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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있는 음악교육실시〈경남국악연구회〉




조순자 / 경남국악연구회 회장

우리는 처음 학교교육을 받을 때 우리 말·우리 글, 역사 등 우리 것부터 배우기 시작하며 어느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다른 나라의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음악만은 예외로 서양 음악어법과 서양 음악문자부터 배운다. 아무래도 좀 이상한 일이다.

생각을 좀 해 보자.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는 또한 우리만의 고유한 말과 글을 갖고 있다. 그리고 언어가 있는 곳엔 그와 꼭 닮은 음악이 자리한다.

그런데 교육의 시작인 초등교육부터 학교의 음악 교과서는 온통 서양음악이고, 양악은 곧 만국공통음악으로 통하는 관례 속에 우리 음악은 음악이 아닌(?) 국악으로만 통용되어 왔나보다.

국악이란 국어나 국사에서의 뜻처럼 우리나라 음악이란 뜻임에도 그 낱말이 풍기는 의미는 모든 사람이 생활 속에서 접하는 음악이 아닌 특수한 부류의 것이란 의미가 짙게 드리워진다. 하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말과 글처럼 우리만의 독특한 음악어법과 문자가 있다. 그 음악문자는 한글을 만드신 세종 임금께서 창안하신 세계에 자랑할만한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인 〈정간보〉이다. 한글과 함께 자랑스런 고유한 음악문자를 활용하여 온 우리의 음악문화는 굉장히 높은 수준이며 그 우수한 음악문화를 우리 국민에게 알려주는 것이 민족 자긍심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생각들을 함께 하는 교육자들이 모여〈학교교육에서부터 국적 있는 음악교육의 실현을〉이란 목표를 세우고 국악교육연구회를 만들었다. 그것이 1976년 5월 장사훈 박사가 이끄시던 대한교련 산하 한국 국악교육회 경상남도지부였다. 1980년대부터 중앙의 활동 약화로 경남만 단독으로 활동하다가 1984년 3월 경상남도 교육위원회 교육연구원 산하 경남국악연구회로 기구 개편하여 현재는 경남 도내 22개 교육청 단위로 지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설립 초기에는 회원인 교사 스스로의 일인 한가지 실기 습득과 기초이론부터 연수를 시작하여 점차 연수 범위를 넓혀 일인 서너 가지 정도의 기능을 습득하게 되었고, 현장학습 지도방안까지 심도있게 연구되었다. 1985년부터는 연 1회씩 현장교육에 관한 연구논문 발표대회를 열어 현장교육에의 활용방안을 활성화시켰으며, 연 2회의 방학을 이용한 일반 교사들 대상의 국악 강습회를 열어 일선 교사들의 국악에 대한 기초지식 함양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회원들이 틈틈이 익힌 실기능력을 3회에 걸쳐 발표하는 무대를 가졌는데 학생과 학부형, 일반인들은 이 발표회가 국악의 아름다움과 교사들의 참신한 연주가 어울려 진한 감명을 주는 무대였다고 평하였다. 또한 문예진흥원의 후원으로 세 번 실시한 순회 국악연주회와 청소년 국악교실은 경남의 작은 마을에까지 국악의 선율이 펼쳐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청소년들의 우리 음악에 대한 높은 관심과 이해에 큰 몫을 하였다.

이런 연주활동 이외에도 현장교육에 필요한 교육자료 연구로는 〈정간보〉를 한글로 사용하는 방법과 가로쓰기 방안을 연구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한 것, 소리가 잘 나지 않아 교재로 쓰기 힘들었던 단소를 보완하여 쉽게 불 수 있는 초보자용 단소취구의 개발로 학교교육에서의 단소 실기교육의 가능성을 실현하였다(실용신안특허 46447호).

더불어 단소 지도방법과 장구장단 지도법을 개발하였으며 1989년도에는 경상남도 교육연구원에서 주관한 단소와 장구장단 지도를 위한 영상자료 제작에 참여한 것이 올해 초(1990년 3월) 완성, 많은 호평을 받았다. 또 음악연구 학교나 시범학교의 전통 음악에 관한 순회지도를 실시하였다.

이런 자체 회원 활동 이외에 국악진흥 보급, 그리고 감상 기회를 갖기 위한 국립국악원 초청 연주회 다섯 번, 국립창극단 공연 한 번, 영남대 국악과 김희숙 교수 정재 발표 한 번 등을 실시하였다.

앞으로도 경남국악연구회는 지금까지 계속해 온 현장교육에서의 〈국적있는 음악교육〉을 위한 교육자료 및 교육방법의 연구, 감상 기회 제공과 강습회를 통한 〈사회교육〉의 계몽에 중점을 두어 우리 음악의 뿌리가 튼튼히 내려 생활 속에 함께 숨쉬는 진정한 나라 음악의 위상이 서도록 힘써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