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상상력 고갈시킨 이념의 굴레

-80년대 이후 희곡의 경향




유민영 / 연극평론가, 단국대 예술대학 학장

우리의 근대연극사를 되돌아볼 때 창작극이 언제나 질적, 양적 면에서 부족했던 것이 하나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연극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즉 공연장 부족, 관객 부족, 전문인 부족 등과 함께 창작희곡의 부진이 연극 답보의 한 요소가 되어온 것이다. 그런데 네 가지 연극 발전의 장애 요인 중 극장이라든가, 배우, 관중 등의 문제는 그런대로 나아진 반면에 창작 희곡만은 여전히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전에 비해서 극작가도 늘어나고 작품 수효도 배가된 것이 사실이지만 번역극의 수준에 못 미침으로써 연극인들 자신이 창작극을 기피하는 현상마저 빚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서울연극제니 전국연극제니 하는 페스티벌을 여는 것도 창작 희곡 진흥을 위한 방편이었다. 그 결과 70년대 이후 창작극이 그런대로 진척된 것도 무시할 수는 없다. 가령 몇몇 극작가는 연극제를 통해 등장하기도 했고 또 연극제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작품 세계를 굳힌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전체적인 변화와 연극의 양적 팽창에 비해 볼 때, 극작가는 아직도 열세에 있다. 극단들이 마음놓고 작품을 취택할 수 있는 극작가가 10명 미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7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했던 중진 작가들이 완전히 손을 떼다시피한데다가 중견 극작가들도 침체를 못 벗어남으로써 80년대는 신인들의 독무대처럼 되기도 했다. 즉 70년대까지 희곡계의 리더로서 활약을 늦추지 않았던 차범석, 하유상, 이근삼 등이 눈에 띌 정도로 창작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박조렬, 김의경, 이재현 등 중견 작가들도 작품을 거의 쓰지 않거나 써도 전혀 진전이 없거나 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60대 중진들은 거의 퇴장하고 40, 50대가 희곡계를 이끌어가는 세대교체가 이룩된 것이라 하겠다. 중견들의 경우 노경식, 윤대성, 오태석, 윤조병 등 50대와 이현화, 이강백, 정복근, 김상렬 등 40대 작가들이 희곡계의 리더 그룹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힌 것이다. 이들에 이어서 최인석, 김광림, 윤정선, 이윤택 등 신진 그룹이 뒤를 받치고 올라오는 중이다.

80년대 희곡계의 또 하나 특징이라면 소위 사회운동적 차원에서 마당극이 크게 활약함으로써 공동 창작이라든가 아마추어 희곡이 돋보인 점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기성 극계와 양분 현상마저 보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마당극의 활성화는 현실기피 내지 외면적이던 기성 극작가들에 커다란 자극을 주면서 그들의 시각 교정까지 한 바 있다. 또한 전국연극제 실시로 인해서 지방 극작가들도 등장했는데, 삼성문화재단의 도의문학상 제도가 눈에 안보이게 많은 기여를 했다.

왜냐하면 지방 극작가들이 거의 삼성도의문학상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박환용, 오대균, 이윤택, 최현묵 등이 모두 삼성도의문학상 출신들인 것이다. 이처럼 극작가들이 서울 중심에서 지방 확산의 조짐을 보인 것도 80년대 현상이었다. 그만큼 지방 연극도 유치한 아마추어 연극으로부터 조금씩 프로페셔널한 연극으로 이행되어 가는 조짐을 보여주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80년대 희곡을 검토하는 데는 아무래도 독특했던 정치, 사회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연극은 그 어떤 예술 양식보다도 직접적이고 대중을 상대로 하는 호소력 때문에 상황에 민감하고 그에 따라 제약도 수반되기 마련이다. 80년대에 기세를 떨쳤던 마당극도 실은 그릇된 정치 사회상황의 반응 현상이었고 보아도 무방하다. 주지하다시피 80년대는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명암이 엇갈린 굴복의 시대였다. 즉 8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강력한 군사독재가 시작됨으로써 정치는 암흑시대를 맞았지만 경제적으로는 무역 흑자를 내는 등 호조를 보임으로써 사회는 심한 불균형 상태에 빠졌었다. 그에 따라 민주화 운동이 가열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서울 국제올림픽과 연결되어 획기적 변화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어차피 개방 정책에 발맞춘 국제화시대를 열어야 했기 때문에 정부는 부득이 탈이데올로기 정책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80년대 10년간은 대단한 굴곡의 연속이었다. 즉 80년대 대부분을 군사독재로 보냈고, 후반에 와서 비로소 민주화 과정에 들어섰으며 그에 발맞춘 북방정책은 통일운동을 촉진시킨 것이다.

