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미술

모더니즘 미술의 검증




서성록 / 미술평론가

한국미술은 지금 두가지의 커다란 문제를 숙제로 안고 있다. 하나는 모더니즘이 과연 현대미술 속에 있었는가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있었다면 그것의 미적 특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문제가 여전히〈미제사건〉으로 남는다면, 한국미술은 수많은 방법적 실험들과 스타일의 한국적 변형과 같은 노력과 그간의 예술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넓은 세계관에 접맥되지 못한 채 손장난 같은 사소한 짓거리로 축소평가될 소지가 크며, 심지어 모더니즘 이후의 미술에 대한 근거박탈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논의해야 할 주요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미국의 미술비평가 크리먼크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현대미술의 이론적인 정당화를 시도해온 가장 영향력있는 모더니즘 이론가로 꼽히고 있다. 또 대다수 포스트 모던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그의 모더니즘 회화에 대한 이론 성과들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그린버그의 관점은 모더니즘 논의를 위한 첩경이 된다. 그린버그에 의하면, 모더니즘 회화의 혁명은 새롭게 출현하는 기계공학적 세계가 가져다주는 가치혼란을 표현하는 데서 일어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정치적 갱신을 위한 것도 아니며, 미술기능에 관한〈원래적〉신념을 다시금 회복하자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것은 미술 그 자체의 발견, 즉 형식, 주제 그리고 그것의 실천을 위한 것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그린버그는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선 삶과 차이를 둬야 할뿐만 아니라 미적 정서를 유발시키는 의미있는 형식들, 이를테면 형태·선·색깔을 주의깊게 탐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적인 것을 삶과 과감하게 분리시킨 형식주의자 클라이브 벨Clive Bell에 동조했는가 하면, 칸딘스키·클레·몬드리안 같은 추상미술의 선구자들의 입지를 강화시켜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린버그의 입장에서 독자적인 부분은 첫째, 그가 미술형식 자체가 내포하는 순수성과 유일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가 이것을 역사적 전개에 의한 필연적 소산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린버그에 있어 모더니즘의 시대는 20세기에 출현한 것이라거나 인상주의의 혁신으로 창궐된 것이 아니라 칸트Kant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내적 자기성찰의 작용으로부터 배태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칸트야말로 자연과 이성 자체의 한계를 엄밀히 구별해낸 첫 철학자이자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모더니스트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철학을 내재적인 비판의 역사로 고찰했듯이 금세기에 들어와 비판적 맥락에서 문화활동을 파악하려는 움직임들이 그 자체의 본질적 속성을 탐구하고 확신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진행되었다. 그린버그는 예술작품의 특수한 면들이 발전되어온 역사를 일종의〈추방〉과정으로 설명한다. 이를테면 19세기 회화가 다른 예술, 즉 문학의 영향권에 들었음에 비해, 20세기 미술은 회화 자체를 특별하고 독자적인 존재로 재발견해 그 위치를 일층 확고히 만든다는 사실이 이를 실증한다.

모더니즘 회화가 지배적 형식으로 독자성을 가지게 된 것은〈합법적〉영역을 공인받아 절대적인 자기소유와 자기지배를 성취하면서 부터이며, 회화 매체에 결정적으로 의존하면서 부터라고 그린버그는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매체의 가장 두드러진 성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화가 다른 종류의 예술과 달리, 2차원의 평면에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현대미술이 이러한 평면성을 감상자들에게 인식시키려고 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회화는 불행하게도 이 하나의 성격에 족쇄가 채워져 자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르 코르뷔제Le Corbusier가 건축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것처럼 그린버그 역시 회화의 단가성univalence을 확립하고자 했다면, 얼마 후 등장한 미술이론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는 회화의 특수성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의 접근이 그린버그와 현저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간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 그린버그와 마찬가지로 프리드는 회화를 구성하는 형식적 요소를 추적하는데 주력했고 그것을 재현적인 성격과 비교하는 연구, 다시 말해 그것이 다른 재현적 형식들과 어떻게 상이한지를 규정하는 방법을 검토해갔다. 그리하여 그 역시 모더니즘이 노정해온 역사적 궤적을 최종적인 개가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파악했다.

보다 근자에 프리드는 회화의 반연극적 성격을 현대미술에 적용시켜 발전시키는 연구와, 그린버그가 취한 모더니즘의 기본 원리로서의 회화의 자기 동일성 문제에 관한 연구에 골몰하고 있다. 이미 프랑스 18세기 회화에 관한 분석에서 밝혔듯이 프리드는 함양된 미의식이 통일성, 즉흥성, 그리고 예술적 자기충족성의 원리에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을 강조하면서 형식적·구성적 수단이 회화에 연금술적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는 또한 모더니즘이 세계를 표현해내는 사명을 배제했다는 점과, 그 결과로서 자체의 스타일과 형식들, 그리고 미니어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음을 강조한다. 널리 알려진「미술과 물성」이라는 글에서 그는 미니멀 아트를 비판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사회 및 제도적 위상들, 말하자면 단순하게 예술작품을 오브제로 통합시키는 것을 저지하는 연극성의 제요소를 관심 밖으로 몰아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프리드는 미니멀 아트가 오로지 작품의 형식적 측면에 초점을 둔 그린버그 같은 비평가들의 관점을 정당화시키는데 유효했다고 간주한다. 말하자면 역사가 회화에 관한 비평을 없애버린 게 아니고 오히려 사회적·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결별이 미술의〈내재적〉역사를 출현시키는 사태를 야기했고, 또 미술을 순수한 형식언어로 귀착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간략하게 살펴본 모더니즘 미술의 성격과 그 비평적 관점들을 통해 우리는 그 역사적 도정과 배경은 다르지만, 70년대 이후 가속화된〈한국적 미니멀 아트〉가 형식적으로는 단색주의를 표방하고 내용적으로는 자연주의 성향을 내보이면서 절대적 추상의 구축, 회화 범주의 자율성 및 순수성을 구가해왔음을 비교적으로 추출해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미술이 정당화되는 과정과 목적 자체는 타율적이고 일방적이었음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군정이 끝난 직후부터 이 미술이 사회경제의 산업화, 현대화 같은 정책시행과 더불어 본격 수용, 전개되었다는 사실과, 예술의 자기충족성이란 솔직히 말해 화살과 포수는 있되 정작 목표가 되어야 할 과녁이 없는 모순적 상황과 같으며, 그것이 한국미술을 성큼 성장시키는데 견인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어가는 사회현실성과 그것이 미술에 미치는 순기능 및 역기능을 동시에 간과함으로써 오늘과 같은〈현실 기피증〉이나〈과대한 현실편벽증〉을 불러일으킨 주요 원인의 하나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