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문화부장관에게 듣는다
문화주의 시대의 선언
김승희 / 시인
고갈의 시대에 생긴 문화의 우물터
우리 시대를 가리켜 흔히 <고갈의 시대>, <미로의 시대>, <중심상실의 시대>라고 한다. 성급한 사람들은 90년대가 되자마자 <세기말>을 논하고 <해체 이후의 시대>라는 위기론을 내놓기도 한다. 미로나 중심상실이란 말은 정신적 실향성을 나타내는 말로서 현대인의 의식의 <뿌리없음>, <중심없음>의 아노미를 반영한다. 이런 정신적 바벨의 시대에 우리에겐 신생 문화부가 생겨, 지금까지 종횡으로 맥이 끊긴 채 떠돌던 우리의 정신문화에 우편번호가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신선한 기대를 갖게 한다. 물론 상징적 의미에서 말이다.
뿌리 없는 문화, 그것은 플랑크톤의 문화다. 대중 속에 침투되지 못하는, 그리고 생활근거와 결합되지 못하는, 또는 민족의 혈육 가운데 섞여서 동화되지 못하는 문화는 장식으로서의 모방으로서의 문화다.
이것은 초대 문화부장관에 취임한 이어령 장관이 20여년전 「제5계절의 인간들」이란 글 속에 쓴 말이다. 그 때부터 한국적 문화상황은 25시나 제8요일, 제5계절과 같은 은유에서 보여지는 피폐한 상황속을 부유해 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화는 주변적인 것, 변두리의 것, 허드레 것으로 방치되어 왔다. 헝그리Hungry 정신 하나로 한국이 개발도상기를 뚫고 나왔다고 했을 때 그 <헝그리>는 산업이나 물질을 향한 것이었을 뿐 정신이나 문화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난입과 더불어 정신적인 것에 대한 천시는 오늘날의 아노미와 미로와 고갈을 더욱 부추겼다.
이 시점에서 문화부가 신설되고 <문화주의 시대 선언>도 있었다. 공동(空洞)처럼 뻥 뚫려버린 우리의 중심 상실의 넋 안에 푸른 우물터 같은 문화의 중심을 샘솟게 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리고 초대장관에 이어령교수가 취임하였다. 사람에게는 기대 지평선이라는 것이 있다. 이어령장관은 실존적 패기에 가득찬 사르트르 같은 문학비평가로 전후의 문화지평선에 혜성처럼 나타난 후「장군의 수염」, 「무익초」와 같은 소설을 썼고, 희곡·시 등의 예술창작을 하면서도 「흙속에 저바람 속에」,「신한국인」,「떠도는 자의 우편번호」등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참조했을 한국문화론을 썼고, 그 문명비평적 시각을 세계로 돌려「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써서 일본과 세계의 지성을 놀라게 했다.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한국문화는 <한의 문화에서부터 푸는 문화, 신바람의 문화로>라는 방향으로 열려져 있지만 그의 존재론 자체가 푸는 신바람, 즉 문화적(예술적) 상상력으로 충전된 고전압의 연쇄 스파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앞에서 보았듯 언제나 벽을 넘는 사람, 자신의 고정된 틀을 깨는 사람, 유목민이나 화전민처럼 언제나 자신의 규격화를 탈(脫)하는 사람, 즉 탈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의 문학평론가·문학교수의 틀을 넘어 예술가의 삶을 살았고, 또 예술가의 고정된 틀을 뛰어넘어 박식한 지식인이자 우리시대를 대변하는 문명비평가로서의 최고 지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그는 언제나 1가지 형태로 자신이 분류되거나 고정·규격화되는 것을 거부했으며, 그것은 그가 반(反)생명적인 것을 누구보다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시대 정신의 전위(아방가르드)였으며 자기 실존의 전위였다. 그런 그의 삶을 뒤돌아보며 우리가 기대 지평선을 갖는 것은 플랑크톤처럼 뿌리없이 떠도는 우리문화에 정신적 본향성(本鄕性)을 잡고 시멘트처럼 굳어가는 우리의 반(反)생명적 경직된 사고체계에 탈(脫)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활성화시켜 주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그가 장관에 취임한 직후 발표한 문화행정 지표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래서인지 <문턱 없이 일하기>, <생색내지 않고 일하기>, <사심없이 일하기>의 삼불원칙과 <마른 바위에 생명의 이끼 입히기>, <문화우물터에 하나의 두레박 놓기>, <부지깽이 되기>의 삼가원칙이 무척 인상깊었다. 