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해외정보 / 특집. 소련의 문화예술

재소 교민문학의 특징




채수영 / 문학박사, 동국대 교수

1. 교민 문학사를 위한 제언

한국 현대문학사의 시발은 일체지하라는 민족의 울분과 수난의 역사로부터 곡절 많은 정서의 굴곡현상을 가져왔고, 이로부터 암울한 환희와 격랑의 분노를 앞세워 오늘에 이르렀다. 즉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국가 없는 민족의 비극적 출발은 정서의 자유를 차압당해야 했고, 이로부터 3·1운동과 더불어 자존을 되찾자는 문학양상은 일제의 제한과 감금을 벗어나기 위한 민족사의 몸부림과 같은 맥락에서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민족의 해외이주사는 일제라는 강점하에서 비극적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이거나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의 방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자가 사탕수수밭 이민의 하와이를 목표로 했던 미국이민과 일제침략의 사슬에 징용으로 끌려간 일본의 경우가 있다면, 간도나 소련 쪽으로의 이민은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와는 본질면에서 약간 다른 목적이 있었다. 간도나 블라디보스톡의 경우엔 강제 이주라는 일본의 의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독립을 위한 거점으로서의 장소였다는 점에서 약간 다르다. 간도로 쫓겨간 윤동주 또한 연변문학의 시발자일 경우일 것이고, 1927년 M·L당 사건에 연루되어 1928년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하여 1938년 4월 스탈린에 의해 총살당한 조명희 역시 소련 교민문학의 시발자인 셈이다. 미국과 일본교민들이 가급적이면 우리말을 안쓰는 경향이 농후한데 비해 연변이나 타시겐트, 알마아타에 있는 소련의 교민들에겐 우리의 전통적인 관습과 언어를 유지하려는 가정생활과 자체교육 시설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정신적 출발에 차이가 있다. 어떻든 6공의 북방정책으로 인한 문호개방은 지금까지 어둠에 가려 있던 교민들의 작품들―비록 1910년대 수준의 유치하고 어눌한 표현의 작품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도 한국 현대문학사의 또다른 영역으로 포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는다. 여기엔 본질적 문제점이 없는 게 아니다. 생활언어권이 다른 것으로 인한 표현의 문제점이 있다. 즉 생활일상어와 문학어가 다를 때 필연적으로 조화와 세련미를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 문학표현은 일상어를 바탕으로하여 문학적 표현으로 가다듬어지게 될 때 또다른 언어문제의 벽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교민문학은 본국 문학과 차이를 갖는 본질적 문제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교류의 폭이 확대됨으로 인해 우리말로 글을 쓰는 동포문인들에겐 더욱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새로운 가능성을 제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욕적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런 견지에서 한국 현대문학사의 한 장은 교민문학을 위해 할애되어야 할 것이다.

