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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일그러진 초상




홍지웅 / 열린책들 대표

"소련에서 이 소설을 출판한다는 것은 개방화조치 중 가장 대담한 조치일 것이다. 이 책의 서방 세계에서의 출판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약 우리가 서로의 과거에 대해서 분별력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현재나 미래에 있어서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의 세계적인 시인 예브게니 예푸투센코가「아르바트의 아이들」이 소련에서 출판되었을 때 쓴 평문의 한 구절이다.

지금 소련에서는 개방 정책의 영향으로 그동안 출판이 금지되어 왔던 많은 문학작품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최근 소련작가동맹위원장 블라지미르카르포프가 밝힌 바에 따르면 문학에서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 책상 밑에 숨겨 놓았던 작품들을 꺼내 출판하는 것, 둘째, 예전에 출판된 적이 있으나 작가가 투옥되거나 숙청돼 더 이상 나올 수 없었던 그들의 저서를 다시 출판하는 것, 셋째, 해외 망명 작가들을 조국으로 초청하고 그들의 작품을 소련 국내에서 출판하는 것 등이다.

이에 따라 과거 사미즈다트에 의해서만 가까스로 출판되었거나, 소련 내의 모든 사전이나 기록에서조차 삭제되어 잊혀져간 많은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소련 독자들은 전혀 구해볼 수 없었던『수용소군도』는 외국에서 출판된 지 15년 만에,『닥터 지바고』는 무려 30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서 소련에서 정식으로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1951년 스탈린상을 수상한 바 있는 아나톨리 리바코프의 경우, 1966년과 1978년 두 차례에 걸쳐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던「아르바트의 아이들」을 20년이 흐르는 뒤인 지난 1988년에『두르쥐바 나로도프』지에 발표할 수 있었다.『새로운 약속』이나『그 이튿날』과 같은 알렉산드르 베크의 작품들이다. 그가 죽은 지 20년이 지난 1972년에서야 발표되기 시작한 것이다.

솔제니친이나 파스테르나크, 리바코프, 베크 이외에도 많은 주요 작가들의 작품들이 개방 정책과 검열 제도의 폐지 이후에 앞다투어 발표되고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복권되지 못한 작가와 그 작품의 숫자는 엄청나다. 지난 달 소련작가동맹위원회 카르포프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을 보면 아직까지 복권되지 못한 작가가 1000여 명에 달하고 그 작품 수도 1만 권을 헤아린다고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발표되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작가는 아나톨리 리바코프와 알렉산드르 베크이다. 현재도 많이 팔리고 있는『아르바트의 아이들』과『새로운 약속』의 저자들일 뿐아니라 솔제니친이나 파스테르나크와는 달리 망명 작가도, 과거에 제명당했던 작가들도 아니다. 이 두 작가의 공통점은 모두 20여 년 전부터 몇 차례에 걸쳐 출판을 시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소재와 내용상의 문제로 발표 금지당했던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두 작가의 작품 모두 1920,30년대 스탈린 통치기를 시대 배경으로 스탈린의 권력 쟁취 과정과 몰락, 그리고 스탈린의 사생활과 인간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그리고 있다. 예푸투센코가『아르바트의 아이들』의 출판이 개방화 조치 중 '가장 대담한 조치'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은 문체와 구성에 있어 19세기 러시아사회 소설의 전통 속에서 씌어졌으며, 소련 초창기의 혼란한 와중에서 비교적 조용했던 1930년대 중반을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모스크바 예술의 거리 아르바트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성장하고 생활하는 공산주의 청년동맹(콤소볼)의 회원들인 대학생들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 이 소설은 '위대한 창조의 시대, 열정의 시대' 그러나 '한편으로는 커다란 비극과 상실의 시대'인 1930년대의 모든 사회 계층을 나타내보인 '미지의 땅'에 대한 지질학적 단면도라고 할 수 있다. 리바코프 자신이 바로 그 시대의 생생한 목격자이자 동시대인이었으며, 그의 비상한 기억력은 모스크바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막다른 길, 그리고 역사를 그대로 재현시키고 있다.

이 소설의 또다른 서술 구조를 이루고 있는 축은 스탈린에 대한 생생한 초상이다. 스탈린이 맹목적인 우상화나 맹목적인 증오 또는 그 두 가지를 교묘하고 뒤섞는 태도로 묘사되지 않고 그 자신의 심리와 성격으로 묘사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정적(政敵) 끼로프나 지노비예프에 대한 정쟁(政爭)에서 보이는 싸늘한 음모가의 면모뿐만 아니라 신경질적인 변덕장이에다 찰리 채플린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감상적인 면모 등이 그러하다.

서구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매카니즘과 스탈린의 무한한 권력욕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다. 소비에트 당국이 20여 년 동안이나 금서로 묶어 놓았던 바로 그 원인도 여기에 있다.

그 후 1989년에 발표한『1935년과 그 후의 세월』에서는 끼로프의 암살 이후의 본격적인 정쟁이 그려지고 있으며, 최근 탈고해 타이프지 600매 분량의 원고 사본을 필자에게 보내온『공포』에서는 스탈린의 암흑기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이 스탈린 집권 이후부터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정점에 달해 있는 30년대 말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면 스탈린 집권 초기와 정쟁의 소용돌이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를 그린 작품이 알렉산드르 베크의『그 이튿날』이다. 이 작품도 1972년 사망 직전에 집필되었으나 17년이 지난 1989년『드루쥐바나로도프』(민족의 우호)지 8,9월호에 비로소 발표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혁명이 성취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신생 소비에트공화국이 여전히 적대감 속에 있고 내전이 시작되고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베크는 그의 소설을 다충적인 연대기로 구상했다. 두 주요 인물은 1904년부터 1920년까지의 레닌과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중요한 문제의 결정에 있어서 레닌을 앞지르고 있으며 레닌의 생각을 봉쇄했으며 혁명 구호를 사용함으로써 레닌의 생각과 반대자들을 봉쇄했다.『그 이튿날』은 다큐멘터리와 픽션과 가정과 피할 수 없는 사실들이 뒤섞여 있다.

작가가 이 소설에서 제기한 것은 스탈린이 언제 권력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로 변모하게 되었는가, 그렇게도 갈망했던 권력이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좌절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해답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은 원래『권력』이었다.

스탈린 권력의 성취 과정을 추적해 가면서 작가는 '언제'보다는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젊은 시절에 혁명에 헌신했던 스탈린이 왜 혁명 이념의 파괴자가 되었으며, 그가 그토록 지배하고자 했던 국민의 학살자가 되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베크는 스탈린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스탈린과 그의 첫부인 예카테리나 스바니제, 둘째 부인 나제즈다 알리루예바의 드라마틱한 운명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련에서 현재 발표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은 스탈린과 스탈린 시대를 재조명하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지금도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아르바트의 아이들」,「수용소군도」,「하얀 옷」,「닥터 지바고」,「새로운 약속」등의 작품들 모두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소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러한 문학의 조짐들은 이미 60여 년간 문학 창조의 준거틀이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한계를,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에 봉사하는 '새로운 인간'의 허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이다. 문학은 다양한 문학적 토양 속에서 발아하는 것이며, 어떤 이데올로기도 문학을 침해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