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들의 새로운 국제동향
허권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문화과장
전세계의 많은 지성인과 예술인들은 인류가 안고 있는 세계적인 문제에 대한 냉철한 성찰과 이의 개선을 위한 예술가적인 사명감을 호소하고 있으며, 과거와 달리 다양한 국적을 가진 예술인들끼리의 집단적 캠페인을 조직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계평화와 복리증진을 위해 결성된 국제기구와 치밀한 공조체제를 유지하여 국제세계에서 괄목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도 하다.
후기사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자본주의의 병리적 취약성과 국제관계에서 야기되는 파행적인 역학관계,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핵의 위험, 자연환경의 심각한 오염 및 독점 권력의 부당성으로 인한 인권의 유린을 과감히 계발하고 이를 작가정신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많은 노력을 보게된다. 국내에서도 80년대부터 이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있어 왔으며 더욱이 한국적 특수성으로 인해 예술가간에 많은 이견이 대두되기도 하였으나 아직까지 이에 대한 학술적 정리나 이해의 수준은 그리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예술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당위성에 대한 깊은 성찰도 중요 하지만 동면상태에서 아직 잠을 깨지 못한 일반대중에게 어떤 메시지로 자신의 고민을 전달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의 개발도 중요하다. 이는 국내 문화 예술계의 작가적 양심의 고양과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기여할 뿐 아니라 국가문화정책의 기본방향 설정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의 예술가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는 문화행사가 일본과 미국에서 개최되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인종차별 반대 예술전
1983년 영국의 로열아카데미에서 개막된 인종차별 반대전 exhibition on "Art against APARTHEID"이 그동안 유럽과 미국에서의 순회전을 거쳐 지난 5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개막되었다. 인간성의 회복과 백인정권에서 신음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색인종을 구원해야 한다는 인류 양심에 호소하는 이 전시에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87명의 미술가의 작품 171점이 전시되고 있다. 절대권력의 남용과 부도덕성,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오직 신만이 인간이 저지르는 갖가지 죄악을 심판할 수 있다는 보수적인 인생관에 안주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를 갖게 하는 기획전이며, 동시에 예술가들은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를 위해 창작을 해야 하는가를 반문케 하는 의미있는 행사라고 볼 수 있다.
1982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을 고발하기 위해 결성된 예술가 모임은 미국·프랑스 등 유럽과 미주지역의 지식인과 미술인 23인에 의해 창단되었으며, 아시아지역의 예술가들은 한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현재 이 단체의 회장은 스페인계 미술가인 안토니오 사우라인데 이 기획전에 대해 전세계 많은 국가의 적극적인 동참이 있기를 호소하고 있으며 〈인류의 양심과 예술가의 사명〉에 부응하기 위한 목적을 뚜렷이 하고 있다.
UN인종차별 반대 특별위원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이 예술인들은 그동안 유렵과 미국에서의 성공적인 전시를 마치고 아시아지역에서의 순회전을 실시하기로 합의하고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의 개최를 위해 현재 국내 관련단체와 개최 가능성을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이 예술전은 영국, 스웨덴, 프랑스, 덴마크, 스페인, 네덜란드, 서독, 그리스, 미국, 일본에서 개최되었으며 미국에서는 뉴욕과 펜실바니아에서 개막되어 많은 호평을 얻었다. 이 단체의 활동은 단순히 예술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이익이 앞서 있다는 비평을 들을 수 있은 정도로 국제사회에 불러일으키는 반향은 매우 크다. 그러나 이 단체의 조정관인 Chantal Bonnet은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이는 예술의 순수성을 호도한 의견이며 하나의 사회인으로서의 작가의 위치를 부정한 자기비하적 견해라고 일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단체는 해외순회전의 기획에 있어서도 자발적인 협조를 요청할 뿐 그이상의 전제조건을 달고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 지구상에서 상식을 벗어난 불의가 자행되고 있는 한 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개최 희망단체는 그 답례로 200만원만 기부하고 나머지는 통상적인 절차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마침 이 전시가 일본에서 개최되는 동안 한일간의 외교적인 문제인 재일동포 법적 지위가 논의되었는데, 개막식에 참가했던 많은 일본 정치인과 예술인들이 어떠한 느낌을 받았는지가 궁금하다.
UN은 3월 21일을 국제인종차별 철폐의 날로 지정해오고 있다. 이는 1960년 3월 21일 샤페빌Sharpeville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을 추념하기 위해서인데, 이날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259명의 흑인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접한 15인의 예술가들은 국제사회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인륜적인 인종차별정책을 호소하기 위해 15점의 포스터를 제작하였는데 이번 기획전에는 이들 작품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 171점의 미술품들은 주로 회화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나 Mart Brusse, Mel Edwards, Magdalene Abakanowicz, Gunther Ubecker, Arman등의 조각작품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끌고 있다. 전반적으로 신표현주의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작품이 많이 있으며 표현자체도 인종차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간의 구속, 압박, 복종 등 어느 사회에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하였으며, 흔히 사회성이 강한 작품에서 발견되는 선동적인 경향성을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작품 자체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 기획전에 작품을 희사한 작가들은 대다수 국제미술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며 아시아지역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화가가 각기 1명씩 참가하고 있는데, 이들은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최근 국내에서 국제문화교류의 활성화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오늘날의 문화예술교류는 국가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어떤 이즘과 캠페인을 통한 민간차원의 국제교류가 가일층 강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이러한 다국적 문화운동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 예술인의 국제교류감각도 단순히 우리의 예술을 보여 준다는 1차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의 미적 소재를 이용한 국제활동에의 참여가 신속하게 이뤄져야 할때라고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아직까지 정책 목적에 의한 국제교류나 특정 국제기구(PEN, ITI, IAA, ICOM 등)를 통한 문화교류도 강화되어야할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만, 이번 인종차별반대 예술전처럼 전인류가 공동으로 해결해야할 자연환경보존, 핵방지, 기아 구제, 인간성 회복들의 영역에까지 국제교류의 폭을 확대해서 우리의 예술가들이 적극 참여하고, 이를 통한 우리 예술의 특징과 수준을 소개하는 국제교류의 필요성을 절감할 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