2. 소련의 교민문학

소련으로의 이민사는 철종 12년 즉, 1861년으로 소급된다. 빈곤과 배고픔에 못이겨 연해주, 그 중에 블라디보스톡이나 우수리 지역으로 여름이면 두만강을 건너가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귀향하는 농부나 품팔이꾼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런 계기는 시베리아 개발에 관심이 깊었던 제정러시아 관리들의 환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농토를 제공하고 분배해주는 호의까지 배풀었다. 이런 사실은 이민의 숫자가 증가하는 동인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1861년 동시베리아 총독 무라브예프 백작이 이민법을 제정 공포하자 더많은 한인부락을 형성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 당황한 이조 말엽의 조정에선 1867년 유민방지책을 실시했지만 흉작과 기근으로 인해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 결국 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한인들의 가난 문제와 제정러시아의 시베리아 개발을 위한 노동력의 문제해결을 위한 목적에서 급성장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작금에〈통상을 위해〉라는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통령과 만나는 일과 일치해지는 묘한 역사적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어떻든 하바로브스키의 서쪽 217마일 지점에 정착하여 블라고슬로베노예(축복받은 곳)란 한인촌을 건설하여 1884년 김병시(金炳始)와 러시아의 웨버C. Walber간에〈한·노 수호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국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한인촌의 변화는 1910년 일제의 강점과 더불어 러시아 이민의 숫자가 1906년에 34,000명이던 것이 1914년 무렵엔 배로 늘어나는 현상을 나타냈으니, 두만강 부근의 시베리아 연해주에서 1917년 무렵엔 이르크츠크, 치타 등에도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17년 2월 혁명에 의해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함과 더불어 한인사회는 러시아 정치변혁과 동시에 수난의 길로 접어든다. 어떻든 레닌이 조선독립을 지지하는 데 용기를 얻어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를 형성하면서 1920년대 초엔 소만국경에 대한독립군과 대한신민군이 조직되었으니, 서일,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등이 이끄는 27개 소대에 3,500여명이 원동에 집합하게 되었다. 독립군은 항일과 독립이라는 목표였고, 러시아측은 적백전, 즉 반혁명군에 필요한 공산화라는 상이한 목표를 위해 협력관계를 유지했었다. 이런 사실은 1920년 일본군에 의한 4월참변을 위시해서 점차 정치적 목적으로 진입하는 이민사의 특징이 형성되었으며, 급기야는 스탈린에 의해 1937년 10여만의 한민족은 소련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고 이로부터 수난과 동시에 개척사가 시작되었다. 소련으로의 이민사는 결국 한국이 직면했던 현대사의 암울한 시대로부터 잉태되었으니 조명희나 윤동주의 소련·간도 이주는 이런 민족사의 와중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김두칠의「선조의 고향집」을 보면 러시아 이민의 참상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점검하게 하는 단초가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도/나와 누이동생도/이 단간초가집에서/나서 살고 있다/이 집을/누가 세웠던가?/그 옛날을/아는 이 없다……이 집 구석구석엔/빈궁에 빠져서 허덕이던/선조들이 흘린 눈물이/주추밑에 늪을 이루었는지/주추는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고/천정은 낮아서/머리를 쳐들 수 없으니/집이란 이름뿐이지/사실은 토굴이나 다름없었다/집안에 좀들은/먹을 것 없어서 기둥을 파먹은지 벌써 오래다……이곳저곳 구리로 땐/부엌에 걸린 가마는/더는 깁을데 없는 아버지의 누덕바지/무릎이 방불하다/가마곁에는/오직 물통이 하나/선반 우엔/질그릇 몇 개/소반과 함지뿐-/이것이 우리집/장식이였고/재산이었다/오직 하나뿐인/우리 집 창문은/틀림없는 애꾸눈/검데데하게 때묻은/찢어진 문풍지는/날마다 날마다/엉엉 울었다

『치르치크의 아리랑』(서울, 인문당).

김두칠「선조의 고향집」에서

김두칠의「선조의 고향집」은 157행의 장시로 이민 1세대들의 참담한 불행을 되살리게 하는 슬픔의 풍경화이다. 이제 이런 역경을 딛고 89년초 한인동포의 숫자는 43만 7천명에 이르렀고1) 중앙아시아 카자흐공화국 등에 가장 많은(약30만) 동포들이 살고 있다. 재소련 한인묵한의 현황은 매우 엉성하고 또 유치하다. 1910년대의 한국문학과 비슷한 수준으로서, 이런 사실은 부끄럼이기보다는 오히려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사실이다. 민족의 언어로, 교민들의 아픔과 슬픔을 서투르나마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음은 용기요, 자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한국 현대문학사는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야할 당위성이 있다. 재소련교민들의 문학은 두가지 계층으로 구별된다. 소련어로 표현한 문학―아나톨리 김이나 미하일 박, 송 나브렌띠 등 10여명은 소련말로 우리의 감정을 일구고 있다면, 또 하나의 경우는 우리말로 표현하는―창간 52년에 이른「레니기치」와 사할린에서 발간하는「레닌의 길로」가 중요한 발표매체였으니, 지금도 이런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레닌기치」신문은 한글세대의 감소와 더불어 1950년대엔 4만여부의 발행부수가 최근엔 9천 6백부 가량으로 줄어들어 교민문학의 열기도 이에 비례했지만, 소련의 최근 개방정책은 필연코 새로운 변화와 활력을 기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3. 재소한인들의 시

페레스트로이카와 그라스노스트 정책은 소련과 우리를 가까이 할 수 있게 만든 직접적 계기가 되었지만, 이전부터 재소한인들의 시가 소개되었고2),「레닌기치」에서『치르치크의 아리랑』의 서평이 1989년 2월 4일자로 실린바 있다.

