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단원 김홍도의 달을 맞아
- 그의 생애와 작품(회화)을 중심으로 재조명하는 좌담회를 마련한다
참석자
안휘준(사회) / 서울대 교수, 한국미술사학회 회장
정양모 /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번영섭 / 미술사, 이화여대 강사
홍선표 / 홍익대학박물관 학예연구원
·일시 / 1990 11월 12일 오후 3시
·장소 / 문예진흥원 회의실
안휘준 / 문화부가 1990년 11월을 단원 김홍도의 달로 정해서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와 11월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만, 우리나라 역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긴 대표적 화가를 기념하는 달을 정했다고 하는 것은 앞으로의 문화정책과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11월을 기해 국립 중앙박물관은 단원 김홍도의 작품전을 열고, 그것과 수반된 강연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또 김홍도의 생장지인 안산시를 중심으로 해서 현대 화가들을 초빙한 행사도 이루어질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술협회 같은 단체에서도 행사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문예진흥원이 단원 김홍도를 재조명하는 좌담회를 열게 된 데 따른 것입니다. 이처럼 한 화가를 여러 기관들이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을, 비록 갑작스럽긴 하지만, 하게 된 것은 그 나름대로 상당히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단원 김홍도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사대가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15세기의 현동자 안견, 18세기의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19세기의 오원 장승업을 사대가로 꼽을 수 있습니다. 18세기 회화를 이야기할 때 겸재 정선의 진경 산수화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가장 두드러진 업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원 김홍도가 우리나라 회화사는 물론, 역사와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할 수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찍이 이러한 화가가 어째서 18세기에 출현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한번도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오늘도, 단원에 대한 우리의 연구가 한계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제반 문제를 모두 규명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겠습니다. 그러나 좀더 포괄적인 시각에서 단원의 위치나 비중을 살펴보고, 김홍도 화풍의 제양상을 한 번 조명해 보는 기회를 이 자리를 빌어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18세기의 전체적인 배경 같은 것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시간 절약을 위하여 우선 제가 생각나는 대로 대강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8세기에는 정치적인 안정이 전대에 비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외부로부터의 대란이 없었고, 당파간의 치열한 경쟁이나 그에 따른 인적 손실 같은 것도 18세기에 들어서서는 탕평책에 힘입어 비교적 완화되었습니다.
이렇게 안정된 정치적 상황이 경제적 안정을 이루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지속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또 수공업이 이루어진다든가 해서 과거에 비하면 경제적 안정이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와 더불어 신분상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대부 계층이 여전히 중심 세력이지만, 중인 계층의 대두가 조선 중기이래 좀더 확고해지고 그들의 전문성이나 기술이 국가적으로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양상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문학에서는 한글 문학이 크게 진작되었고 음악에서는 토속성이 강한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미술에서는 진경 산수나 풍속화 같은 것이 유행하였습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문화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경향이 생성되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학문이나 사상적인 측면에서 제일 주목이 되는 것은 실학의 발전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리공담을 일삼던 성리학과는 대조적으로 전에부터 그같은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18세기에 와서는 더욱 우리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데 직접·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쪽에 학자들이 연구를 집중시켰습니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18세기에는 어느 시대보다도 자아의식이 팽배해 있었고, 이것이 한국적인 문화의 형성에 직접적인 활력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18세기의 새로운 경향들이 회화 분야에서도 두드러지게 태동되었습니다. 첫째, 남종화의 토착화를 들 수 있겠고, 둘째, 남종화를 토대로 하고, 그 이전부터 이어져왔던 실경 산수의 전통을 결합하여 진경 산수화가 풍미하게 되었으며, 셋째, 서민들의 생활상을 관찰하고 파헤친 풍속화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넷째, 북경을 통해서 음영법이나 원근법·투시도법 등의 기법을 특징으로 하는 서양화법이 부분적으로 수용이 되었고, 그리고 다섯째,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는 민화가 크게 유행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특별한 경향들을 꼽아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들 중에서도 특히 풍속화와 관련하여 제일 주목이 되는 인물이 단원 김홍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김홍도는 사실 풍속화만이 아니라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산수화, 영모화, 화훼 등 못하는 분야가 없었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어떤 한 가지 주제만 가지고 그를 조명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풍속화를 중심으로 보되 그의 예술 전반적인 문제를 검토해 봤으면 합니다. 부득이 제가 너무 장황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먼저 김홍도의 생졸년부터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홍선표 / 생졸년은 최순우 선생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1745년에 태어나서 1816년∼1818년에 타계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만, 그 이전에는 김용준 씨가 그보다 훨씬 더 늦게부터 활동을 한 것으로, 그러니까 생년이 1745년보다 약 10년은 늦은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안휘준 / 그 점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홍선표 / 예, 단원의 생년은 조희룡의「호산외기」,「김홍도전」에 근거하여 1760년의 경진생 설이 정설로 되어 있었는데, 1960년 최순우 선생이 발견한「단원유목」첩의「을축단구지갑년(乙丑丹邱之甲年)」이란 기록에 의해 을축년 즉 1745년에 태어났음이 밝혀지게 되었고 또 졸년도 1816년∼18년으로 추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아직도 1760년 설을 따라 풍속화에서도 단원보다 신윤복을 더 선배 화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안휘준 / 김용준 씨는 단원 김홍도가 천재 화가였기 때문에 1760년생으로 보아도 그의 활동상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보았지요.
