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미술

단편적 다중적 나레이티브




서성록 / 미술평론가·안동대교수

현단계 미술비평의 커다란 쟁점중 하나는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의 문제이다. 더러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옹호하는 비평가도 있고 또 더러는 이것이야말로 신식민지적 문화사조이며 비주체적 예술형태이므로 배타되어야 마땅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비평가도 있으며, 관망자세를 펴는 섬약한 신중론자도 있다. 어쨌든 달아오른 포스트모더니즘의 열기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의 자세와 입장과 관련된 비평의 추이는 비평적 논점을 한층 명료하게 할뿐만 아니라 비평은 창작 일반에도 나름의 영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시선의 집중을 요한다 하겠다.

그러므로 필자는 여기서 서구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몇몇 논점들을 살펴보고 또 그것과 결부된 쟁점들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아직 미궁에 빠져 뚜렷한 문제항을 발견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다양한 입장의 차이점들을 개관하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의 용법을 둘러싼 많은 혼선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니는 문화적 관점(모더니즘의 내재적 관계)과 사회적·철학적 시대 또는 조건을 설명하는 포스트모더니티가 합성되는 데서 비롯된다. 후자는 지적 및 정태적 담화 관계성에 의해서 그간 다양하게 규정되어 왔다. 그리고 그 조건이라는 것은 냉소주의를 만연시키면서 범현실성, 유사모방 같은 들어보지 못했던 새 감각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결정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하여 이제는 현시대의 보편성을 탐닉하려는 사람들에게 포스트모더니티의 이같은 설명 속에 존재하는 모순들은 그다지 놀랄만한 사실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티가 휴머니티에의 비판과 실증주의 비판을 내포하는 것으로, 또 우리와 우리가 생각하는 주관성에의 관점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철학만 하더라도 포스트모더니티는 현저히 다른 이론적 상황들을 적용하는 용어로 받아들여져 왔다. 예를 들면 데리다Derrida의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이라든가 후코Foucault의 담화, 지식, 권력 사이의 공모에 관한 연구라든가 바티모Vattimo의 역설적인 <나약한 사유>, 료타르Lyotard의 메타 나레이티브의 합법적 권리 및 해방성이 지니는 타당성에 관한 이의제기 등등.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들은 모두 담화구조를 문제시할 뿐만 아니라 명령체계를 의문시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담화구조나 명령체계란 인간 위주로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티에 관한 논쟁은 하버마스와 료타르 사이에 벌어진 모더니즘에 관한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하버마스는 계몽주의의 합리성에 뿌리를 둔 모더니티의 프로젝트는 미완성이며, 따라서 그것은 완결지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반대해서 료타르는, 모더니티는 역사속에서 침몰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에 의하면 그 역사의 비극적 범례는 나치가 집권하는 것에서처럼 궁극적으로 비합법적인 권력이 우리의 지식에 관한 개념을 변환시켜온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테크노사이언스>의 역사와 비등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료타르의 입장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티란 웅대하나 폭력적인 총체적 나레이티브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와 합법화의 일반화를 용인하지 않으면서 단편적이고 다중적인 나레이티브로 특징지워지는 것을 가리킨다.

프래드릭 제임슨Frederic Jameson은 이들이 <원형적인 나레이티브>를 정당화하는 것은 모두 찬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의 사유가 다르다는 점을 밝힌다. 하버마스가 독일적이고 헤겔주의자임에 반해 료타르는 프랑스적이고 프랑스혁명 정신에 고취되어 있어 전자가 공통감을 중요시하는데 반해 후자는 구금에 더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는 두 사람의 입장에 극력 반대한다. 아이러닉하게 양자는 오늘날 철학의 역할에 대해 거의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지식과 권력의 공모로 파악되는 포스트모던이 보다 온건한 역할을 취해야 한다고 보면서 로티는 신실용주의neo-pragmatism관점을 택하여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 같은 포스트모던 입장을 연결지으려 한다.

그러나 실제적 의미에서 그러한 대립은 쉽게 풀려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문제의 어려움은 역사에 달려 있다. 하버마스에 있어서 독일 모더니티는 나치에 의해서 중단되었으며 그래서 그는 모더니티를 완성시켜야 될 프로젝트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를 포스트모던 역사주의자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모더니티를 함양시키는 의식>이라는 것은 역사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게 만들며, 또 그속에는 모더니티의 합리적이고 폭발적인 내용이 내재해 있다고 믿는다. 독일적인 모더니티의 혁신적 관점에서 보면, 포스트모던이란 하버마스의 말대로 신보수주의적일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버마스가 그 밖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지역적인 반모더니즘을 비판하고, 특히 독일의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티를 꿰어맞추려고 하는 점에 대해 반대한다.

료타르가 하버마스의 포스트모더니티 규정에 대해 취한 이의제기 역시 엄중한 검토의 대상이 된다. 영어판『포스트모던의 조건』(료타르) 책머리에서 제임슨은 료타르의 메타 나레이티브 견해에서 긍정치를 부각시키려하는데, 이유인즉 부분적으로 제임슨의 포스트모던에 대한 관심은 만델Mandel의 문화의 연대기적 통찰에 근거를 둔 메타 나레이티브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시장 자본주의가 리얼리즘을 낳고 독점 자본주의가 모더니즘을 낳았음에 반해 다국적 자본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야기시켰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사실은 한층 자명해진다. 포스트모던을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조직>이라고 설명하는 제임슨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 자본주의의 <기만적이고 비난받아 마땅>하며 사회경제적 측면들을 확대 재생산한다고 엄중하게 비판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월터 모서Walter Moser가 포스트모던을 <뒤돌아가는 모더니즘>이라고 익살맞게 정의내린 것은 흥미롭다.

담화, 미적 형식, 그리고 정치권력과 사회경제적 요소들과 함께 현 시기 문화를 분석하는 포스트모던은 이렇듯 다양한 입장들의 큰 차이와 대립을 보이면서 불확정의 문화예술적 향방을 예감하고자 한다. 과거 리얼리즘을 동구형으로 놓고 모더니즘을 서구형으로 취급하던 데서 벗어나 최근 문화의 성격은 보다 복잡미묘한 양상을 띠면서 후기 산업사회 속의 미적 담화구조를 분석·검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처럼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의 통념적 이분법을 가지고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형식의 이중성과 내용의 복합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한층 우리를 당혹감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이 어떤 성격을 취하든 그것은 우리 미술문화에서 볼 수 있고, 불만스럽게 체험해 왔던 형식의 교조성을 비교조화시키며 흑백논리의 이념적 허구를 낱낱이 드러내 암울한 현실에 산재해 있는 불합리와 모순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주의깊은 관찰을 요하는 시대적 과제로 등장해 있다. 때문에 역사적 감시자로서의 문화와 문화의 내면성을 논리적으로 감당해주는 비평이 이런 문제를 중추적 과제로 상정하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시대적 책무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