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의 발전을 위한 제언
정진수 / 연극평론가, 성균관대 교수
대다수 국민들은 연극에 대해 무관심하며, 연극이 필요한 분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연극과 접하지 않고도 아무런 지장없이 생활해 나간다. 그러나 연극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연극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데에 별로 인색하지 않으며 연극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실상 연극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뚜렷한 이유를 물으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대답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이제 90년대에 접어들어 선진조국의 건설을 앞당기려는 시점에서 연극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왜 연극이 필요한가?
연극은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과거 서양에서는 문화 창달의 주역을 맡았으나 현재는 가난하고 자생력이 없으므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정도의 발상으로는 연극의 발전과 그에 따른 국가 발전에의 기여를 기대할 수 없다. 고작 우리나라에도 연극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체면치레에 끝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연극의 발전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려면 그에 앞서서 연극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뚜렷한 이유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 글은 먼저 연극이 필요한 이유부터 말하고자 한다.
1)예술로서의 연극
연극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이 첫 번째 이유는 원론에 속한다. 이 자리에서 예술이 왜 필요한가를 새삼 역설할 필요는 없고 다만 연극도 예술의 한 분야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서 족하다.
순수 예술로서의 연극은 그 순수성 때문에 난해성을 띠고 엘리티즘에 빠질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심오한 의미에 도전함으로써 이 경박한 소비지상주의의 대중 사회 속에서 우리들의 의식을 깨어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윤 추구의 실리적 목적과 상관없이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탐구함으로써 형식 미학의 지평을 확대시켜 준다. 이것이 순수 예술로서의 연극이 가지는 내용과 형식의 양면에서의 소중한 가치일 것이다.
2)기초 분야로서의 연극
방금 위에서 지적한 순수 연극의 내용과 형식에서의 가치들은 연극 예술 자체뿐만 아니라 연극의 인접 분야들, 가령 같은 드라마 매체인 영화나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대중 연예, 광고, 패션 디자인분야, 축제, 행사(이벤트) 등에 대하여도 중요한 영감의 원천을 제공함과 함께 기초 훈련이 되어 준다. 이들 분야는 서로 재료와 기법을 달리하면서도 사고의 원리는 동일하다. 곧 소구의 대상인 대중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는 것이 기본 과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 분야를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전문 기관도 없으며, 있다 해도 바로 이 '설득의 기술 the art of persuation'을 중점적으로 교육하지 못한다. 가령 대학의 영화나 텔레비전 전공자들은 매체의 특성을 배우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뿐 기초 원리인 설득의 기술을 배우지는 못한다. 이것은 외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대중 연예 종사자들도 태반은 연극 학교 또는 현장에서 기초 훈련을 받는 것으로 통계에 나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영화, 텔레비전 종사자들의 상당수가 연극에서 기초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영화나 텔레비전 촬영장에서 기초 재료인 대본을 놓고 장시간 심도있게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일은 연극 학교 또는 현장에서 이미 다년간 경험을 쌓았어야 할 일들이다. 대본과 씨름해야 하는 연출자, 극중 인물과 대결해야 하는 연기자, '어떻게'에 앞서 '무엇을' 표현해야 할지부터 파악해야 할 디자인 스태프들도 바로 그같은 훈련을 연극에서 받아야 한다. 연극은 사람의 예술이기 때문에 복잡한 기계적 매체의 방해를 받음이 없이 예술 창작의 원리를 배우는데 집중할 수 있는 최선의 교육장인 것이다.