월북 작가의 해금이라든가 북한 원전의 국내 출판 등은 표현자유의 한 특징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연극의 경우도 실로 80여 년만에 표현의 자유를 얻어 낼 수 있었다.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심의제도 폐지야말로 그 단적인 예라 볼 수 있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개방화에 따라 분단 극복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데올로기가 미묘하게 작용한 점이라 볼 수 있다. 반공이데올로기에 묻혀서 적대시만 되어 온 사회주의가 거론되는가 하면 마르크시즘이 풍미하기도 했다. 특히 6·25를 전후한 이데올로기 갈등이 재검토되고 그것이 예술 분야에서 하나의 제재로 취급된 것도 80년대의 한 특징이었다. 그러한 격변의 80년대를 가장 투명하게 표현한 것이 마당극이었고 그것은 다시 기성 극작가들에게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80년대 후반의 희곡계는 그 전과 같이 아마추어리즘의 마당극과 상업주의적인 기성극으로 양분되지 않고 적어도 그 주제에 있어서 만은 거의 구별되지 않을 만큼 모호했다. 바꾸어 말하면 마당극에서 다루는 문제나 기성 작가들이 추구한 문제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기성 극작가들도 80년대에 와서는 현실 문제에 집착했고 그것이 또한 희곡의 경직성을 불러온 요인도 되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먼저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사회 변혁에 적잖이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 마당극 작품을 대강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마당극은 정치 성향극으로서 사회 운동적 차원에서 공연 활동은 벌였지만 연우무대 같은 경우는 전문 연극으로서도 기성 극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바 있다. 그러나 70년대까지만 해도 마당극은 순수 아마추어 극으로서 대학가나 산업, 농촌 현장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만큼 마당극은 체제뿐만 아니라 기성 연극계에게도 반발하는 연극 운동을 고수했었다. 그러다가 연우무대가 발족되면서 마당극 운동가 일부가 전문 연극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형태까지 제대로 갖춘 마당극본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80년대부터였다. 즉「장산곶매」(황석영 작)라든가「토선생전」(안종관 작)과 같이 기성 작가들이 마당극을 위해서 희곡을 쓴 것이 80년인 것이다.

정치, 사회문제가 다양하듯이 마당극이 추구한 것은 매우 광범위하며 황석영이나 안종관, 김광림처럼 기성 작가들도 있지만 아마추어 작가와 공동구성 형태도 없지 않았다. 극단 자유극장의 집단 창작 방식은 70년대 후반부터 있어 왔지만 공동구성은 마당극이 처음이었다. 이처럼 마당극본을 쓴 작가들은 기성작가 서너 사람과 여러 명의 마당극 운동가들이었다는 점에서도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조선시대의 구비적인 전통예술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물론 공동작업이지만 최종정리자는 있었다. 가령 임진택이라든가 김민기, 박인배, 김선영, 문무병, 김지하, 김윤기 등이 바로 그들이다. 마당극본을 정리한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때묻지 않은 연출가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사회의식이 강하고 동시에 이념성 또한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곳에 그들은 가있었고 그런 문제들을 공연을 통해서 부각하려 한다.

따라서 마당극에서 다룬 문제는 매우 광범위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통치와 무관할 수 없는 각종 정치비리, 산업화에 따른 노사문제, 경제부조리, 인권문제, 농촌의 피폐화, 공해문제, 빈부 격차 문제 등 다양하다. 가령 80년대에 크게 주목을 끌었던 몇 작품들만 검증해 보아도 그 점은 확인할 수 있다. 80년대 초두에 화제를 뿌렸던「토선생전」만 보더라도 그것이 비록 전래의 판소리「수궁가」가 바탕이 된 것이지만 주제는 현실풍자였던 것이다.

어두웠던 시대에 정치의 부패와 사회, 경제의 비리를 고전을 빌어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형식에서도 재래의 방법을 거부한 것이 특징이다. 판소리에서 음악을 배제하고 탈춤이라든가 꼭두극, 그리고 근대극적 양식, 이를테면 신파극, 서사무가 등이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황석영의「장산곶매」에서는 창을 많이 도입해서「토선생전」과는 대조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성 작가가 쓴 작품들이 패기 넘치는 마당극 운동가들에게는 벌써 낡은 것으로 비쳐졌던 것 같다. 아무래도 현실 폭로나 비판에 있어서 너무 온건하거나 우회적이고 또 현장에서 멀리 떠나있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급진적인 마당극 운동가들은 현실에 더욱 가까이 밀착해서 문제점을 민중에게 직접 알리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상업성을 철저히 배제한 것도 두말할 나위없다. 각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마당극 전문 단체들이 생겨난 것도 그것이 사회 운동적 차원에 그 본질을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각 지역에서는 자기 고장에서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사회문제를 극적으로 표출시키기 위해서 지역 마당극단들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것은 마치 3·1운동 직후 전국에서 요원의 불꽃처럼 번졌던 소인극단들의 활동과 비교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즉 제주도에서 창단된 마당극단 수놀음은「믑녀풀이」,「태꿅땅」등 로컬하면서도 이념성 짙은 작품을 공연하여 주목을 끌었고 전주놀이패 녹두는 섬진강 주변의 수몰지구 농민들의 실향적 삶을 묘파한「계화도 땅풀이」등을 공연하여 역사의 한 장에 그네들의 삶을 기록해 두기로 했다. 이와 같이 기록극의 자세로 사회문제에 접근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마당극이 취한 소재에 약간씩 차이가 있었는데, 이를테면 호남평야를 갖고 있는 광주 연희패 광대는 부실 농정을 비판하는 작품을 주로 제재로 삼은 점에서 그러하다.

각 지역의 대표적인 작품이라면 제주도 수놀음의「태꿅땅」,「돌풀이」연희광대패의「나의 살던 고향은…」, 광주의「돼지풀이」, 한두레의「청산리 벽폐수야」,「강쟁이, 다리쟁이」, 그리고 서울대 학생들의「녹두꽃」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중「태꿅땅」은 관광지로 변해서 제주도의 본질이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저항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구성자들은 제주도를 한반도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 외지인들에 의해 풍습이 파괴되고 나름대로의 토착윤리가 훼손되며 땅마저 앗아가는 것에 대한 지킴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한마디로 주체성이고 민족 의식이기도 한 것이다.

임술년의 제주민란을 소재로 한「돌풀이」도「태꿅땅」과 맥을 같이 하는 작품으로서 지배층과 외세에 항거하는 화전민의 강인한 삶을 묘사한 것이다. 과거부터 제주도에는 제신을 숭상하는 굿이 많았다.

