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의 현재
서성록 / 미술평론가, 안동대 교수
1.
오늘날의 미술이 일반대중과 엄청난 괴리감에 사로잡히고 또 그에 상응하는 배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 현대미술에 참가하는 작가들은 예술적 창조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은 소비자(대중)들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들에 의해 추구되는 미적 가치는 향수자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봉쇄 내지는 심한 단절상태에 놓여있다. 이 같은 결과는 궁극적으로 작가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작가들은 소통을 위해 작품수준을 하향해야하고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구성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 대중들은 작가들이 목적하는 미술적 전망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판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소통의 단절은 대중들에게도 이로움을 주지 못한다. 현대작가들은 사물화되고 소외된 상태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인간의 진정한 문화 산물이라고 간주되는 예술을 향수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은-그들이 노동자든 비노동자든-소외된 상태 속에 구속되어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예술과 대중의 단절이 발생하며 이 단절은 우리 시대의 예술적 체험에서 보여지듯이 예술과 사회간의 충돌, 다시 말해 특징 항목에의 종속이냐 아니면 상호 배제냐 하는 극단적 시각을 보편화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날로 심화되어가는 자본주의의 예술에 관한 유리는 분화된 산업사회의 구조로 비추어볼 때 불가피하게 대중과의 관계 절연을 낳기 마련인데 왜냐하면, 작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미적 차원을 쉽사리 낮추기 어려우며 또한, 대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미적 안목을 예술작품이 지니는 높은 차원으로 높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일부 작가들은 소외적 상태로 존재하면서 그들의 작품이 수백만, 아니 수천만 명 일반 대중들에게 읽혀지고 감응을 일으키거나 공감을 받는 일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미술과 사회의 유리관계, 다시 말해 미술의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볼 때, 현시기의 미술이란 오직 선택된 일부 유한층 혹은 미술의 발안자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은 소수성, 한 마디로 말해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일찍이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의「예술의 비인간화」에서 분석된 바 있다. 가세트는 이 책에서 예술과 대중들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방법을 검증했으며, 또 이미 가세트의 이론은 스페인 언어권 국가에서 일찍부터 광범위하게 인지되어 왔기는 하지만, 예술의 정상적 소통의 계기를 알아본다는 측면에서 그의 관점들을 다시금 추스려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예술은 늘 대중들에게 적대적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대중적 취미를 반영하지 않으며, 심지어 반대중적이기까지 하다고 한다.
가세트의 기본명제를 정리하면 첫째, 예술은 대중과 분리되어 있다는 인식 둘째, 이러한 인식은 극복될 수 없다는 주장에 기초한다. 현대예술은 말하자면 "특별히 궁리된 소수성"에 함몰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가세트에게 있어서 대중의 개념은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지 않기 때문에, 또 그는 이러한 범주 속에 "궁리된 소수성"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시키기 때문에 현대예술은 본질적으로 지엽적일 뿐만 아니라 혹은 그가 말했듯이 "세련된 감각을 소유한 특수 귀족들의 예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예술이란 원칙적으로 만인은 아닐 지라도 폭넓은 계급층을 구성하는 사회 대중들의 것이 아니라 그 미술을 "이해하는 사람들만의 것"이다. 아무튼 가세트의 예술적 관점에서 보면, 현사회 예술의 번주는 엘리트 예술과 대중적 예술로 구분되며, 이것은 "한 그룹이 다른 그룹을 부정하는 이해 기관,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간적 종의 특성을 띠고 있음을 의미한다."(Jose Ortega y Gasset,『The Dehumanization of Art』, Princeton, N, 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8. p.6)고 해석될 수 있다.
2.
