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四天王寺 왔소!」축제
이강렬 / 연극평론가
일본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교포들이 살고 있고, 고대이래 문화사적으로도 깊은 관련이 있는터에 일본 속에 있는 한국 문화에 대한 작고 큰 행사가 연중 열리고 있다.
때로는 그것이 재일교포들의 법적 지위문제 등의 큰 맥락에서 행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일본에 남아 있는 고대문화의 현장을 찾는 작업 내지 학술적인 행사가 대부분이다.
지난 8월 19일 오사카에서 열린 '사천왕사 왔소!'는 재일동포들의 사상 최대 민족 축제였다는데 일본 문화계에 큰 눈길을 끌었다.
약 3천여명의 동포들이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의 전통의상을 차려 입고 고대 목선을 앞세운채 1.5km 거리를 행진하여 잠시나마 오사카 도시를 1천4백여년 전으로 되돌려놓았다.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일본 문화와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한반도 도래인들의 상황을 재현한 것이다.
이 행사는 일본 내에서도 재일교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오사카(大阪)에서 행해졌으며 19일 하오 3시부터 7시까지 덴조지구(天王寺) 시텐노지(四天王寺)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이날 행사는 하오 3시 시텐노지와 이쿠다마 소학교 두곳에서 동시에 진행돼 시텐노지에서 화려하게 폐막됐다.
이쿠다마 소학교에서는 지난 5일 부산에서 선편으로 오사카에 도착한 한반도 도래인들의 시가 퍼레이드가 출발하여 1,5km 떨어진 시텐노지까지 오사카 중심지 대로 3차선을 누볐다.
연도에는 수 만명의 오사카 시민들과 재일동포들이 나와 진기한 복장의 퍼레이드 대열에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퍼레이드 행렬은 고(高)·양(梁)·부(夫) 세 성(姓)의 개조로 분장한 인물들을 앞세운 탐라국, 그 다음에 신라, 백제, 고구려, 조선 순으로 이어졌다.
일본에 한자를 전한 왕인(王仁)박사, 고대 일본 최대의 정치가 성덕(成德) 태자에게 불교를 가르친 혜자(慧慈)스님, 동대사(東大寺) 건립에 큰 영향을 미친 원효대사, 일본과의 공식 무역을 시작한 세종대왕 등 역대 유명 인물들을 태운 가마 수레 행렬 속에 사물놀이패, 취타대, 궁중아악대 등 전통 악대들이 고대 한국 음악을 연주하여 연도 시민들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인원은 모두 3천5백명이나 됐고, 길이 12m의 고대선 3척을 비롯해 가마, 우차 등 66대가 대열 중간중간에 섞여 장관을 이루었다.
시텐노지에서 이들을 영접한 일본 측 인물은 백제계 도래인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성덕태자,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으로 일본 불교에 큰 족적을 남긴 행기(行基) 등이었다.
행사가 진행되기 훨씬 이전인 6월 12일 약 5백여명의 동포들이 고향을 방문하였고, 이때 임진각 등 5개 지역에서 '성토제(聖土祭)'를 올리면서 사실상 '사천왕사 왔소!' 축제는 시작된 셈이다.
이 행사는 단순히 일본내에 있는 동포들의 문화행사 차원이 아니라 고대 한반도의 문화가 건국 전 일본열도에 전래된 과정을 복원해 가면서 오늘에 사는 교포들의 민족적 뿌리를 재확인시키는데 기여를 한 행사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행사비용도 동포 실업가들이 거금을 희사했고, 일반동포들도 각자의 분수에 맞게 비용을 보태 무려 24억엔이라는 기금을 조성했을 뿐 아니라 승려역을 맡은 동포들은 삭발까지하는 등 참가자들의 열의 또한 대단했다.
오늘날 교포들이 3, 4세로 이어지면서 언어와 민족적 풍습내지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현실에서 이같은 행사를 통해 젊은 세대들에게 일본땅에 사는 것에 정당성을 갖게 하는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데 큰 역할이 되었다.
'사천왕사 왔소!'는 그런 의미에서 분명 고대 한·일 역사 복원의 축제였으며, 일본 속에 한국 문화의 위상을 더 높이는데 자극이 되었다.
일본측 참여 인사들로서는 후쿠다 전 수상을 위시하여 오사카 지역 유지들이 대거 참여하는 등 일본측의 관심도 상당했다.
시민들은 35도의 폭서에도 불구하고 10만여 명이 거리로 나와 지나는 행렬에 박수와 응원을 보내며 즐거워했다.
고대사 이래로 한·일의 만남은 한반도의 문화가 일본에 전래되는 수직관계였으나 오늘날은 일본이 의도적으로 수직관계를 수평관계로 희석시키고 있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천왕사 왔소!'에 참가한 교포들이“왔소, 왔소”를 외치며 민족적 자긍심을 오사카 거리에 울려퍼지게 했던 노력이 축제로 승화되어 보여졌다.
굳이 역사적 사실을 들먹여 논할 필요가 없드래도「일본서기」에 의하면 612년에 백제 사람인 미마지가 일본으로 건너가 오나라에서 배워 온 기악무를 앵정이란 곳에서 소년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미마지가 처음으로 일본에 전한 기악무란 것은 사자놀이까지를 포함한 일종의 가면무용이었다. 그것은 당시 일본 귀족사회에서의 각별한 보호를 받기에 이르렀고, 사월 초파일과 7월15일 제회(齊會)에 사찰의 연중행사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화려한 전승을 거듭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일본 전통예능의 하나인 '기가꾸'의 배경이다. '기가꾸'는 오늘날까지 일본의 고도라 불리우는 나라시에 위치한 동대사에서 연중행사로 상연되고 있다.
일본에 오래 산 사람들에게서 너무나 일본화 되어버린 우리의 자취를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반면에 일본의 구석구석에 우리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없다.
예를 들어 '나라'라는 지명도 우리나라의 '나라(國)'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동대사란 사찰 경내에 위치한 엄청난 크기의 대불(大佛)조차도 백제계 도래인인 군니카노 기미마로 등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또한 세계 제일로 손꼽히는 목조건물인 대불전(大佛殿)조차도 신라 도래인인 이나베노 모모요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하다.
필자가 동대사 경내에 들어섰을 때 느낀 순간적인 착각은 마치 우리나라의 어느 한 사찰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느꼈다는 것이다. '나라'를 일본인들은 그들 문화의 고향으로 부르고들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우리나라의 어느 한 사찰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이었다.
대불전의 모습이라든가, 하물며 가람배치에 이르기까지 겉잡을 수 없이 피부에 와 닿는 친숙함과 따뜻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일본족의 문화원형이 한민족 문화였다는 것은 이제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지만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었던 놀이문화가 그대로 수용, 창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백제는 미마지가 일본으로 이주한 반세기 후에 멸망되고 백제의 민속연희는 일본땅에 뿌리내려 그후 약 백년이 지난 752년, 동대사의 사월 초파일 행사에서 10여명의 탈꾼들이 기악을 공연하는 전통을 남겼다. 또한 기악에 사용된 가면은 초기의 것에서부터 일본의 정창원과 동대사에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행해진 '사천왕사 왔소!' 행사는 동포들의 뿌리찾기 축제의 차원을 넘어 일본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