회남(淮南)의 귤을 회북으로 옮기면 탱자가 된다고 했다. 이 말은 환경과 밀접한 상관을 갖는 환경과 문학을 의미한다. 재소한인의 문학은 귤화 위지의 문학으로서 고도한 문학성의 작품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는 일상언어가 다르다는 점 때문에 포용의 애정이 아니면 안된다. 언어의 섬세한 기교라든가 감정을 지적으로 절제하지 못하는 현상을 가지고 있다. 시행의 기교적인 배열을 하고 있지만 무엇을 위해서인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지나치게 설교조와 관념적 표현이 압도적이다. 시적 리듬도 3·3혹은 4·4의 율조를 유지하려는 복고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소련 본토의 문학을 접해서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는 언어적인 문제와, 문학 본질적인 이해의 미흡과, 한국문학을 접할 수 없었던 고립성과 한계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재소교민의 시를 발표하는 시인들의 나이는 40대에서 80대에 이르고, 6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현상은 생동감보다는 회고적이요, 리듬이나 관념속에 묶일 수밖에 없는 폐칩성에 머무는 이유가 된다. 이는 일종의 향수의식이며 고독을 달래려는 생각과, 복고조의 주제과잉과 관념적인 현상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특히 나이많은 연성용(81세)은 가장 문학성이 있는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의 시「전쟁을 막자」,「고향마을」, 등엔 휴머니즘인 사고와 평화의 갈망이 담겨 있으며, 소설「금빛 꾀꼬리」와 희곡「영원히 남아 있는 마음」,「동창생」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다. 또한 조기천은「수양버들」과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찬양한 10월을 썼고, 한 아나똘리의「두 소원」, 강태수의「카사흐스탄」,「그대의 노래」와 김광현의「삶이 넘친다」, 남경자의「기념비 앞에서」, 남철「지름길」, 량원식의「복별」, 리진의「비소리」, 리길수의「다정한 봄」, 리상희의「목소리」, 명철의「벼이삭」, 맹동욱「생각하세요」, 박 보리쓰의「조국땅이여」, 박현의「강변에서」, 정장길의「신비한 달밤에」, 주연균「사랑의 계절」, 우제국의「갈까마귀」, 윤수찬「콩나물」, 김세일「치르치크의 아리랑」, 김승익「깝차까이」, 김준「눈산」, 김종세「마음 먹은 길」, 류병천「달밤」, 리동언「해바라기」, 리세호「좋기도 해라」, 리은영「좀」, 일환「걸어야 한다」, 한 아뽈론「어머니에 대한 생각」등 30여명의 시인들의 시엔 여러분야의 관심들을 담고 있다. 재소시인의 시는 개인정서에서 자연물에 이르기까지의 표현영역이 다양하다. 선조들이 직면했던 혹심한 경제적 수탈과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 매우 밝은 표정들이다.

뭉게뭉게 흰구름떼 내려앉았느냐?/땅속에서 백화바다 솟앗느냐?/가며가며 볼수록 목화대풍일세!/집약화의 농사 나래치는 벌/꼼바인도 쉬여가며 오가는 천리벌-황금가을 노을안고 아롱지고나

―명철(월봉)「목화라고 불러보면」에서

함박눈이 내린후에/보름달밤 신비한데/창문밖의 백양나무/신부차림 한듯하네/잠든 처의 머리우에/면사포를 그려볼까

―정장길「신비한 달밤에」에서

우리 집 화단에 장미꽃 피였네/장미꽃도 내 사랑도 함께 피였네/너와 나와 놀던 곳엔 달도 밝구나/저 달같이 둥글둥글 둥근 사랑아!

―연성용「장미꽃 피였네」에서

재소시인들의 시는 첫째가 자연적인 풍광에 가장 관심이 많다. 목화밭과 꽃, 사랑, 눈, 별, 강, 두루미, 봇나무, 삼림, 연놀이 등에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우세한 편이다.