필자가 논의하려는 바는 현대미술이 지닌 귀족성과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의 미술적 체계는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현대미술이 소수성을 띠기 때문에 지엽적이며 한정적임과 동시에 특수적이라고 보는 입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일반적으로 현대미술의 추상양식이 보편화되면서부터 사회에 관한 작품의 내재적 연결고리는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또한 추상양식이 일부 상류계층의 독과점 품목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이 일지만, 지금처럼 다원화된 계급 구성과 복잡다단한 사회적 성격에 비추어 귀족적 및 대중적, 추상적 및 형상적, 보편적 및 특수적, 예술적 및 사회적 관계 같은 이항 개념만을 가지고 작품과 외적 세계에 관한 상보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허구적 논의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숨길 수 없다. 그러므로 필자는 미술과 사회적 유기성을 확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명제 아래, 화단 일각에서 탐색하고 있는 도시문명 내에서의 삶의 내용을 반영하는 미술적 유형을 소개하고 그것의 잠재적 조형력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아다시피 현대사회의 발전은 도시문명을 기초로 해서 형성된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의 이른바 대도시의 출현은 인간이 에덴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후 가장 주목할만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리하여 1960년대 초 팝아트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리히텐스타인Roy Lichtenstein은 "외부는 하나의 세계이며 팝아트는 그 세계를 탐구한다."는 지침 비슷한 것을 발표했는가 하면 뒤샹Marcel Duchamp을 비롯해서 라우센버그Robert Rauchenberg, 재스퍼 존스Jasper Johns등은 작가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없다는 자각 아래 각종 도시 물품들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물론 현대 문명사회 속의 도시적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은 팝아트의 작가들이 처음이 아니겠지만, 그들은 어떤 뚜렷한 의식적 자각에 바탕하여 20세기 중반의 특별한 대도시 속의 미술을 구현하려고 했다. 팝아트는 도시환경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이 점은 또한 미술의 대중화를 속도 있게 촉진하는데 상당한 기폭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처음에 미술적 주제로 택하기 불가능한 것으로 단언했던 특별한 환경적 측면들과, 환경과 관련되어 있는 문화적 인공품들, 말하자면 만화, 사진잡지, 광고물과 선전 판촉물, 그리고 온갖 종류의 포장물, 헐리우드의 영화, 팝음악과 유흥산업, 텔레비전과 타블로이드판 신문, 냉장고나 자동차 등 내구성 소비재들, 고속도로나 주유소 등 현대적 시설물들, 핫도그나 아이스크림, 파이 같은 음식물들 따위는 깡그리 새로운 모티프로 비추어져 화면에 옮겨졌다. 미술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일에 있어 이러한 현실의 리얼리티를 반영하는 모티프를 활용하는 작업은 절대적이며, 아울러 그것은 한국화단의 심각한 문제중 하나인 단조롭고 획일적인 소재 문제를 극복하는데 어떤 실마리를 줄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복고적인 자연적 사실주의를 형상미술의 전체인 양 착각하고, 작가의 세계관을 재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자연을 아름답게 모방할 뿐만 아니라 생명의 신비한 현상을 가져다주는 순환원칙에 입각해서 그림도 그 원칙을 준수할 때에만 비로소 미적 경지에 도달한다는 무지를 범하는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을 감안하면, 자연적 소재주의의 탈피에 대한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없이 분명해진다. 풍경화일 지라도 그것은 오늘의 숨쉬는 현장을 담은 것이 아니라 100년전에 있었고 또 50년 전에도 접해 왔던 자연주의적인 것이 버젓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실경산수 등 수묵화의 전통이 아직 뿌리깊게 남아 있는 탓인지 현대미술의 경우도 산과 들, 그리고 해변 풍경이 등장하는 게 고작이다. 자연의 실체가 불변하듯이 이러한 작품들 역시 불변인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거기에 어떤 작가의 생각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도 깃들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소재의 작품을 접하면 우리는 그것을 곧잘 풍경 그림, 아니 회화의 전형인 양 인식할 때가 제법 있다. 