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전통

민속과 문화정책




김태곤 / 경희대교수, 민속학

한나라의 문화정책이 수립되자면 먼저 그 기본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무엇이 현재 어떠하니까 앞으로 어떻게 해서 어떻게 되도록 해야 되겠다는 것인데, 그러자면 무엇이 현재 어떤가, 현재 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기초 조사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국민들이 쌀밥만 먹어서 쌀이 부족하니 밀가루 분식을 장려해야 한다고 한 때가 있었다. 요즘은 쌀이 남아돌아 정부미를 비축하는 데에 드는 보관료만 해도 어마어마한 거액이 되어, 정부예산을 다룰 때 잉여분 쌀의 처리문제가 골치거리로 등장한 일도 있었다. 만약 현재 되고 있는 상황이 파악되지 않고 전처럼 계속 밀가루 분식을 장려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왜정 때 조선총독부에서 한국의 전통문화 전반에 걸친 자료조사를 한 적이 있다. 금석문에서부터 사찰·불상·향교·전적(典籍)·민속·지명·신흥 종교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전 행정력과 학계를 동원하여 전국적인 조사를 실시했다. 그와 같은 조사가 1930년대에 주로 이루어져 조선총독부 조사보고서로 출판되었다. 이 조사보고서가 1920년대 후반부터 출판되었으니 조사기간을 계산에 넣는다면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후 얼마 안되어 조사계획을 수립해 실천에 옮겼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전반을 거론할 겨를이 없어 민속분야로 국한시켜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의 풍수」,「부락제」,「조선의 점복과 예언」,「석전·기우·안택」,「조선의 귀신」,「조선의 무격」,「조선의 향토·신사·오락」등이 우선 가까이 접해 볼 수 있는 책들인데, 모두가 7,8백 면이나 되는 방대한 양의 자료집들이다. 풍수분야를 보면, 집을 짓거나 묘를 쓸 때면 으레 산세를 꼭 점검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1931년「조선의 풍수」가 출간된 이후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문제를 정리해보지 못했다. 부락제·점복·기우·안택·귀신·무격·신사·오락 등 모두가 우리의 생활과 너무나도 밀착되어 있는 것들인데도 역시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이후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손으로 다시 매만져 보지 못한 채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이제 1세기를 채워가려 하고 있다. 이 총독부의 조사 보고서들은 당시 행정망을 통해 전국적으로 조사된 방대한 자료인데 5천년 우리의 전통문화가 일제에 의해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적인 일제조사를 실시한 이후에 우리의 손으로 그에 상응하는 조사를 하지 못 한 데에 문제가 있다. 전에는 밥을 먹기조차 힘들어 문화에 비중을 크게 두지 못 했다면 이제 세계 10대 교역국의 서열에 든 오늘날에는 문화에 대한 시각이 뭔가 좀 달라져야 할 게 아니냐는 국민적 자존심을 가다듬어야 할 때도 되었다. 하기야 전통문화에 대한 정부차원의 관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간에 구호처럼 외쳐 온 것이 전통의 뿌리니, 우리 것 찾기니, 한국적 무엇 무엇을 노상 앞에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강조해 온 것이지 그와 같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의 제시나 그런 방법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지금 어떻게 되고 있다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방법도 나올 수 없고, 방법이 없으니 실천에 옮길 수도 없어, 그것은 언제나 구호에 그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의 정책은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한민족이 어디가 어떻게 생겼기에 그토록 민족성이 강한가. 그 민족의 저력을 찾아 거기에 맞는 식민정책을 펴나가기 위해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일괄 조사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이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 조사로 그와 같은 방대한 양의 조선총독부 조사자료집을 펴냈던 것이다. 간혹 사람에 따라서는 만약 조선총독부의 이 조사자료마저 없었다면 1900년대 초, 아니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의 전통문화 전반이 그대로 사장될 뻔 하지 않았느냐고 하여, 조선총독부의 그 조사사업을 고마워할 지도 모른다. 식민사의 쓰라린 아픔과 민족적 자존심을 빼 버린다면 조선총독부의 이 조사자료는 최초로 근대과학적 방법을 통해 이 나라의 전통문화 전반을 일괄조사했고, 또 우리가 남겨놓지 못한 1900년대 초 자료라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는 크다.

1945년 건국이래 정부차원의 문화정책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것도 사실이다. 문화재 보호법에 제정하여 문화재를 보호하고 문화재 관리국을 통해 사찰과 불상·탑·문화유적·건축물들을 조사 보존해 오는 등 많은 일을 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기로부터 십 수년간에 걸쳐 문화재 관리국에서「전국민속 종합조사보고서」를 간행한 일도 있다. 그러나 정부차원의 이 조사보고서가 1930년대 조선총독부 조사보고서보다 분야에 따라서는 비교도 안될만큼 월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반대로 분야에 따라서는 또 상대적으로 취약한 면이 있기도 하다. 이 「전국민족 종합조사보고서」는 1년에 1개 도를, 그것도 주로 여름방학을 이용해 문화재 관리국으로부터 용역을 맡은 사람들이 투망식으로 훑은 조사자료여서, 여기서도 전국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되고 있다는 전반적인 정보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1930년대 조사자료(조선총독부 조사자료)인 「조선의 무격」,「부락제」같은 데에는 당시 도별 통계까지 나와 전국적인 정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정리되어 있다. 물론 이 자료도 행정망을 통해 조사된 자료라는 취약성은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서라도 전국적인 조사통계를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통계자료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치욕적인 조선총독부의 1930년대 자료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하기야 문화정책이 독립된 주관부서가 없이 문교부에 예속되어 있다가 그 후에 문화공보부로 병립 관리되어 왔으니 지금까지 펼쳐온 문화관련 업적이 장하기도 하다. 이제 문화부가 따로 독립된 금년부터는 곁방살이를 하던 종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문화에 대한 소신을 펼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연극·영화·음악·미술·무용·조각·건축·문학…… 다 손길이 미쳐야 할 분야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서양 것이 아니고 한국적인 개성을 갖는 것이 되어야 한다면 도대체 <한국적>이라는 그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디에 묻혀 숨쉬고 있는가 일단은 정부 차원에서 그 기초조사가 이루어진 기반 위에서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자면 한민족이 수천년을 두고 살아온 삶의 발자취인 전통문화, 좁게 잡아서 민속에 대한 전국적인 기초조사는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렇게 말하면 예산이 있어야지……하고 돈을 먼저 앞세운다. 그러나 그 많이 오고 가는 정부예산에서 이 조사비라는 것은 그야말로 극히 적은 액수가 되고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중앙부서가 아니더라도 군 단위로 도에서 관장해 지방비로 민속조사를 실시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래서 이 조사사업은 돈에 앞서 문화를 보는 시각상의 정책문제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의 연극·영화·음악·미술 등의 표층예술에 아무리 돈을 들이고 한국적인 것을 강요한다 해도 그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손에 잡을 수가 없으니, 쌀이 남아돌 때 분식을 장려하는 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