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일상성
윤진섭 / 미술평론가
20세기초의 다다 운동에서 비롯한 '습득물objet trouvee'이 미술적 콘텍스트에 편입된 사건은 애초에 그것이 전통적 예술의 규범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다다이스트들의 도발 심리로부터 우러나온, 일종의 장난기 비슷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네오다다Neo-Dada를 거친 이래 그것은 현재미술 표현상의 일반화된 관례가 되고 말았다.
미학상으로 볼 때에는 예술과 반예술, 혹은 비예술의 개념정의를 둘러싼 금세기 중엽의 논쟁-A. Danto의 '자격수여 행위'란 개념에서 힌트를 얻어 전개한 G. Dickie의 이른바 '열린 개념'과 '닫힌 개념'에 의거한 '예술정의론'을 둘러싼 찬반논의 따위-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일상 생활용품에 대한 화가들의 관심은 기존의 예술개념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마르셀 뒤샹의 그 유명한 작품「샘」-남자용 소변기에 R. Mutt라고 사인해서 그대로 전시장에 진열한-은 전시자체를 거부당할 만큼 그 당시 미술계에 충격을 주었으나, 현재는 하나의 '고전'으로 미술관에 모셔져(?)있다. 뒤샹의 이 모험적인 거사로부터 7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이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다. 현대 미술에 관한한 이미 익숙한 하나의 어법으로 굳어버린 탓이리라.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도 부쩍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혼합매체mixed media에 대한 열기는 이 같은 레디메이드 미학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본래 입체파 화가들에 의해 대상에 대한 묘사와 대상이 지닌 실재reality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밝히는 수단으로 고안된 콜라쥬 기법에서 발원하여, 2차대전 이후 기성의 오브제를 자유자재로 결합시킴으로써, 전혀 색다른 이미지를 창출해내는 아상블라쥬에 근거하고 있는 혼합매체는 오늘날 가장 각광받고 있는 재료와 기법상의 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화가들은 비단 붓과 안료만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부서진 라디오 부품이나 헝겊 조각, 톱밥이나 철판에서부터 심지어는 목이 부러져나간 인형에 이르기까지-을 끌어모아 이를 붙이거나 썰고, 깎거나 다듬어서 전혀 색다른 어떤 것을 창출해 낸다. 이를테면 일종의 마술사인 셈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화가는 단지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에서의 화가가 아니라, '된다'는 의미에서의 화가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이 되나? 여러 가지로 된다. 그는 때로 목수가 되기도 하고 미장이가 되기도 하며, 용접공이 되는가 하면 직조공이 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심지어는 건축설계사나 기계공학자, 나아가 조선공의 역할까지 맡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매우 흥미있는 가설을 성립시킨다. 그것은 예술이 미분화되기 이전의 고전적 개념으로 다시 피드백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다. 이는 예술art의 개념을 '어떤 법식에 따라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술로 보았던 희랍적 의미의 테크네techne를 연상시킨다. 그 당시에는 직조술이나, 건축술, 제혁화술이나 심지어는 용공술조차 예술의 범주에 들지 않았던가? 그러던 것이 18세기 중엽 파인 아츠Fine Arts개념이 형성되면서 예술은 점차 전문화, 신비화되기에 이른다. '다다'는 바로 이와같은 예술의 신비화에 반기를 든 일대 혁명이었다. 지고한 베일 속에 가려진 예술을 일상적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이것이 다다 이스트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이태리 미래파 운동의 기수였던 마리네티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예술에서 엄숙한 것, 신성한 것, 심각한 것, 숭고한 것 등의 가치를 파괴하자."
