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초점 / 동양극장사

<동양극장>사




안광희 / 단국대 공연예술연구소

1. 들어가는 말

우리의 근대극은 일본의 침략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에 처음 여러 측면에서 한국인을 착취·수탈했는데, 그 중에 극장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즉 일인들은 극장을 수탈의 한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개화기 때부터 해방전까지 수십 개의 극장(영화관)이 명멸했지만 협율사(원각사)와 동양극장만 한국인의 것이었고, 모든 극장은 일인 소유였다. 그것도 그들의 연극·영화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극장을 통해 돈벌이를 하는 악덕 흥행주들이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연극은 사회성이 강한 고급예술로서 정치·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예술 장르이다. 그러니까 상당한 투자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예술이라는 이야기이다. 그와 같은 연극이 악랄한 식민통치 아래서 제대로 성장할 수 없음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특히 극장이란 연극이 생겨나고 자라나는 태반과 요람과 같은 것인데, 일인 모리상인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니 우리 연극예술이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한 일인들의 탄압과 수탈 속에서도 우리 연극은 명맥을 유지해 왔고, 한국인의 힘으로 동양극장 같은 연극 전용극장도 세웠던 것이다.

2. 본 말

1930년대에 들어서 신파극이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또 서구 근대극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운동은 활발했으나 극장 사정은 더욱더 나빠만 갔다. 왜냐하면 일인 극장주들의 횡포가 더욱 심해진데다가 흥행성이 강한 영화관으로서만 극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30년대 연극의 전망에서도 극장문제가 가장 큰 것이었다. 근대극 초창기부터 언제나 되풀이되던 연극 침체 요인이 대체로 극장문제·인재문제·창작극문제·관객문제·정책문제였는데, 그중에서도 극장문제는 항상 거론되어 왔었다.

당시의 절박한 상황에서 당대의 무희이며 한말 요화(妖花) 배정자의 조카딸 배귀자와 그의 남편이며, 당시<배귀자악극단>을 조직하여 일본 길본홍업의 전속으로 있는 동안 흥행업에 눈을 뜨고 경험을 얻어 극장경영에 뜻을 가졌던 홍순언이 건립한 동양극장이 1935년 11월 1일 개관하게 되었다.

동양극장은 홍순언이라는 비연극인의 의지로 세워진 극장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당시 경성극장, 경성촬영소를 가지고 흥행사로서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 세력을 펴고 있던 일인 분도(分島)의 금전적인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하여 설립된 동양극장은 대지 488평에 건평 373평(2층), 객석 648석에 회전무대에다가 호리존트까지 갖춘 연극사상 최초의 연극전용극장이 되었다.

1935년 11월에 준공된 동양극장은 서대문구 충정로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개관을 앞두고 전속극단 조직을 서둘렀다. 그러나 전속극단 조직이 금방 되지 않아 우선 <배귀자악극단>을 주축으로 영화, 무용등으로 개관프로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1일부터 며칠 동안 진행된 신축개관 공연은 <배귀자악극단>의 만극(漫劇), 「멍텅구리 2세」(1경), 촌극「월급날」(1경), 무용극「급수부」(1경), 그리고 20명으로 조직된 소녀관현악단의 무대연주 수 종, 무용 5종, 한국무용「아리랑」, 독창·합창·뮤직 플레이 등이었다. 설립자가 대중적 무희인 배귀자인 데다가, 대중작가 최독견, 대중극 연출가 박진 등이 극장을 이끄는 전속이 됨으로써 동양극장 연극의 성격은 처음부터 상업극 노선으로 정해졌다.

소설가 최독견을 지배인으로 삼은 동양극장은 홍해성, 박진, 이운방을 맞아들여 서툰 서양극에 도취된 신극단체를 불러들이면 흥행수지가 맞지 않을 것 같아 참심한 젊은 세대를 모집하여 신극은 못할망정 신파로는 좀 참신하고 매력적인 것을 시켜 볼 목적으로 이름조차 <청춘좌>라고 정해놓고 남녀 배우를 모집하였으며, 이 때 월급제를 실시(1급 60원, 2급 45원, 3급 30원)하였으므로 유능한 연극인들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동양극장의 제1 전속극단인 <청춘좌>는 그 해 11월 15일부터「승방비곡」(최독견 작, 2막 3장), 사회극「국경의 밤」(이운방 작, 2막), 그리고「기아일개이만야」(구월산인 작, 5경) 등을 공연하였다. <청춘좌>가 공연하는 중에 제2, 제3의 전속극단 조직에 착수한 동양극장은 사극(시대극)을 주로 하는 <동극좌>와 희극을 전문으로 할 <희극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희극을 즐기는 관객이 적어 <희극좌>는 수명이 길지 못하였고, 1936년 9월말에 <동극좌>와 병합하여 <호화선>이 되었다.

