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사물화 현상
서성록 / 안동대교수, 미술평론가
마르크스에 있어 상품의 사물화 문제는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그것으로부터 소외되는 데서 일어난다. 이러한 사물화 속에서 사람들과 생산품들은 동일하게 거래되고 흥정된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관계들은 <사물들간의 주마등같은 형식의 관계> (「자본론」)로 자리잡고 상품들은 인간의 능동적인 대행물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르셀 뒤샹의 레디 메이드가 예술로서 폄하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물화의 증후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레디 메이드는 자본주의 사회속의 자율적인 예술작품이 상당히 물신주의적인 것으로 비춰졌는데, 그것은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보자면 예술과 사회, 작가와 대중의 관계가 예술작품들 간의 관계로 축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프로이트적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보상적 대체물로서의 이러한 예술의 기능이 그것의 물질적 현실을 은폐하거나 고의로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레디 메이드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예술작품인 흡사 어떤 걸작에 대해 우리가 찬사를 보내는 것이 상품에 대해 가지는 호감만치나 사물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품의 영양권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현재의 예술 문제는 엄청난 불균형을 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유인즉 레디 메이드는 매우 분명하게 산업화되기 이전에 있었던 전통적인 예술의 기술과 산업사회 속의 현대적 상품생산 사이의 모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은 모순적인 사물 경제적인 비판의 괴리로부터 2가지의 도발적인 명제들이 도출되어진다. 하나는 우리가 예상했던 예술이 지닌 자율성이 시장의 힘들에 의해서 점점 잠식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예술에 대한 필요성은 과거 부부관계와 같았던 교환가치보다는 사용가치에 의해서 결정되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율적인 예술과 일상생활의 상품 사이에 벌어진 불일치는 뒤샹이 레디 메이드가 제작된 50여년이 지난 후인 팝 아트와 미니멀 아트의 시대(이 미술들을 계기로 해서 오래 된 고급 예술의 주관적인 모델이 갖는 모순들은 소진되어 버린다)에 와서 한층 고조되어지며 추상표현주의자들과 새로운 창작유형을 따르는 작가들에 의해서 재주장될 뿐만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를 예비하게 된다. 이 예술과 상품 사이의 모순을 분석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기성 오브제의 장치들(미니멀리즘의 경우에는 산업적 오브제, 팝 아트의 경우에는 발견된 이미지)을 대상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순을 만족할 만하게 풀지 못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물화(이 사물화는 역시 현대예술의 형식주의적 맥락에 기인하여 유발된 신념의 상실에 의하여 추진되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에 의존한다. 미니멀리즘의 경우 사물화 현상은 새로운 재료들(예를들면 플랙시 유리라든가 알미늄, 그리고 플라스틱)과 공법들(예를들어 산업적 제작법, 동일 제품 생산법)에서 발견되는데 그것들은 미학적으로 비전통적이기는 해도 도날드 쥬드Donald Judd가 말한 바처럼 고도로 발전된 산업사회에 있어서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팝 아트의 경우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 사물화 현상은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상품적 기호들, 즉 워홀Worhol의 캠블 수프깡통으로 대표되는 기호체계에 대한 사물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예술과 상품간의 모순은 모더니즘과 대중문화가 벌이는 변증법의 한 주요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변증법적으로 진행되는 이 모순은 특정한 개념주의 작가들, 예컨대 마르셀 브로드텔러스Marcel Broodthaers, 한스 하케Hans Haacke, 지그머 폴케Sigmar Poke, 게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ter등의 작품들 속에서 한층 발전되어 가고, 이렇게 가다듬어진 작품들은 다시금 최근의 작가들, 즉 쉐리 래빈Sherrie Levine, 바바라 크루거Babara Kruger, 신디 셔먼Cindy Sherman, 리차드 프린스Richard Prince 그리고 그외의 고급예술과 대중매체 이미지들을 새롭게 연결시키려는 작가들에 의해 차용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예술행위도 그것이 속한 환경의 영향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대 미술의 이같은 사물화 문제는 덮어놓고 방관하거나 도외시할 성격의 것만은 아닐 것 같다. 무제는 그것이 사물화라는 거대하고 단단한 그물 속에서 산업사회의 상품경제체계에 포획됨이 없이 스스로 예술이 지닌 주어진 환경에 대한 비판력을 초대한 발휘하면서 상품적 물신주의에 현혹된 사회의 억압성에 저항을 꾀하는 동시에 일상생활의 실천적 관계의 투명성을 식별해내게 하는 기능을 획득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바그너 음악을 논하는 글 속에서 자본주의 예술의 커다란 파라독스를 반영하는 현대의 작품들은 <바로 그 사물화의 덕목으로 인하여 인간 자신을 말하게 하고, 그렇게 됨으로써 그것이 진리에 관여한다는 환영으로서의 성격으로 인하여 비로소 완전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현대예술이 고민하는 사물화에 대한 신비적인 예찬이나 낭만적인 절대적 거부 대신에 상품화 사회 속에서 오늘날 예술이 담당하고 복무해야 될 중요한 기능과 효과의 부분들이(다소 음울한 형태로나마)적극적이며 철저한 현실인식의 태도와 함께 모든 예술 전반에 있어 도출되고 있다.
여기에는 주요 문제로 상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깔려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내재적 문제가 자칫 방관될 때, 현대예술은 사물화와 상품화를 극복하지 못한 채 진리의 접근은커녕 일순간 키치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 불붙은 현대미술 소장의 열풍을 이용해 명성높은 해외작가의 가짜 작품을 전시하고 전시작품이 위조품임을 발각되자 미국으로 줄행랑을 친 사건이 벌어져 화단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한 재미교포 중개인의 기만에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빠져들어 한국화단은 작품의 진위 여부조차 가려낼 수 없다는 무능력에 대한 탄식과 기반의 취약성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뼈아픈 체험을 해야만 했다. 차후 감식가를 양성하고 이를 체계화하여 미술계에 돌팔이 중개인들이 활보하는 것을 막아야 하겠지만, 더욱 경계하고 반성해야 할 점은 지나친 예술작품의 사용가치에 대한 편중을 덜어내어 예술작품을 통한 사회교육 가치의 측면과 향유조건의 기반 조성을 꾀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리라 본다. 그렇지 못할 때, 미술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작품들은 군침 도는 투기품목의 하나로 전락되어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리는 대신에 양적 가치와 화폐 가치에 의해 좌우되거나 부유층의 전유물이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영영 떼어내기 힘들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