설혹 연극 예술 자체는 없어지더라도 다른 매체에 대한 교육의 방편으로서 연극의 필요는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모든 정책 입안자와 매체 종사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매체 및 분야들간의 배타적 분리 현상이 심화되어 심지어 동일 분야인 연기자만 하더라도 영화 배우, 연극 배우, 텔레비전 탈렌트로 나뉘어 있으며 텔레비전의 경우는 한술 더떠서 방송사마다 따로 나뉘어 있는데 개탄해마지 않을 일이다. 소아적이고 편협한 기득권 수호 심리와 관료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지배 심리에서부터 기인한 이같은 분리 현상을 타개하고 매체간의 공조 체제를 수립하는 일이 모두의 이익과 발전을 위하여 대단히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감각만 발달되어 있고 머리는 텅빈 예능인이 아니라 논리적인 사고와 직관적인 재능을 겸비한 대중 매체 종사자를 양성함으로써 우리나라 대중 예술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도 기초 교육으로서의 연극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해외 영화제에 출품된 한국 영화가 기술 수준의 낙후성 때문이 아니라 드라마의 기법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매도되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10초짜리 광고 방송 필름, 원고지 1매 분량의 광고 문안, 토막 죠크, 짧은 노랫말, 한 장의 스냅 사진은 세계 수준에 도달한 작품을 때때로 만들어 내면서도, 보다 긴 논리적 사고가 요청되는 드라마의 수준에서 뒤쳐지는 것은 기초 분야인 연극을 통하여 심도있는 훈련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처럼 논리적 사고가 부족한데에는, 비단 예술인을 키워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더라도, 연극 교육이 절실하다.
3)사회 교육으로서의 연극
현대 산업 사회 속에서 사회 교육의 방편으로서 연극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강조되어야 한다. 인구의 증가와 생활의 복잡화, 기구와 조직의 전문화 및 세분화에 따른 지역과 계층과 직종과 세대간의 갈등 및 대립, 분열은 심화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들에게 공감과 상호이해와 유대감을 가지게 할 수 있는 화합과 단결의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은 국가발전을 위하여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내는데 있어서 영화나 출판물 또는 방송 같은 간접 매체들은 매우 제한된 역할밖엔 할 수가 없다. 이같은 일은 현장에서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는 연극 매체만이 해낼 수 있다. 요즘 활발히 시도되는 축제방식 또는 이벤트, 퍼포먼스 등 개념과 방법이 미쳐 정립되지 못한 공연 행위들은 모두 현대 연극의 새로운 조류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들이다.
다만 이러한 공연 행위들이 상업적, 유행적, 행사적 한탕주의로 흘러, 자칫하면 공감과 화합은커녕 위화감과 해이감을 조성하는데 기여할 공산이 크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축제 문화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지역 단위, 직장 단위, 계층 단위, 세대 단위의 각종 공연 행사에 대한 장기적 안목의 조직과 정비가 시급하다 하겠다.
4)소양 교육으로서의 연극
연극의 교육적 가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식되고 활용되어 왔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사회화 교육의 방편으로서 연극은 여러 선진국에서 일찍부터 정규 교과목으로 자리잡았다. 서방 선진 국가들의 발전의 원동력이 민주주의의 역량을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심어주는 데 있었다면 민주주의 교육의 방편으로서 연극의 역할은 실로 지대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민주 시민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말에 의한 의사 표현 능력에 있으며 이 점에 있어서 연극만큼 훌륭한 교육 수단은 없었다. 더구나 연극을 통한 말하기 교육은 일방적인 의사 발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한 타인과의 합의의 도달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남을 존중하는 바탕위에 선 자기 표현 능력의 계발 수단으로서 연극이 효과적이라는 것은 연극이 여러 사람이 모여서 만드는 협동 예술이라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이뿐만 아니라 연극은 관객 앞에서 공연되어진다는 점에서 참가자들에게 벅찬 성취감을 안겨주며 이것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연극은 아마추어리즘이 크게 흠잡히지 않는 예술로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학창 시절에 연극 한 편에 참가했었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즐거운 추억이 된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연극은 여러 요소를 결합하여 한 편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참가자들에게 논리적 사고를 키워준다. 이 밖에도 연극이 학교 교육의 일환으로 가질 수 있는 이점들은 많이 있다. 입시 위주의 현행 교육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할 시점에 이르러서 초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연극을 포함하는 문제는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초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연극을 활용해햐 할 대단히 시급하고도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이 점은 이 글의 말미에 가서 별도의 항목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연극 발전, 어떻게 하면 되나?