따라서 제주도 마당극들은 영감놀이굿 같은 것을 주로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광주의「돼지출이」는 70년대의 축산정책의 오류를 비판한 작품으로서 돼지값 폭락에 따른 피해 농민들의 분노를 묘사한 것이다. 이 작품은「함평 고구마」와도 연결될 수 있는 농정 실패의 주제로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부작용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본질적인 목표는 왜곡된 자본주의의 병폐와 정경유착과 직결된 정치 비리를 고발하는데 두어져 있다.

산업사회와 직결된 생존 문제로서 공해야말로 오늘의 난제인 것이다. 마당극은 거기에 대해서도 메스를 가해서 주목을 끌었다.「나의 살던 고향은…」과「청산리 벽폐수야」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극단의 활동 정지 명령까지 받았던「나의 살던 고향은…」은 공해 귀신 마당, 봉고 유람 마당, 농촌 마당, 공단 마당, 식수 마당 등 5부로 구성되어 있다.「쾌지나 칭칭나네」「액막이 타령」등의 민요를 부르며 지신(地神) 밟기를 하고 첫째 마당에서는 수은, 카드늄, 복합중금속, 유독가스 등 각종공해 물질들이 의인화되어 자신들의 위력을 자랑한다. 이어 폐수와 대기오염으로 피해를 본 주민들이 보상 및 이주 문제를 둘러싸고 한바탕 논쟁을 벌이며 뒤풀이에서는 오염된 물과 공기, 땅의 소생을 기원하면서 풍물과 춤으로 지신밟기를 하면서 끝난다.

우리들이 생존의 위협까지 받아야 할 문제임에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던 산업 공해를 처음으로 심각하게 제기한 이 작품은 마당극의 가치와 무게를 새삼스럽게 인식시켜 주었다. 특히 우리의 가장 큰 숙제라 할 핵(核)문제까지 제기한 것은 우리나라 드라마가 반드시 다루어야 할 것을 마당극이 가장 먼저 들고 나왔다는 점에서 주도자들의 문제의식 포착 능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보다 주목을 못 끌었지만「청산리 벽폐수야」가 실은 최초의 공해 문제극이었다. 여천 공업단지 주변의 피해 주민들의 저항과 패배를 제재로 한 이 작품은 공장 매연과 폐기물이 인체와 농작물에 얼마나 피해를 주는가를 구체적으로 다룬 작품이었다. 공해 문제의 심각성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슬라이드와 해설까지 곁들임으로써 연극이 단순한 오락으로 끝날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기도 했다.

반공해 운동의 마당극에 이어 민중혁명을 역사를 통해서 고취한「녹두꽃」도 나왔고 1984년 수해를 인화의 차원에서 다룬「강쟁이 다리쟁이」라는 작품도 무대에 올려졌다. 이처럼 마당극은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가해하는 모든 문제를 작품화해 왔고, 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정치폭력 문제에서부터 경제 부조리, 빈부 격차, 인권 문제, 산업공해, 농정 실패, 언론 탄압, 그리고 노동 문제 등 대단히 광범위하다. 80년대 후반부터는 마당극이 노동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지창이 일찍이 지적한 바 있는 것처럼 마당극은 '진실에의 통로가 차단되고 유언비어만이 무성한 어두운 시대의 광야에서 진실을 외치는 외로운 목소리'였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마당극 작가들은 표현 통로를 여러 각도에서 찾은 것이 특징이다.

즉 그들의 강한 민족의식에 입각해서 민속을 기본적인 표현수단으로 삼고 서구의 기록극, 서사극, 표현주의, 사실주의 등 여러 가지 연극 기법을 원용한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마당극은 기존 희곡의 틀을 깨었고 열린 형식을 취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희곡 형식에 일대 변혁을 가한 것이다. 그만큼 마당극은 일종의 주체적 입장에서의 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당극이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의도적이어서 의미 전달에만 신경 쓴 나머지 밖으로의 외침이 강했고 그것이 또 성숙되고 미숙한 아마추어 극으로 대중에 비친 요인도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마당극은 80년대 희곡의 주된 흐름으로서 기성 희곡계에도 적잖은 충격과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특히 마당극은 극작가들로 하여금 시급히 다루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를 은연중에 깨우쳐 준 것도 커다란 공로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가령 유치진 이후 희곡계를 이끌고 있는 중진 극작가 차범석만 하더라도 신채호의 민족의식에 초점을 맞춰 쓴「꿈하늘」을 발표한 것에서부터 그런 흔적은 나타난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리얼리스트로서 일관되게 사회, 역사 문제를 집중적으로 형상화해 온 작가이긴 하다. 그렇지만「꿈하늘」에서는 그가 추구해온 종래의 희곡의 틀을 벗어난데다가 강한 저항 의식마저 표출해서 상당히 변모된 모습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마당극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작가로는 중견 윤조병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농촌, 광산촌, 어촌 문제를 다루어 온 그가 90년도에 들어서는 운동권 이야기까지 과감하게 수용한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지만 윤조병은 정통 리얼리즘 기법을 고수했기 때문에 마당극 흐름과는 전혀 다르다. 윤조병은 80년대에 자기의 작품 세계를 구축할 정도로 괄목할 활동을 벌인 극작가이다. 그는 농촌 3부작(「농토」,「농민」,「농녀」)으로부터 시작해서 광산촌 3부작(「모닥불」,「아침 이슬」,「풍금소리」), 그리고 어촌극을 쓰고 있으며 최근들어 소외계층 문제에 대해서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우선 농촌 3부작만 보더라도 개화기 이후 농촌이 외형적으로 또 내적으로 어떻게 변모되고 그 속에서 삶과 사람들의 사유는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묘사해 주고 있다.