오늘의 우리 생각으로 해외교민들의 조국이 한국이라 노래부르기를 원한다면 지나친 요구일지 모른다. 재외국의 국적을 얻고 그들 나라의 풍습속에서 살아가는 데는 갈등과 고민이 유다를 것은 짐작이 된다. 오히려 재외국에서 우리민족의 특성을 과시한다면 더욱 합리적인 현상일지 모른다. 이들이 쓴 조국이라는 용어는 우리를 지칭하는 뜻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일리츠가 시월에 그리던 앞날이/바로 조국의 찬연한 오늘이어늘/장하여라 위대한 쏘베트조국이여/녜와강은 긍지로 출렁인다

―김세일「녜와강」에서

나는 조선사람이다/그러나 쏘련공민이다/내가 난 곳은 원동이고/내 조국은 쏘련이다

―김두칠「송림동 사람들」에서

흘러간 세월은 다시 안오니/은혜로운 조국의 따뜻한 품속에서/보람있게 살아가자, 순간이나마

―리동언「순간」에서

재소교민의 작품엔 고향―한국땅으로 돌아가자는 염원은 없다. 이민 1세대들이 아니라 2세, 3세라는 사실 때문에 고향의 추억이나 그런 인자들은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표면상의 소련이 조국이라는 등식에서 외면 돼야할 이유는 없다. 이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 소련이기 때문이지만, 감정과 느낌을 한글로 쓰고 있다는 사실은 시어에 소련을 조국이라 하더라도 엄연히 정신적 에너지가 한국속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4. 재소교민의 소설

소설의 경우도 시의 경우와 똑같은 상황에서 출발했다. 역시 발표매체가「레닌기치」일 수밖에 없었고, 알마아따의 사수꾁출판사에서 몇권의 단행본들이 발간되었다. 재소교민의 소설 작품 경향은 사랑과 휴머니즘을 대상으로 표현한 많은 편이다. 강태수의「기억을 더듬이며」, 김오남의「기념비」, 김 빠웰의「쟈밀라, 너는 나의 생명이다」, 김 보리쓰의「집으로 가는 길」,「갈림길에서」, 박 미하일의「뾁가노츠카」, 명철의「전사의 편지」, 남철의「못잊을 추억」, 웨아포닌의「고요한 만」, 남경자의「갈림길」, 김 블라지미르의「메아리」등은 사랑과 인정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또한 생활고를 극복하고 낯선땅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 할 수 있는가를 토대로 한 이데올로기적인 작품엔 김기철의「복별」, 리 드미뜨리의「불멸」, 리 왜체쓸라브의「저멀리 산이 보인다」, 리정희의「검은 룡」, 명철의「흠집의 사연」, 박성훈의「살인귀의 말로」, 한진의「녀선생」, 유 크왜뜨롭스기의「거룩한 생활」(양원식 번역) 등의 작품엔 독일과 일본을 증오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지주계급의 착취와의 피나는 싸움 끝에 결국 인민의 승리로 낙원을 쟁취했다는 이상적인 세계지향의 도식적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매우 조악하고 산만한 구성이다. 리 드미뜨리의「불멸」도 러시아혁명의 성공은 곧 조선의 해방이라는 등식을 도입하고 있어 이렇다 할 특징이 없으면서, 소설로서의 인물과 구성에 적절한 기능수행을 구조화하지 못하고 있다. 김기철의「복별」도 이념의 포로가 되어 문학성이라는 미감을 놓치고 있다. 지상의 별이 공산주의를 이룩한 땅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어 낙원의 별을 선전하는 팜플렛 구호문학이다. 리정희의「검은 룡」은 완전히 작업일지식이다. 소설이라는 말을 붙이기엔 민망한 공사장 일화를 삽입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재소교민가운데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작품을 쓰는 사람은 명철이다. 빨치산으로 싸웠던 무공이야기인「그들의 운명」이 있고,「마을 사람들」은 지주와 소작인들의 대결을 테마로 다룬 작품으로 구성에 인과처리가 미흡하다. 할머니의 얼굴의 흠집을 역순으로 회상한「흠집의 사연」은 이데올로기의 지나친 비중으로 작품의 전체균형이 무너진 인상을 준다. 박성훈의「살인귀의 말로」는 일제치하를 무대로 하여 보배의 아버지 리금석이 징용으로 끌려가서 맞아 죽은 35명 노동자의 슬픔과 아픔을 민족의 영상으로 오버랩시킨 사이사이에 보배의 사랑이야기를 곁들인 다소의 소설적 흥미를 삽입하면서 연합군의 승리로 살인귀인 일본이 패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리 왜체쓸라브의「저 멀리 산이 보인다」는 이념적 경향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작품이다. 심리적이고 차분한 문체와 사물을 통찰하는 눈이 예리한 작가이다. 주인공 원춘 노인이 빨치산 중대장으로 백마군을 무찌르고, 아내와 자식의 죽음을 회상하면서 외롭게 살지만, 그가 이룩한 공훈은 결코 외로움과 견줄만큼 나약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날 혜순의 손자가 쓰러진 원춘 노인을 부축하고 간호하는 데 감격한 노인은 오랫동안 간직한 연옥알을 건네준다. 이념적 신념과 인간미가 결합하는데도 지리하지 않는 흥미를 이끌어내는 솜씨가 있는 작가이다. 이념편향 작품들은 거의가 러시아혁명의 공간과 일제치하를 회상하는 감상적 느낌으로 일관된 형식을 취했다. 편집자적인 논평을 앞세워 예술성을 반감하는 이야기 수준에 머물고 있다.