홍선표 / 예, 그렇습니다.
안휘준 / 어진 제작을 한 연대와 관련지어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단원이 1760년생이라고 보면 처음 어진을 제작한 게 1773년이니까, 그렇게 되면 단원의 나이 열셋일 때가 되는군요. 아무리 천재 화가라 하더라도 열세 살 짜리가 어진을 그리는데 참여했다고 보기에는 사실 무리한 점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순우 선생의 연구 결과가 보다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다음 김홍도의 출신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 보아서 역시 안산이 제일 타당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변영섭 / 출신지라고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7, 8세의 어린 나이로 안산의 강세황의 집을 드나들면서 그림을 배웠다고 하니까 안산 부근이거나 안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합니다.
안휘준 / 사실상 안산은 화가를 배출한 중요한 요지였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성종 때 최대의 인물화가였던 최경이 바로 안산에서 소금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일례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에 조선 중기의 대표적 화원 김명국도 안산 출신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호가 연담이라는 점, 물론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연담이라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보다 안산의 옛 이름이 연성인 점과 연관이 있을 수 있지요. 또한 그가 안산 김씨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어쩌면 본관과 출생지가 같았을 가능성을 배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다음 18세기에는 틀림없이 출신이 안산인 것이 확인되는 사람이 표암 강세황의 처남이었던 유경종입니다. 유경종도 서화를 잘했습니다. 표암 강세황이 처남과 처가댁이 있는 안산으로 이사를 가서 30년 가까이 살았는데, 이때 단원 김홍도가 표암 강세황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했던 사실이 변영섭 박사의 표암 강세황 연구에 의해서 확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강세황과 친했던 허필·석유뢰가 그 지역 출신입니다.
변영섭 / 허필은 그곳 출신이라기보다 그곳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안휘준 / 김홍도는 어려서부터 안산에 살았기 때문에 안산 출신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변영섭 /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화가들과 관련해서 성호 이익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익이 강세황에게「도산도」라든지「무이구곡도」를 그려달라고 한 것도 안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익이 안산 출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요, 이익, 유경종, 강세황은 직접 접촉이 있었습니다.
안휘준 / 어쨌든 해안가가 내륙 지방보다는 진취적이고, 중국문화와의 접촉이 용이했고, 그에 따라서 회화 분야의 인물들이 해안가에서 많이 배출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산 출신의 화가들이, 또는 안산과 연관이 깊은 화가들이 비교적 여러 사람 밝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성호 이익 같은 학자도 안산 출신이라고 한다면, 지역적 특성에 더욱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홍도가 틀림없이 안산 출신이냐 하는 문제를 더 이상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 안산 출신이 아닐 가능성보다 그곳 출신일 가능성이 더 많다고 봅니다.
변영섭 /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안산에서 꼭 태어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위대한 화가인 김홍도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던,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곳이 안산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안휘준 /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해변가의 생업 장면을 많이 묘사하고 있는 것도 그가 해변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향들이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변영섭 / 그 문제와 관련해서 강세황이 그러한 김홍도 작품의 평을 쓸 때 해안가에 살아보아서 해안가 아녀자들이 어떻게 지냈는가를 언급하였는데 김홍도 역시 그러한 측면에서 납득될 수 있습니다.
안휘준 / 일단 안산이 단원 김홍도의 생장지로서, 화가로서 그가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으로 볼 수 있겠죠. 그러므로 안산을 단원 김홍도의 도시로 칭한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잖겠습니까.
