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산업사회와 예술
권택영 / 경희대 교수
개인과 사회의 총체성을 그리든, 개인의 내적인 세계를 그리든, 개인과 사회의 총체성을 그릴 수 없다고 하든, 문학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 모더니즘은 실체를 규명한다고 믿었던 19세기 사실주의에 반발한다. 그래서 실체 혹은 객관 진리에 회의를 품고 개인의 의식으로 돌아선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개인의 의식에 다시 상황을 끌어들인다. 그리고는 역설적으로 그 의식조차도 상황을 감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인식주체의 분열이다. 한 시대의 미학이론은 그것이 일어나는 초기에는 기존에 대한 반발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상황과 뗄 수 없는 관계였음을 드러낸다. 예술의 형식과 당대의 인식론은 현실(혹은 실체)을 보는 시각이고 이것은 당대의 상황을 끌어가는 듯 싶지만 종래는 그 상황의 산물이 되고 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어나던 당시에는 자유화 물결과 기준에 대한 반발과 원시에의 복귀 등 기존에 반발한 격렬한 실험 운동이었다. 그러나 최근 80년대에는 그것 역시 한 시대의 상황을 반영했다는 쪽으로 논의가 기울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단순한 미학이론으로만 다루지 않고 해체론 혹은 후기구조주의라는 당대의 인식론과 관련을 짓고 후기자본사회라는 정치적 맥락에서 다룬다. 아무리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법석을 외워도 결국은 그것 역시 그 상황의 산물이라는 역설이다.
후기 산업사회, 후기구조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미국의 마르크시스트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예술의 형식을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연결지어 논쟁을 유도한다. 19세기 사실주의는 시장경제시대의 문화논리이다. 산업혁명에 따른 자본주의 초기로서 자유방임주의는 작가의 주관에 비친 세계가 그대로 객관진리가 됨을 아무런 회의없이 받아들인 시대였다. 화가는 어떻게 하면 눈에 보이는 물체를 실물에 가깝게 그릴 것인가에 몰두하고 작가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매끄러운 서사로 독자에게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믿게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 국가가 자본시장에 개입한다. 시장경제는 통제되고 조정되면서 전기, 자동차 제조로 대변되는 독점자본주의 시대를 맞는다. 이 시대의 문화논리인 모더니즘은 작가가 더 이상 실체를 반영할 수 없다는 본질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개인의 의식을 강조하지만 개성을 전통 속에 종속시켜 보편진리를 추구했다. 그래서 그들의 기교연습은 단련에 의한 보편질서 찾기의 수단이었다. 따라서 작가의 권위는 줄어들지만 개성 대신 보편성을 강조함으로써 문화의 제국주의적, 중앙집권적 성향을 낳는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는 느슨해지고 다국적 경제 시대를 맞게 된다. 컴퓨터, 원자력, 광고, 그리고 미디어의 시대이다. 제임슨은 이 시대 문화논리를 대중성, 깊이 없음, 주체의 해체, 역사의식의 빈곤으로 규정한다. 테리 이글튼은 위의 세 구분을 작가의 시대, 텍스트의 시대, 독자의 시대로 구분짓기도 한다. 이것은 제임슨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지적이면서도 되돌아보아야 할 문제점을 안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후기자본사회의 소비문화와 영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일어나던 당시의 의도와는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이기 때문이다.
후기자본사회를 후기산업사회 혹은 정보사회라는 개념으로 진단한 다니엘 벨은 인류문화사의 변모 과정을 3단계로 나누었다. 수렵과 채취의 방랑생활에서 목축과 농경으로 옮아간 농업화사회, 18세기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함으로써 맞게 되는 산업화사회, 그리고 2차대전이후 컴퓨터의 혁명에 의한 정보화 시대이다. 자본과 노동과 자원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기계 기술에 의해 합성되는 공업화시대로부터 벗어나는 이 탈공업화 시대는 전력 대신 원자력, 거대한 제조기계 대신 간단한 컴퓨터 그리고 유형의 노동이 아닌 무형의 지식 정보가 생산의 주체가 되는 시대이다. 그는 후기산업사회의 특징을 제품 생산에서 서비스경제로 전이, 전문기술계층의 우대, 기술혁신을 위한 이론적 뒷받침의 강화, 정보자료와 기술의 체계화, 그리고 새로운 지적기술의 창출 등으로 본다. 새로운 의사소통의 매체로서 텔레비전, 컴퓨터, 전송 케이블 그리고 비디오가 주요한 역할을 하고 각종 정보산업이 도시를 형성하며 두뇌 집단이 출현한다. 마치 미셀 푸코의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연상시키듯 이제 정보는 권력의 근원이 된다. 정보에의 접근은 자유를 누리기 위한 주요한 요소가 되고 정보의 네트워크나 여론을 좌우하는 텔레비전은 공정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떠맡는다.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향한 전이를 산업화와 관련짓는 최근의 논의에는 포디즘Fordism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원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발전시킨 이 용어는 제품의 규격화를 중심으로한 대량생산제도를 일컫는다. 특정 모델에 적합한 기계의 대규모 사용과 노동의 과학적인 운용으로 대량 생산되는 제품은 소비시장을 요구하고 이에 국가의 보호 정책이 필요하게 된다.
