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띤 소련의 무용
김용복 / 무용가
소련에서의 춤은 예술 중의 최고로 주시되고 있다. 더욱이 대중들은 발레에 조예가 깊고 비평이나 출판물들도 대개 발레에 관심을 갖고 있다. 발레예술을 국책으로 특별히 육성하고 있는 만큼 발레댄서들은 특권계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소련사회 안에서는 모든 예술이 예술적 관점에서만 창조되기는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발레의 모든 레퍼터리는 소련체제의 정치적 여과기를 거쳐 나온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즉 발레예술 역시 어느 정도는 그들의 이른바〈계급투쟁〉에 대한 태도를 기초로 적합한가 부적합한가를 판정하는 것이다. 소련 당국은 가능한한 광범위한 대중의 이해를 위하여 막연한 표현을 피하기도 한다. 지금보다 한층 억압적이던 시기에 소련 정부는 발레의 수용성 여부를 표시하는〈등급체계〉를 가지고 국내의 모든 발레를 분류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어떤 작품들은 무대에 올리기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이같이 가혹한 등급매김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정부는 아직도 공연에 대해선 상당한 통제를 가하고 있다.
러시아의 아방가르드예술의 영광, 그것은 뒤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족쇄에 쓰여져 좌절했지만,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위대한 도전이었다. 예술가들은 주류를 이루는 레퍼터리 개발과 최우수성을 유지하는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아방가르드나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변덕스러운 정부의 태도―초기의 고무적인 태도, 스탈린 시대의 잡아먹을 듯한 반응, 브레즈네프 시대의 고리타분한 보수주의 성향 등―에 대항해 투쟁을 해야만 했다.
혁명직후의 소비에트 정권은 예술적인 전위 운동을 환영했으나 나라의 기초가 단단해지자 정치적 선전에 도움이 안되는 예술을 배척하고 유물론이라는 이론에 사로잡혀 그 진부한 리얼리즘 이외의 예술을 외면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비에트예술의 기본적 방법이며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에 있어서 정확하게 역사적 구체성으로 그릴 것을 예술가에게 요구한다〉고 규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공식적 견해는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영광을 상처뿐인 영광으로 바꾸어 놓았다. 개화 반보 전에 좌절한 러시아 아방가르디스트의 원통함은 정치상의 혁명이 예술상의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는 그 배반감 때문에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것처럼 더욱 원통스러웠던 것으로 본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의 정치국원이었던 지다노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예술문학 정책이론을 발표, 예술에 있어서의 형식주의 모더니즘, 코스모폴리탄이즘을 격렬하게 난도질했다. 그것이 악명높은 지다노프비판이며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을 타고 그 악영향에서 벗어나게된 요 몇 년까지 러시아의 예술을 결빙시켰다. 러시아의 오랜 인습세계를 단숨에 뒤엎은 혁명에 대하여 당초 전위적인 예술가는 큰 기대를 걸었다. 숨막힐 듯 무거웠던 조국에서 빠져나와 자리를 유럽으로 옮겨 새로운 예술을 넓혀왔던 러시아 출신의 예술가는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고 그 당시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1917년 혁명의 발단은 수많은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들이 이미 러시아를 떠난 후였다. 1920년대 중반까지도 많은 예술가들이 서구로 건너갔다. 안무가 미셀 포킨스, 보리스 로마노트, 조지 발란신 등이 그 예이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1차 세계대전 전에 이미 젊은 러시아 무용가들을 서구로 데려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 바술라브 니진스키, 타마라 깔사비나, 아돌프 볼름, 올가스페 시체바, 펠리아 도브로프스카, 알렉산더 다닐로바 등 그 외에도 수많은 무용가들이 있었다.
혁명직후 소련에서는 클래식 발레가 소련사회에 필요한 것이냐 아니면 불필요한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하여 격렬한 논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작품들을 망각의 위험에서 구해낸 사람이 바로 로푸코프였다. 디아길레프의 업적과 로푸코프의 혁신적인 과업은 유일한 아방가르드 현상의 대표적인 두 양상이었다. 불행한 것은 러시아가 예술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다.