지주와 노비 사이를 매우 숙명론적으로 묘사한「농토」나 근대화 과정에서 농부 2대의 갈등을 사회 모럴의 입장에서 다룬「농녀」, 그리고 농토가 어느새 자본주의 병폐의 온상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묘사한「농민」등은 농촌 출신 작가의 현실의식을 살필 수 있는 텍스트라 볼 수 있다. 윤조병은 농촌 문제를 다룬 세 작품을 통해서 산업사회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농촌 환경의 변화와 농민들의 의식의 변모를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농촌에 접근하는 작가의 자세는 극히 전통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리얼리스트로서 접근했다면 현실과 가능의 변증법이라는 자세를 취했어야 함에도 그는 유치진이나 차범석과 별다름 없는 리얼리스트로서 자족한 느낌마저 준다.

다만 시적 언어라든가 농촌의 문제에 근대사를 투영시켜 보려 한 것 등이 큰 차이점이라 볼 수 있다. 소의 주인은 그것을 키운 사람이라는 유치진의 작품 주제나 땅의 주인은 농민이라는 윤조병의 주제는 같은 맥락이다. 그렇지만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주인공들의 생존 방식은 자연주의적인 데가 있다. 그리고 3부작 중 마지막인「농민」에서 시적 리얼리즘의 싹이 보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결국 이러한 시적 사실주의는 농촌 3부작이 끝난 뒤에 쓴「겨울이야기」와「휘파람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한 은퇴 서커스단 나팔수의 비극적 삶을 묘사한「겨울이야기」는 농촌 3부작에서의 고독성을 벗어나서 삶을 관조하고 또 거기서 오는 인간의 고독과 죽음의 문제를 서정적으로 그려본 것이다. 소외된 노인들의 좌절을 비극적으로 묘사한 뒤 그는 청춘 남녀의 삶으로 방향을 돌려서 문명이 빚는 질환을 지적했다.「휘파람새」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그러니까 한 신혼 부부가 여행을 옛 고향 마을로 가서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찾는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문명에 대한 회의와 자연에의 깊은 친화를 보여준다는 주제인 것이다.

서구적 리얼리즘을 신봉하던 그가 동양적 은일(隱逸) 같은 것을 희곡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과연 희곡으로 얼마나 농축되어 나타났느냐 하는 것은 별개로 치더라도 작가의 정신적 성숙 같은 것을 보여준 데다가 우리의 희곡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었던 릴리시즘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겠다.

함세덕에서 조금 보이다가 사라진 시적 리얼리즘이 윤조병에 와서 뒤늦게나마 되살아난 것이며 경직된 희곡적 전통이 조금씩 변화의 조짐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게다가 상징적인 기법의 활용은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에 의한 것이므로 사실주의극도 초기 단계를 지나 심화 단계에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뜻도 지닌다.

이러한 작가의 새로운 면모는 탄광촌 3부작에서도 부분적으로 보인다. 즉 탄광촌 갱내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모닥불 아침 이슬」과 탄광촌 갱밖의 삶을 통해 굴절된 현대사를 조명한「풍금소리」그리고 광부 2대의 변화된 생존 방식을 묘사한「초승에서 그믐까지」는 우리의 사실주의 극이 좀더 새 국면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보여준 작품들이라 하겠다. 주인공들이 새로운 빛을 찾아보려 몸부림치고 또 어떤 유토피아를 동경하는 모습에서 한국 사실주의의 한 단계 상승이 엿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지나치게 모럴리스트의 자세로 작품에 임했기 때문에 언제나 작품의 종결이 도식적으로 끝나곤 했다.

결국 그는 어촌 3부작 첫 번째에서 한계에 봉착했고 깊은 침체 속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이때부터 그는 목적극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시적 리얼리즘이 더 심화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타는 탑(塔)」,「외로운 도시」,「아버지의 침묵」등이 그런 계열의 작품들이다.

즉 그는 신라시대의 지귀(志鬼) 설화를 바탕으로 민족 화해를 묘사한「불타는 탑」을 쓴데 이어 도시의 중산층과 서민층의 괴리와 갈등을 묘사한「외로운 도시」에 이어 운동권 문제를 편향적으로 다룬「아버지의 침묵」을 연이어 발표했다. 그러니까 시적 리얼리즘이라는 새 경지를 열었던 그가 80년대 말엽에 와서는 엉뚱하게 목적극적 성향을 띰으로서 침체가 길어지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80년대에 와서 윤조병만큼 활발한 활동을 벌인 작가도 드물다. 가령 그보다 먼저 등단했던 김의경, 노경식, 이재현 등이 슬럼프에서 못 헤어나오고 있는 가운데 윤조병은 독주하다시피 괄목할 작품 활동을 벌인 것이다. 김의경만 하더라도 60년대 초에 등단하여 70년대에「남한산성」과 같은 노작을 내고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일대기를 극화한 이후에는 이렇다할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 점에서 노경식도 비슷하다. 70년대에「달집」으로서 개성 강한 작가로 인정받은 그는 주로 근세 역사를 정면으로 다룬 사극을 쓰다가 80년대 와서는 진전된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정읍사」,「강 건너 너부실로」등도 역사물에 가까울 정도로 고시가(古詩歌)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단순한 기다림이나 민중적 삶, 저항 등을 극히 표피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80년대 후반에 와서는 또 이산 가족 문제를 다룬 작품을 발표했는데「하늘만큼 먼 나라」와「한가위 밝은 달아」가 바로 그런 주제이다. 83년 이산가족 문제가 크게 부각되자 그는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하늘만큼 먼 나라」를 썼고 그 범위를 재외 동포에까지 넓힌「한가위 밝은 달아」도 내놓았다.

