피하여 핵심적으로 주도적 기능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경제발전이 참된 인간적 삶을 가능케 하는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나라의 발전이 이룩된다고 볼 때, 경제발전의 추진력이 되고 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적 가치가 없다면, 그 사회는 결국 활력을 잃고 쇠퇴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절대빈곤의 퇴치를 위하여 우리가 채택했던 모방적 국가발전 전략에서 보면 문화적 가치들은 타율적으로 주어진 것들이었으며, 따라서 문화의 위치는 종속적이고 부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방을 넘어서 선진화를 향한 국가발전은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문화적 종합을 요구하고 있으며, 따라서 문화는 국가발전의 핵심부에서 이를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문화부가 정부 부처간 서열에서 문교부에 뒤이어 일곱 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지만, 과연 이러한 거창한 문화정책적 과제를 거머쥘 수 있겠는가? 아니 능력의 문제에 앞서, 과연 문화적 종합의 과제가 정부의 행정기관이 맡아야 할 성격의 것인가? 이러한 당위성에의 물음은 특히 우리가 지향하는 자유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보다 첨예하게 대두된다.
최근 문화와 문화정책에 대한 논의는 묘한 이중성을 노정하고 있다. 하나는 문화적 무간섭주의에 대한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활동에 대한 보다 강화된 정부지원 요청이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라는 표어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듯이 이 주장은 흔히 같은 맥락에서 같은 사람에 의해서 제시되기도 한다.
문화는 개인적 자유의 영역이며 따라서 어떠한 정책적 개입도 부당하다면, 아무런 정책도 없는 것이 바로 최상의 정책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문화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떠한 정책적인 고려도 부당한 것이 된다. 문화정책의 이념적 입지 정립의 과제야말로 앞으로 문화정책이 풀어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국가는 국민에 대하여 어떤 특정 문화개념을 강요하거나 사회의 집단적 가치결정을 대행하는 <관제문화>를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체제비판적 문화수요에 바탕한 <민중문화>와의 첨예한 대립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문화의 참된 사회결속 기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국가발전 전략에 있어서 문화정책의 효율성과 적실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문화정책의 고유한 과제는 문화적 종합의 내용에 대한 정책적 개입이 아니라, 문화적 종합의 자율적 성취를 위한 문화활동의 진흥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것에 의하여 다양한 양질의 문화가 창출되고, 공급되고, 공유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적절하게 마련하여 제공하는데 정책행위의 일차적 목표가 주어져야 한다.
문화정책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문화가치의 목표에 대한 결정이 국민들 개개인의 문화적 욕구와 이념을 수렴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합의의 문화>이어야만 하며, 문화정책은 이러한 합의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적절하고 객관적인 여건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특히 정부안에서의 문화정책적 인식의 전환을 위한 <계몽적> 작업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오늘 출범하는 문화부의 모습이 우리의 당초 기대에 비해 많이 미흡한 것도 부서별 이기주의뿐만이 아니고 문화정책적 우선성에 대한 몰이해를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선진화를 향한 국가발전에 있어서 문화정책의 구체적 역할은 넓은 의미에서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정책적 노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주거환경을 포함한 우리의 일상 생활환경의 설계, 체육과 관광을 포함한 국민의 여가선용방안, 노동환경의 설계, 각종 문화사업, 그리고 각급교육의 형식과 내용도 모두가 문화정책적 관심의 대상영역이라는 것을 인식시켜 나가기 위한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문화부가 이 방대한 영역을 <관장>할 수도 없고 또 해서도 안된다.
문화정책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는 전통문화, 고급문화, 그리고 대중문화의 단절과 반목을 극복하고, 이 3가지 요소가 적절한 상호보완적 위치를 차지하는 새로운 문화적 종합을 유도할 수 있는 객관적 여건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다.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문화는 자신의 과거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와도 대화하면서 영향을 줄 수 있는 역량을 바탕으로 해야만 한다. 문화정책은 한편으로는 세계문화와 개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 인간적 번영을 실현할 수 있는 문화적 종합이 실현될 수 있도록 제반여건을 마련하기 위하여 보다 광범한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