제임슨에 따르면 독점 혹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이다. 60년대 후반부터 이 포디즘에 위기가 닥친다. 컴퓨터식 분배계통에 의해 기능과 실용성보다 개성있고 전문적인 디자인이 중시되고 규격이 와해되면서 특정 그룹을 겨냥한 제품이 중시된다. 후기포디즘은 다수의 노동자가 아닌 소수의 전문기술자와 분산된 그룹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융통성 있는 분업화를 초래한다. 굴뚝에서 연기가 사라지고 규격화는 다양성과 전문성으로 대치된다. 기능위주의 건축 양식이 인간의 안락과 욕망을 중시하는 분산되고 다층적 건축 양식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60년대 중반에 건설된 미국의 콜롬비아 시티는 주택가와 상가의 분리를 없애고 공공건물과 개인주택이 서로 열린 공간을 누리도록 지어진 일종의 인공도시이다. 직각을 이루는 폐쇄된 대형 건물 대신 과거의 다양한 건축양식들이 이상스럽게 한 건물 속에 공존하고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흐려진다. 인간의 상상력이 마음껏 펼쳐지도록 꾸며진 열린 공간과 다양한 장식들이 서로 어우러져 모하게 아름답고 아늑한 평화를 준다.
융통성, 다양성, 전문성, 파편화, 지엽성 그리고 허구성으로 요약되는 후기자본사회의 문화논리, 정보사회의 특성, 그리고 후기포디즘과 건축 양식은 당대의 인식론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후기구조주의를 살펴보자.
20세기 문화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계몽주의 이래 급진적 사상가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꼽을 수 있다. 마르크스는 정치와 사회의 영역에서, 프로이트는 인간 의식의 영역에서 매끄러운 논리에 틈새를 낸다. 자본주의 사회에 감춰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그리고 의식의 저변에 감추어진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역사와 인식 주체의 억압된 영역에 관한 통찰이었다. 여기에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가 합세한다. 언어의 실체는 무엇인가. 객관 사물을 지칭하는 언어의 기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한 언어 조직내에서 '다름'에 의해 기능이 생겨난 자의적 체계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다. 이 물건만을 반드시 의자라고 부르자는 약속에 의해 우리말에는 '의자'라는 단어가 생긴다. 이 자의성과 차이라는 변별성이 매끄럽고 자연스러워 보이던 언어에 틈새를 낸다. 언어의 산물인 인류 역사와 문화에서 다름, 혹은 타자는 무엇일까?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힐끗 보여준 틈새, 그 억압된 영역을 소쉬르는 조금더 드러냈고 이 상대적인 체계를 한층 더 밀고나가 억압된 것을 귀환시키는 게 후기구조주의이다. 데리다는 디페랑스differanc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말하기를 글쓰기보다 우선시켜온 서구 이성중심주의를 전복시킨다. 디페랑스의 a자는 소리로는 나타나지 않고 글로 써야만 나타나니 어찌 말하기가 글쓰기보다 더 우월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남/녀, 이성/감성, 중심/주변 등 모든 경계와 우월을 지우고 차이에 연기를 합쳐 어떤 논리도 설 수 없는 미결정성을 제시한다. 데리다가 텍스트를 중심으로 논리의 아포리아를 드러낼 때 푸코는 이것을 좀더 넓은 역사적 문맥에 적용한다. 한 시대의 진리가 어떻게 서는가. 그 자체로서는 참도 거짓도 아닌 담론이 어떻게 진리가 되는가. 권력이란 지배계급에서 피지배계급으로 하강하는 게 아니라 구석구석에서 역동적으로 존재한다. 저항없는 권력, 대응없는 권력이란 없다.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미시적으로 접근하여 서구 역사의 불연속성을 드러낸 푸코는 주변으로 몰려난 억압된 타자를 복원시킨다. 이처럼 데리다와 푸코는 인식 주체가 어떤 논리도 세울 수 없음을 보여 반인본주의의 계열에 서게 된다.
인식 주체의 분열과 반인본주의는 문학의 경우 서사의 분열도 나타난다. 60년대의 포스트모던 소설은 언어와 역사와 인식 주체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다. 2차대전에 대한 반성으로 절대논리의 위험성과 언어의 자의성을 경고하고 인간의 추함과 사악함을 드러내고 역사가 욕망의 산물임을 보여주려는 소설들은 인간의 고상함과 단련 밑에 숨은 광기를 드러내 인간에 대한 어떤 환상도 벗겨버리고자 했다. 이런 반인본주의적 요소는 서사의 교란, 언어의 게임, 자의식적 서술 등 전통서사의 형식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저자가 더 이상 현실을 반영하는 허구의 세계를 그릴 수 없다는 것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뜻이다. 인식주체의 분열로 인한 자의식적 서술이 우화, 메타픽션, 반사실주의, 반소설이다.