그것은 모두 반생명적인 것을 거부하고 생명적인 데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의 기호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끼·두레박·불씨를 뒤적여 살려내는 부직깽이 등은 모두 생명의 기호로 되어 있으며 문턱·생색·사심은 모두 생명을 차단하는 고갈과 단절의 기호가 아닌가. 그러므로 문화란 <생명의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열린 의식의 힘>으로만 이룰 수 있다는 의미론을 그 안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언어의 심층의미 찾기
Q: 문화부가 신설되고 나서 나오는 여러 가지 사업계획의 용어들이 무척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부지깽이, 우물터, 쌈지공원이라든가 하는 용어들에서 경직된 관청용어의 시멘트 같은 육체들이 피가 도는 우리 토박이말로 바뀐 것이 무척 인상적인데요. 역시 탈구축de construction(구축되고 제도화된 것을 해체하기)의 상상력과 은유의 귀재라는 평을 듣던 장관의 스타일답다는 호평이 있는가 하면 문학소녀적 말장난 운운하는 혹평도 교차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A: 일제 때 쓰던 용어를 우리 토박이말로 고친 것을 왜 수사적 표현이라고 합니까? 문화란 말이며 수사입니다. 표현의 방법, 표현의 양식이 새로워져야 문화가 새로워집니다.
Q: 모국어에 대한 장관의 열정과 믿음은 이미 저서 안에 여러번 씌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제 때 창씨 개명을 하고 황국신민으로서 등록되어 학교에 갔을 때의 체험들을, 모든 서류에 잘못 찍힌 나의 탄생을 바로잡기 위해서 나에게는 탯줄의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 존재의 탯줄을 지키기 위한 전략- 그것이 바로 크리스테바가 말한 어머니의 몸으로서의 언어였는지 모른다. 호적에 위조된 언어가 나를 삼켜버리려고 할 때 나는 이 배꼽의 언어, 배를 가를 때 울던 최초의 모음(母音)으로 나의 말을 지켜갔다>라고 쓰신 것을 보았는데 모국어에 대한, 탯줄 언어에 대한 커다란 집착이「한국상징 신화사전」등의 편찬과 같은 문화부의 사업계획에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지요.
A: 인간의 가장 비참한 것이 언어를 빼앗기는 것이지요. 언어를 빼앗겨 보지 못한 민족은 언어의 절실성을 모릅니다. 곧, 혼을 빼앗기는 것이예요. 언어를 빼앗긴 체험은 폴란드의 경우나, 알퐁스도데의「마지막 수업」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데, 아마 지금 20대는 모를 겁니다. 나만 해도 한국어를 쓰면 매를 맞았고, 그런 비참한 체험을 가졌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언어에 관심을 가졌지요. 결핍 속에서 풍요가 나타난다면 아마 모국어를 빼앗겨본 그 박탈의 체험속에서 절실한 애정이 생긴 것일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해방 이후 한국언어의 표준말·맞춤법 등을 다루는 문자 정책을 써왔는데 그것이 주로 언어 순화차원에서였고 외래어냐 아니냐, 맞춤법이 맞느냐 안맞느냐와 같은 극히 표층적이고 기술적인 면만 다루는 어문정책이었거든요. 그래서 정말 언어 속에 숨겨놓은 천년 이천년의 영혼, 의미의 퇴적, 의미의 지층에 대해서는 빼앗겼던 문자나 언어를 피상적인 데서 시작해서 표층적 차원을 다듬은 작업이 필요하지만 그 시기가 이젠 지났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문정책도 큰 전향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또 어문정책이 문교부에서 우리 문화부로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어학자 중심의 어문정책에서 그야말로 문(文)이 있는, 시가 있고 역사가 있고 생활이 있고 혼이 담긴 어문정책을 펴고 싶습니다. 그야말로 말과 글이 함께 있는 어문정책을. 또 그런 시기가 온 것이구요. 이런 의미에서 상징적인 일로「한국상징 신화사전」편찬을 시작해보려고 해요.