재소교민 소설의 또다른 특성 중 효를 포함한 가정이야기의 작품이 많다는 현상은 대가족중심의 동양적 사고방식과 거기에 따른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복고적 현상이다. 이는 우리민족의 관습과 전통적 특성이 여전히 중요한 정신적 지류를 형성하여 살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연성용의「영원히 남아있는 마음」이나 오쌈쏜의「한집에 두어머니가」, 리정희의「선물」, 전동혁의「천연배필」, 리만식의「이붓어머니」, 리한표의「부모의 초상」, 명철의「어머니들」, 남경자의「생일날 아침」등엔 낳은 정과 기른 정의 소중한 의미를 부각하는 줄거리와, 고부간의 갈등문제에서 화해를 묘사하고 있으며, 이야기의 귀결은 항상 부모를 극진히 모셔야 한다는데 합리적인 귀결점을 부각하고 있다. 오쌈쏜의「한집에 두어머니가」는 재미있고 뛰어난 작품이다. 해외이주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느끼게하는 극명한 작품으로 매우 인상깊은 이야기이다.

리 마리야 노파의 집은 시월명절부터 자물쇠가 걸려있었는데 오랜만에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자 동리사람들의 관심이 노파의 집으로 집중되면서 소설의 도입부가 시작된다. 아들집에 갔던 노파가 기후가 맞지 않아서 돌아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들집엔 소련인 안사돈이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는 소련의 풍습이라는 걸 모르고 아들집에서 편안히 손자들을 돌봐주며 한국식으로 살려고 찾아갔으나, 손자들이 외할머니를 할머니라 부르고 조선말밖에 할 수 없는 고독한 처지가 된다. 한국풍습 밖에 모르는 리 노파에게 한 소련인 안사돈의〈걸상에 앉지 않고 왜 방바닥에만 앉느냐〉는 말을 듣고 곡해하여 일이 벌어지지만 아들과 며느리의 설명으로 무사히 수습된다. 그러나 어느날 잉어를 솥에 붓고 아이들을 데리러 소련인 안사돈이 밖으로 나간 사이에 리 마리야 노파는 사돈과 친해지는 절호의 기회로 알고 한국식으로 잉어요리를 한다. 이 또한 빗나간 풍습으로 물고기 요리를 통채로 해먹는 줄 모르는 리 노파의 본의 아닌 실수였다. 며느리가 칼질한 물고기를 참을성 있게 실로 기워매는 것을 보고 아들집을 떠나면서 리 마리야 노파는 아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이 돈을 너희들에게 남겨두고 간다. 매달 100루불리씩 우편으로 보내군 해라. 그러면 이 늙은 것이 제혼자 애를 쓰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덕을 입으며 호화롭게 산다고 할거 아니냐?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매우 극적이고 재미있는 장면전환이 스피디하다. 전통적인 우리의 관습문화와 이국문화가 어떻게 융화될 수 있는가의 어려움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서 이민 간 1세대의 고충과 갈등을 나타낸 수작이다.

또하나의 관심은 전원무대를 중심으로 공존의 광장을 다룬 작품이 많은 편이다. 자연현상의 수용과 순응이라는 점에서 한국적 표정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재소교민의 작품이 거의가 이런 특성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전통적인 것들의 원형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고립된 처지에서 오는 복고적 취향으로 생각된다. 전통관습과 문화가 이방문화와 합류하는 데는 언제나 길항과 움추러드는 보수성을 갖게 마련이다. 교민들의 대다수가 농경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데서도 산업사회와 달리 집단의식과 인정을 강조하고 사랑과 헌신성의 가치를 우위에 놓고 있다. 산업사회가 힘 우위의 패권주의와 투쟁을 선동한다면 농경사회는 사랑과 조화를 테마로 선택하면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앞세워 효도를 특히 강조한다. 리한표의「부모의 초상」의 일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실 실험조수로 근무하면서 예쁜 처녀와 결혼하여 문화주택에서 살고 있고, 그의 어머니는 며느리 눈치밥을 먹는다고 혼자 자급자족하면서 시골에서 외롭게 산다. 결국 양로원에 계신 어머니를 모신다는 단조한 줄거리이지만 가장 한국적인 생각을 담고 있다. 연성용의「영원히 남아있는 마음」은 치밀한 구성으로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한국적 관습으로 마무리지은 작품이다.