이러한 소재의 작품들은 요지부동의 자연공간 속에 갇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적, 역사적 상황성을 질식시키게 만들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인간의 상대적 가치와 그 가치의 특질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몇몇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도시적 그림의 도상들을 유형별로 정리하면, 첫째, 도시환경이 가져다주는 폐해성과 황량함을 나타낸 것, 둘째,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도입하되 파괴당한 삶의 질감을 표현한 것, 셋째, 도시문명과 관련하여 공학적 재료에 주안점을 두면서 미술행위의 체험과 그 내용의 전달에 관심을 두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식적 분류는 접어두더라도 몇몇 작가의 작품을 뜯어보면 금새 우리는 외적 세계에 관한 각별한 관심이 꾸준히 고조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통하여 미적 소통체계를 확립하면서 이제 미술을 제한된 향수층의 것으로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대중적이며 보편적인 시각형식으로서 발전시키려는 의도가 두드러진다는 점을 발견 할 수 있다. 도식적 그림의 전형적인 작가는 이석주이다. 그는 형상을 마치 인쇄되어 찍혀나온 정교한 이미지로 취급하면서 대형 도시 내에서 일어나는, 또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을 보여주고 연상케함으로써 미술과 생활의 일체성을 찾으려 한다. 동시에 폐쇄된 조형공간이 아닌 개방된 공간, 다시 말해 삶의 구체성이 잔존하고 미술의 현시성이 도사리는 생명력을 지닌 공간으로 구축해 간다. 유사한 작가로는 김용식을 들 수 있겠는데, 그의 경우 생활공간의 보편성이 개인적 공간의 특수성으로 변화되어 나타난다는 점이 특이하다. 작가는 깊은 수면에 빠진 익명의 도시인을 통해 꿈을 꿀 수 있는 현대인의 권리와 명상적인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작가적 삶의 중요성을 자신이 거주하는 실내 공간과 관련시켜 자서전적으로 부각시키는 정일의 경우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라는 두 차원을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시적 운율을 타고 부유하는 예기치 못한 사건의 과정을 정감 있게 그려낸다. 또 조용각은 적막한 도시공간 속을 서성대는 이웃들의 모습을 표출하면서 친근한 주변적 사실들에 관한 깊은 애정과 관찰력을 담아 내고자 한다. 이외에도 김용철, 강성원, 문인수, 조덕현 등은 갖가지 산업재료를 이용하거나 환경문제를 주제로 포착하여 물질문명 속의 인간과 존재가치 문제를 훌륭하게 취급해 준다.
한편 물질적 가치의 전횡적 폭력성을 고발, 비판하는 작가로는 먼저 김영원을 들 수 있다. 그는 몰가치와 이성적 야만성 속에서 신음하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무기질적으로 반영해 주고 기계적으로 재현함으로써 후기산업사회라는 표피속에 갖힌 폭력성과 기만성을 들추어낸다. 그에게 의식의 파편화는 조형구조의 분절적 형식으로 파악되고, 따라서 어떤 인간의 구원도 처절하게 난파당한 현실과 그 현실 속의 의식에 대한 판단 없이는 가능하지 않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현실의 폭력성을 인간 본성에서 찾는 작가는 황용진으로, 그는 만연하는 불신과 혐오의 감정들을 숨김없이 화면에 쏟아넣고 거기에 다시금 알록달록한 색상을 가함으로써 작품의 내용적 요소와 조형적 요소의 공통이 되는 동일 공간을 구축하려고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사회의 악성의 근원을 외부에서 찾는 이흥덕의 경우, 생활터전을 박탈당한 노동자라든가 학업과 미술에 전념할 수 없는 미술학도 등 표류하고 있는 인간상을 회화 전면에 내세우면서 사회 정치적 모순의 불가항력에 시달리는 현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산업화 과정의 도시 풍상을 생활세계와의 교감이라는 측면에서 담아내려고 했던 1970년대 말의 극사실 및 팝아트류의 경향과,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서울의 공간성과 1980년대라는 시간성에 초점을 맞춰 일그러지고 폐허화된 도시인들의 삶을 원초적이며 구체적인 형상 처리로 조형공간 속에 구현해낸 신표현류의 미술, 그리고 최근에 나타나는 좀더 극명화된 형태의 도시문명에 관한 관심은 한국화단에서는 이례적인 사건으로 파악할 수 있다. 국전풍의 자연적 사실주의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서구 인상파나 자연주의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이었고 지금도 낙후된 형식틀에 사로잡혀 새 비전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반면, 그 반대편에 위치해 있는 이른바 추상미술의 회화의 현대성과 자존성이라는 두 축 사이를 맴돌며 현실적 삶의 깊이나 미술의 상황적 통찰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도시공간과 그 안의 인간' 문제를 배제하고 있다. 도시라는 것이 인간의 문명사의 발전과 더불어 형성되어 왔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서울은 세계 10대 도시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인구가 밀집해 있고 거대한 빌딩 숲은 또 하나의 인공적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서울과 그 속에서 파란만장하게 전개되는 삶의 성격들과 긴박감 넘치는 사건들을 담아내는 미술이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했던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치 한국화단은 소재의 빈곤을 극복하려는 몸부림 없이 전통적인 소재와 관념적인 미술행위 자체에 집착하면서 현실에 안주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태를 감안할 때, 도시문명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실로 값진 미술적 전망을 보증하는 이정표쯤으로 여겨도 손색이 없으리라 본다.