Q: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오랫동안 지탱해온 상징적인 문화배경을 담고>, <표층적으로 기술된 국어사전 백과사전 등을 보다 심층화함으로써 한국인의 정신적·문화적 뿌리찾기>라고 되어 있던데요.
A: 상징사전이란 말하자면 한 말의 지시적denotation 의미만 나와 있는 게 아니라 그 언어의 공시적 의미Connotation(함축적·비유적)까지도 나와 있는 사전을 말합니다. 까치를 예로 들어보자면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까마귀에 속한 새로 날개길이가 어떻고 꽁지가 어떻고 머리와 등은 검고 허리에는 회백색의 띠가 있고 텃새이고 우리나라 국조이다>라는 등의 표층적인 지시적 의미와 자연과학적 정보만 나와 있지요. 까치라는 말과 더불어 몇천년 함께 살아온 한국인의 심성·이미지·상징성 같은 그말의 공시적 의미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같은 동양3국이라 해도 일본에선 까치가 안 나타나고 중국에선 또 우리에게 흉조로 알려진 까마귀가 효도·보은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거든요. 그래서 말속에는 그때그때의 문화가 화석처럼 박히고 우리들의 정신과 혼이 담기는데, 그것을 모르고서는 그 말이 지닌 상징성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까마귀·까치라는 것도 자연과학적 의미에서는 다 같겠지만 공식적 의미에서는 한국인의 상징성, 일본인의 상징성, 중국인의 상징성이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언어란 지시적 의미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내포적 의미, 역사·문화가 섞여진 것이므로 까치라는 말의 상징성까지도 담는 사전을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한국어의 까치의 상징성이 되는 거지요. 번역 불가능한 것, 상징성과 신화, 이콘icon(도상)의 기호적 의미까지 담아나가면 그것은 연대에 따라서도 달라지므로 의미의 변천까지도 담을 수 있다고 봐요. 삼국유사에 나타난 명사만 해도 시대에 따라 공시적 의미의 변천은 굉장하니까요.
Q: 서양의 상징사전을 보면 까치는 해를 끼치는 도둑, 아부꾼이나 위선자로 나와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조를 까치라고 했을 때 서양인들이 무엇을 생각할지 문화충격이 오는군요. 그들에게 이 상징사전을 꼭 주어야 하겠습니다……. (웃음)
A: 그래서 한국언어가 외국언어와 다른 것은 발음만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역사가 언어 속에 화석처럼 박혀 있기에 우리만의 상징성을 갖게 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는 삼국유사나 각종문헌에 나타난 공시적 의미를 찾고, 십장생도나 일월도, 불교의 평화 같은데 나타난 각종 도상 기호들의 의미까지도 해독해서 포함시킬 겁니다. 인도문화권에서는 해보다 달을 숭상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불교 이전의 시대엔 해를 숭상하다가(석탈 해나 해모수, 주몽신화에 나타나듯) 불교문화가 들어와서 달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외래문화로 인해 달이라는 말의 공시적 의미가 달라진 것입니다. 요즘은 과학화로 인해 월계수가 있는 달이라는 상징성은 약해졌지요. 그래서 그전 여러 가지 시대적 요소가 언어의 의미를 결정하기 때문에 언어의 의미의 족보를 우리가 따져봐야 합니다. 그래서 고대문헌부터 해방전후의 문학이나 문헌을 독해해서 본래적(거시적) 의미와 다른 어떤 의미로 그 말이 쓰여졌는가를 알아내 컴퓨터에 입력해서 가나다라 순으로 그 언어의 의식의 족보, 상징성의 족보를 펴내려는 것입니다.
Q: 그렇다면 신화나 전설·역사·구비 문학·문학이나 민속적인 문화인류학까지를 포괄해야 하니까 굉장히 방대한 작업이 되겠군요.
