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한국미술의 주요쟁점과 작가들
서성록 / 미술평론가
거칠게 구분지어 말하면, 80년대는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그리고 탈모던적 형식을 취하는 미술의 시대라고 특징지을 수 있으리라 본다. 80년 서울의 봄은 끝내 실현되지 못한 채 광주민주화 항쟁으로 번지고 많은 인명 살상과 값비싼 희생을 치르면서 비합법적인 5공화국이 탄생되자, 이 땅의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대다수 국민들과 지식인들은 다시 한번 뼈아픈 좌절감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80년대에 들어와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젊은 세대는 거의 예외없이 그들 회화의 바탕에 80년 5월의 의미를 깔고 있었고 한편으로 민중미술은 폭력과 허위의 압도적인 힘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았다. 진실을 알리려는 목소리를 비장하게 가다듬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신시절부터 이 사회의 전체부분을 암울하게 지배해오던 억압과 허위구조를 광주항쟁을 계기로 해서 새롭게 각성하는 동시에 그 억압과 허위구조에 대한 인식을 더욱 첨예하게 해주는 동기로 삼았다.
이런 상황에 대한 구조적이며 확고부동한 인식은 이미 <현실과 발언>에 의해 감지된 바가 있고 좀더 분명하게는 <두렁>, <일과 놀이>등 젊은 미술인들에 의해 구체적이며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작용하면서 공동작업, 무크지 출간, 걸개그림 등을 탄생시켰고, 이같은 민중미술은 미술 내적인 문제로 범주를 한정한 듯이 보이는 <현발>과는 다르게 소시민적 갈등과 민중지향, 외적 억압에 대한 저항과 그것의 내면화와의 자기투쟁, 내용적 과격성과 형식적 파괴성, 정치주의와 예술주의의 동일시각은 보다 크고 넓은 광장으로 미술행위를 끌고나갔다. 오윤, 임옥상, 신학철, 홍성담, 이종구, 황재형, 송창, 이명복, 김정헌, 민정기, 박영률, 손기환, 전준엽, 이철수, 박불똥 등이 활발한 작품활동을 보이면서 예술로서의 완결미보다 민중적 전망을 갖춘 사회 비판적 기능을 중시하는 경향을 띠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결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같은 미술운동이 대학가와 노동현장, 농촌 등으로 광역적으로 확산되자 세력권의 조직정비와 보다 능동적인 현실문제에의 대응을 기하기 위해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암전> 사태를 통해 정보당국이 표현제한을 가했기 때문이지만) 민족미술협의회를 발족함으로써 민중미술은 일종의 문화적 통일전선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회화적 진척을 보이면서 양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분야의 미술은 이른바 모더니즘 계열의 진영이었다.
모더니즘이 우리에게 과연 실재하는가 하는 질문이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지만, 현상적으로 환원성과 순수조형성, 추상성과 회화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부류의 미술이 강력한 화단의 구심체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회화의 절대적 신봉과 그 존재에의 방법적이며 현상학적 탐구가 지속적으로 꾀해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 모더니즘은 무시할 수 없는 화단의 지배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더니즘 미술은 80년대 초 공백기를 거친 다음, 종전의 환원주의적 성격을 평면의 표현적 농축화(예를 들면 박서보, 정창섭, 윤형근, 서승원, 김창열, 최명영, 하종현)로 발전시키는 쪽과 이들보다 아래 세대에 의해 시도된 추상형식의 구조적 내재화(진옥선, 김태호, 박영하, 윤미란, 장옥심, 정은미, 지석철, 형진식, 이형우, 정덕영)로 심화시키는 쪽으로 약간의 변화를 보였다. 현대미술의 선두자리를 지켜왔던 박서보씨가 묘법에서 에크리춰로 방법을 바꾸면서 결의 질감적 표현을 반인위적이며 해방된 자아실현의 장소개념으로 인식했던 사실과, 70년대 중반 이후 줄곧 한국화단의 미니멀리즘의 전개에 견인역할을 맡아왔던 재일 한국작가 이우환씨가 딱딱한 평면해석에서 벗어나 피투개념을 상정한 듯한 자의적이며 우연적인 서체식 그림에로 선회하기 시작했던 사실 등이다. 또한 신기하학(네오 지오)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은 모노톤 이후의 세대가 회화의 물질적 측면을 심미적이며 보다 정서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던 사실 등은 알게 모르게 파악된다. 