위에서 연극의 필요성을 여러 방면에서 역설했다. 순수 예술로서뿐만 아니라 기초 분야로서, 교육의 방편으로서 어떻게 연극의 발전을 도모할 것인가?
이것에 대하여는 모든 사람의 의견이 각각 다를 수가 있으며 또 어떤 의견을 따르더라도 그 나름대로 연극의 발전에 보탬이 되어줄 것이다. 문제는 연극이 국가 발전에 꼭 필요하다는 인식의 확립이며 이러한 인식만 확립된다면 연극은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도 중요한 법이다. 그렇다면 연극 발전을 위한 방안을 세움에 있어서 우선 순위를 찾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 연극에서 가장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부터 찾아서 그것들을 제거해 나가는 방법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 연극에서 현재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 역시 사람에 따라서 재능있는 연극인, 관객, 사회적 인식, 공연장 및 무대 시설 등등 무엇이 더 부족하달 것 없이 연극과 관련한 모든 요인들을 제각각 지목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결과적인 것들이며 가장 근원적인 것은 연극인들의 생계 유지를 위한 소득원의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연극인의 가난이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가난이 연극인의 숙명처럼 되다보니 오늘날에 마치 당연한 것인양 치부되기도 한다. 마치 연극은 가난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마저 없지 않다. 그러나 어제까지의 연극은 가난해도 좋았으나 앞으로의 연극은 가난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다.
오늘날 아시아권에서 현대적 개념이 제대로 존재하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뿐이다. 그런데 이 땅에 연극이 존재하게 된 것은 물질적 이득을 포기하고 오직 연극이 좋아서 개인적 희생을 무릅쓰고 연극을 지켜온 연극인들 덕택이다. 우리나라에 아직도 농업이 있는 것은 고지식하게 농토를 지켜온 농부들이 있기 때문이지만 거기에 덧붙여 농산물을 소비하는 국민이 있었고 정부의 시책이 있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극은 순전히 헌신적인 연극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 사회가 연극인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제까지의 연극은 개인적인 희생을 무릅쓴 연극인들 때문에 존재해 왔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존재의 차원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회에 대한 책임 때문이 아니라, 개인이 그가 좋아하는 연극을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방식으로 주어진 여건의 테두리 내에서 해온 연극이었다. 그것은 아마추어적 호사 취미의 행위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연극의 발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국가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연극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단계의 발전된 연극마저 순전히 연극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제부터는 연극인이 연극을 통하여 최소한의 생계를 꾸릴 수 있는 환경을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만들어 낼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 최소한의 의무를 이행하기까지는 아무도 연극에 대하여 요구를 할 자격이 없다. 지금 국민소득 5,000달러 시대라고 하는 우리 사회에서 어느 분야의 전문인이 전문 분야에서의 활동을 통하여 생계조차 꾸리지 못하고 있는가?
연극을 지원하는 문예진흥원이 운영하는 연극 공연장인 문예회관의 직원들도 생계를 꾸려가는데, 그 극장 무대의 주인인 연극인이 최저 생계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을 방치할 수는없다. 생계마저 못꾸리는 연극인의 예술 활동을 비평하는 일은 실상 가혹 행위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국가가 연극인의 생계비를 지급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연극인이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는 환경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연극인들과 더불어 노력해야 할 공동의 의무가 있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관련 당사자들도 함께 행하여야 한다. 연극학과를 설치, 운영하는 대학과 교수, 연극인을 발탁해서 사용하는 방송사, 영화사 등은 직접 관련자들이다.