A: 그래서 1차 2차 3차로 해서 조금씩 단계적으로 해가야지요.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사전, 영원히 수정되며, 민족과 함께 커져가는 사전, 정본(定本)이 없는 사전이 될겁니다. 문화부에 그렇게 큰 예산이 없기 때문에 5개의 개인 출판사와 협의중인데, 아직 결정이 나지는 않았지만, 정 어려우면 5개의 출판사가 함께 하는 방향도 생각중입니다.
Q: 제가 시를 쓰다가 <달걀>이나 <구슬>같은 상징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 우리에겐 상징사전이 없으니까 불란서판 사전이나 폴란드에서 나온 상징과 이미지 사전을 봅니다. 거기에 보면 구슬은 진주나 보석 같은 것으로 나오는데 우아함이라든가 허영, 신비한 세계의 중심같은 의미로 나오거든요.
A: 우리의 언어의 숲은 거의가 서양의 상징의 숲이지요. 우리에게 구슬이라면 모태나 자궁 상징, 그리고 <구슬이 바위에 거신달 걷이야 그치리이까> 같은 「정석가」에서처럼 육체 관능 에로스의 의미가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이 서구화되어간다는 문제도 우리말 상징사전이 안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한 거예요. 그 뿐만 아니고 이 작업을 하면 이점이 5가지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지금 일본·중국과 협의하여 일본·중국의 상징사전도 만들기로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종주국이 되어서 동양의 뿌리인 극동 3국의 문화의 뿌리를 찾자는 겁니다. 우리가 중심이 되어 동양 3국의 상징사전을 펴내서 동양 3국의 언어상징이 어떻게 유사하고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고 서양과 대조하면 재미있는 일이 생길겁니다. 보들레르의, 랭보의, 성서의 상징과 동양의 불교적·유교적 상징들은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리고 동서양의 원형이 있을테니 유사성도 나올거구요. 그러니까 동서양 상상력의 구조라는 것을 논술로 쓰지 않고도 이 사전 하나를 통해 하나의 문화사를, 문학사를, 상징사를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전통의 맥도 정확히 짚어낼 수 있구요.
Q: 현대시에서 자꾸 외래문화적 요소가 강해지는 것도 언어 속에 담긴 전통의 맥이나 상징사와 단절되어서 그렇다는 말씀은 제 개인체험으로도 이해가 갑니다.
A: 또 한가지는 요즈음 국문과가 많아서 석·박사 졸업자가 무척 많은데 그런 고급 두뇌들에게 일터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백명이 일터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리고 문학자·문화인류학자·민속학자·역사학자·기호학자 등이 참여하지 않으면 한 언어의 상징을 캐내지 못하지요. 이론 기호까지 다루려면 미술기호론을 한 학자들까지 참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기 길만 가느라고 멀어졌던 학자들과 너무나도 정치지향적 시대 속을 살아오느라 분파적으로 흩어진 우리 지식인들이 우리 연대에 그좋은 머리를 일을 위해서 뭉친다면 얼마나 신바람나는 일이겠어요. 그리고 자기 각도로 상징을 해석하면 자기만의 시각을 문화사 속에 기명(記名)으로 남길 수 있어서 좋은 일이구요. 언어를 사랑하는 각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 같이 뛸 수 있는 종합마당이 될 수 있어요. 지금 마스터 플랜이 돼 있는데 4월달쯤 공표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땅파기 놀이를 즐겨했다고 하는데 그 땅파기를 책읽기와 등가적 행위로 본다. 그리고 비평가가 된 것도 <예술 속에 숨겨진 구조>를 땅속의 심층을 파듯 굴착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쓴 적이 있다. <내가 은유의 문장을 좋아하는 것도 그것의 의미가 항상 문장의 심층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지층과도 같은 여러 층위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켜마다 각기 다른 비밀스러운 화석을 숨겨두고 있다. 표층적 의미보다는 항상 심층적인 속에 있는 의미, 매몰되어 숨겨진 불가시의 의미의 세계를 찾는 것, 그것이 나의 비평작업이었다.>
소모될대로 소모되어 거시적·정보적 의미만으로 고갈된 우리 언어의 공시적 의미찾기는 바로 한국인의 의식의 족보찾기, 정신적·문화적 뿌리찾기의 작업이며 외래문화에 오염된 모국어의 넋씻김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땅에 혼의 상징성을 심는 작업
