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초점

강릉 단오굿의 현장




황루시 / 관동대 국문학과 교수

대관령고개를 한번 넘자면 고속버스 안에 편안히 앉아서도 번번이 멀미가 난다. 구불구불 아흔아홉 구비 휘감돌아 오르는 오십리 길, 아무리 힘좋은 차라도 숨이 턱에 차 한두번은 끽끽거리게 마련인 치높은 고개. 그때마다 한발 한발 걸어서 이 고개를 넘었을 옛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에 닿았을 때 뚜벅뚜벅 힘겹게 오른 발자국 만큼 그들 마음속에 더욱 굳건히 자리 잡아온 이 고개의 신성함이 한줄기 바람처럼 나를 휘감으며 비로소 멀미에서 놓아주는 것이다.

태백산맥은 영서와 영동을 가르면서 길게 누워 있다. 그 분수령이라고 할 대관령은 오랜 세월을 두고 영동사람들 마음의 고향이 되어 왔다. 가장 높고 신성한 그곳에는 국사서낭(國師城隍)님이 계셔서 주민들의 삶을 관장하고 보호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강릉 단오제는 바로 그 신앙심이 표출된 문화행위인 것이다.

오월 단오는 추석과 함께 설 다음으로 큰 명절이지만 오늘날 단오를 명절답게 지내는 곳은 영동지역뿐이다. 그 중에서도 단오를 전후하여 닷새동안 대관령 국사서낭님을 모시고 무당굿과 제사, 각종 놀이와 난장을 벌이는 강릉 단오굿은 강릉뿐 아니라 삼척, 평창, 정선, 양양, 울진 등 이른바 영동 6군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옛부터 강릉단오굿은 관민이 하나가 되어 대규모로 행해졌는데 이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져 강릉시가 주최하고 각급 행정기관과 시민들의 참여로 행사를 치루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강릉 단오굿의 내용을 순차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단오굿에서 모시는 신은 대관령 국사서낭님이다. 서낭님은 신라말의 고승인 범일(梵日)국사로 믿어지고 있는데 범일은 명주군 학산 출신이다. 어머니가 석천(石泉)의 물에서 바가지에 든 해를 떠먹고 낳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대관령의 산신은 김유신장군을 모신다고 일찍이 허균이 기록한 바 있다. 지금 대관령에는 산신각과 서낭당이 있어 각기 제의를 베푼다. 그러나 단오굿은 서낭굿의 전통이 깊어 범일국사 서낭이 예배의 주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단오굿은 음력 4월 보름 대관령에 올라가 서낭님을 모셔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전에 도가집에서 제주를 담그는데 워낙 3월 20일에 하던 것이지만 요즘엔 일정치 않다. 옛날에 서낭님 모시러 가던 길은 아주 장관이었을 법하다. 나팔과 태평소 그리고 북·장고를 든 악사들이 풍악을 울리는 가운데 호장 수로 도사령 등의 관속, 무당과 양중(세습되어 내려오는 무당집안의 남자들이다.)들 수십명이 말을 타고 가고 그 뒤에는 수백명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진 채 대관령 고개를 올라갔다는 것이다. 지금은 오전 9시 정각 시청앞 뜰에서 버스로 떠나는데 준비를 맡은 실무자들과 전국에서 몰려든 취재진 외에 신심 깊은 강릉 본토박이 아주머니들이 정갈한 한복차림으로 차안에 앉아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도착하면 먼저 서낭당에 대관령국사 성황신위, 대관령국사 여성황신위라고 쓴 위패를 모셔 놓는다. 여서낭은 강릉정씨처녀인데 대관령서낭님이 호랑이를 사자로 보내어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산신제와 서낭제가 차례로 이어지는데 유교식 제사를 먼저 지내고 무당이 부정굿과 서낭굿을 한다. 산신제의 초헌관은 명주군 군수가, 서낭제의 초헌관은 강릉시장이 맡아 관민합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강릉 단오굿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교와 무속신앙이 습합된 내용을 갖는데 이는 신목베기에서도 나타난다. 정중히 위패를 모셨지만 신이 나무를 통해 내려온다는 무속적 심성에 따라 다시 신목을 베는 것이다. 신장부(神將夫)는 서낭당 옆 숲속을 들어가 양팔을 벌린 듯한 Y자모양의 나무를 골라 서낭신을 받는다. 요란한 제금소리와 무녀의 축원으로 나무 잡은 팔이 떨리면 신이 하강한 것으로 믿고 밑둥을 베는데 오로지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아낙들이 다투어 달려들어 청색·황색의 예단을 걸면서 소원을 빈다.