이와는 달리 이강소, 이승택, 김구림, 곽훈 등은 각기 독자적인 작업세계를 다져가면서 뉴 이미지 페인팅이나 뉴 웨이브를 민족적인 감성으로 확인하거나 발전시키는 뚜렷한 조형적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으로 타락한 사회적 가치의 지배, 산업사회에 있어 매커니즘의 전일적 작등에 이의를 품고 일상적 삶의 꿈과 결의 회복을 주장하는 미술형태는 이른바 <삶의 미술>(장석원)을 통해 구현되기도 했다. 80년대 초반의 민중미술이 미술의 민중적 변혁운동에의 복무를 테제로 내세우면서 주체적 가능성과 창작적 실천을 사회정치적 관점에 국한시킬 무렵, <삶의 미술>은 개인적 삶의 진실을 옹호할 것과 억압된 미술형식의 개혁을 지상명제로 상정함으로써 삶과 예술의 동질성 회복과 미술구조의 재편, 나아가 열린 미술 행위의 가능성 타진을 궁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뿌리>(1984), <토해내기>(1984), <젊은 의식>(1984), <시대정신>(1984)과 같은 일련의 그룹과 기획전을 통해 이같은 형상논리를 증폭시킨 작가로는 이상호, 김진열, 정복수, 황재형, 이흥덕, 홍순모, 최민화, 권용현, 장경호 등이며 이들은 80년대 문화를 <삶과 현실위에 짜여진 역사적 필연성의 유기질적 짜임>(장석원「80년대 미술의 변화」)으로 분석하면서 좌절과 갈등으로 얼룩진 파편화된 개인의 삶을 깊이 있게, 동시에 세계의 부정성과 싸우며 끄집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미술>이 추상에 대한 형상의 대별적 강조, 질료성의 드러내기를 통한 밀폐되어 있는 인간상의 고발과 같은 성과를 얻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닫힌 표현양식의 의도적 정당화와 사물화된 인간의 직접적 표출로, 의식훼손이라든가 손상된 삶의 부정성을 처절하고도 고통스럽게 나타내는 대신에 이른바 70년대의 모노톤 미술 내지는 미니멀리즘에 대한 반대국부적 저항 및 비판으로서 의미 확보를 하려는 조급성을 가졌다. 또 한편으로는 형상미술의 우위 점유라는 상대적 자율성에 안주하려는 문제를 가졌기 때문에 발전된 미술적 승화를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한계를 노출하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미술의 탄생과 근거확보를 위한 그간의 몸부림은 몰개성이 만연하던 형식주의 미술과 손상된 삶에 대한 반론이라는 또 다른 창조적 지평을 활짝 열어 보이는데 중요한 계기로서 작용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부분은 탈모던에 관해서이다. 탈모던의 제기는 명시적으로 85년 메타복스와 난지도, 86년의 현상과 같은 그룹에 의해 일어났으며 그 기본적인 틀은 산업사회의 물질적 양상과 그 영향에 대한 의식을 담아내고자 했던 <시각의 메시지>(고영훈, 조상현, 이승하, 이석주)역시 이미지의 구조적 접근을 꾀한 <사실과 현실>(지석철, 김강용, 주태석, 서정찬, 송윤희)에서 진원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각의 메시지>와 <사실과 현실>이 일상적 환경속의 미술을 구현하고자 함으로써 대중사회속의 미술적 표상과 현위치를 잡아두려고 목적했던 것은 관념에서 현실로, 또 형식에서 내용으로, 현실적 무관심에서 적극적인 삶의 관통의 표시로, 각각 회화의 위상을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고 평가된다. 어쨌든 한국 미술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분화되고 착종된 형태로 고착화되어가는 데에 반대해서, 메타복스와 난지도 그리고 현상동인은 한편으로 고답적이고 귀족적인 모더니즘과 현실재현 능력에 관해 낙관적인 리얼리즘에 회의를 가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문화적 사건들의 연속과 대중적 전자매체의 확산, 재현적 표현이 가지는 한계의식의 증대 속에서 작가가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확고부동한 질서나 가치, 신념의 환상적 제공을 기꺼이 포기하는 대신에, 보편적 진리를 보충하거나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안에서의 회의, 다시 말해 억압적 세계의 내면화와의 싸움과 물신주의와 같은 부정성과의 대결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젊은 세대에 의한 도전은 다음과 같은 이원적 상황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발단된 것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권위에 저항하던 당시의 젊은 의식들이 누구보다 더욱 권위에 차있고, 서구문명 발달의 필연적 귀결로 보여지는 냉철한 자기비판이 하나의 이념적 태제로 전락하며, 전위의 아방가르드가 고급 모더니즘의 표상으로 변질되어가고, 참다운 민중의 실체를 부각시키며 등장했던 실천미술의 이념이 이데올로기 분쟁을 방불케 하는 극단적 대립을 야기시키며 세력 집단화되고, 진테제의 논쟁으로 내분을 초래하는 상황, 이것이 오늘날 우리 현대미술의 현주소이다." (오상길, 메타복스를 결산하며, 메타복스 해체전 도록에서 일부 발췌)
