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무용

최근의 현대춤들, 왜 재미없는가



김경애 / 무용평론·월간「춤」편집장

최근 춤무대들은 대략 두가지 정도의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하나의 비의적(秘儀的)인 성격으로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느린 동작이 주가 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춤본질에 위배될 만치〈설명적〉이라는 점이다.

이 두 현상은 90년 봄시즌을 넘어오면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느린 동작의 비의적 표현으로 가고 있는 모습은, 그동안 춤이 테크닉 위주로 인식돼 춤정신·작가의식을 소홀히한 점이 지적되면서 80년대 후반부터 춤의 시대정신 내지는 예술로서의 기능강화를 목표한 것에서 비롯된다. 즉 춤이 빠른 템포나 난기교를 구경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미래비전을 제시하려드는 욕구에서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내면의 흐름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이것이 표상화 되는 무대기술에 있어 무용가가 아크로바틱한 기교보다 신체에 담긴 정신 흐름을 우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세계 춤무대에서 발레가 퇴조해 그냥 볼거리·구경거리 정도로 남게되고 현대무용이 득세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우리 현대무용이 최근들어 부쩍 이런 현상을 낳고 있다는 것은 바꿔말해 아직까지 그것이 예술정신에 입각해서 제작되었다기보다는 발레 원리와 같이〈보여주는〉행위에 그쳐왔다는 것을 웅변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발레형식에는 빠드뒤·그랑빠 등등의 신비한 테크닉들이 있어서 구경거리로 충분히 제구실을 할 수 있으나 현대춤에서의 같은 기교의 난발은 정말 의미없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80년대 현대무용의 중훙기교들이 작품명칭만 다르되 꼭같이 사용되는 현상을 목격해왔다. 무용가들이 손쉽게 남의 것, 즉 서구에서 개발된 동작이나 형식을 그대로 연구없이 가져다 쓰면서 또 고민없이 작품을 양산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익히 보아오던 한국춤이나 발레에 비해 이것들을 처음 대하는 우리 문화계에는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져 많은 팬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렇게 10년, 현대춤은 80년 후반을 지나면서 사실은 당착에 빠진 모습들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의 아이덴티티가 문제가 됐고, 진정한 우리것, 자아의 뿌리 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서양 유학생들이 옮겨온 테크닉 구사 정도를 넘어서려는 노력들이 몇몇에 의해 비롯된다.

이들의 입장은 한국인만의 고유성으로 세계성을 획득해 세계무대에서 위상을 확보한 일본 부토의 입지적 영향도 그 하나로 작용된다. 이들의 극치의 자아구현은〈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움직이는〉경지를 유행시키는 모티브를 제공한다. 또 이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홍신자의 뉴욕 춤계에서의 성공 소식도 한국 현대춤계를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홍신자의 제의성에 입각한 구도정신의 무대화는 움직임없는 움직임으로 나타났고, 그를 거부하던 국내무대에서의 의외적인 89년 성공은 현대춤계를 자극한다.

이에 앞서 자기찾기를 모색해온 김매자의〈춤본〉, 이정희·김현자 등의 미니멀적 표현과 기(氣) 춤 등에 의해 외견상 느린 동작들이 우리것 찾기 춤 정신과 맞아떨어져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의 현상에 있어 문제는 이런 바람직한 정신에 입각해서 급속히 번진 춤작업들이, 춤을〈지루하게〉이끌고 간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그 작업의 정수보다는 생각없이 모방에 그치고 있는 젊은층들이 자기것없이 유행에 편승하고 있어 퍼지고 있다. 대개의 무대들이 특별한 색체없이 동작 테크닉을 간과하고 있어 춤이 아닌〈무언극〉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춤정신보다 과거의〈구경거리〉를 갈망하게 만들 정도로 의미없는 춤무대들이 양산되고 있다. 90년 상반기, 작가정신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주류를 이룬〈재미없는〉춤들의 모습은 관객을 무용에서 더 멀리할 원인제공이 되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한편 무용공연은 왜 보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하게 할 설명적인 현대무용들이 많았다. 많은 공연예술 장르 중 왜 하필 춤을 보아야 하는가, 이것은 우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의 무대는 연극을 보기위해 극장에 온 것인지 춤을 보기 위해 온 것인지 혼동할 만치 상황 설명에 그친 춤무대가 흔히 있다.

박명숙의 연작「그날 새벽―고구려의 불꽃」(5월 26∼27일 문예대극장)은 이런 춤계 경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춤을 연속방속극처럼 얘깃거리 단위로 4부까지로 나눠 매년 계속해서 한다는 발상부터가 치졸하지만, 작년 1부나 금년 2부가 동명왕기라는 모티브를 재해석해서 독자단위로 춤화한 것이 아니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연극에서 조금 발전한 정도의 설명적이라는데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고구려 신화를 춤무대화 했다는 제목 그 자체가 서사적이고, 이런 서사적 풀이에는 당연 떠올리게 하는 연희장면, 사랑장면, 투쟁장면, 승리장면 등 상식적인 몇가지가 있게된다. 박명숙이 만든 무대에도 당연 이러한 구조가 남용되는 드라이아이스 효과를 회전무대를 빌어서 보여주고 있는데, 문제는 1부와 2부가 큰 차이없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데 있다.

대사없는 연극무대를 방불하게 하는 이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국제현대무용제 등에 등장한 몇작품이나 청소년 대상의 작품들에서 춤의 설명적임에 대한 최근 경향을 떠올리게 했는데, 이것은 춤을 쉽게 풀어간다든가,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주장의 오해를 보게하는 지점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이해를 쉽게 하는 춤이라는 것이 줄거리 나열을 뜻하진 않는 것이다. 춤에 있어 구체적이라 함은 추상성에 대비되는 설명을 말함이 아니라 춤의 본질인 상징성을 단순화시키고 견고히 함을 뜻할 것이다. 진정한 춤은 몸이 말의 대용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발레리가 말한 춤의 무목적성이다.

결국 춤 언어가 상징적 기능밖에 없으니까 의상·장치등에 의존해 코스 춤플레이에 그치거나 아예 일상적 동작에 율동을 조금 가미해 설명하는 데로 끌고가는 정도, 또는 한국춤에서는 종족끼리 이미 통용돼 있는 상징동작, 즉 민속춤사위를 그대로 올린다든지에 그치고 있다. 이런 지리멸렬한 춤행위들은 무용가들의 의식혁명이 없는한 최근 보여준 사례들로 봐서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심도있는 상징성의 춤세계를 보여주었던 현대 춤 작가들마저 그러한 소재주의에 그치고 있다는데 있고, 춤 만드는 사람보다 관객의 지성이 높은 요즘 어떻게 무용가가 그들을 리드할 수 있을까를 염려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