조심스레 위패와 신목을 모시고 일행은 대관령 고개를 내려온다. 옛날 역원(驛院)이 있었던 구산 서낭당에 잠시 들려 굿 한석을 한 뒤 일행은 곧장 여서낭당으로 간다. 당안에 위패와 신목을 모셔놓고는 역시 제관들이 유교식으로 제사올리고 이어서 무당패가 부정굿, 서낭굿을 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단오굿이 시작되는 5월 3일까지 위패와 신목은 여서낭당에 둔다. 국사서낭님이 정씨처녀를 데려가 혼배한 날이 바로 4월 보름이었다니 어쩌면 이때가 두 분의 정기 신혼여행 기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5월 3일은 강릉 단오굿의 전야제이다. 저녁무렵 무당과 제관들은 여서낭당에 올라가 위패와 신목을 모셔내온다. 지금은 최씨가 살고 있는 여서낭 정씨처녀의 생가에 들려 역시 굿 한석을 한 뒤 넓은 남대천 모랫벌에 가설한 굿청으로 모셔가는데 시내를 한바퀴 도는 행렬이 볼 만하다. 위패·신목, 화려하고 맵시를 낸 무녀들과 악기를 울리며 걷는 양중들의 뒤를 옛날 부사(府司)행렬처럼 꾸며 가마 타고 일산발친 제관들이 따르고 수십명 농악대와 등불을 밝혀든 중학생 수백명이 함께 시가행진을 하는데 거리는 구경꾼으로 메어져 장관을 이룬다.

드넓은 남대천은 벌써 오색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고 술장수 밥장수들이 출출한 손님을 부르고 있다. 각종 지화와 등으로 장식한 굿당에 위패와 신목을 모셔놓은 것으로 이날 행사는 끝난다.

그러나 축제전야의 흥청거림은 늦은 밤까지 사람들을 유혹해 결국은 막걸리와 감자적에 취하도록 만든다.

5월 7일까지 벌어지는 남대천의 굿판 현장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유교식 제사와 무당굿으로 이어지는 종교의례이고 두 번째는 풍물이·탈놀이·그네뛰기·씨름·활쏘기 등의 민속놀이, 마지막으로, 몰려드는 수십만의 구경꾼을 상대로 벌어지는 난장이 그것이다. 이 셋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면서 축제마당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허리를 잘록하게 매고 맵시있게 머리띠를 두른 무녀들의 굿판은 단연 할머니들 차지이다. 발디딜 틈도 없이 빼곡하게 끼어앉은 할머니들은 무녀의 사설, 춤 한사위, 민요 한가락 놓치지 않으며 울고 웃는데, 행여 맡아놓은 자리를 빼앗길세라 소변보러도 맘놓고 못 간다. 목 마르면 하드 하나 사 먹고 신명나면 제자리에 선 채 춤도 덩실덩실 추고. 그렇지만 무녀가 하루에 대여섯번씩 꽹과리 들고 시주걷으러 올 때에는 천원 한 장 놓고 백원 동전 아홉 개를 거슬러가는 영리한 셈을 잊지 않는다.

단오굿은 종교의례이다. 하지만 그 핵심이라고 할 무당굿은 비대해진 단오행사에 밀려 이제 그 작은 일부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사람들은 관노가면회 같은 탈놀이 구경도 가고 농악 장단에 어깨도 으쓱대며 행여 황소를 탈까 씨름판도 기웃거린다. 그러나 가장 단오굿을 압도하는 것은 거대한 난장의 풍경이다.

각종 옷장수·각종 밥장수·각종 술장수·각종 운동화 장수에 시계, 모자, 우산, 인형, 앨범, 아이스크림 없는 것이 없다. 거기에 서커스 거기에 약장수, 거기에 국악예술단, 난쟁이들 십여명 보는 일은 아주 쉽고, 하늘을 메운 천막집들이 셋에 하나꼴로 빙고게임판을 벌이고 있다. 사기꾼의 숫자도 만만치 않으리라.

난장과 놀이는 5월 7일, 위패와 신목을 비롯 굿에 사용된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송신제가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이것이 우리의 축제이다. 경건한 신앙심과 먹고 마시고 춤추는 질펀한 놀이와 실속있는 경제 행위가 어울려진 한 마당 강릉 단오굿은 가장 대규모로 우리 축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단오굿판은 난장판이라면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문화교육장에 청소년들을 보내지 않는 경직된 사고,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빠지지 않아 정말 난장판이 되고 마는 임시방편의 편의주의 사고, 전주비빔밥 간판이 제일 크게 눈에 뜨이는 경박한 상업주의 사고가 극복될 때 강릉 단오굿은 이 땅의 가장 건강한 축제로서 튼튼히 자리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