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전통

되찾아야 할 단오절




김태곤 / 경희대교수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 다가온다. 요즘은 단오절이 한산하게 그대로 넘어가지만 1800년대 기록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단오가 설·한식·추석과 함께 4대 절사(節祀)를 지낸다고 하여 4대 명절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사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평안도·함경도 등지에서 월남하여 남한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에 단오절이 남부지역의 추석보다도 더 성대하게 지내던 큰 명절이었다고 입을 모으는 것을 보면 북부지역에서 과거에 단오절이 꽤 성대하게 세우는 명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월남민들이 말하는 과거란 8·15 이후에서 6·25까지로 대략 1940년대 말로 잡을 수 있어서 북한지역에서 단오절이 194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성대하게 세우는 명절이었고, 그렇게 보면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단오절을 4대 명절로 꼽고 있는 연유를 이해할 수 있다. 단오절이 1800년대 도성인 서울지역에만 전승되던 명절만이 아니고 전국적으로 널리 전승되던 4대 명절의 하나였는데, 북부지역이 남부지역보다 단오절의 전승력이 강했던 것이라 짐작된다. 단오절의 전승력 문제는 농경과 기후·일제 탄압·사회변동 등 여러 각도에서 검토될 수 있으나 여기서 이 문제까지 따질 겨를이 없다. 삼한의 생활상을 전해 주는 「삼국지」동이전(東夷戰)의 제천(祭天) 대목에서 5월달에 씨를 뿌리고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신께 제사하고, 10월에 농사를 끝내고 나서 역시 신께 제사하여 추수에 감사한다고 한 기록을 보면 단오절의 연원은 삼한의 제천의식으로부터 이어오는 농경의례의 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삼한의 그 제의가 국중대회로 연일 밤과 낮을 쉬지 않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고 하여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대대적인 축제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래서 씨를 부리고 신께 풍년을 비는 국중대회의 대대적인 농축제로 그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게 된다. 대만 등지에서도 단오절이 되면 5일 동안 관공서까지 휴무해가며 성대한 명절로 단오절을 보내고 있다. 그러면 세시풍속으로 전승되던 한국의 단오절에는 어떤 행사가 있었나 잠시 알아보기로 한다.

집안에 갇혀 지내던 아낙네들이 단오날에는 모처럼 말미 받아 들로 나가서 육모초와 약쑥을 뜯고, 또 산기슭에서 있는 큰 나뭇가지에 높다랗게 그네를 매고 서로 밀거니 당기거니 그네를 뛰고, 냇가나 강가 모래톱에서는 남정네들이 씨름판을 벌여 힘을 겨룬다. 아낙네들은 또 연못이나 늪가에 가서 창포 뿌리를 캐다가 삶아서 그 물로 머리를 감으며, 그 창포 뿌리를 갸름하게 다듬고 거기에 수복(壽福)이라 글자를 새겨서 아이들의 머리에 비녀로 꽂아 주며 수명장수를 빌고, 단오날 천중부적(天中符籍)을 문간에 붙이며, 여름에 대비하는 단오선(端午扇)을 준비하고, 대추가 많이 열리라는 뜻으로 대추나무 갈고지 틈바구니에 돌멩이를 끼워 놓는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육모초와 약쑥은 단오날 오시(午時)에 베어야 양기가 가장 성해 약효가 있다하여 시(時)를 보아 육모초와 약쑥을 베는 일……. 이런 단오절의 세시풍속들, 해마다 매년 단오날이 되면 그렇게 떠들썩하던 단오 세시풍속이 이제는 옛 문헌이나 민속학자들의 저서에 지나간 과거의 일로 한가롭게 잠들어 있는 것이나 아닌지. 강릉에 나가야 단오절을 느낄까, 그 외 어디를 가나 단오날이 명절이라는 것을 느끼게 할만한 풍속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기야 의약이 발달했으니 굳이 시를 보아가며 어렵게 약쑥이나 육모초를 베어 그늘에 매달아 말리느라 정성을 쏟을 필요가 없고, 〈스위치〉하나만 손가락으로 누르면 씽씽 돌아가는 성능 좋은 선풍기와 〈에어콘〉이 있으니 굳이 단오날 부채를 대비해야 할 필요가 없어 과거의 풍속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입을 모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좋던 과거의 인정이 이제는 메말라, 어디 사람이 마음을 붙이고 살수 있는 세상이냐고 시대를 나무라는 원성도 높아가고 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서로 아끼고 어우러져 네것 내것을 까다롭게 구분짓지 않고 함께 살던 농촌에도 이제 도시바람이 불어닥쳐 인정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져가고 있다. 지난날에는 우리의 선조들이 이렇게 가파르게 살지는 않았다. 농촌에서는 두레패를 짜서 품앗이로 모름 심고 김 매고 벼 베고 탈곡하며, 그 전 과정이 축제적 분위기 속에서 흥겹게 이루어져 어느 마을을 가나 두레패의 농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두레패의 농악과 그 농악에 맞춰 추는 춤이 농사일의 어려움을 어려운 줄 모르게 하는 활력소가 되었다. 그렇게 어우러져 농사일을 하던 두레의 품앗이가 네것 내것을 까다롭게 구분짓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농촌 어디를 가나 두레패는 고사하고 농악소리조차 들을 수가 없다.

농촌마저 이렇게 인정이 고갈되어 가는 것을 우려해 정부에서 향토축제의 활성화 안을 내놓게 되었다. 그러나 그 향토축제라는 것을 10월의 어느 한때에 맞춘다고 하면 농촌에서 한창 일손이 바쁜 때고 또 그런 인위적인 축제가 농민들에게까지 뿌리를 내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단오절은 예로부터 농경의례의 하나로 벌어지던 대대적이고도 거족적인 축제였으니 기왕 전승되던 단오절을 부활시켜 축제로 승화시키는 방안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강릉시에서는 단오제가 대대적인 축제로 벌어져 단오날이 되면 남대천 모래사장에서 수십만의 인파가 벅적댄다. 대관령 서낭당에서 국사성황신을 모셔다 단오제가 벌어지는 남대천 모래사장에서 무당들이 모여 단오굿을 하고, 한 편에서는 그네뛰기와 씨름판이 벌어지고 또 한편에서는 농악과 관노가면극이 벌어지고. 여기에 영동·영남일대에서 모여든 박물장수·약장수·야바위꾼·서커스단까지 몰려 난장판이 벌어진다. 도토리묵·막걸리·국수를 파는 음식점들이 즐비해 강릉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어깨춤을 추어가며 단오절을 맞는다. 그래서 이날만은 너와 나 가슴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어 허심탄회하게 마음놓고 하루를 즐긴다. 이런 강릉의 단오제는 누가 꼭 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강릉시민 스스로가 몸담고 사는 고장의 축제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다.

단오절은 잃어버린 명절인가. 인위적으로 향토축제를 만들어 장려하려고 하기보다는 기왕에 있는 4대 명절의 하나이던 단오절을 되살려 축제로 활성화시킬 방안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