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의식과 비평적 감수성
오세영 / 시인, 서울대 교수
한 시인이나 작가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가 쓴 전체 작품이 초지일관해서 한 가지의 세계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문필생활이 연륜을 더해 감에 따라 그의 문학이 반영하는 세계 역시 변한다. 가령 그가 20대에 데뷔하여 꾸준히 작품을 쓰다가 70대에 죽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사이에는 50년이라는 긴 작가 생활이 있고 따라서 그의 전작 가운데서 20대에 쓴 초기 작품들을 70대에 쓴 노년의 작품들과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쉽게 거기서 어떤 문학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법, 언어적 감수성, 세계관, 미의식, 사상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변화이다.
일반적으로 작가론 혹은 시인론을 쓸 때 먼저 그의 문학을 시기 구분해서 살펴보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가령 우리는 채 10년도 되지 않은 김소월의 시적 생애를 초기시와 후기시로 나누어 살펴본다. 이 양자 사이에 문학적 변모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의 전체 작품에서 그 어떤 변화도 발견해 낼 수 없다면 우리는 굳이 작가론을 쓰면서 시기를 구분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한 작가의 문학세계에는 왜 이처럼 변화가 따르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작품의 생산자요 반영의 대상인 작가 그 자신에게 연륜에 따르는 변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음악의 예를 든다 하더라도 어떤 소녀는 국민학교 때는 동요를 좋아하고 대학교 때에는 팝송을 좋아하며 30대에 들어서는 고전음악을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녀가 40대 후반에 들면 젊었을 때에 그렇게 싫어하던 소위 '뽕짝'을 좋아하고 마침내 50대 후반에 들면 우리의 판소리 가락이나 가야금에 심취하게 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것을 젊었을 적의 서구 취향으로부터 늙었을 적의 전통취향으로의 변화라고 하든, 혹은 젊었을 적의 감각과 취향에서부터 늙었을 적의 감각과 취향에서부터 늙었을 적의 사색적 취향으로의 변화라고 하든 그 어떤 해석도 상관은 없다. 문제는 인간의 삶이란 연륜에 따라 그 생각, 가치관, 세계관, 미의식 따위에 변화가 오기 마련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그 인간의 반영인 문학작품 역시 지향하는 세계에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이러한 선입견 없이 한 시인에 접근해 보면 그의 작품이 가장 잘 된 부분뿐만 아니라 가장 개성적인 부분까지도 과거의 시인 즉 그의 선배들이 가장 힘차게 그들의 불멸의 심혼을 경주한 부분인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타인의 영향을 받기 쉬운 청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숙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엘리오트의 유명한「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인용한 글이다.
물론 이 글의 요지는 훌륭한 시인이란 전통에 뿌리를 대고 작품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있다. 그러나 본 논지와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엘리오트 자신도 시인이란 연륜에 따라 그의 문학적 특성이 변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시인의 일생을 청년기와 원숙기로 나누어서 비록 훌륭한 전통에 토대하여 시를 쓰는 일이 이 양자에게 모두 중요하기는 해도 타인에게서 보다 영향을 많이 받기 쉬운 시기가 전자임에 반해서 비교적 그렇지 않은 시기는 후자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 시인 또는 한 작가의 일생에 있어서 그가 쓰는 작품은 그의 연륜에 따라 그 세계가 각기 달라진다. 나이가 들면서 그의 철학은 보다 원숙해 질 수 있고 사물을 바라보는 눈 또한 달라지며 세계에 대한 통찰력과 예지도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론 젊은 시기의 작품이 노년기의 그것에 비해 문학적으로 저열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젊은 시기에 쓴 작품 역시 노년기에 쓴 작품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장점을 지니고 있음도 사실이다. 가령 신기성이라든가, 문제성이라든가, 감각성이라든가, 실험성 같은 것은 아무래도 젊은 시절의 작가의 작품에서 보다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문학사에서 불후한 명작들의 상당수가 처녀작임을 잘 알고 있다. 다만 필자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한 작가의 전 생애의 작품을 청년기 혹은 장년기나 노년기 따위로 나누어 그 어느 한쪽에 보다 가치를 두려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작가의 문학세계란 연륜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한 작가의 작품을 가치 평가함에 있어서 그 작가의 한 특정된 시기의 감수성만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시기의 작품을 재단한다는 것은 사태를 그르칠 수도 있게 된다.