사상적 투쟁을 위해서는 개인을 말살하는 것도 서슴치않는 소련사회에서 그들이 출 수 있는 레퍼터리는 너무나 한정되어 있기에 1961년 루돌프 누리예프의 서방 망명을 시작으로 1970년의 나탈리아 마카로바, 74년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등이 잇따라 망명하였다. 1979년 볼쇼이 발레단의 미국 공연에서 고두노프의 망명으로 미·소 양국간의 시비가 벌어졌고 조국을 택하는 그의 부인인 루드미라 울나소바와 고두노프의 자유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서는 비행기가 이틀간이나 이륙을 못하고 있었다.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러한 망명사례들은 러시아 클래시즘의 기준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들의 망명사건이 있고 부터는 해외공연 때의 댄서들에 대한 감시와 경계는 눈에 띄게 심해졌다.
스탈린, 후르시초프, 브레즈네프 지배하에 있었던 때에 비하면 지금 고르바초프의 정권이래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 소련은 본격적인 해빙기를 맞고 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을 폄으로써 소련의 예술집단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 변화의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내부적인 요인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적인 요인이다. 내부적인 요인으로는 우선 고용제도의 변화라 볼 수 있는데, 전성기가 지난 예술가들의 활동을 줄이고 영구고용이 아닌 계약을 갱신하는 제도이다. 그만두는 인원은 바일로 러시안 주립 문화부에서 충원시키게 되며 남자 60살, 여자 55살 정년 이전에 퇴직한 예술가들의 연금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과거에는 정년 이전에 퇴직하면 연금이 감소되기 때문에 기량이 떨어져도 무대를 떠나려 하지 않았으나, 이 혁신적인 제도의 장점은 우선 예술가들에게는 재정적인 안정감과 프라이드를 줄 수 있으며 새로운 예술가를 영입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 하나의 내부적인 요인은 극장 운영에 관한 것이다. 소련예술계에서 관료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1985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아무리 운영을 잘하는 극장이라도 티켓가격을 인상할 수 없었으며 예술가들의 봉급규정을 공식적으로 정하는 일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으로 극장 운영에도 변화가 오고 있는 것이다. 극장의 이 같은 운영을 위한 법령은 1990년 1월부터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소련연방 내의 모든 극장에 대해 영향력을 미치게 될 이 법으로 각 극장은 봉급과 티켓요금 체계를 독자적으로 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과외수당을 들 수 있다. 엄격한 봉급규정을 지키면서도 공연성과에 따라 예술가 개개인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제도이다. 공연성과는 극장 경영자와 예술조합원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정해진 봉급만으로 보상금 지급을 위한 재원을 창출하는 방법으로 인원을 규정보다 모자라게 쓰는 방법이다. 지난 4월에 새로 발령된 법령으로 고스콘체르트Goskontsert(공연예술을 관장하는 소련의 국립기관)가 공연 매니지먼트 독점권을 잃어버림으로써 무용수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게 되고 자연히 지위도 향상되는 결과를 가져와 사실상 자유경쟁시대로 들어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글라스노스트 정책 이후 소련예술의 변화는 해외 공연의 확산에서 나타난다. 키로프 발레단이 89년 25년만에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성공적인 공연을 했는가하면 1989년에는 바일로 러시안 발레도 여러지역의 순회공연을 가졌다. 앞으로 미·소 양국간의 문화교류는 두 나라 사이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큰 문제에 부딪히게 될 여지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 소련에서는 이른바 그들 내부에서〈재건restructuring〉이라는 명색하에 스스로 자발적으로 서구의 공연 흥행가들에게 다각도의 교섭을 개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앞으로 소련의 예술단체들은 이제 공식적인 대행기관인 고스콘체르트를 통하지 않고서도 서구의 공연기획자들과 직접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므로서 독자적인 외환 구좌를 개설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었다. 또한 스스로 스폰서를 찾아야만 한다.
지금 소련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변화로 볼 때 소련 무용가들의 국제무대 진출을 향한 욕구의 분출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피사레프의 경우만 해도 지난 1988년 캐나다 동계올림픽에 알버타 발레단과 7주간의 공연을 했었다. 중요한 것은 고스콘체르트가 어떻게 하여 미국 관객들의 요구대로 그들의 순회공연 스케줄을 맞추느냐가 문제인데, 이것은 미·소 양측이 생각해 볼 문제인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상징적 어휘가 된 글라스노스트의 물결은 이미 1988년부터 개인적 무용수의 해외교류까지 이루어져 89년에도 계속되었으며, 한국의 문훈숙이 12월 키로프발레단과 함께「지젤」에서 주역 무용수로 공연무대를 갖게 된 것을 계기로 이제 한국과 소련과의 문화교류는 국가차원을 넘어서 좀더 밀접한 상호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