그러면 이 위대한 서사의 퇴락, 리오타르의 말을 빌어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회의"는 어떤 도덕성을 지니는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로 바꾼 라캉의 말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어떤 이념이나 미학이론은 나름대로의 도덕성을 지니지 못하면 한 시대의 것으로 지속될 수가 없다. 60년대의 반소설가들은 2차대전의 유태인 학살이나 히로시마폭격이 언어와 이념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인간의 단련과 고상함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의 고급예술이 그 밑에 숨은 광기를 억누른다고 믿었다. 차라리 매끄러운 논리와 이성의 겉자락을 들추고 억눌린 추함과 광기를 드러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 그들이 환상으로 도피하고 욕망을 노출시키고 원시성을 갈구하고 어떤 실험적인 이념도 거부하는 과정으로서의 진실을 주장한 것은 이처럼 절대논리에 대한 회의에서였다.
그런데 논리에 대한 회의는 과거에 대한 반성이면서 동시에 다가오는 새로운 현실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현실이 점점 허구적이 되면 모더니즘 시학은 낡은 기법이 되고 현실의 허구성을 그리는 새로운 미학이 필요해진다. 컴퓨터의 발달로 인한 미디어, 광고, 뉴스보도, 그리고 각종 정보가 이미 허구화되어 우리에게 도착하는 시대, 나탈리 샤롯트가 우리는 모두 '의혹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했듯이 픽션제조자에 의해 우리의 삶은 이미 허구로서 존재한다. 노먼 메일러는「밤의 군대들」에서 이제 아무도 펜타곤 앞에서의 반전데모를 사실주의로 그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차라리 역사와 보도의 허구성과 주관성을 인정하는 게 진실에 더 가깝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보도자체가 픽션이 되는「뉴 저널리즘」이나 롤랑 바르트가 그랬듯이 자서전을 픽션이라고 하는 예는 진실의 허구성을 그린 극단적인 경우들이었다.
허구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로브 그리예가 말했듯이 더 이상 보편진리가 아닌 개인의 리얼리티가 중시된다. 환상과 실체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 온갖 정보와 논리가 허구로서 오는 시대, 그래서 객관진리가 모호해지는 시대이기에 개인의 선택이 중요해진다. 개인의 상상력을 연습시키고 독자를 참여시키는 기법으로 콜라주나 파편화된 서술이 압도적으로 등장한다. 이제 책의 의미란 작가에 의해 주어지는 게 아니라 독자가 흩어진 서술을 종합하여 틈새를 메꾸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롤랑 바르트가 19세기 리얼리즘을 수동적인 읽기로, 20세기 모더니즘을 능동적인 쓰기로 구분한 것이나 테리 이글튼이 19세기를 작가의 시대, 모더니즘을 텍스트의 시대,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독자의 시대로 특징지운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독서가 점차 민주화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권위가 점차 독자에게 이양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독서의 민주화는 독자의 자율성을 최대로 높이고 개인의 진실을 중시하며 스스로가 경험하기 전에는 어떤 이념도 인정치 않는다는 삶에 대한 경험주의적 자세이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미학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 아니라 컴퓨터와 정보사회, 그리고 대중문화와 상업주의 시대에 사는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예술양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미학이념이 그렇듯이 일어나던 시기의 격렬한 반발은 시간이 흐르면서 또하나의 정설이 되어 당대의 질서와 손을 잡게 된다. 독자적인 인식주체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논리를 와해하여 표층의 흘러넘침을 축복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여성운동, 제3세계운동, 동서의 장벽이 무너지는 것 등에 나름대로 공헌을 했지만 이념의 허구성과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다보니 역사의식이 희박하고 사회개혁에 소극적이라는 마르크시스트들의 비난을 받게 된다. 게다가 고상함과 저속함이 한 자리에 있는 대중문화의 출현은 재빨리 상업주의에 흡수되어 인간의 안락과 해방의 추구가 아이러닉하게도 또하나의 구속이 되고 만다. 실험운동의 한계요,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모더니즘이 제외시킨 저자와 독자와 상황을 텍스트에 다시 끌어들이고 언어가, 텍스트가 현실을 지칭하는지 실험하더니 지칭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역설의 미학, 그래서 파편화된 서사로, 리얼리즘을 흉내낸 서사로 리얼리즘을 패러디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제 후반기의 새로운 사실주의로 변모해가면서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중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위와 같은 서구의 흐름과 상황은 우리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고 어떤 식으로 수용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우리에게는 서구의 논리가 적용될 수 없는 영역이 너무 많은가, 컴퓨터와 팩시밀리의 사용, 농작물의 다양한 잡종교배, 또 최근 교통방송의 성공을 보면서 융통성과 지엽성과 다양성은 남의 나라의 일만은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그것이 갖는 한계와 문제점을 아울러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