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정책의 첨병 소련문예
이항재 / 단국대 노문과 교수
집권(1985년 3월) 이후 고르바초프 정권이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는 개혁·개방정책이 문예 부문에 미친 영향은 실로 크다. 그동안(특히 스탈린 집권기간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억압당하고 작품 발간이 금지되어 왔던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재평가되면서 오늘의 소련문단에는 이른바 <해금 문예>, <복권 문예>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해금·복권된 문예들은 독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현재 고르바초프 개혁·개방정책의 첨병이자 가장 강력한 지지자로 역할을 하고 있는 오늘의 소련문예의 실상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고르바초프 문예정책의 특징은 문학, 연극, 영화, 음악 등 각 장르별로 현장에서의 자주적인 욕구를 중앙에서 수용한다는 형식으로 추진된 점이다. 새로운 문예정책의 실험은 연극분야에서 시작되었다. 일선 극작가들(자하로프, 예프레모프)은 1985년 7월∼12월에 걸쳐「문학신문」을 통해 창작활동과 연극의 자율화를 요구했다.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86년 6월 소련 문화부는 60여개 극장의 검열폐지, 독립채산제의 실시, 아마추어 연극의 지원을 내용으로 하는 <연극에 관한 종합적 실험계획>을 발표하여 87년 1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또한 당국은 전위극 공연을 허용했고, 각 공화국이나 시 예술 소비에트가 갖고 있던 공연작품 선정과 결정권을 극단에 이양했다. 이러한 열린 분위기 속에서 스탈린 치하에서 비판·금지당했던 많은 희곡들(불가꼬프의「뚜르빈씨네 나날들」등)이 공식적으로 공연되고 있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참사를 고발한 연극「석관(石棺)」의 공연은 소련 연극계의 열린 분위기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당기관지「쁘라브다」의 현직 과학부장인 구바리예프가 쓴 이 희곡은 소련 상층부의 무능을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자력의 위험과 세계 종말의 가능성을 비극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종류의 희곡공연은 이 전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소련 역사극의 제1인자인 미하일 샤뜨로프는「브레스트 리토브스크 평화조약」(1987),「전진, 전진, 전진」(1988)을 발표하여 1917년 볼셰비키혁명과 그 후 반(反)혁명을 주도했던 역사적 실존인물(레닌, 스탈린, 뜨로쓰키, 부하린, 께렌스키, 제닌킨)들을 등장시켜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는 물론 레닌의 오류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비판, <레닌은 오류가 없는 신화적 인물>이라는 지금까지의 전설을 파괴하고 있다. 이 희곡의 상연은 현재 소련 내외에서 혁명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평가라는 비상한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연극계의 열린 분위기는 영화·음악·미술 부문에서도 확인된다. 86년 5월에 열린 소련 영화인동맹 제5차 회의에서는 영화행정 최고 기구인 <고스끼노Goskino:국가영화위원회> 지도층의 관료주의와 고스끼노 간부들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87년 1월에 영화인동맹 총회를 계기로 고스끼노의 통제와 검열하에 있던 영화계의 주도권이 영화인동맹으로 옮겨져 검열제 폐지와 각 스튜디오의 자주적 경영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감독·시나리오 작가·비평가·고스끼노 대표자들로 구성된 분쟁심의 위원회가 구성되어 그동안 상영 금지되었던 작품들에 대한 재심사가 이루어져 끼라또바의「긴 이별」, 빤필로프의「주제」, 아블라제의「참회」, 게르만의「도중의 점검」등 20여편이 해금되었다. 특히 스탈린 시대를 고발한「참회」는 87년에 공개되어 호평을 받았고, 지식인 여성의 매춘을 다룬「인터 걸」(우리나라에도 수입되어 곧 개봉될 예정임)은 현재 소련에서 전례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음악분야에서는 조국을 떠나 주로 미국에서 활약해온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호르비쓰의 모스크바 공연이 허용되었고(1986년 4월), 역대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비판당했던 소련의 대표적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드미뜨리 쇼스따꼬비치가 탄생 60주년을 맞아 당기관지「쁘라브다」로부터 재평가를 받아 명예 회복되었다. 음악계의 열린 분위기는 특히 대중음악 부문에서 실감된다. 