재소 교민소설의 또다른 특징은 자연주의적 사고에서 오는 순박한 인정이 동물과 인간이 교감하는 양상이다. 강태수의「우정」, 리 드미뜨리의「수직」, 남해연의「사랑의 힘」, 연성용의「금빛꾀꼬리」, 와흐땅그아나냔의「배신자」등은 개와 고양이, 승냥이와 인간관계, 꾀꼬리와 소녀, 뱀과 사냥꾼의 이야기에서 삶의 신뢰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배신자」는 사냥꾼의 배신으로, 뱀으로부터 인간이 파멸에 이른다는 교훈성을 담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작품줄거리이다. 특히 김용택의「그를 어데서 찾는담」은 한국전통 혼례식 광경을 소련기자의 눈을 통해 스케치식으로 나열한 작품으로 민족의식의 한부분을 만나는 작품이다. 김 빠웰의「신비로운 꽃」은 어린애의 눈을 통해 아침에 피는 서리꽃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내는 환상적인 작품으로 시적인 신비와 상상력의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공산사회에서 그 사회를 고발하고 비난하는 작품이 있다면 이는 이종의 현상일 것이다. 물론 어떤 사회에서도 비리와 불합리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량원식의「년금생」에서는 은퇴한 주인공의 눈을 통해서 소련사회 간부의 부정직함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물론 간접적인 형태이지만 유일한 고발형태의 작품이라는 데 유다른 점이 있다.

시와 소설 외에도 희곡분야엔 채영과 연성용, 한진을 들 수 있다. 특히 연성용은 1928년 첫 희곡「승리와 사랑」이후 1935년「춘향전」을 각색 연출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1983년「지옥의 종소리」외에도 17여편의 희곡을 썼고, 한진은 알마아따의 조선극장 극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1988년 사수꾁출판사에서『한진희곡집』을 출판했다. 「산부처」(1979),「의붓어머니」(1964),「나무를 흔들지 마라」(1987),「토끼의 모험」(1981) 등 4편을 담고 있지만, 1967년엔「고용병의 운명」과「량반전」(1972),「봉이 김선달」(1974),「어머니 머리는 왜 세였나」(1976),「너 먹고 나 먹고」(1983),「쪽발」(1985) 등 장막 희곡을 쓴 바 있다. 아울러 연성용의「동창생」은 매우 간결한 구조에서 인간의 간사함을 풍자하고 있으며 빠른 극적 전환이 특이한 작품이다.

특히 재소교민 문학의 탄생 매체는 1950년대인「레닌기치」신문사에 김준, 김광현, 림하, 한상옥, 김기철, 리은영, 차원철과 같은 사람들이 합심하였기에 가능했으며 1958년 한상옥의 단편「출생」과 시편들을 실은 문예란으로부터 촉발된 점으로 볼때「레닌기치」는 재소한인 문학의 필수관문인 셈이었다.

이들 작품에 나타난 방언들은 함경도 평안도 방언들이 많은 편이다. 이는 역사적 교섭관계와 유이민들의 실상을 회상하게 하는 흔적으로 보인다. 특히 1939년 스탈린이 소련내 조선인 학교를 폐지한 이후 급격히 쇠퇴한 한글세대속에서 우리말로 쓴 우리의 문학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자랑이면서 긍지의 한국현대문학사의 정신적 한부분을 발견한 셈이 된다.

1) 1981년 6월 외무부발표. 해외교민의 숫자는 중국에 약 200만, 소련에 약 50만, 일본에 약 70만, 미국에 약 65만 가량으로 추정하고 있다.

2) 『캄차카의 가을』(정신문화원, 1983)

『소련식으로 우는 아이들』(주류, 1986)

『치르치크의 아리랑』(서울, 인문당. 1988)

『쟈밀라, 너는 나의 사랑』(서울, 인문당. 1989) 소설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