Q: 다음으로 <문화지도 발행>과 <창작마을 조성>, <작은 박물관>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A: 「한국상징신화사전」이 언어의 시간적퇴적을 파헤치는 것이라면 <문화지도>는 국토를 산업개발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개발하는 것입니다. 국토 그 자체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쳐서 문화적 부가가치를 국토에 주자는 것이지요. 나는 그것을 문화적 국토개발이라고 부릅니다.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을 가보면 보잘 것 없는 벼랑에 불과한 곳이예요. 그런데 노래와 전설과 민담과 하이네의 시가 있기 때문에 그곳이 그렇게 아름다운 곳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우리도 땅투기의 대상으로나 국토를 볼 것이 아니라 그렇게 땅의 혼을, 시를, 전설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Q: 제가 어릴 때 무등산을 보며 자랐는데, 저기 김삿갓의 묘비가 있네, 미당이 <가난이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노래부른 산이지, 하고 바라보면 산이 물체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 표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없이 꿈꿀 수 있는 대상으로 다가오거든요. 그속에 시가 묻혀 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사람과 국토 사이 공리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꿈의 관계, 정신의 관계, 신비한 혼류(魂流)의 관계가 생겨날 것 같아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척 기쁩니다. 공리성이 끝나야만 꿈과 시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거든요. 산업개발과 공해와 투기꾼들에게 지친 우리의 국토도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 같습니다. 그 지도엔 지가 시세표는 안나와 있을테니까요……. (웃음)
A: 그리고 전국토의 문화공간화와 좀 다른 것이긴 하지만 문화창조를 활성화하는 방법으로서 <예술인 창작마을 조성>이 있는데 이것은 기왕에 있는 전통 민속마을을 개방해서 예술인들에게 창작의 방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골 사람이 유명한 작가와 만나니까 문화화되고 마을전체가 간접적으로 문화적 영향을 받을 수 있어서 좋고, 시골에 대해서 쓴다면 그 무대가 시·소설·그림에 반영되어 문화사에 그 고장이 숭상되니까 좋고, 무엇보다도 작가에겐 예술적 체험을 넓힐 수 있어서 좋으리라 봅니다. 대개가 세계의 명작은 한곳에서 씌어진 것인데, 별장없는 문인들은 생활의 번잡스러움을 피할 수가 없어요. 릴케의 「도이노의 비가」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두이노 성에 탁시스 후작부인의 초대로 가서 그곳에 머물면서 쓴 것이죠. 또 뮈조트 성에서 사색하면서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도 썼습니다. 큰 작품이란 그렇게 <숨을 수 있는 곳>에서 술광 속의 포도주처럼 익어야 쓰는 겁니다. 메주가 뜨듯이, 누룩처럼 떠야 합니다. 익어야 해요. 서울에선 <뜰>수가 없지요. 전화가 오고 아이들에 지치고…… 그래서 전통마을로 지정된 6군데를, 6개 마을에 51실을 창작마을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문화재관리국 소관인 것을 예술진흥국에서 사용하자고 부탁한 것이지요. 이것이 문턱없이 일하기의 표본인 셈입니다.
Q: 아닌게 아니라 요즈음 예술인에겐 모태가 되는 방, 글처럼 재생할 수 있는 통과제의의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산업화시대의 집이란 게 구조가 뻔한 것이어서 누에의 잠실 같은 은밀한 생명공간이 없지요. 그것이 시혼의 웅장함 같은 것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외부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A: 토담집에서 글을 쓰고 또 하회마을에서 <징비록>을 쓰던 방에서, 그 책상에서 글을 써보세요. 하루 숙식 만원도 비싸다는 사람도 있고, 창작마을 필요 없다는 사람도 있는데, 옛날엔 보존마을이니까 아무도 못들어 가던 곳을 이젠 문인들이 쓸수 있으니까 <들어간다>는 자체가 특전이지요. 아무리 돈으로 따지는 돈만능 시대라지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백년전의 분위기로 <들어가서> 글쓸 수 있다는데 예술인의 특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Q: 문화보급 방식의 혁신으로서 작은 박물관·미술관을 설치 권장한다는 계획을 들었는데요.