가령 우리 문학사에서 정지용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초기에 모더니즘계열의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러나 중기에 오면서 민요시계열의 작품을 쓰다가 후기엔 종교적인 사색의 시를 썼고 만년에는 엉뚱하게도 프로레타리아 문학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문학적인 변모를 놓고 오직 모더니즘의 비평기준으로만 그의 후기 문학활동을 투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어찌해서 이러한 변모를 보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시인론으로서 정지용 연구의 중요한 테마의 하나가 될 것이지만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지용의 젊은 시절과 같은 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비평가가 만일 그의 후기 작품들을 평가할 경우 정지용의 후기작들은 초기작에 비해 훨씬 야박한 점수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하리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나 시인 자신들은 만년에 들어 항용 자신의 젊은 날의 작품들이 미숙했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술회를 하곤 하는 것은 아이러니칼하다. 내 자신의 경우를 들어도 20대엔 모더니즘계열의 전위시를 썼고 지금은 존재론적인 시를 쓰지만 지금의 관점으로서 20대에 쓴 시들을 보면 치졸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의 젊은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나의 20대의 작품들이 보다 좋다는 평도 있는 모양이다.
한 시인이나 작가가 연륜에 따라 그의 작품세계에 변화를 보이는 것처럼 비평가 역시 연륜에 따라 그의 문학적 감수성에 변화가 오는 것은 당연하다.
전문적인 비평이 아니고 평범한 독자의 문학적 감상에 관련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독자의 문학작품 수용에 있어 인생의 경륜이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것인가는 쉽게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학교 때에는 지드의「좁은 문」이나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좋아하던 소년이 고등학교 때에는 헷세의「데미안」을 좋아하고 대학 때에는 도스토옙스키의「카마라조프가의 형제들」을, 그 이후에는 소포클레스의 비극들을 좋아한다. 그의 독서는 단순히 연령에 따라 감수성에 맞는 작품의 대상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같은 작품이라도 그것을 읽는 시기에 따라 그 느끼는 바 혹은 감동받는 바도 달라지는 것이다.
관점을 조금 바꾸어 이야기한다면 이는 작품을 평가하는 비평가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즉 독자가 그의 연령에 맞는 문학적 감수성에 따라 작품에 대한 호 불호의 감정, 혹은 가치의 우열판단이 달라질 수 있음과 같이 비평가 역시 작품에 대한 가치판단에 있어 나이에 따른 문학적 감수성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한 시대 한 민족의 문학을 공평하게 혹은 객관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작가나 시인의 문학작품이 연륜에 따라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를 가치평가하는 비평가 역시 연령적으로 다양한 세대의 활동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만일 그렇지 않고 파행적으로 20대 혹은 30대의 비평가들만이 활동을 하고 그보다 나이가 많은 세대의 비평가들이 침묵하는 문단 상황이라면 어느덧 그 시기의 문학은 편협하게 젊은 비평가들의 감수성에 맞는 방향으로만 끌려가게 되고 말 것이다.
이의 역도 물론 마찬가지일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과는 비록 그 방향이 바람직한 쪽으로 서 있다 하더라도 종국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 시대의 문학적 탐구는 다양성과 자유에 토대하여 여러 이질적인 창조적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데서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 문단 상황을 예의 주시해 본다면 우리 비평계가 지닌 문제점의 하나는 그 세대별 활동으로 볼 때 너무 젊은 비평가들에게만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 문단은 20대 후반에서 30대에 이르는 젊은 비평가들의 독무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젊어져 있다. 기왕에 왕성한 활동을 했던 비평가들이라 하더라도 대체로 40대 후반에 들면 스스로 실천 비평의 영역에서 물러나 제 이선을 지키는 것이 언제부터인가처럼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러한 까닭에 오늘의 한국 문학은 바야흐로 편협하게 젊은이의 감수성에 맞는 경향으로만 치닫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우리 문단은 장년에 든 비평가나 노년에 든 비평가의 자기 성찰이 요구되고 또 이들의 활발한 문필 활동을 유도해 낼 수 있는 문예지 편집자들이나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의 각별한 배려가 아쉬운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