한 나라의 연극 발전을 전적으로 연극인의 개인적 희생에 의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이미 활동중인 기성 연극인뿐만 아니라 앞으로 연극에 투신할 뜻과 능력을 갖춘 잠재 연극인을 위해서 더 절박한 문제이다. 연극계에는 이미 20대에서의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연극인의 생계의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 문제는 방법에 있다. 연극인에 대한 직접적인 생계비 지급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자유 경쟁의 원리에 따라 유능한 연극인들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취업의 기회를 창출해 내면서 동시에 전문 연극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생계 유지를 위한 취업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 한 연극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연극인은 물론 연극에 발을 들여놓은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 전문 분야에서 3∼5년 이상의 경력을 갖춘, 재능이 인정된 한국 연극의 발전을 위한 방향과 맞아떨어질 수 있도록 조화를 이룩하는 데 모든 연극 발전의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연극 진흥 정책은 이 두가지와 상관없는 행사 위주, 전시 위주, 실적 위주, 안배 위주로 흘렀기 때문에 진흥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제부터 연극인의 생계와 연극의 발전을 조화시킬 수 있는 연극 정책의 수립과 관련되어지는 문제들을 하나씩 열거하여 나가기로 한다.
1)연극 협회
연극인 자신들의 자구 노력이 우선되지 않으면 안되고 그러기 위하여는 전체 한국 연극인들의 협의체인 '한국연극협회'의 체질 개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협회는 과거와 같이 단순한 친목 단체로 안주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연극인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기구로 탈바꿈해야 한다. 그러자면 협회는 전문 협회답게 우선 회원(연극인)의 자격 규정부터 정립해야 한다. 현실적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연극 활동에 일정 기간 이상 지속적으로 종사해오고 있는 개인과 단체만이 입회할 수 있고 입회 후에도 엄격한 자격 유지 조항의 규제를 받아야 한다. 지금처럼 반수 이상의 회원이 실제로 연극 활동에 종사한다고 볼 수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채, 그들이 협회 운영을 좌지우지해서는 협회가 진실된 연극인의 대변기구의 역할을 수행해 낼 수 없다.
이렇게 연극협회는 회원의 실질화를 조속히 이룩해야 하며 이어서 협회 운영의 민주화를 달성해야 한다. 현재와 같이 대의원 총회에서 간접 선거 방식으로 임원을 선출하는 것은 협회가 전체 회원의 권익을 대변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대의원의 민주적 선출과정이 전무하여 특정인이 항상 고정 대의원이 되는 현행 간선 제도는 마땅히 고쳐져야 한다.
아울러 전국의 연극협회 조직이 일원화 되도록 정비되어야 한다. 각 지방의 모든 도시가 동등한 협회의 단위 조직으로 간주되어 인구 수백만의 부산지부와 인구수만에 불과한 군소 도시가 똑같은 발언권을 가지며 같은 도내의 지부들이 수평적, 독립적 관계를 가지도록 짜여진 현행조직은 전국의 연극인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연극의 문제에 대처할 수 없도록 만들어 준다.
따라서 서울을 포함한 15개 시, 도 지부가 수평적으로 연합하여 연극협회를 이루고 각 지방의 도시들은 도지부의 산하 지회로 편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2)연극인 조합
연극 활동의 주체는 상업 제작자 개인 또는 집단, 민간 극단, 공공 극단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항목에서는 흥행을 통한 이윤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상업제작자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한다.