3.
미국의 경우 도시적 풍경의 그림이 출현한 것은 1959년 근대미술관에서 개최된「인간과 새로운 이미지들 전」을 계기로 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미술비평가 피터 셀츠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해서 펼쳐지는 화풍을 '상처입은 현실에 대한 주목'이라고 평한 바 있고, 미술사가 리콜라스 칼라스와 엘레나 칼라스 부부는 그러한 그림을 '인위적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의 유명한 미술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는 새로운 리얼리즘을 1960년에 제안하면서 "오늘날의 모든 어휘들, 언어들, 양식들은 고갈의 상태에 처해 있다"며 현실적인 것에 관한 관심을 "상상적이라거나 지적 복사라는 프리즘에 의해서가 아닌 현실 자체의 모험"을 통해서 구체화할 것을 주장하여 앵글로 색슨계의 차갑고 지적이며 전통적인 미술적 접근 태도에 한계가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61년 레스타니가 발표한 제2의 새로운 리얼리티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미술자체가 사회학적인 것이 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적 현실로서의 특별한 이미지, 인간적 행위가 보편적으로 충만한 특별한 이미지, 그리고 우리의 사회적 교감과 행위로 발현된 위대한 공화국으로서의 특별한 이미지" 따위가 어떤 중요성을 갖고 표출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르망, 이브 클랭의 오브제나 뒤샹의 레디 메이드를 새로운 중요성을 갖는 작품으로 간주하면서 특히 레디 메이드야말로 현대생활과 도시, 거리, 공장 그리고 대량생산과 같은 사회의 전체적인 유기적 부문들을 직접적이고도 올바르게 표현하고 해석한 것으로 보았다(『Modern Art;Impressionism to Post Modernism』ed., David Britt, Thames and Hudson, London, 1989. p.350).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시각예술의 발전을 위한 주요 계기로 삼은 사람은 찰스 잰크스이다. 그는 오늘날 건축은 표준화, 기계화된 대량생산의 메커니즘과 달리 같은 대량생산 사회 속에서도 다양성과 차이성이 보증되는 미적 형식이 역동적으로 획득되어가고 있다고 본다.
"컴퓨터로부터 비롯된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새로운 창작 형태를 가져오게 했다. 이것의 유력한 유형은 첫 산업혁명 때의 틀에 박혀 있는 생산적 과정보다 훨씬 변화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개성적이다. 대량생산, 대량반복은 물론 현대건축에 있어 확고부동한 기반이었다. 하지만 이 기반은 붕괴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상당히 흔들리고 있음은 명백하다. 컴퓨터로 설계되고 또 그것으로 자동생산되며, 시장체제를 연구하고 예상하는 보다 고도화된 기술들은 이제 우리에게 매우 다양한 양식들과 거의 개인적인 창작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만들어준다.(Charles Jeenck,『The Language of Post-Modern Architecture』, London Academy Editions, 1984. p.5)
산업사회의 테크놀로지가 모더니즘과는 구별되게 예술의 비교조성, 대중성, 다양성을 각각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것 자체가 새로운 미적 모델이 된다거나 목적으로 간주될 수는 없으리라 본다. 하지만 정보전달과 미디어 기능이 극대화되고, 따라서 예술의 생산과 수용이 하나의 통합된 메커니즘으로 바뀌고 있는 현 사회구조의 성격상 그것이 생산의 측면들, 다시 말해 창작의 순수성, 고유성만을 고집하던 모더니즘 시대의 창조적 관심을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가 된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생산과 수용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뚜렷한 관심 없이 예술의 효용성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접근은 모더니즘 미술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 예술적 비전을 찾아가는 돌파구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모더니즘 미술을 형식주의적 맥락에서 규정지으려 했던 클리먼트 그린버그와 그의 계승자 마이클 프리드의 이론을 검토하는 작업은 따라서 미술의 대중성 획득을 통해 '소통 가능한' 미적 체계를 타진하기 위한 논리적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미국의 미술비평가 클리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현대미술의 이론적인 정당화를 시도해온 가장 영향력 있는 모더니즘 이론가로 꼽히고 있다. 또 대다수 포스트모던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그의 모더니즘 회화에 대한 이론 성과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그린버그의 관점은 모더니즘 논의를 위한 첩경이 된다. 