이 작품은「소작지(小作地)」의 후편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노경식은 그때그때 이슈가 되는 사회 문제를 재빨리 극화해 내는 포착력은 있으나 상상력의 결핍으로 인해서 사건의 재구성과 같은 범작(凡作)만을 내놓고 있다.

이재현의 경우도「해뜨는 섬」으로부터「포로들」에 이르기까지는 정통 리얼리스트로서 희곡계의 한 귀퉁이를 떠받칠만 했다. 그의 탄탄한 극작술과 사실에의 탐구 정신은「적(赤)과 백(白)」에서 절정을 이루는 듯 했다. 가령「포로들」로부터 시작해서「어둡고 긴 터널」그리고「적과 백」에서 일단락되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야기는 6·25 전쟁의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과 얽히고 설킨 동족 전쟁 속의 미묘한 인간갈등을 매우 명료하게 분석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처럼 포로들의 삶을 통해서 인간의 맹목성과 이데올로기의 허구성, 전쟁의 무모성을 파헤칠 수 있었던 것은 사실(史實)에 접근해서 충실하게 재구성한 데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전쟁 3부작을 쓰면서 작가가 지나치게 사실에 젖어들어서 상상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도 그는 인물의 일대기를 쓴다든가 화제의 사건을 극화하는 등 좀처럼 실화(實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내놓는 작품들은 초중기 작품들에 비해서 밀도에 있어서나 또는 주제의 심도에 있어서 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도 김의경이나 노경식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고 있지 않나 싶다.

중견 작가 가운데서 윤조병과 함께 꾸준히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극작가는 윤대성이다. 그도 텔레비전 드라마를 쓰면서 작품의 탄력을 잃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80년대 들어서 쓴 작품들은「신화 1900」을 위시하여「방황하는 별들」,「꿈꾸는 별들」,「불타는 별들」그리고「사(死)의 찬미」등이다.

80년대의 작품들이라고 해서 그 이전의 작품 주제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가 청소년 문제로 시선을 돌린 점이 조금 색다르다고 하겠다.「신화 1900」을 발표할 때만 해도 그의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인권 차원으로까지 확대되었으나 청소년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모랄리스트로 바뀌어 가는 듯했다. 즉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으로 폐인이 된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은「신화 1900」은 권력의 타락한 도덕성을 고발한 것이어서 주목받을 만한 작품이다. 식민지시대 탄압 정책의 잔재가 해방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데다가 군사 독재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인권이 여지없이 짓밟힘으로써 큰 사회 정치 문제가 되곤 했었다.

특히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인명 경시 풍조까지 겹침으로써 무고한 사람들이 비참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윤대성은 바로 그러한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이다. 그런데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강압 정치가 극에 달해 있던 때라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제약되었고, 따라서 정치 문제를 풍자적으로 다룰 수는 없었다.

윤대성이 정치폭력 문제를 다루고 싶어도 그러한 외적 상황 때문에 불가능했다. 가령 살인 누명을 쓰고 고문당한 사건을 극화한 것도 실은 정치 권력의 횡포와 도덕성 실추를 우회적으로 묘사한 것이었다. 여하튼 가혹한 경찰의 고문으로 인성(人性)이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극 및 재판극적 수법으로 리얼하게 묘파한「신화 1900」은 80년대 희곡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극작가들이 인권 문제를 그처럼 정면으로 다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사극의 장기를 지닌 윤대성이 재판극의 방법을 빌린데다가 사이코 드라마의 기법까지 도입하는 등 다양한 실험이 고독한 희곡계에 새로움을 준 것이다.

이렇게 윤대성이 80년대 중반에 들어서 청소년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희곡을 연달아 3편이나 발표함으로써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오늘날 청소년들의 문제는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모든 것이 물량 면에서 크게 팽창하고 전통적 가족제도의 붕괴에 따른 구심력 상실, 극도의 이기주의 그리고 출세주의와 맞물린 입시교육 위주의 사회 환경은 청소년들의 가치관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으며 상업주의적인 문명이기에 의한 대중 오락은 청소년들의 정서를 크게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청소년들은 정처를 잃고 방황하면서 기성 세대와의 의식의 골만 깊게 패게 하고 있다.

작가는 바로 그러한 청소년들의 삶을 사회 문제의 차원에서 정면으로 다루었다. 첫 번째 작품에서 가출 청소년 문제를 다룬 그는 두 번째 작품에서도 그와 유사하게 접근하여 오늘날 그들의 진정한 꿈이 무엇인가를 이기적인 부모의 입장에서가 아니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형상화했다. 윤대성의 이러한 태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찾을 만하다. 그 하나는 변변한 청소년 문제극이 없었던 마당에 그러한 분야를 열어놓았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청소년을 위한 연극이 성인의 입장에서 교훈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참여하는 작품으로 만든 점이라 하겠다.

따라서 표현 감각도 현대 청소년들의 정서에 맞춘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물론 이러한 작품 경향은 윤대성이 일괄되게 추구해 온 제재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 문제가 사회문제의 일환이긴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성년자들의 삶의 행태이므로 그것이 극화되었을 때 기성층에서는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게 된다. 바로 그 점에서 청소년극이 쉽게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후 윤대성은 또 다른 변모를 보여준다. 20년대 중반 크게 화제를 뿌렸던 음악계의 스타 윤심덕의 정사 사건을 다룬「사의 찬미」가 그의 변화를 보여준 작품이다.