한 나라의 연극 발전을 위하여는 상업연극의 활성화가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연극 문화가 발달한 선진 외국의 경우에도 한결같이 상업 연극이 그 나라 연극의 중추를 이룬다. 예술적 진지성의 결핍 때문에 항용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하지만 그 나라 연극의 전문적 완성도의 표준은 상업 연극의 수준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상업 연극은 자본주의의 시장 경제 원리에 입각한 자생력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지원 대상이 되기보다 각종 규제의 대상이 된다. 물론 상업 연극도 대중 문화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활한 활동을 위한 법제적 장치를 국가가 마련해 주고 이윤 추구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상업 연극의 이윤 추구 동기는 적절한 제동 장치가 없을 경우 오히려 연극 발전의 저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을 수 있는 대상이 전문 연극인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아직은 심각한 단계는 아니나 피해 사례가 없지 않다. 전문 연극인들의 권익 옹호를 위한 조합들 사이에서나 상호 양해 사항으로 통용되 이 결성되어 있지 않은 허점을 악용하여 자유 계약이라는 명목 아래 순수 연극인은 턱없이 낮은 보수를 지불하고 연극인을 고용하는 것이 자칫 관례로 자리잡을 염려마저 있다. 연극인들끼리 주고받는 보수를 연극인에 대한 적정 보수로 산정할 때 연극인이 입는 피해는 막대하다.
이같은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연극인들은 서둘러 권익 옹호를 위한 조합을 형성할 필요가 절실하다. 단체 행동에의 경험이 없으며 약삭빠른 개별 행동이 이로울 것이라는 단견에 사로잡혀 있는 연극인들의 어리석음이 스스로의 권익을 해치고 있는데 이제라도 각성하여 조합을 조직해서 공연의 성격에 따른 최저 보수선에 대한 집단적 대응을 해야 한다.
이 같은 조합의 결성은 우선 연극 분야안에서 먼저 시작되어야겠으나 영화, 방송, 광고 등의 인접 분야 종사자들과 연대를 이루어가야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다.
3)극단 운영
위에서 말한 상업 제작자보다 더 중요한 공연 행위의 주체는 극단이며 그것도 민간 극단이다. 실상 60년대 이후 이 땅의 연극 예술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개인적 희생을 무릅쓰고 연극에 투신한 자발적 연극인들의 집단인 소위 동인제 극단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민간 극단들의 동인제적 성격은 최초의 동인들이 대부분 이탈하면서 퇴색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민간 극단은 대표 중심제 극단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대표 중심제 극단이란 대표 한 사람의 전횡 체제이다. 대표가 흥행에 관련된 모든 책임을 지고 단원을 임명하고 공연 계획을 수립하는 등 극단 업무를 통괄한다. 이런 뜻에서 현재의 민간 극단은 상업 제작자와 다름이 없다. 다만 이윤 추구를 주목적으로 삼지 않으며 단원에 대한 적정 수준의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상업 제작자 또한 적정 보수를 지급하지 않지만 최소한의 보수를 사전에 책정한다.)
이들 극단들이 우리 연극의 명맥 유지에 지대한 공헌을 한 점은 인정해야 하나 연극의 발전을 위하여 현재의 극단 운영 방식은 혁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대표 중심제 극단은 비록 상업 극단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기업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공공적 성격이 없는 사조직에 대하여 국가나 사회가 지원을 할 명분이 서지 않는다. 연출가, 극작가 또는 배우로서의 특출한 개인 예술가에 대한 지원은 가능하나 사조직에 불과한 민간 극단에 대한 공연 활동 지원은, 현재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민간 극단들이 국가나 사회로부터 지원을 얻기 위하여는 조직의 공공성을 획득하여야 하며 그 방법은 외국의 경우에서처럼 비영리 법인체로 탈바꿈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한 극단은 어느 특정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공의 조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관도 없고 대표의 임기도 없고 회계 감사의 기능도 없고 심지어 상근 단원조차도 없는 현재의 극단은 공조직이 아니다. 