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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든 포용력과 공평한 기회




양미을 / 주한 프랑스문화원 근무

3월 17일 불란서 바스티유 오페라의 성공적인 개막 공연에 뒤이어, 7월 중순 한국을 방문하여 우리에게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준 정명훈의 내한 공연을 불란서 문화예술계와 연관지어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한국인 예술가에 대한 불란서 언론들의 전례없는 호의적인 태도를 거론할 수 있겠다.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백남준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불란서 언론에서 한국 예술가의 이름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불란서 화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한국에서 보도되었던 화가 L씨의 이름도 피아니스트 P씨에 대한 기사도 애써 찾아보았건만 아직 한번도 발견한 적이 없다. 여기에서 불란서 언론이라 함은 나의 직장 불란서 문화관이 취사선택하여 정기구독하고 있는 각 분야의 정기간행물 50여종으로 한정되어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필자가 1975년도 입사할 당시는 한국에 관한 기사는 전무했다. 그러다가 한국의 '기적적인 경제발전' 기사가 가끔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선은, 마치 무식한 벼락부자 대하듯 결코 곱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한국에 관해서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유난히 부정적인 사건에 초점 맞추기를 즐기듯이 보이던 그들이 폭동에 가까운 학생 데모와 진압과정, 잔혹한 광주사태를 집중 보도했음은 물론이다. 그 뒤 올림픽으로 조금 나아진 듯도 했으나 체육일변도로 편중된 정책이 한국의 이미지를 얼마나 개선시켰는지는 미지수다. 그들 언론이 소개한 한국은, 그 어디에도 5,000년 역사의 찬란한 문화전통을 떠올릴 수 없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관한 기사는 주로 이런 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작년 5월, 정명훈에 관한 낭보와 꾸준히 전개되는 백남준의 눈부신 활약 등에 힘입어 한국의 예술가들도 비로소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정명훈에 대한 전격적인 발탁소식에 불란서 언론이 보인 첫 반응은 노골적인 빈정거림과 우려였다. 그러나 자만심과 매사 비판적인 그들이지만 일단 정명훈의 천재적 재능이 발휘된 '트로이……'의 성공적인 초연 후, 이들의 태도는 돌변한다. 그들은 솔직히 그날의 영광을 정명훈에게 돌리며 진정한 승리자를 축하하고 있다. 이들의 객관적인 평가는 한국이 낳은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불란서, 아니 세계 정상에 우뚝 섰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6월 11일자 Elle지에서 G. Mannoni는 "바스티유 오케스트라는 정명훈이 지휘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산적한 많은 난제들……정명훈이 펼치는 기적에 의지할 수밖에"라고 적고 있다. 이밖에 불란서 잡지 등에 소개된 한국 예술인에 대한 최근 기사를 간추려 본다.

우선 누구보다도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그는 세계적 명성에 걸맞게 끊임없이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7월 20일의 존 보이스 추모굿+퍼포먼스도 불란서 방송국 Canal+(꺄날 뿔뤼스)가 금년 말에 방영할 백남준 특집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련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불란서 비디오 작가인 쟝 폴 화르지에Jean Paul Fargier가 백남준과 동행하여, 그가 나서 자란 생가며 동대문시장, 경주 등을 필름에 담아갔다. 화르지에는 작년말, 불어로는 처음으로「백남준 개인 연구서」를 낸 사람이다. 1989년 11월호「아트 프레스Art Press」지 141호에서는,「나의 어머니, 백남준」이란 제목으로 백남준과의 만남, 그의 예술세계 등을 기록하고 있다.

1990년 6월호 뢰이유L'oeil지 제 419호에는 "나의 친구 김수는 자신의 용어대로 독특한 개성의 조형주의자이다"로 시작되는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따니Pierre Restany의 글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현대 미술사의 분기점, 조형주의라는 제목하에 "김수의 이원적 조형주의는 현대 예술가에 정신적 기여를 함으로써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며, 자신이 이를 증명할 수 있음에 기쁨을 표하고 있다.