희곡계에서 사회 문제극 작가로 공인되고 있는 그가 매우 낭만적이며 허무주의적인 작품을 쓴 것은 이색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쓴 작품들 중에는 아직까지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작가가 50대의 장년기에 접어들어 치열한 사회 문제와의 싸움으로부터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추구로 방향을 돌려보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조심스런 변화는 다음 작품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겠지만 여하튼 차가운 등장 인물들이 벌이는 생존 투쟁과 거기서 빚어지는 긴장감 및 속도감이「사의 찬미」에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생에의 연민과 관조적 자세마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80년대에 두드러지게 활동하여 희곡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오태석은 같은 현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소재와 극적 기법에 있어서 대단히 다양하고 유니크하다. 그는 우선 1년에 한편 이상 발표한 다작의 작가이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실험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데뷔작에서부터 70년대에 발표한 일련의 희곡 작품들도 실험적이었지만 80년대는 더욱 더 실험적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무래도 자기 작품을 자기가 거의 연출한 데서 가능했을 것도 같다.

그가 80년대에 꼭 11편의 장막극을 발표했는데, 그중 7작품을 자신이 연출했다. 그런데 자신이 연출한 작품은 성공한 경우가 많아도 다른 연출가들이 만든 작품은 거의 실패했다.「산수유」(이해랑 연출),「자전거」(김우옥 연출),「팔곡병풍」(윤호진 연출)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오태석은 매우 현실적인 극작가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민속이나 지난 역사에서 소재를 많이 가져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 문제를 은유적으로 또 대비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일 뿐 과거나 민속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이것도 그의 장기중의 하나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오태석이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80년대에 1년에 한 편 꼴로 발표한 그의 작품을 보면 11편중 4편이 민속이나 역사적 사건에서 취재한 것이고 3편이 당시 화제를 뿌린 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쓴 작품이다. 그리고 분단과 동족상잔을 소재로 한 것이 또한 3편이나 된다. 즉 분단과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어떻게 파괴시키는가를 다룬 작품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어떤 문제를 소재 원천으로 삼을 때 그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측면에서 그 문제를 끌어들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초현실주의적인 경향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흔히 오태석을 가리켜 무의식과 충동의 작가, 즉 부조리극 계열로 분류하지만 실제로는 초현실주의 작가라는 말이 더 적합할 듯싶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은 거의가 인간의 심층심리에 조명을 대고 거기서 떠오르는 이미지나 언어를 일상이나 의식 작용으로 구체화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는 대부분 현실과 환상의 혼교나 멀리 떨어진 사건 사물의 연결에 의한 시적 섬광이 빛나곤 한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과거(역사)와 현재, 현실과 상상, 삶과 죽음 등이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하지 않고 지각(知覺)되어 하나의 주제로서 통일된다.

가령 80년대 초에 쓴「사추기(思春期)」와「한만선(韓滿線)」만 보더라도 조선시대 여인의 한을 묘사한 한중록(恨中錄)과 오늘의 중년 여성을 대비시킨 것과 안중근 의사의 민족애적 삶과 현대 젊은이의 범속한 일상을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기법은 그 후에도 계속되는데 사도세자와 오늘의 젊은 세대를 대비시킨「부자유친(父子有親)」, 처용가를 현실 극복 의지로 묘사한「팔곡병풍」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작품들에는 충격적 사건들이 상당 수 소재로 등장한다. 즉 대통령 시해의 궁정동 사건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던「1980년 5월」, 최영철 일등병 연애 편지 사건을 어머니의 비극으로 끌고 간「어미」, KAL 007기의 격추 사건을 약소민족의 아픔으로 승화시킨「아프리카」등은 현대에 있어서 정치, 사회의 큰 문제가 작품으로 형상화된 경우이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볼 때 그는 사회와 현실을 매우 비관적으로 보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10·26사건 이후 한동안 대중은 희망과 절망의 교차 위에서 방황했었다.

그러한 시대 분위기를 조그만 카페에 모인 소시민들에 맞춰 본 것이「1980년 5월」이다. 여기서는 고문에 대해서도 상징적으로 묘사된 바 있다. 그 다음에 그는 갱년기 여성의 정신적 좌절을 혜경궁 홍씨와 연결시킨「사추기」를 써서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구하는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젊은 남성의 도시적 삶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한「한만선」을 씀으로써 관점의 폭을 넓혀갔다. 조국독립을 위해서 처절하게 죽어간 안중근과 오늘의 같은 또래 범속한 사업가의 삶은 너무나 대비가 되는 것이다. 물질적 충족감과 육체적 안일만을 찾는 오늘의 젊은 세대는 치열한 자기부정의 과거 독립운동 세대와는 거리가 멀다. 오늘의 젊은이들의 삶을 무목적성으로 공격하는 오태석은 아무래도 우리 전세대를 정신적 구원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어미」는 그 전형적인 작품이다. 왜냐하면 한국적 모상(母像)은 인륜의 한 표상일 수도 있다고 그는 보았기 때문이다.

최영철이라는 한 학도병은 연애 편지 사건으로 상관을 살해하고 사형당한다. 그의 홀어머니도 10여 일 뒤에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을 오태석은 해원굿 형식으로 풀어냈다. 즉 해녀인 어머니는 죽은 아들과 장님의 딸을 영혼 결혼시킴으로써 자식의 출생과 죽음, 그리고 저승에까지를 인도해 준다는 내용이다.