정부와 연극인들은 공동의 노력으로 우리의 민간 극단들이 서서히 공조직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법제와 기타 여건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비영리 법인체로서 순수 연극 단체의 공공적 성격이 갖추어진 후에는 이들 단체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이 베풀어져야 한다. 이같은 외국의 민간 극단들도 전체 운영비의 50퍼센트 이상을 외부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각 극단들의 실적과 역량을 엄격히 심사하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극단의 공공적 성격이 확립되고 외부의 지원이 이루어지면 극단원들에 대한 최저 생계가 보장되는 길이 열려지게 된다. 현재와 같이 1년에 한 차례 '서울연극제'에 참여 기회가 주어지면 실 공연 제작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원금이 주어지는 지원으로는 연극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4)국공립극단
우리나라에는 현재 '국립극단', '서울시립가무단', '88서울예술단'과 같은 국공립연극 단체들이 있다. 이들은 국내 최고 수준의 공연장과 전문 스태프, 단원, 부대 시설을 가지고 막대한 공공 예산을 확보하여 운영하고 있다. 단 한 명의 유료 관객이 오지 않아도 책임지는 사람 한 명 없는 극단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국내 일급 수준의 연극 배우들을 전속 단원으로 묶어 놓고 1년중 많은 부분을 놀리고 있다. 많지 않은 월급으로 단원들을 묶어 놓음으로써 연극 발전에 막대한 손실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매년 재계약 심사라는 과정까지 있어 단원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신분이 보장되지 못하는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될 수 있다. 이들 단체장들은 예술적인 능력으로 그 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정 명령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국공립 단체들이 연극 발전에 기여하려면 먼저 시즌 프로덕션을 실시해야 한다. 최고의 극장 시설과 스태프를 거느린 이러한 단체들이 1년 후의 공연 계획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불만스러운 일이다.
또한 현재의 단원 전속제를 철폐해야 한다. 1년 후에 예정된 공연에 필요한 모든 배역은 전체 연극인을 대상으로 한 공개 오디션을 통해 적역주의에 입각한 모집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공연의 질도 자연히 높아지고 참여 의욕도 충만해지며 이들 공연에 뽑힌 연극인들은 생계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전속제에 묶여 외부 활동에 제약을 받는 연극인도 없게 됨으로써 연극계의 인재는 골고루 활용될 수 있다.
전체 연극인들에게 능력에 따라 골고루 기회를 줌으로 해서 연극계에 혜택을 베풀고 자체 공연의 질 향상도 기할 수 있는 이 시즌 프로덕션의 방식을 이제라도 서둘러 채택해야 한다. 다만 현행 전속제는 일부 존치시켜 연극에 공이 큰 원로, 중진 연극인 몇 사람을 종신 단원으로 영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5)다른 매체와의 관계
앞에서 이미 연극이 기초 분야로서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점은 영화 특히 방송의 분야가 익히 알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도 영화와 방송은 연극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왔을 뿐 자체 발전을 위한 투자 대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영화와 방송은 쉴새없이 돌아가는 생산현장이지 훈련과 연구에 정력을 쏟을 여력이 없다. 그러나 그들 분야에는 막대한 이윤의 축적이 있다. 그 일부분을 이제라도 연극 분야에 투자할 태세를 갖추는 것이 그 분야의 발전과도 직결된다는 것이 그 분야의 발전과도 직결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관련 당사자 모두가 적극적인 설득에 나서야 할 때다.
특히 방송은 연극에 대한 직접 투자 못지 않게 자체의 구조적 모순을 개혁함으로 해서 저절로 연극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다. 이미 조금씩 개선의 기미가 엿보이고 있으나 현재의 방만한 방송사들은 기구와 조직을 대폭 축소하여 송출과 프로그램 판매의 기능에 전념하고 제작 기능은 독립 제작사들에게 과감히 떠넘겨야 한다.
근본적으로 예술안에 속하는 연출자, 디자이너 등을 방송사의 직원으로 채용하고 있다는 시스템 자체가 불합리하며, 더욱이 방송사의 직원도 아니며 고정급을 지급하는 것도 아닌 연기자(탤런트)마저 전속제로 묶어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합리하다.