A: 박물관법을 고쳐서 개인이 장롱이나 반닫이 속에 소장해왔던 도자기나 문화재 같은 것을 작은 박물관으로 등록해주면 그동안 숨겨져 있던 문화재들이 양성화되어서 좋고 일반에게 공개되니까 일반도 문화향수의 기회가 넓어져서 좋지요. 아주 작은 박물관, 사설박물관, 쌈지박물관을 문화재로 소장하고 있는 개인들이 열도록 유도해서 10년내에 3천개 정도의 작은 박물관이 생겨나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재벌이라면 회사내에 미술관도 만들고 문화박물관도 만들면 여러 가지 세제혜택도 있고 좋지요. 가령 도자기 10개 가진 사람도 자기집 안방이 박물관이 되어서 좋고, 법인으로 만들어서 자기 자식을 법인체의 관리자로 할 수도 있으니까 상속문제도 편하지요. 자기 개인집이 박물관이면서도 법인화되어 있으니까 가족들이 자기 멋대로 팔아먹지 못하고 사회에 환원하지 않아도 되니까 자기 이름이 남는 것이구요. 박물관끼리는 거래할 수 있으니까 사고파는 것은 박물관끼리 하면 됩니다. 출판박물관도 설치되도록 할 것이고…… 문화 박물관이 많으면 많을수록 문화향수의 기회가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요즈음은 교육의 빈부격차가 심하다고 온통 세상이 들끓고 있는데 따지고보면 문화향수의 빈부격차도 그에 못지않게 심한 것 같다. 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시간이 가난해서 문화향수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계층을 위한 움직이는 박물관·미술관의 운영은 문화부가 가진 <국민의 문화 향수 기회의 확대>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사업이라 하겠다.
아무리 문명이 첨단 테크노피아를 이루고 물질이 편리와 안락을 제공하고 거대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행복할 수 있는 무수한 정보를 제공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현대사회 속에서 점점 더 소외를 느끼고 혼란을 느끼고 정신적 무기력과 아노미는 축적된다. 20세기 문명사회를 앤트로피 시대라고 부르는 토마스 핀천은 이 앤트로피 상태에서 질식되어가는 인류와 문명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란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 or construction>이라는 흑백논리적 선택의 태도가 아니라 <둘다 그리고 모두 both and construction>식의 포괄적 태도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확실성을 나쁘다고 생각지 말라. 오히려 불확실성 속에서 다양성이 나오고 그 다양성 속에서 문화의 무한한 가능성이 나온다>는 그의 말을 우리는 한번쯤 음미해 보고 싶다. 이어령 장관 역시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인은 나나주의를 버리고 도도주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시나 쓴다>,<공부나 한다>,<장사나 한다>는 냉소적이고 자기모멸적인 소극성을 버리고 <시도 쓴다>,<공부도 한다>,<장사도 한다>라는 적극성·포괄성을 가지고 생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인식은 자유로운 다양성속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기 것으로 할 때 한 개인의 삶과 한 사회의 삶이 역동적 에너지로 가득차 서로 열리게 된다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생각할줄 아는 힘, 지성의 힘이 얼마나 큽니까? 달릴 때 빠르기로 치면 타조가 인간보다 빠르고 힘이 세기로 치면 인간보다 사자가 강하지요. 인간이 강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리고 지적 다양성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안 믿으면 야만의 무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정신의식·문화의식 속에 지성의 불씨를 묻어두어야 합니다.>
1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이 아니듯 문화부가 생기고 그 초대장관이 모든 문화부문에 통달한 르네상스적 인간이라고 해서 우리에게 일시에 르네상스가 오는 것은 아니다. 정신의식·문화의식 속에 지성의 불씨를 묻고 부지깽이로 항상 그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그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몫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