예술에 대한 작가들의 이 같은 견해는 날이 갈수록 전문화 추세로 치달아가는 후기산업사회 속의 관료제도, 과학기술, 경제체제, 교육제도 등 산적한 문제들이 야기시키는 위기의식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어쨌든 인류가 화약을 지고 불속에 뛰어들려 하는데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그래서 서구 제국주의가 극한적 형태로 나타난 1차대전의 와중에서 다다이스트들이 온갖 광기와 소란으로 서구의 이성에 저항하고 조소하였듯이, 오늘의 예술가들은 일상성으로 전문화에 대항하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오늘날과 같은 전문화된 시대에서 앞으로 예술가는 마지막으로 남은 비전문가가 될 것이다."는 로덴버그의 말은 시사적이다.
이와 같은 사항을 염두에 두고 보자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고 있는 혼합매체 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우려가 되는 것은 대다수의 작가들이 혼합매체를 단순히 미적 차원으로만 끌고 가려고 하는 안이한 사고방식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작품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기억의 회로 속에 유폐시키고, 대중과의 소통을 기하지 못함으로 해서 결국은 또다시 예술을 신비화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 게다가 창고의 문을 등지고 서서 너무 많은 잡동사니를 주워 모으다보니 문이 막혀 빠져나올 방도가 없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하다못해 피륙을 짜더라도 그것의 짜는 법식을 알았는데, 오늘의 우리 젊은 작가들은 사 년씩이나 미술 공부를 하고도 재료 다루는 것이 서툴다. 심한 경우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왜? 애초부터 문제가 없었으니까.
화단 내에 조성되고 있는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근래 전시된 몇몇 작가들의 개인전이나 그룹전은 꽤 관심있게 지켜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관훈 갤러리에서 있었던「7월전」(7. 25∼7. 31:최정열, 조명식, 이진휴, 심재구, 김영희, 이관희)을 비롯하여 한미수 개인전(제3미술관:6. 20∼6. 26), 최정열 개인전(관훈미술관:8. 1∼8. 7), 심재구 전(제3갤러리:8. 1∼8. 7), 이종구 개인전(청남미술관:8. 1∼8. 7), 남기덕 개인전(청남미술관:8. 1∼8. 7)등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남기덕 개인전과 이종구 개인전은 혼합매체에 대한 접근방식에 있어서 서로 상반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남기덕의 작업이 나무조각이라든가 라디오, TV의 부품과 같은 폐품들을 짜맞추는 '결합과정'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면, 이종구의 그것은 분방하고 활달한 붓 터치와 드리핑이 자아내는 시각적 효과로 인하여 행위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혼합매체는 단순히 이러한 분위기를 보완해 주는 부가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 차이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기덕이 세련된 도시적 감각을 가지고 예의 그 '미래도시'와 같은 주거형태를 창조해 내고 있다면, 이종구는 우리 문화가 지닌 원초성을 탐색해 나가는 듯한 '힘의 의지'를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랄 수 있다.
마치 공상과학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남기덕의 검은색으로 말끔하게 표면 처리된 구조물은 한 작품을 가지고 두 개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의적이다. 흡사 대지의 균열처럼 장방형이나 삼각형, 사다리꼴의 작은 나무조각들을 섬세하게 짜맞추는 작업을 기본적인 프로세스로 갖고 있는 그의 작품은 정면에서 볼 때는 전통적인 회화의 감상법을, 측면에서 볼 때는 오밀조밀하게 라디오 부품으로 이루어진 주거지 안에 거주하는 인간들과의 '말하기-듣기'체계를 교묘하게 유도해 내고 있다.
이와는 달리 이종구는 자신의 메시지를 회화적으로 전달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동물의 살해와 봉헌으로 대변되는 제의 및 이와 관련된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처리한 듯한 그의 작품은 힘찬 필치와 넘치는 에너지로 인하여 강한 인상을 주는 반면에, 내용상으로는 우리 문화의 원형에 대한 작가의 애정만 확인될 뿐,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다소의 무리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장고나 한복 따위의 이미지가 던져주는 소재의 안이함, 상투성은 이 작품이 지닌 힘을 오히려 떨어뜨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