현재까지의 방송 드라마가 주로 연속극 위주이고 자체 스튜디오 제작에 의존해왔기 때문에 상근 요원을 필요로 했던 이유들이 있었으나 방송 자체의 발전을 위하여 서서히 사전 장기 제작 방식으로 전환해 가야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배우들이 분야의 차별없이 자유 계약제에 따라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고 자의에 의한 스케줄 편성에 의거하여 각종 장르를 넘나들면서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며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금처럼 탤런트들이 언제 뽑힐지도 모르는 프로그램을 무작정 대기하면서 능력을 잠재우고 있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왜 국공립 연극 단체들이나 영화사나 방송사들은 자기네가 부리는(?) 예술인들의 인생을 책임져 주는 것도 아닌데 전속 계약이라는 것으로 타인의 자유를 그토록 구속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이해할 길이 없다.
아울러 현행 방송사들이 배우들에게 지급하고 있는 보수 등급제도 자연히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는 방송사들이 배우들과의 자유계약을 회피하여 출연료를 절감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급 높은 선배 배우를 회유하여 등급제를 강요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인 수요 공급에 의한 가격 형성을 제도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사항이다.
여기에는 방송에 종사하는 배우들의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받아야 할 절대 액수는 생각지 못하고 남과의 등급 비교에 연연하며 다른 장르 동료들의 침투(?)만을 경계하는 소아병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정당한 자격에 의한 자유 출연, 자유 계약의 관행을 만들어 낼 책무가 배우들에게 있다.
이런 뜻에서도 위에 말한 대로 모든 장르의 배우들이 대동 단결하여 권익 옹호를 위한 조합을 결성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비단 배우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연출, 디자이너들에게도 해당된다.
6)문예진흥원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문예진흥원은 단위 행사 위주의 사업 지원을 줄여나가고 연극 발전을 위한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지원 체제로 전환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현재의 나눠먹기식의 지원심의제도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와 같이 연극인들과 이해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해당 전문 분야 인사들로 구성된 심사위원 대신에 객관성있는 심의 기준을 만들고 심의 전문직제를 두어 공정하고 책임있는 심의제도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직접 지원의 방식과 병행하여 문화 예술의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항목별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가) 공연장 설립 및 지원
그동안 문예진흥원이 추진해온 전국 각지의 공연장 건립 지원 사업은 다대한 실적을 거두었으나 앞으로는 공용의 다목적 극장보다 개별 공연 단체를 위한 소규모의 전용 극장 확보 노력에 대한 지원에도 나서야 한다.
위에 말한 공공적 성격의 민간 극단이 생겨나고 이들이 자체 공연장 설립을 위한 의지를 보일 때 진흥원은 이 같은 노력에 대한 지원이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기존의 극단 전용극장의 유지, 운영에 따른 지원도 필요하다.
나) 무대 예술 지원 센터 설립
이미 진흥원이 착공에 들어간 무대 예술 연수원의 개념을 확대하여 이것이 무대 장치의 제작, 보관, 대여는 물론 무대 디자이너의 교육과 양성, 연구와 개발의 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다) 국립예술학교 설립
진흥원이 이미 계획 단계에 들어간 예술학교 설립은 연극 발전을 위해 미래 지향적 투자로써 가장 바람직한 사업중의 하나이다.
