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정부의 딜레마, 문화예산의 부족
허권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과장
1. 정부와 문화계의 대립
영국이 자랑하는 예술기관들이 재정난으로 허덕이고 있지만 대처 정부는 자유시장 경제질서에 맞게 문화·예술도 타산업 분야와 마찬가지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자생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반해, 예술인들은 영국 유산의 수호자로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상업주의와 문화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재정지원의 특별정책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는 시각을 견지해 오고 있다. 아울러 예술인들은 정부측의 시각, 즉 예술을 경제구조와 연계시키고 예술인을 전문 경영인과 동일시하는 데 큰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국뿐 아니라 대다수 국가가 공통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화예산의 부족은 과거 수년동안 정부와 예술인간의 관계를 불편하게 하였으나 지난 몇 개월 동안은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영국 정부와 예술계의 최근 논쟁은 로열 셰익스피어극단이 이번 겨울동안의 공연을 취소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재정난이 이유가 되었다.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은 금년 약 500만 파운드(56억원)의 재정손실이 예상되기 때문에 4개월 동안 런던의 두 극장에서 공연할 계획을 백지화시키고 단지 셰익스피어의 출생지인 셰익스피어 극장에서만 공연한다고 결정하였다. 셰익스피어극단의 아드리안 노벨 예술감독은 존폐위기에 처한 극단의 운명을 호소하기 위해 런던 바비칸 예술센터의 소극장에서 정부와 예술인에게 보내는 진정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영국내의 저명한 예술단체는 로열 셰익스피어극단과 마찬가지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정부는 예술평의회Arts Council로 하여금 지난해보다 11%증액된 지원계획을 시행하라고 하였으나, 대다수 예술기관들은 정부의 노력은 현상황을 직시하지 못한 임시방편이라는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로열 오페라하우스Royal Opera House는 금년도에도 약 300만 파운드(35억원)의 손실이 예견되고 있으며 영국국립발레단English National Ballet과 영국국립오페라단English National Opera도 지방정부의 재정지원 축소와 전면 중단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측의 즉각적인 예산지원이 절실한 위치에 놓여있다.
2. 영국의 문화예산
유럽공동체나 대학 연구소의 각종 자료를 통해서 영국의 1인당 문화예산을 스웨덴·서독·프랑스·네덜란드·캐나다 등 일부 유럽국가와 비교해 볼 때,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결과가 제시되고 있다. 런던에 위치한 행정연구소Policy Studies Institute는 7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문화예산연구에서 미국을 제외한 6개국에서 영국이 최하위의 수준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을 발표하였다. 물론, 객관적인 통계에 의하면 미국이 최하위국이지만 미국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문화예산이 적은 대신, 각종 조세혜택을 통한 민간부문의 후원정책을 유도하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의 정부예산 대비는 큰 의미가 없다. 아무튼 PSI의 1987년도 자료에 의하면, 매년 정부의 문화예산을 국민의 수로 나눈 1인당 문화예산에서 스웨덴이 28파운드(32,000원)로 제일 높고 영국은 16파운드(11,200원)이며 미국은 단지 2파운드(1,400원)로 나타나 있다. 작년 문예진흥원의 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국내 문화예산이 국민 1인당 400원 수준인 것을 볼 때, 스웨덴은 우리보다 무려 80배나 많은 예산을 투여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접하게 된다. 물론 일국의 문화예산 규모는 그 나라의 경제생산성과 무관할 수 없지만, 국민 총생산GNP로 비교해 볼 때에도 영국은 7개국 중 6위를 점하고 있고 미국은 맨 마지막에 랭크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연구에 참여했던 앤드류 피스트Andrew Feist교수는 〈비록 영국정부의 문화예산은 지난 1987년부터 점진적인 증가추세를 보여왔지만 넓은 시각에서 볼 때, 문화예산의 절대부족 현상은 지속되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3. 영국정부의 대안
이에 반해, 리차드 루츠Richard Luce 예술장관은 사석에서 〈예술단체가 비록 영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해 온 공적을 부인할 수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복지국가로부터의 지원에 매달리지 말고 스스로 사회 속에 존립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할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영국의 민간 예술 로비단체인 국립예술사업National Compaign for the Arts은 민간 후원금이 바람직하지만 과거 수십년 동안의 부족분을 채워줄 만큼 충분하지 못한 실정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NCA의 관계자는 비록 기업 후원단체가 총문화예산의 5%선까지 지원될 계획이지만 과거 10년동안의 기업후원금은 불과 1%의 신장에 그쳤고, 기업가들은 영국예술계의 1/3에 해당하는 정부예산을 대신 부담할 의향은 조금도 없다고 밝힌 바 있다. 1976년 〈보다 좋은 유대관계, 성공적인 고용, 판매의 증가, 좋은 이미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창립된 예술후원 기업협회Association for Business Sponsorship of the Arts에 참여하고 있는 한 기업가는 정부와 예술가의 일방적인 요구에 대해 〈우리 기업가는 정부예산을 대신 지원하는 것이 아닌, 보조형태의 지원방침을 견지해왔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고 반박하고 있다. 한마디로 예술에 대한 기업의 책임은 부정할 수 없으나 절대적인 책임은 맡을 수 없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1970년대 연간 100만 파운드(11억원)를 밑돌던 기업의 지원금이 작년말 3000만 파운드(210억원)를 기록하는 신장세를 나타내고 있다.
정부와 예술계의 첨예화된 갈등과 관련, 야당인 노동당은 현정부야말로 교양없는 무리라고 혹평하면서 소위 지원정책을 통해 예술을 말살시키는 저의가 무엇이냐는 반박을 하고 있다. 노동당 총재인 토니 뱅크스Tony Banks는 대처 수상이야말로 예술보다 미사일을 좋아하는 호전적 여투사라는 극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 예술계는 정부 지원금의 만성적인 결핍뿐 아니라, 대중의 문화향수를 위한 프로그램의 개발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이는 몇몇 정치가와 평론가들이 지적해 오고 있는 것이지만 소위 엘리트 문화를 지향하는 정부의 문화정책을 지속시켜야 하느냐는 정책방향과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영국의 국립 계열단체들은 더 많은 정부의 예산을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만큼, 일반 대중으로부터 일부 예술가와 선택된 고급 취향의 예술애호가만을 위한 일방적인 정책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 예술단체의 존립 가능성은 정부의 예산지원 모색이라는 투쟁적 방법과 함께 일반인의 참여가 활성화될 수 있는 개방된 방법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