그러면 김홍도의 사승 관계를 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김홍도의 스승으로서 현재 분명하게 밝혀져 있는 사람은 표암 강세황입니다. 표암 강세황은 화원 출신이 아닌, 사대부 가문 출신의 전형적인 문인 화가입니다. 김홍도가 문인 화가인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띱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기법만을 배운 것이 아니라 화결을 직접 표암으로부터 듣고, 화론에 대한 교육까지도 제대로 받으면서 그림 수업을 하게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화가로서의 김홍도의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해준게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 점을 어떻게 보십니까.
변영섭 / 강세황의 집에 김홍도가 드나들었다는 문제를 신분차이 때문에 불가능하며, 따라서 사승 관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견해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강세황 자신이 김홍도가 단원기를 지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두 사람의 관계를 진솔하고 명료하게 적어놓은 것입니다.“처음에는 사승이 어려서 내 문하에 다닐때에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였고, 그에게 그림(화결)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중간에는 같은 관청에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거처하였고,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에 있으면서 지기다운 느낌을 가졌다.”
이외에서도 나이와 지위를 잊어버릴 수 있는 친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화평을 쓰는 관계라든지 등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강세황과 김홍도가 신분을 넘어서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특히 화결을 가르쳤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어린 아이에게 화결을 가르칠 때 실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을 했을 거니까 김홍도의 가장 첫 번째 스승이 강세황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강세황 자신은 그림을 배우는 선생님이 따로 없었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여 사승 관계가 잘 밝혀질 수 없는 면이기도 한데,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상당히 중요한 예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안휘준 / 강세황 문하를 출입했던 것이 그림의 격조를 높이고 화론 등을 터득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변영섭 / 동감입니다. 더욱이 김홍도와 강세황과의 관계에서는 화풍상으로 일목요연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사제관계라고 확신하기에 모호한 점도 있지만, 김홍도가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화가였기 때문에 화풍이 닮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사제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하겠습니다.
또한 김홍도의 사선구도라든지 배경을 배제하면서 초점을 맞춘다든지 하는 구도감각 즉, 조형적으로 재구성 능력이 뛰어난 점 등은 김홍도 자신의 역량도 있겠지만, 화결을 배울 때 강세황이 가지고 있던 예술적 견해가 전달된 것으로 믿어집니다. 또 도장을 찍는다든지 서명을 할 때 화면의 구성을 생각했던 점 등도 강세황의 영향이라고 여겨집니다.
정양모 / 표암과 김홍도는 몇 살 차이입니까?
변영섭 / 서른두 살 차이입니다.
정양모 / 표암이 다른 사람의 그림평을 쓴 것은 얼마나 됩니까?
변영섭 / 상당히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김홍도 그림에 대한 평이 단연코 제일 많습니다.
안휘준 / 일단 김홍도가 강세황의 제자였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김홍도가 강세황의 제자였던건 분명한 사실인데, 김홍도가 강세황의 회화라든가 서예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적어도 양식상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김홍도가 그만치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김홍도가 강세황의 영향을 받았다면 서권기(書卷氣) 같은 정신적 측면일 것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옛날에도 화가와 학문과의 관계는 밀접했던 것이 아닐까요. 안견도 안평대군 및 집현전 학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하면서 격조 높은 그림을 그렸지요. 그렇지 않았으면 그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김홍도의 경우에도 강세황과의 관계가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실 선생한테 배우는 것 중 제일 중요한 것이 공부나 창작하는 태도 아니겠습니까?
정양모 / 그 당시 화원들 중에서 시귀를 적은 것은 단원밖에 없었습니다. 단원은 그것을 많이 썼어요. 전문가가 보면 훌륭한 실력은 아니라 할지라도 단원의 학문은 꽤 괜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글을 썼거든요. 표암은 그림 선생님이라기보다 시·서·화 모두의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서·화를 통해 단원의 소양을 높여주었습니다.
홍선표 / 특히 단원의 마지막 관직인 현관직에서 물러난 50대 이후부터는 처사적(處士的) 취향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정양모 / 요전에 홍 선생님이 경제신문에 게재한 글도 단원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겠더군요. 그 글에도 보니까 그 당시 단원이 처사란 말씀이에요.
안휘준 / 18세기 이전에도 화원들 중에서 문사들로부터 학문을 배웠던 사람이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 중기에 나옹 이정이 간역당 최립의 문하에 출입하며 시문을 배운 것도 그렇구요. 그러니까 그런 전통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단원 김홍도도 그러한 전통을 이은 것인데, 더 혜택을 많이 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정양모 / 그래서 그때 그림에 단원이 시구를 쓴 게 많잖습니까.