그는 또 3백여 명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KAL 007기 사건을 중동 근로자의 삶의 행태와 연결시켜서 개발도상국가인 우리의 위상이 어떤 것인가를 매우 리얼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태석을 언제나 끌어당기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6·25 동족 상잔의 망령이 아닌가 싶다. 소년 시절에 6·25의 체험을 아버지 잃음으로 뼈아프게 겪은 그는 그러한 아픔을 표현하고 싶어서 극작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데올로기 갈등과 동족 전쟁을 희곡화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산수유」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데올로기 상잔의 상징이랄 수 있는 지리산을 배경으로 이념의 허상을 매우 비극적으로 묘파했다. 즉 이데올로기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양민들이 죽고 죽이는 참상을 역시 해원굿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러한 6·25 망령은 다음 작품「자전거」와「운상각(雲上閣)」으로 이어진다. 두 작품 모두가 6·25 당시 살기 위해서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쓰고 살인 하수인 노릇을 한 뒤 그 죄업을 치르는 내용들이다. 즉 전자의 경우 인민군의 사주로 자기가 살기 위해서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뒤 수 년 동안 양심의 가책을 받다가 자살하는 내용이고, 후자는 비슷한 죄업으로 정신 이상이 되어 방황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오태석은 언제나 두 이야기를 병치시키는 기법을 쓰는 것이 특징인데, 이들 작품에서도 전자의 경우는 나병환자 일가의 비참한 분사와 병치시켰고, 후자는 6·25 때 아들을 잃은 모친의 이야기와 병열시켰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그가 6·25를 화해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수유」의 경우만 하더라도 무당을 등장시켜 해원굿을 시키는가 하면「운상각」에서는 어머니가 6·25를 우리의 뇌리에서 지워버리자고 한다. 작가들이 여러 측면에서 6·25를 조명하지만 오태석과 같은 입장은 드물다.

그리고 최근에 그는 모랄리스트의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부자유친」에서 세대간의 갈등을 묘사했던 그는「비닐하우스」에서는 산업재해와 도덕의 황폐화를 비판했으며「심청이는 왜 인당수에 두 번 몸을 던졌나」에서는 인성의 피폐화를 풍자하고 있다.

즉 17살의 수은 중독 환자 실화를 작품 속에 끌어들여서 산업사회로 바뀐 이 시대의 도덕성 붕괴를 고발한 것이「비닐하우스」라면 공중 전화 박스에서의 우발적 살인 사건을 인간성 붕괴로 진단한 것이「심청이는 왜…」의 주제인 것이다.

오태석은 이처럼 현실에 매우 민감한 모랄리스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접근이 어렵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적 기법에 입각해 있는데다가 전통적 생활 풍정, 그 중에서도 고유의 즉흥적이면서도 은유적 어법을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적 연극 어법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그의 시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초논리적 연극 어법은 때때로 관중을 혼란에 빠뜨리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극 어법이 관중의 잠재 의식을 때려주기 때문에 재미있고 또 감각적으로도 신선하다. 아마도 오태석만큼 나름대로의 연극 어법을 창조한 극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 점에서 오태석은 희곡사에서 가장 개성 강한 극작가로 기록되어야 할 것 같다.

오태석에 버금갈 만큼 극작과 연출에서 활약한 중견으로는 김상렬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70년대에 등단했지만 80년대에 와서 나름대로의 작품 세계를 구축할 만큼 두드러진 활동을 벌였다. 그도 오태석처럼 극작과 연출을 병행한 작가이고 또 극단까지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그가 연출을 겸하기 때문에 기법에 있어서 돋보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시 실험도 한다. 특히 그는 극단을 운영하다 보니 흥행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중을 유인할 만한 연극 방식을 강구한 것 같다. 그 좋은 예가 뮤지컬의 기법이라 하겠다. 그는 공연이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는 연극관을 갖고 있는 성싶다.

따라서 그가 만든 작품들은 대체로 재미있다. 그 재미는 첫째로 연극 기법에서 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소재 취택의 기발함과 광범위함에서 온다. 그리고 세 번째가 시적 서정성에서 오는 것이다. 가령 기법에 있어서만 보더라도 그는 추리극, 서사극, 사실주의극, 기록극, 극중극 등 매우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다. 소재만 하더라도 고대, 현대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비롯해서 KAL 007기 격추사건, 어느 강도범 이야기 등 실화에서도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멕시코 이민사(移民史)를 취급하기도 했다.

그는 거의 모든 작품에 음악을 도입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무용까지 활용한다. 그만큼 그도 리얼리스트임에는 틀림없지만 재래의 고루한 틀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기법의 다양성은 우선「언챙이 곡마단」「로미오 20」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백제의 멸망을 비장한 역사가 아닌 하나의 인간 희극으로 파악한 이 작품은 역사극임에도 그런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기록된 역사의 그 너머를 들여다보고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인간 진실을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그의 작품은 역사재구의 과거 사극들과 선을 뚜렷이 긋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의식이 강한 작가이다. 그 점은「님의 침묵」,「로미오 20」, 그리고「애니깽」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KAL 007기 격추를 강대국 간 힘의 대결에서 빚어진 약소민족의 비극으로 파악한 그는 그러한 사건을 멕시코 이민사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확인한다.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기고 귀국한 멕시코 이민이 조국에서 밀입국자로 체포된 것이 우리 현대사였던 것이다.