그린버그에 의하면 모더니즘 회화의 혁명은 새롭게 출현하는 기계공학적 세계가 가져다준 가치혼란을 표현하는 데서 일어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정치적 갱신을 위한 것도 아니며, 미술기능에 관한 '원래적' 신념을 다시금 회복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미술 그 자체의 발견, 즉 형식, 주제 그리고 그것의 실천을 위한 것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그린버그는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선 삶과 차이를 둬야 할 뿐만 아니라 미적 정서를 유발시키는 의미 있는 형식들, 이를테면 형태, 선, 색깔을 주의깊게 탐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적인 것을 삶과 과감하게 분리시킨 형식주의자 클라이브 벨Clive Bell에 동조했는가 하면 칸딘스키, 클레, 몬드리안 같은 추상미술의 선구자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린버그의 입장에서 독자적인 부분은 첫째, 그는 미술형식 자체가 내포하는 순수성과 유일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가 이것을 역사적 전개에 의한 필연적 소산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린버그에 있어 모더니즘의 시대는 20세기에 출현한 것이라거나 인상주의의 혁신으로 창궐 된 것이 아니라 칸트Kant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내적 자기성찰의 작용으로부터 배태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칸트야말로 자연과 이성 자체의 한계를 엄밀히 구별해낸 첫 철학자이자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모더니스트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철학을 내재적인 비판의 역사로 고찰했듯이 금세기에 들어와 비판적 맥락에서 문화활동을 파악하려는 움직임들이 그 자체의 본질적 속성을 탐구하고 확신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진행되었다. 그린버그는 예술작품의 특수한 면들이 발전되어 온 역사를 일종의 '추방'과정으로 설명한다. 이를테면 19세기 회화가 다른 예술, 즉 문학의 영향권에 들었음에 비해, 20세기 미술은 회화 자체를 특별하고 독자적인 존재로 재발견해 그 위치를 일층 확고히 만든다는 사실이 이를 실증한다.
모더니즘 회화가 지배적 형식으로 독자성을 가지게 된 것은 '합법적' 영역을 공인받아 절대적인 자기소유와 자기지배를 성취하면서부터이며, 회화매체에 결정적으로 의존하면서부터라고 그린버그는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매체의 가장 두드러진 성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화가 다른 종류의 예술과 달리, 2차원의 평면에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현대미술이 이러한 평면성을 감상자들에게 인식시키려고 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회화는 불행하게도 이 하나의 성격에 족쇄가 채워져 자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르 꼬루뷔제Le Corbusier가 건축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것처럼 그린버그 역시 회화의 단가성univalence을 확립하고자 했다면, 얼마 후 등장한 미술이론가 마이클 프리이드Michael Fried는 회화의 특수성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의 접근이 그린버그와 현저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간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 그린버그와 마찬가지로 프리드는 회화를 구성하는 형식적 요소를 추적하는데 주력했고 그것을 재현적인 성격과 비교하는 연구, 다시 말해 그것이 다른 재현적 형식들과 어떻게 상이한지를 규정하는 방법을 검토해 갔다. 그리하여 그 역시 모더니즘이 노정해온 역사적 궤적을 최종적인 개가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파악했다(Steven Connor,『Postmodernist Culture』, Basil Blackwell, 1989. pp.81∼83)
보다 근자에 프리드는 회화의 반연극적 성격을 현대미술에 적용시켜 발전시키는 연구와, 그린버그가 취한 모더니즘의 기본 원리로서의 회화의 자기동일성 문제에 관한 연구에 골몰하고 있다. 이미 프랑스 18세기 회화에 관한 분석에서 밝혔듯이 프리드는 함양된 미의식이 통일성, 즉흥성, 그리고 예술적 자기충족성의 원리에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을 강조하면서 형식적, 구성적 수단이 회화에 연금술적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상과 같이 간략하게 살펴본 모더니즘 미술의 성격과 그 비평적 관점들을 통해 우리는 그 역사적 도정과 배경은 다르지만, 1970년대 이후 크게 성행한 형식적 모더니즘 회화가 양식적으로는 단색주의를 표방하고 내용적으로는 자연주의 성향을 내보이면서 절대적 추상의 구축, 회화 범주의 자율성 및 순수성을 구가해 왔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미술은 '현대미술'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가지 실험성과 회화의 자족성을 '현대의 리얼리티 발견'을 위하여 시도했지만, 이때의 리얼리티란 수용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관념적인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현실 상황에 대한 예술적 반응과 투영을 배제한 것이어서 미술 자체의 기능을 지나치게 축소지향화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화살과 과녁은 있되 정작 활을 당겨야 할 포수는 없는 모순적 상황과 같으며, 그것이 한국미술을 성큼 성장시키는데 견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어가는 사회 현실성과 그것이 미술에 미치는 영향관계를 동시에 간과함으로써 오늘과 같은 '현실 기피증'이나 반대로 '과대한 현실 편벽증'을 불러일으킨 주요 원인의 하나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4.
