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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현실주의자의 죽음




함유선 / 이화여대 불문과 강사

지난 3월 12일 프랑스의 시인이며 소설가이고 저널리스트였던 필립 수포Philippe Soupault가 파리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필립 수포는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루이 아라공Louis Aragon과 더불어 초현실주의의 창시자로서 초현실주의 문학운동에 참여했다. 초기 초현실주의 그룹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그의 나이는 올해 92세였다.

1919년 3월 루이 아라공과 앙드레 브르통과 필립 수포가 공동으로 편집책임을 맡은『문학Litterature』지가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유럽의 격변기에 이르러 르네상스를 출발점으로 한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의 모든 가치 체계가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예술전체가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격렬하고 대담한 혁신을 시도하려던 다다Dada와 초현실주의의 텍스트들을 출판한 것이다. 이「문학」지 그룹은 다다에 열중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고 거기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다다의 무정부상태에서 벗어나 문학상의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그러므로 초현실주의는, 다다를 대표하는 시인 트리스탕 짜라Tristan Tzara의 표현대로, 다다의 잿더미 위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비교해 볼 때 공통적인 것은,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 점과 초기의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 모두 다다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브르통과 아라공, 수포, 이들 세사람은 <모든 감각들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세심하게 계획된 착란>을 꿈꾸었던 랭보와 잠재의식의 세계를 시에 도입한 로트레아몽을 선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앙드레 브르통은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초현실주의를 <말이나 글, 또는 다른 방법으로 생각의 실제적인 기능을 표현하는 방편으로서 심리적 자동성,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를 배제한 가운데 일체의 미적 도덕적 관심 밖에서 생각을 그대로 받아쓰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니까 초현실주의는 일종의 인식 방법과 표현 방법임에 그치지 않고 반항의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의 창시자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필립 수포는 1897년 8월 2일 프랑스의 샤빌Chaville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지주 가문 출신으로, 그가 일곱 살 때 여읜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의사였다고 한다.

그가 어렸을 때 영국 여자 가정교사가 불렀던 자장가라든가, 청소년 시절 영국과 독일에서의 최초의 외국여행들이 아마도 여행자와 시인으로서의 그의 성향을 그때부터 뚜렷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군대에 입대해서 포병대의 포병지휘자로 있던 수포가 그의 최초의 시「출발Depart」을 쓴 것은 병원에 있을 때였고, 그는 그 시를 아폴리네르Appolinaire에게 보냈다. 그는 아폴리네르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내 머리 속에서 하나의 문장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때로 벌레소리를 내기도 하고, 또 간절하게 애원을 하기도 합니다. 이 더러운 파리같으니! 그것은 며칠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펜을 들어 그것을 썼습니다. 그때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무엇인가가 터져나왔습니다.>

필립 수포의 최초의 시집「수족관」이 1917년에 출판되었다. 그것은 수포가 거의 반세기동안이나 계속 추구해야할 시작 행위의 시초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소설을 썼으며, 편집인으로, 에세이스트로, 저널리스트로, 방송인으로 많은 활동을 했다.

필립 수포는 일생동안 자신이 초현실주의자라고 믿고 있긴 했지만, 정작 그가 초현실주의 그룹에 참가해서 활동한 것은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920년 그는 자동기술écriture automatique이라는 방법으로 앙드레 브르통과 함께 초현실주의의 최초의 책『자장(磁場)』을 공동 편집하여 출판하는 것에 참여했다. 이 책은 전위적 문학의 새로운 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과학적 의미에서의 실험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후에도 브르통과 공동 작품을 한 권 더 출판하기는 했으나, 수포는 초현실주의의 되풀이되는 결별, 재결합에 지쳐서 결국 초현실주의 진영을 탈퇴했다.

그후 수포는 크라Krâ출판사의 문학고문이 되어 유럽총서를 주관했고, 1923년 그의 소설 처녀작인「성자Le Bon Apôtre」를 발표했다. 그는 후기에서 <모든 것은 끝났다. 나는 소설을 쓰고, 책을 출판하고, 일에 몰두하고 있다>라고 썼다.

그후 10년 동안 그는 약 10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특히「뒤랑도형제들」,「오라스 피루엘의 여행」,「거총 En joue!」,「파리 최후의 밤Les Dernieres Nuits de Paris」등이 알려져 있으며, 또「현대 새로운 시모음집」을 펴내 성공을 거둠으로써 시와 신문에서 작가로서의 역량을 과시했다.

수포는 크라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외국문학에 대해 개방적인 그의 태도로 괄목한 만한 잡지「유럽」을 창간했으며, 고리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 외국작가의 작품집들을 간행하였다.

1929년부터 여행을 하기 시작한 수포는 파리문단과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선거와 독일연방 하원의원 방화사건 등 많은 르포를 썼다. 그후 라디오 튀니지 방송국의 책임자로 있다가 그는 비시Vichy정부에 의해 해고당했고 투옥당했다. 감옥에서 그는, 그가 읽을 수 있었던 유일한 작가 라비쉬Labiche에 관한 한편의 에세이를 썼다. 라디오 알제의 책임자직을 그만둔 후 그는 프랑스 통신사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남·북아메리카를 종횡무진 다니며 많은 글을 썼다.

수포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거의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보냈다. 그는 영화·미술·문학에 대해서 많은 신문기사와 서문과 에세이를 썼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는 무엇보다도 시가 가장 우선이었다. 필립 수포가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해서 많은 애정을 기울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꾸준히 시작품을 발표했고 시선집을 펴냄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고 끝까지 시인으로 남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애절하면서도 가볍고, 때로 우울한 그의 시속에서 우리는 상드라르Cendrars나 라르보Larbaud와 같은 여행자 시인들의 영향을, 그리고 작가의 실제적이건 상상 속에서건 여행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시에서는 대체로 이런 여행의 흔적과 함께 데페이즈망Depaysement을 상기시키는 구절을 만날 수 있다.

1954년부터 필립 수포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시의 대중화·시의 보급에 힘썼다.

오랜 세월동안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잊혀져 있던 수포는 뒤늦게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자장』과『시와 시』를 재출판한 이후, 몇편의 장편소설이 차례로 다시 출판되었다. 각 잡지에서는 그를 재평가하는 연구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초현실주의 초기 상황이 잘 드러나 있는 모험정신을 끝까지 고집했던 시인, 끝내 시인으로 남기를 원했던 시인 필립 수포. 자아 속에 몸을 숨긴 채 자기에게서도 부재하는 듯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서 명징한 잠 속에 빠져들어가 있던 초현실주의자인 시인, 그는 이제 영원한 <선고를 받고condamné>이 현실에서 사라진 것이다.

뜨거운 밤 쏟아진 밤

읽어버린 시간

밤보다 더 멀리

이제 마지막 시간이다

단 하나 중요한 시간

감소된 힘 은밀한 맘

그런데 순간이 다가온다

마침 또다시

저 도도한 어둠을 향하여

저 최후를 향하여

저 불을 향하여

꺼지는 것을 향하여

몸을 수그려야 한다

숨결 침묵 형벌

잠시동안만이라도

좀 더 용기를

그런데 벌써 저 완만함이

끝난다

잃어버린 불빛

하늘의 바람들아 기다려다오

한마디 말 하나의 몸짓

한번

나는 손을 쳐든다

-「선고받은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