포지티브Positif 1989년 10월호는 배용균감독의「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한 장면을 책표지로 내세워 그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5페이지에 걸쳐 싣고 있다. 미쉘 시망Michel Ciment과의 대담에서 배 감독은,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경위와 무의 미학, 불교 선사상의 심오한 철학성 등이 작품의 기조가 됨을 설명하고 있다. 말미에 그의 완벽한 불어 구사력을 칭찬하는 대담자에게 배용균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책을 통해서 배웠다. 파리는 6년전, 단지 관광차 짧은 체류를 했을 뿐이다. 굳이 관광차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예술가란 자기 나라가 아닌 제3국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외국의 재능있는 예술가를 포용하는 불란서의 대범함이다. 불란서가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만든 바스티유 오페라의 예술감독직을 '외국인' 정명훈이 차지했다!……한국에서라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낭만의 도시 파리에는 외국의 많은 예술가가 몰려든다. 능력있는 모든이를 파리는 손짓하여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나누어준다. 불란서라는 거대한 용광로를 통하여 새로 태어난 이들은 그곳에서 찬란한 예술세계를 꽃피운다. 그들이 파리를 세계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고 있다. 이것이 불란서의 힘인 것이다. 금년 3월, 불란서 현대예술의 메카 파리 퐁피두센터의 관장직도 그리스 출신의 역사학자 아르바일러H.Ahrweiller 여사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코스모폴리탄적 휴머니즘이 인정받은 것이다. 또한 파리 오페라발레의 예술감독직도 얼마전까지 소련계 미국인 루돌프 누례예프Rudolf Noureev였음을 쉽게 기억할 것이다. 퐁피두센터는 누구 손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바로 이태리인 Renzo Piano와 영국인Richard Rodgers의 작품이었다. 또 불란서 혁명 2백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대형기획물'들을 살펴보자. 우선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은 Carlos Ott라는 캐나다인이 설계했으며, 라 데팡스 대아치는 덴마크인 Otto Von Spreckelsen의 작품이다. 그랑 루브르의 피라밋은 중국계 미국인 I. M. Pei, 19세기 미술관인 오르세 박물관 내부설계는 이태리인 Gae Aulenti 여사가 맡았다. 이밖에 셀 수 없이 많은 외국 예술가가 불란서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의 바탕은 불란서인의 특징인 '개방주의'와 '미의 추구정신'에서 연유한다. 그들은 훌륭한 예술을 받아들임에 있어 개방적이다. 그들은 잠재력을 갖고 있기에 외국인을 겁내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주요 문화시설의 많은 수가 외국인에 의해 장악(?)되는 것에 반대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나 국적보다는 능력이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함을 당연시 여긴다. 한 예술가가 그곳 토양이 맞아서 그곳에 상주할 때 그는 이미 불란서인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피카소도 달리도 불란서인이다. 그들의 예술세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명훈도 불란서인이다. 아직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그들의 자랑스런 불란서인'이 될 것을 믿고 있다. 그들에게 국적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공부한 그의 실력을 재빨리 간파하여 그에 합당한 자리에 임명한 자신들의 혜안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의 정명훈이 있기까지 우리 한국이 무엇을 했는가 새삼 자문해 본다. 한국인 양친 밑에, 한국 땅에서 태어난 것만으로 한국의 음악가라고 떳떳이 내세울 수 있을까? 정명훈, 백남준의 업적은 한불수교 백년사에 길이 남을 쾌거라고 믿는다. 그 어느 대사가 한국의 위상을 이만큼 올려놓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이들의 업적을 기념할 만한 무언가가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명칭이 예술의전당이나 현대미술관 어딘가를 장식할 수도 있겠고, 이들의 이름으로 국제 상이 추진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정명훈, 백남준을 한국의 예술가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우리의 애정과 성원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끝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한국의 정명훈을 선택한 불란서인의 결단에 박수를 보내며 우리가 막상 우리의 예술의전당을, 서울시향을, 현대미술관 등을 개방하여 필요하다면 외국의 유능한 인재를 기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자문하게 된다.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획기적인 예술 행정을 펼칠 때 우리 문화예술계의 새로운 도약은 물론이요 국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리의 많은 인재들에게 더 큰 활약과 발판을 마련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