그동안 음악 관료주의의 희생물이 되어 금지되어 왔던 재즈, 록뮤직, 헤비메탈 등이 보수파의 우려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현재 모스크바에는 <알리아>, <아쿠아리움>, <브리가다>등 수백개의 록그룹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문예계의 전반적인 열린 분위기 속에서도 문학의 해빙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문학은 과거, 특히 스탈린 치하에서 탄압당했던 작가들의 복권과 그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작품들을 해금시켜 소련 문학사의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대중 문예지「아가뇨끄」(불꽃)가 86년 4월호 특집에서 1921년 반혁명 시인으로 지목되어 처형된 니꼴라이 구밀료프를 20세기초의 가장 뛰어난 소련시인으로 재평가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이어서 스탈린 치하에서 탄압당했던 시인 만젤쉬땀과 형식주의 비평가 쉬끌로프스키의 문학유산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만젤쉬땀과 쉬끌로프스키 문학 유산위원회가 각각 설립되었다. 이들 3명 문인에 대한 복권과 재평가는 소련문학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86년 6월에 열린 제8차 소련작가동맹대회를 기점으로 이러한 변화는 더욱 구체화되었다. 1950년대 말문단에 등장한 이른바 <성난 젊은이들>과 <자유파 시인들>인 예프뚜셴꼬와 보즈네센스키는 그동안 금지되어 왔던 작품들의 해금을 위해 앞장섰다. 특히 보즈네센스키는 문학분야에서 처음으로 글라스노스찌(개방, 정보의 공개)란 말을 사용하면서 모든 예술부문에서 자행되고 있는 검열제도의 철폐를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 결과 지금껏 여러 가지 이유로 출판금지 당하고 금기시되어 왔던 작가들이 복권되고 그들의 작품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아흐마또바, 뜨바르도프스키, 쁠라또노프, 자먀찐, 불가꼬프, 두진쎄프, 빠스쩨르나끄, 나보꼬프, 네끄라소프, 브로드스키, 솔제니찐 등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이 속속 재평가되고 복권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스탈린 치하에서 부당하게 탄압을 당했던 작가들이거나 나보꼬프와 네끄라소프 망명 제 1, 2세대 작가들이었다.
오늘의 소련문학이 스탈린 치하에서 억압당하고 브레즈네프 시대의 관료주의 밑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작가와 작품들의 복권이나 발간에만 국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프바초프 등장 이후에 발표된 몇몇 작품들은 소련 사회의 은폐되어 왔던 부분을 폭로하고 지금껏 금기시되어 왔던 테마를 과감히 다룸으로써 80년대 초에 나타난 사회정치 평론적 음조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아이뜨마또프의「처형대」, 아스따피예프의「슬픈 형사」, 라스뿌찐의「불」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처형대」는 마약거래와 생태계의 파괴를,「슬픈 형사」는 폭력과 절도 등 수많은 범죄를 다루면서 지방도시에 살고 있는 지식인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그리고「불」은 선악의 문제에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면서 영혼과 양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련국민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오늘날 문학의 현안문제를 다룬 아다모비치의「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와 대학의 실상(미혼모와 관료주의의 문제)을 숨김없이 묘파한 그레꼬바의「대학교수」도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른바 <해금 문예>와 <사회정치 평론적 문예>는 오늘날 소련문화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면서 독자들의 억눌려 왔던 호기심과 진실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소련문예는 검열제도의 폐지, 언론과 표현의 자유, 소련문학사의 공백메우기, 비판과 자기비판의 분위기 조성, 역사의 진실 밝히기에 앞장서고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을 적극 지지하면서 문예의 르네상스기를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테마에 지나치에 얽매이다 보니 현실의 주요 현안들, 특히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서 야기되는 부정적 요소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스탈린 시대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 선정주의와 폭로주의에 기초한 문예의 무분별한 해금도 문제가 된다. 오늘날 소련문예의 전반적인 해빙이 얼마만큼 지속되고 어떤 방향으로 진전될 지는 두고볼 일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문예의 해빙은 개혁·개방정책의 산물이자 그것과 긴밀하게 맞물려 진행되고 있으므로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의 운명과 궤를 같이하리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