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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서사




권택영 / 문학평론가, 경희대교수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심리는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성적 욕망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최근들어 인간의 행위와 문화의 근원을 욕망으로 분석하려는 철학자나 비평가가 부쩍 는다. 미셸 푸코는 인간에게 내재한 지식에의 의지와 권력과 쾌락을 동일하게 본다. 르네상스이래 서구사회가 성을 억압해왔다는 정설에 의문을 품는 그는 지식에의 의지는 수많은 성적 담론을 낳고, 그것은 권력 그 자체이며 쾌락을 증폭시켜왔다고 말한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과 인류역사의 근원을 모방하는 욕망에 둔다. 예를 들어 그 여자에 대한 나의 갈망은 타인이 그녀를 갈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 타인이 라이벌인 경우 둘 사이의 모방욕망은 빠르게 교차되어 폭력을 낳는다. 그러니까 정말 내가 그녀를 원하는 것인지(열정)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여 원하는 것인지(허영)를 잘 구별하라는 게 지라르의 충고이다. 타자의 눈으로 선택된 대상은 허상이기에 욕망은 결코 충족을 모르고 끝없이 연기된다.

라캉에게 있어서도 욕망은 끝없이 지연된다. 욕망 그 자체가 이미 결핍이어서 대상을 얻어도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가서면 저만큼 물러나는 신기루와 같다. 급진적 마르크시스트인 들루즈와 과따리는 외디푸스의 응시를 타자를 억압하고 구조화하려는 욕망의 시선으로 본다. 롤랑바르트는 독서를 독자가 텍스트와 벌이는 에로틱한 행위로 본다. 아라가레이는 여성의 육체적 특성을 남성과 구별하여 여성해방론을 편다. 이외에도 바따이유, 크리스테바, 프레데릭 제임슨 등 성적 욕망을 서사(역사)와 연결시키는 예는 많다. 그래서 클레이튼Jay Clayton은 그의 논문「서사와 욕망의 이론Narrative and Theories of Desire」(Critical Ln-quiry 16, 1989년 가을호)에서 욕망은 최근 비평이론의 핵심용어master tropes라고 말한다.

클레이튼은 브룩스Peter Brooks와 베르자니Leo Bersani, 드 로래티스Teresa De Lauretis의 욕망이론을 분석하면서 최근의 경향을 진단한다. 브룩스는 유명한 책,『플롯을 위한 읽기Reading for the Plot』에서 한 편의 소설이 쓰여진, 혹은 읽히는 과정을 에로틱한 행위와 동일시한다. 죽음을 연기시키는 삶에의 본능으로 이야기를 풀이한 경우로 흔히「아라비안 나이트」가 언급되곤 한다. 주인공 세라자드는 죽지 않기 위해 얘기를 되풀이하고, 그것이 어느덧 플롯을 형성한다. 브룩스 역시 플롯을 죽음을 연기시키려는 욕망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엔 삶에의 본능이 아니라 성적 욕망이 근원이다. 쾌락의 종말을 지연시키기 위해 곁얘기나 샛길로 나가는 에피소드들이 반복되다가 종말에 이르고, 그런 과정이 곧 플롯이라는 것이다. 독자는 읽는 과정에서 의미를 꾸려나가는데 에피소드들이 반복되기에 결코 결론에 이를 때까지 종합을 하지 못한다. 이런가하면 아닌듯하고……. 이렇게 이야기가 지속된다. 브룩스는 야콥슨이 구별했던 환유(자리바꿈)와 은유(의미만들기)의 두 축을 플롯에 끌어들인다. 읽는 과정은 의미가 계속 지연되기에 환유이고 마지막에 이르러 결론을 내리는 게 은유이다. 그러므로 브룩스는 욕망이 지연되다가 종래는 충족되는 것으로 본다. 단계마다 독자의 인식은 반복·단련되어 최종인식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결코 충족을 모르는 라캉의 욕망과 브룩스의 그것은 이런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브룩스는 욕망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본 것에 비해 베르자니는 부정적으로 본다. 이 두가지 입장이 욕망에 대한 현대비평의 두가지 축을 이룬다. 롤랑 바르트가 전자라면 르네 지라르나 들루즈, 과따리는 후자라고 볼 수 있다. 전자에서 욕망은 단련되는 과정이요 문화는 지속시키는 동력이다. 브룩스는 서사를 독자의 인식과정으로 보기에 인본주의의 맥락에 서있다. 이에 비해 베르자니는 욕망을 해로운 동력으로 본다. 욕망의 종잡을 수 없이 다면적인 도착성은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을 억압하고 조정하려는 욕망이기에 인식과정이 아닌 억압으로서의 서사이다.