탈모던은 안으로는 닫힌 미술형태라는 문제의 극복과 밖으로는 사회적 억압과 정치적 폭력이 관행적으로 자행되는 현실의 이중의 문제를 감당하면서 일상적 생활 세계속에서 삶과 의식, 그리고 거기에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의 작용을 드러내는 다양한 성찰의 양식을 생산해냈다. 설치 작업의 등장이 그 하나이고 형상과 추상의 혼용 내지는 접변이 다른 하나의 양식이다. 설치작업은 새롭게 제기되는 현실적 상황에 진취적으로 대응하는 단계에서 획득된 미술형식으로 젊은 작가들에게 비춰졌고 형상과 추상의 혼용(한 회화공간에 이 두 요소가 어느 것도 우월성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병존하는 경우)은 자칫 무성격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으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양극론이 일반화된 우리 미술풍토에 열린 시각을 요청하는 시도라고 풀이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형식의 발견과 변화는 단지 외부적 영향에 대한 표면적 대응의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심층에 있으면서 그 외피를 입은 채 그 외피를 적절히 활용하며 때로는 필요에 따라 그 외피를 변화시키기도 하는 산업사회의 제도관리 매커니즘의 조작적 성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제도관리의 매커니즘은 복합적인 모순을 중층화하며 그것들을 통합적으로 관리한다. 이 매커니즘의 지배에는 안팎이 없다. 외적 사물은 물론이고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일상적 삶과 그들의 내면 깊숙이까지를 지배하며 인간을 사물화하고 그 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는 온갖 대항문화마저도 제도속에 끌어들여 고사시키고자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매커니즘의 작용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된다는 데에, 그리고 의식의 복판까지 침투하여 복제 가능하고 자동적인 의식의 양상을 야기하는데 있는 것이다. 미술의 현실 응전력은 이런 점에서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된다. 창조행위뿐만 아니라 예술적 의식을 뒤흔드는 거대한 매커니즘은 전복적 사유를 밑바탕으로 하는 부정의 언어, 고통의 표현에 의해서만 포화상태에 있는 현실의 모순과 불합리, 그리고 억압적 힘들이 포착될 수 있다.
한국미술의 위선적 교양주의와 실천적 구호주의는 새로운 메신저로서의 젊은 작가들, 80년대 중반의 조성무, 황주리, 윤명재, 오상길, 김찬동, 윤효준, 이은산, 신영성, 그리고 80년대 끝자리의 한명호, 이석주, 김태호, 정일, 하용석, 유연희, 정병국, 조덕현, 강성원, 홍승일 등에 의해 극복되어가면서 병든 세계속에서의 회화형식을 충격적이며 때로는 무게있는 경험적 탐구로 충실하게 그려내는 성과를 빚어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외에도 김영원은 형상의 리얼리티에 박제화된 현대인의 표상을 냉소적이며 무기질적으로 반영해냈고, 김홍중은 고통의 제스처와 자학적 포즈로 80년대 사회문명적 민감성을 내재적으로 껴안으면서 부정의 언어를 꽃피워냈다.
90년대의 열린 회화적 공간과 창조적 지평을 확보하기 위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문제는 80년대의 행적을 정확히 파악하며 어떤 미술이든 실제적 완결형으로 보는 대신에 진행형의 미결정물로 포착하면서 잔재되어 있는 문제들을 보충하고, 거기에 어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시각이 굴절많은 80년대적 격변기 동안에 주관적으로 해석되어 편파적으로 평가되어졌는지를 면밀히 통찰하는 일일 것이다. 현재적 시점에서, 본질적 수준에서의 형성과정은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 형성은 어쪄면 영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우리를 괴롭힐지도 모르지만, 의식과 창조행위의 안과 밖을 동시에 훼손하면서 자동화되는 물량적 사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은 좀더 차분하고 신중한 성찰과 그것을 바탕으로하는 표현적 내재성의 확보에 의해서 비로소 성패 타진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역시 80년대를 돌이켜 보면서 개운하지 못하게 판단되는 부분중 하나는 요란법썩거리는 형상적 미술과 얌전한 추상적 미술이 지루하고 비경제적인 경계와 상호대립을 펼치는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예술적 에너지를 소진했는가 하는 점이다. 각 미술진영의 근수 재기와 <내가 옳으니 너는 꺼져라>는 식의 아둔함 및 획일주의적 사고는 더 분석하고 구체화시켜야 될 한국화단의 잔여 과제에의 접근을 가로막으면서 우리를 더욱 암울한 궁지에 빠트리지 않았는지 곰곰이 반성해 봄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