오늘날의 미술은 그것을 정작 감상하고 향유해줘야 할 주체인 대중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으며 또한 어느 정도는 이해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삶의 현장성이나 역동성을 박탈한 것이어서 폭넓고 입체적인 수용을 무기한 연장시킨다. 심하게 말하면 그림의 난해성이 단념되든지 향유의 즐거움이 포기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하지만 다행으로 여겨지는 것은 상기의 도시문명적 미술은 우리의 이러한 수용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소재적 보편성을 띠고 있으며, 그리하여 정서적 공복감을 충분하게 해소할 것을 앞으로의 과제로 삼으면서 예술과 현실의 등식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려는 탐구적 노력을 일층 증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모더니즘과 민중 미술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간 형태의 미술로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는 '경향적 이데올로기'나 '형식적 심미주의'에 의해 잠식당한 한국화단의 불구화 된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의 공감의 너비를 증폭시키고 새로운 조형적 잠재력이 내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원하는 "예술에 의해서 제공되는 인간적 풍부성을 획득하여"(A. Sanchez Vasquez, 『Art and Society』, Merlin Press, London, 1973. p.262) 인간 존재의 사회적 기능을 꾀하려는 본질적인 의미 내용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행위 자체가 자신의 수용층에 대한 사려깊은 통찰을 지니지 않는다거나 상황적 특수성에 관한 배려 없이 다만 동어반복의 차원에 머물러 버린다면 그것은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되고 만다. 도시문명적 미술이 함축하는 가능성과 그것이 앞으로 분출하게 될 조형력은 이런 점에서 미술의 본래적 권리를 되찾으려는 명예회복 운동에 다름 아니며, '새로운 것의 전통' 으로 지칭되던 통념화되고 일반화되어 더 이상 미술적 전망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대미술의 변혁을 촉구하는 시대적 욕구를 만족시키며, 그 책임을 스스로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질적 측면에서의 예술의 현실적 대응이라는 사회 역사적 필연성에 입각한 일종의 개혁운동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미술이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것이 엘리트주의, 귀족주의 같은 계급적 폐쇄성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또다른 함정은 바로 이것의 계급적 개방성, 그리고 위로부터 하강하는 위압적 힘을 향해 저항하는 아방가르드적 정신의 부재 속에 잠복되어 있다. 소위 고급예술이 띠는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대안으로서의 대중성의 도입은 일견 타당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예술의 상품화 문제를 가중시킬 수 있고, 나아가 체제순응적 문화형태라는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날 수도 있다. 모더니즘이 그 자신의 거역할 수 없는 추상성을 옹호함으로써 부르조아 계층을 합리화시켰다면, 이 미술은 수용자층의 소통관계를 특별히 강조하기는 하지만 작품의 사회비판적 기능을 간과함으로써 예술 자체의 에너지를 반감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짐들은 이미 패턴화된 양식의 작품들이 남발되고 미적 가치를 여느 상품들과 동일하게 무작정 화폐가치로 환산해서 보려고 하며 '진지성'을 결여한 창조형태 속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된다. 미술이 오늘날 같은 광고, 소비, 상품 사회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비판의식을 더욱 예각으로 갈아세워 사회의 표준화, 기계화, 복제화 같은 비인간적 속성을 파해치고 한편으로 교묘하게 침투해 있는 지배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순수성의 공모를 과감하게 폭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예술적 인식과 창조적 실천을 위한 지평은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