베르자니는 70년대 중반부터 성적인 욕망과 폭력을 연결시키는 글을 발표해왔다. 그는「폭력의 형태들The Forms of Violence」에서 브룩스와 반대입장을 취한다. 욕망은 서사를 촉진하는 동력이 아니라 서사에 의해 억눌리고 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플롯이 완벽한 서사일수록 독자를 지배하고 수동적으로 만든다.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완벽한 서사는 완결된 자아에 의해 이루어진 모방적 서사이다. 이에 비해 플롯이 없이 흩어진 서사는 흩어진 자아이며 반모방적 서사이다. 전자는 리얼리즘이고 후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모방적 서사에서 성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직선적으로 단일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은 욕망의 대상을 가두고 고립시키기 위해 반복운동을 계속하고 폭력에 의해 종말을 맞는다. 베르자니는 목적을 향해 달려온 폭력의 서구역사를 모방적 서사로 본다. 화이트Hayden White나 폴 리꾀르는 서사는 인간을 관계들의 망에 배치시키고 거기에서 세상을 보고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케한다고 말한다. 서구의 역사가 이런 서사였다면 서사를 와해시키는 것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된다. 서사없는 욕망, 즉 시작과 끝, 행위와 결과가 없는 서사에서 욕망은 그 실효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베르자니가 단선적인 플롯의 모방적 서사를 싫어하고 플롯이 와해된 반모방적 서사를 원한 것은 욕망을 억압이요 폭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견해는 6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형식이 반사실주의였음을 떠올리게 한다. 메타픽션니스트들 역시 욕망이 그것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도록 좌절시키기 위해 서사를 와해시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이 없는 파편적 서사에는 독자를 구속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소설에서 뿐아니라 철학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데리다는 서구의 이성중심의 역사에 종말을 고하려 했다. 비록 대상을 단어와 텍스트에 한정시켰지만 어떤 논리도 설 수 없게 와해시킨 데리다의 해체 역시 욕망을 억압과 조종으로, 서구의 역사를 폭력의 역사로 본 셈이다.

그런데 왜 최근에 부쩍 욕망에 관한 이론들이 활기를 띠는가. 형식비평으로부터 인간과 문화의 현장으로 서사를 끌어내려는 의도 때문이다. 상징이니 인물분석이니 풀롯이니 어렵고 딱딱한 형식의 분석에서 벗어나 인간과 상황, 문화적 맥락에서 서사를 보자는 것이다. 브룩스와 베르자니 등 20세기 후반의 욕망이론가들은 서사를 욕망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감흥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형식비평의 틀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성공했느가. 이들 역시 욕망을 보편감흥으로 보아 진정한 역사성을 거두지 못했다는 게 여성운동의 입장에 선 로레티스의 견해다.

로레티스는「서사에서의 욕망Desire in Narrative」에서 브룩스와 베르자니가 형식주의를 넘어서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서사를 역사와 사회 속으로 끌어낼 것인가. 서사를 성의 차이를 생산해낸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사는 다양한 인간의 경험을 남성은 주체요 여성은 객체라는 두 축의 드라마로 축소시켜왔다. 독자는 쾌락을 향한 욕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품을 읽으며 어떤 역할의 편에 서게 된다. 그런데 서사는 늘 남성은 주인공이요 여성은 그가 얻으려는 보상, 혹은 대상이라는 역할을 주어 독자를 조정해 왔다. 그래서 그것은 이미 이데올로기적이다. 페미니스트로서 로레티스는 이런 닫힌 서사에 도전한다. 남성에 대한 모방욕망과 여성성 사이를 왕래한 프로이트의 로라를 예로 들면서 독서과정에서 동일시는 이중적이라는 논리이다. 독자는 욕망하는 주체인 남주인공과 욕망의 대상인 여성 사이를 오가면서 나름대로 의미를 엮는다. 그러므로 이 모순성, 혹은 이중성을 서사는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로레티스의 논리도 진정한 사회성을 얻는 데는 나름대로 문제에 부딪친다. 그래서 최근의 서사와 욕망에 대한 연구는 특정 기간·특정 사회와 성을 연결짓거나 서사형식과 욕망의 변화를 보는 쪽으로 옮겨가리란 게 클레이튼의 견해다.

에로틱한 욕망은 과연 우리를 살게 하는 동력인가, 우리를 억압하는 폭력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혹은 아직까지도 탐색되지 않은 이름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