그는 이어서 한용운의 치열한 삶을 부각시킨「님의 침묵」을 쓰기도 했다. 그의 추리극적 기법은 서사극, 기록극 방법과 혼합되어「그대 말일 뿐」,「제3 스튜디오」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관객을 유인하는 진짜 이유는 그만이 갖고 있는 감상주의적 귀향의식(歸鄕意識)에 있지 않을까 싶다. 70년대의「종이연」등에서 잘 나타난 것이 80년대에 와서는 「로미오 20」, 「애니깽」, 「그대 말일 뿐」등으로 이어진다. 그의 작품의 장기는 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점이다. 이는 자칫 천박한 센티멘탈리즘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들 뒤에서 이현화와 이강백이 만만치 않게 치밀어 올라오고 있다. 두 작가 모두 지적이고 감각적이며 현실 포착력이 뛰어나다. 물론 40대 중반의 이들 두 작가의 성향은 매우 대조적일 만큼 다르다. 이현화가 예리한 감각을 지닌 부조리극 계열의 작가라고 한다면 이강백은 견고하고 경직된 우화극 기법의 명수라고 말할 수 있다. 이현화는 비교적 과작의 작가인데다가 방송인으로 활약하고 있어서 작품도 드물게 내놓지만 또 연극계와도 끈끈한 연대를 맺고 있지 못한 극작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따금 발표하는 희곡 작품들은 우선 그 감각의 뛰어남 때문으로 해서 충격을 던져주곤 한다.

20년의 작품력을 갖고 있지만 그가 80년대에 발표한 작품은「0.917」을 비롯해서「산씻김」,「불가불가」그리고 시나리오 2편이 전부이다. 그러니까 80년대 초에 장막 희곡 3편을 내고는 거의 작품을 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그가 70년대에「누구세요?」등 몇 개의 작품으로 화제를 뿌렸던 것처럼 80년대에도 단 몇 편의 작품으로 희곡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이다. 필자는 일찍이 이현화를 가리켜 아파트 시대의 극작가라 명명한 바 있다. 아파트는 문명시대의 주거 형태이지만 밀폐와 소외라는 특수 환경을 조성하며 인간성 상실과 고독을 낳는 상징성도 지닌다. 우리는 이러한 주거 환경이 군사문화와 산업사회가 맞물린 상태에서 조성되었기 때문에 정치 사회의 각종 부조리 및 인권 문제 등과 연결되며 불확실성의 표징으로서도 작용된다.

이현화는 바로 이러한 병적이면서 또 불안의 시대를 특유의 감성으로 파악하여 상징과 알레고리 기법으로 표현한 극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이색적일 뿐만 아니라 작품 구조자체가 알레고리가 상징이기 때문에 사실적인 눈으로 보면 비논리적이고 또 불합리하다. 그가 80년대에 와서 쓴 작품의 주제는 대체로 사회의 부도덕성이고 그것은 다시 역사의 부도덕성으로 확대된다.「0.917」과「불가불가」등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그는 부조리극과 표현주의 기법을 교묘하게 접합시키기 때문에 관중에게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한편 이강백은 문제를 정면에서 파악하고 접근하는데다가 탄탄한 극작술로 관중에 어필한다. 그러니까 모호성의 이현화와는 다른 입장에 서지만 우화극(寓話劇)에도 능하다. 이강백 역시 사회를 꿰뚫어 보는 예리한 눈을 갖고 그 병리를 희곡으로 형상화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우화 기법에 능하기 때문에 이현화와는 다른 입장에서 상징과 알레고리를 활용한다. 이현화가 분위기를 중시하는 상황극적 모랄리스트라면 이강백은 우의극적 리얼리스트인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사회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현했다. 군사통치에 대한 증오심을 역사를 빌어 풍자한 그는 80년대에 와서 다소 변모를 보여주었다.

결국 정치 사회 모든 병리가 개인으로부터 연유한다는 인식 아래 개인의 사회적 자각과 책임을 묻는 방향에서 작품을 써갔다. 따라서 그의 관심 분야는 70년대의 정치 일변도에서 벗어나 노동 문제, 분단과 이데올로기 문제로 확대되어 갔다.「유토피아를 먹고 잠들다」,「호모세파라투스」,「칠산리」등이 그런 계열의 작품이다. 아마도 이강백만큼 일찍이 또 본격적으로 분단과 이데올로기 문제를 정면으로 취급한 경우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80년대 후반에 와서는 또 다른 변모를 보여주고 있다. 즉「봄날」이나「비몽사몽」에서 보이는 것처럼 계층의 문제나 빈부 격차 등을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파악하면서도 동양적 초절주의로 끌고 간 것은 이강백의 인간적 성숙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들에 이어 정복근, 최인석, 이윤택, 김광림, 윤정선 등이 정력적으로 작품을 내고 있는데, 이들 각자가 개성이 다른 것처럼 작품 성향도 다양하다. 정통 리얼리즘 방법으로 산업사회와 경직된 체제가 빚어낸 사회 병리를 묘파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굴절된 현대사와 도덕의 타락을 매도한 작가도 있다. 따라서 80년대 희곡의 전체적 특징은 우선 형식의 다양성에서 찾아야 될 것 같다. 그것을 마당극의 풍미로 인해서 신극의 주된 흐름이었던 소위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크게 흔들렸고, 포스트모더니즘 성향의 각종 기법들이 소위 전통 소재와 얽혀서 특이한 작품들을 양산하기도 했다.

이것은 일종의 극술의 다양성(多樣性)이라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80년대가 적어도 희곡사에 있어서는 실험의 시대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소재의 폭도 대단히 넓어졌다. 특히 우리 고유 민속이 시대 분위기에 맞춰서 작품 소재로 많이 활용되었고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가 희곡의 제재로 폭넓게 취급되었다. 특히 경직된 정치 체제에 대한 앤티로서 정치극이 풍미했던 것도 80년대의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그러나 작가들이 지나치게 정치 사회 문제에 매달리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이데올로기에 오염되는 경향마저 보임으로써 상상력이 고갈되는 역현상도 나타났다. 희곡이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 답보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며 상당 기간 수작이 나오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80년대 희곡만을 다루다 보니 중진 작가와 신진 극작가들에 대한 논급이 소홀해진 것 같다. 이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