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연극
김정옥 / 연출가, 중대교수
지난 5월 소련연극이 최초로 한국에 상륙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서구문화는 유행적 문화로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러시아 문학, 특히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고리끼, 체홉 등은 우리의 문학과 지식인들의 정신적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연극분야에서도 체홉이나 고리끼의 희곡, 그리고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와 연출에 관한 메소드는 일부 우리 연극인들의 예술적 성장에 영향을 미쳐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러시아나 소련 문화예술을 접한 것은 일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였다고 할 수 있고, 소련의 대표적 극단이 내한공연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250년의 전통을 가졌으며 소연방에서 최대 규모의 극단이라 할 수 잇는 모스크바의〈말리극장〉이 서울 공연을 가진 것은 우리의 연극사상 최초의 소련연극 공연이라 할 수 있다. 〈말리극장〉은 호암아트홀에서 체홉의「벚꽃동산」을 5일간에 걸쳐 7회 공연을 가졌는데, 그 완벽한 앙상블과 섬세한 연기로 서울의 연극 관객을 매료했다고 할 수 있다. 대단히 리얼하면서도 우화적이고 시적인 무대는 연극의 참된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인간의 본성을 연극적으로 해석하면서도 리얼리즘 연극의 진수를 동시에 맛보게하는 무대였다. 이제 7월에는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모스크바의 〈유고자파드 극단〉이「햄릿」의 내한공연을 갖는다고 한다. 소련연극을 이제 책이나 영상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살아있는 인간들을 만남으로써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30년 전의 파리 유학시절,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 때도 레퍼터리는 체홉의「바니아 아저씨」였다. 그 때도 느낀 것이지만 러시아나 소련의 희곡이나 무대는 리얼리즘을 표방하면서도 뭔가 시적인 분위기와 부조리한 인간의 슬픔같은 것을 감싸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북방민족이나 문화가 가지고 있는 개성같은 것일런지도 모르지만 뭔가 우리에게 공감대를 형성해 주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86년 4월 초순에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89년 3월 다시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될 무렵, 모스크바를 찾아갈 수 있었고, 그후 4년이 흐른 뒤의 소련 연극의 현주소를 목격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억압에서 해방되어 마침내 숨통이 트이고, 은폐하지 않는 투명한 정치를 내세운 고르바초프체제 하에서 소련 연극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4년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86년에 처음 찾아갔을 때도 자유를 얘기하고 뭔가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새로운 연극을 꿈꾸고…….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공개적이라기 보다는 속삭임처럼 퍼져서 일종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면, 작년 모스크바에 갔을 때는, 자신감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주장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작품들이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30년 전, 파리에서 본 소련 연극과 30년 후 서울에서 본 소련 연극은 3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크게 변하지 않고 보수적이고 전통적이면서도 닦고 닦아서 깊은 맛과 새로운 맛이 더해가는 무대였다면, 모스크바에 가서 4년의 간격을 두고 보게 된 소련 연극은 변해가는 사회와 정치적 정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어제의 구속에서 대담하게 탈출하려는 그러한 연극이었다. 사실, 소련 연극은 소련의 정치적 개혁의 뒤를 따라 변혁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유도한 하나의 에너지로서 작용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소련 연극의 중요한 성과는 다양성의 획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국가의 지원으로 이루어지는 연극은 필연적으로 획일화 될 수밖에 없었으며 오늘의 소련 연극인들은 그러한 획일화에서 뛰쳐나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몸부림은 대체로 세가지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동안 금기가 됐던 얘기, 침묵을 지켜야 했던 주제나 소재를 다룬 반체제 내지는 저항적 성격의 무대이고, 둘째는 국가에서 마련한 공연장이 아닌 일종의 지하 소극장, 소규모의 스튜디오와 같은 공간에서 이룩되는 자유롭고 개성적인 공연을 들 수 있고, 셋째는 이번 내한 공연을 가진〈말리극장〉의「벚꽃동산」과 같은 고전적이면서도 시대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가미하고, 새로운 각도에서 심도 있는 창조를 노린 무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소련의 연극계에 공존하면서 전체를 위해 개성을 포기해야 했던 어제를 거부하고, 개성과 개개의 인간성의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예술의 획일화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첫째의 경향으로 선풍적인 화제를 던진 작품으로는 레닌그라드의〈말리극장〉에서 도오진이 연출한「새벽하늘의 별들」,「형제자매」, 모스크바의〈엘모로와 극장〉에서 포킨이 연출한「말하라」등을 들 수 있다. 「말하라」는 표현의 자유와 언로를 튼다는 것이 침체된 사회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임을 보여준 작품이다.「새벽하늘의 별들」은 모스크바의 창녀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이 개최되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든 모스크바의 창녀들은 올림픽 개최로 외국 손님들이 도착하기 전에 모스크바로부터 쫓겨나게 되고 도시의 빈민굴도 철거된다.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어제의 공산 청년동맹의 일원이었던〈안나〉, 그러나 지금은 알콜중독의 창녀로 전락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해서 연극은 전개된다. 연출은 대담하고 개방적이어서 한국에서의「매춘」공연 때와 같은 외설 시비도 없지 않았지만, 외설적인 내용을 상품으로 했다기 보다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고민이 극적으로 형상화되고 사회의 무관심과 위선과 타성을 고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형제자매」는 여섯시간에 이르는 대작이라 할 수 있는데,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야심적인 무대로 평가되었다.
스튜디오 극장은 일종의 무허가 지하극장으로 싹트기 시작했으나 지금은 모스크바에만 80여개가 있으며 일년에 한번 스튜디오 연극 페스티벌을 가짐으로써 소련 연극을 대표하는 하나의 중요한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스튜디오 공연으로「진자노」라는 작품을 보았는데 우리의 소극장공연과 유사한 공연을 발견할 수 있는 비교적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공연으로 느껴졌다. 이러한 스튜디오 공연에서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중요한 주제가 되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형제자매」의 연출가 도오진이〈우리는 언제나 사회에 대한 개인의 의무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개인에 대한 사회의 의무를 말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소련의 이러한 새로운 연극의 정신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다양성과 개인의 자유와 같은 시대 정신이 소련 연극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면, 풍부한 연극적 유산과 잘 훈련된 연기자와 관객들은 소련 연극을 뿌리깊은 나무로 가꾸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