당대 최고의 명배우들로 구성된 2개의 전속극단을 거느리고 장안의 인기를 끌며 순풍에 돛을 단 듯 운영되던 동양극장은 당연히 상업극단의 메카가 되었다. 그러나 홍순언의 요절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첫 시련에 봉착한 동양극장은 최독견이 1938년 5월부터 동양극장을 단독운영케 되었다. 그러나 호탕했던 최독견의 탕진으로 동양극장은 재정적으로 더욱 악화되었고, 이듬해 1939년 8월 24일부터 잠시 문을 닫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즉 지배인 최상덕이 19만원이라는 거액을 부도내면서 동양극장 건물은 석천 모 외 1명에게로 넘어갔다. 또한 극장의 흥행도 흥행사로서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으면서 동양극장을 번성하게 한 김기동에서 고세형에게로 넘어갔다.

1939년 9월 경영자가 바뀌면서 동양극장은 김태윤이 총지배인을 맡게 된다. 제2대 지배인을 맡은 김태윤은 비록 비연극인이었지만 연극에 대한 열의와 사명감은 대단하여서 배우양성을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1940년에 <연극연구소>를 부설하였다. 특히 그는 1933년에 창립된 판소리 명창들의 모임인 <조선성악연구회>와 신파 극단 <고협>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당시 대중들이 사랑하던 창극과 신파극을 동시에 수용 발전시키려 하였다.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중 <청춘좌>는 해방될 때까지 그 이름으로 계속 공연활동을 벌였지만 <호화선>은 1941년 11월에 <성군>으로 개명, 재창립 공연을 가졌다. 2개의 전속극단을 가진 동양극장은 1941년부터는 다른 극단들에게 대관을 많이 했으며, 1942년 이후에는 대관의 폭을 넓혀나갔으며, 그러한 가운데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을 맞게 되자 사회 전체가 급속히 변화하였고, 동양극장의 전속단체도 자동적으로 해산 되었다. 또한 협소한 동양극장은 1930년대부터 많이 생겨난 영화관에 밀려 3류 극장으로 밀려나게 되어 평범한 대관극장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6년 4월에 <호화선>이 재건되었으나 그해 말 7회 공연을 끝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더구나 1950년초에 국립극장이 설립되자 더욱 빛을 잃게 되고 말았으며, 6·25동란 가운데 극장을 운영해 오던 김태윤이 납북되자 극장은 개성 재벌이었던 이영균에게 팔렸고, 동시에 영화관으로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그러니까 동양극장의 연극전용극장으로서의 역사적인 사명은 전쟁과 함께 끝난 것이었다. 영화관으로 쓰여온 동양극장은 1958년에는 다시 김희덕에게로 넘어갔고 이도 1976년에는 문을 닫아 영화관으로서도 문을 닫은 셈이 되고 말았으며, 그 후 현대 건설회사에서 인수하여 사원교육용 강당으로 쓰여졌다하나 오늘에는 그 자취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3. 맺음말

사실 동양극장은 배귀자, 홍순언, 최독견 트리오가 운영하던 1935년부터 1939년까지의 4년간이 전성기였다. 그러나 동양극장은 주요맴버 중에 리얼리즘극 신봉자인 연출가 홍해성과 장치가 원우전 등이 있었지만 영향력이 컸던 배귀자와 최독견·박진 등의 성향에 의해서 이 땅에 신파극, 즉 대중연극을 토착화하는데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한국 최초의 본격적 연극공연장 동양극장은 신극사상 대중연극이 토착할 수 있도록 만든 극장이었다.

·참고문헌 및 자료

유민영, : 『한국극장사』, 한길사, 1982. ; 『국립극장 30년』, 국립극장, 1980.

매일신보,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