라)공연 예술 종합 연습 센터 설립
진흥원이 현재 임대하여 운영중인 예일 연습장을 확충하여 보다 규모가 큰 각종 연습장 시설을 갖춤과 함께 공연 예술인들의 사교와 휴식과 교류를 위한 공간 및 식당 등의 후생 시설, 도서를 갖춘 독서실 그리고 영세한 각 극단의 기획 사무실과 그에 따른 공용 통신 시설 등까지 마련해 준다면 현실적으로 가장 유익하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마) 무대 예술 정보 센터 운영
공연 예술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은 정보지를 주간으로 발행하면 관객에 대한 서비스는 물론 극단의 홍보활동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시내 요지의 지하철 역구내, 대형 건물의 로비 또는 자동차 회사들의 시내영업소 또는 은행 및 백화점의 공간을 포스터, 전단, 할인권 같은 공연 정보 제공처 및 예매 대행소로 운영한다면 문화 정보를 시민 생활에 가깝게 접근시킬 수 있으며 말썽많은 포스터 부착에 따른 부작용도 해소할 수 있고 도시의 문화적 분위기 조성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바) 에이전시 및 기획 회사 지원
해외 교류와 국내 교류를 원활히 하고, 참신하고 의욕적인 공연 활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저작권 대행과 공연 중개 또는 공연 기획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민간 차원의 에이전시나 기획 회사를 선별하여 활동 지원을 한다면 공연 예술 활성화에 커다란 기폭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사) 기금 확충 사업
현재의 불합리한 문예진흥기금 모금 제도를 전향적으로 철폐하고 기금 확보를 위한 보다 진취적이고 창의적이고 적극인 활동을 전개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국민교육으로서의 활용 방안
끝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의 앞부분에서 이미 밝혔듯이 연극을 국민 교육의 방편으로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이다.
이 항목을 따로 두어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기로 한 것은 나의 제안 내용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연극 발전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국가 발전을 더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연극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지만 국가 장래를 위하여도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고뇌하여야 할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바야흐로 선진국 진입을 앞에 두고 어느 때보다 민주주의의 역량을 키워야 할 시점에 이르러 있다. 현재의 과도기적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으며 규범과 질서의 부재를 개탄하고 있다. 혹자는 도덕의 실추에서 그 원인을 찾고 도덕 회복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현대 사회에서 국민 전체가 신봉하고 합의할 수 있는 도덕적 질서가 존재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자칫 이것은 민주적 질서에 역행하여 우리 사회를 또 다시 전체주의 사회로 퇴행시킬 수 있는 위험마저 있는 것은 아닐까? 도덕이란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지 강제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의 무규범과 무질서를 새로운 도덕률이 자생할 때까지 언제까지나 방치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지금부터라도 한국인의 성정에 알맞으면서도 선진 외국 사람들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예법manner을 만들어 내서 전 교육과정을 통하여 보급해야 한다.
예법은 도덕과 달라서 민주 사회의 시민들 사이에 상호 유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사회적 약속이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훈련에 의하여 습관으로서 몸에 배게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과거에는 유교적인 예법이 있어 왔으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해방과 전란을 겪는 동안에 상당 부분 와해되었고 근대화 과정을 겪는 동안에 마모되어서 지금은 통용 가치를 많이 상실했다.
우리가 이제 전면적으로 구시대의 예법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안에서 아직도 통용 가치가 있는 것들을 되살려 내고 현대 세계와 발맞출 수 있는 현대적 예법들을 체계화하여 우리시대의 예법을 만들어 내야 한다.
현재 우리의 교육 과정 속에는 그 어디에도 어린 학생들에게 예법을 가르치는 과목이 없으며 예법의 교육을 가정 교육의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이미 부모 세대들이 통일성 있는 예법을 상실한 세대로 바뀌어져 있다. 이제 한국인이 국제 사회에 당당한 모습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도 예법의 체계화는 절실히 필요하다.
예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곧 말과 몸짓이다. 그런데 이 말과 몸짓은 연극과 가장 관련이 깊다. 그래서 연극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이 예법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예법을 확립하기 위하여는 정부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총동원하여 충분한 시간을 두고 토의, 연구, 검토를 거쳐서 예법에 대한 총체적 시안을 마련한 뒤에 각종 공청회와 데몬스트레이션과 여론 조사를 거쳐 확정한 뒤에 이 시대의 예법을 망라한 교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각 대학의 연극과를 확충하여 연극 전공 학생들에게 예법에 대한 교수 능력을 가르친 뒤에 각급 학교의 예법 교사로 채용하게 하여 필수 국민 교육으로 예법을 보급시켜야 한다. 그리고 기성 세대에게는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하여 새 예법을 체득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대대적인 국민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할 막중한 일이며 연극이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부분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