안휘준 / 흔히 김홍도가 김응환의 제자라는 설이 있는데, 우리가 이 점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정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정양모 / 그것은 단원의 생년이 1760년일 때 거론되었던 것입니다. 단원이 1745년에 출생했다면 성립되기 어려운 이야기겠습니다.
안휘준 / 1745년을 생년으로 치면 김홍도와 김응환의 나이 차이는 어떻게 됩니까?
정양모 / 두 살이나 세 살 차이니까 그것을 놓고 사승 관계라 칭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안휘준 / 그런데 강세황이 금강산을 여행할 때 김응환과 김홍도가 함께 갔었는데, 그때도 강세황이 김홍도를 먼저 이야기하고 김응환을 나중에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비중을 염두에 둔 강세황의 평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정양모 / 그럼 도화서에 들어간 연대는 어떻게 됩니까? 도화서에 누가 먼저 들어갔는가가 밝혀지면 문제는 조금 간단하게…….
홍선표 / 그런데 제가 최근에 새롭게 본 자료에 의하면 1771년에 이미 단원이 26세의 나이로 화원의 최고 관직인 별제에 올라 있었고, 또 중부방의 강희언 집에서 당대의 대표적인 화원화가인 신한평, 김응환, 이인문, 한종유, 이종현 등과 함께 공적, 사적인 그림 주문에 응수하는 모임에서도 단원의 이름이 제일 앞에 기록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김응환의 제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화법도 그보다 더 높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양모 / 결국 김응환이 김홍도의 스승이었다는 점은 시정이 되어야겠지요. 김응환과의 사승 관계는 선배 동료 정도의 관계로 밝혀져야겠습니다.
안휘준 / 아무튼 이 문제는 이번 기회에 시정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승 관계와 결부시켜 더 생각을 해볼 사람은 명나라 때 문인 화가인 이유방입니다. 직접적인 스승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김홍도가 정신적 사표로 삼았죠. 이유방의 호가 단원과 서호였습니다. 김홍도가 이유방의 호인 단원과 서호를 그대로 차용했다는 점은 이유방의 인품을 단원이 상당히 흠모했다는 말이 되지요. 이유방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진 않지만 단원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양식상의 관련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홍선표 / 단원이 이유방을 흠모하고 사승했던 것은 이유방이「개자윤화전」의 편찬에 관계했던 문인 화가였다는 점에서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양모 / 역시 정신적 측면의 관련성을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밖에 선배 화가로서 단원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분은 없을까요? 아, 문인 화가로서 이인상이 있겠군요.
안휘준 / 청대에는 예찬이나 홍인 두 사람의 작품을 한 점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행세를 못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중국 회화 중에서 가장 깔끔하고 격조 높은 사람으로 그 두 사람을 꼽고, 그 중 한 사람의 작품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무슨 격조를 아는 사람으로 대우를 받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인상이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추사 김정희도 이인상만은 높이 평가했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단원이 이인상 화풍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중요시되어야 합니다.
홍성표 / 단원의「송월도」같은 작품의 돌 그리는 기법 등을 보면 이인상의 석법과 상당히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만, 이밖에도 묵법보다 필법을 중시했던 이인상의 문인 화풍을 수용했었음을 그의 유작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양모 / 단원이 겸재 정선의 진경 산수의 맥을 이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안휘준 / 그렇습니다. 단원 김홍도도 진경 산수를 종종 그렸지만 풍속화, 도석인물화, 일반산수화, 회조화 등 다른 분야가 두드러졌기 때문에 단원의 진경 산수가 상대적으로 덜 평가받은 측면이 있지요.
정양모 / 「병진화첩」이나「을묘화첩」은 거의 진경입니다. 또한 단원의 장년의 걸작이기도 하니까 거의 진경이 맞다고 할 수 있지요. 역시 겸재와 관계가 깊었습니다.
홍선표 / 겸재와 단원과의 관계는 겸재 문하에서 10년간 그림을 배웠던 마성린이란 위항문인과 단원이 가까웠던 사실을 통해서도 연결지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휘준 / 그러니까 겸재 정선과 직접 사승 관계는 없었다 하더라도 정선의 진경 산수화풍에 단원이 감화를 받아서 그렸을 가능성이 크지요. 그리고 김홍도의 산수화와 관련하여 심사정과의 관계가 검토되어야 합니다. 심사정 화풍이 남종화를 위주로 하면서도 나중에는 북종화를 가미해서 절충적 성격을 많이 띠었는데, 단원의 경우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인문도 그렇고요.
정양모 / 단원은 현종보다 운필이 간결하면서 힘이 있지만 만년에 비진경계열에서 갈필을 구사하고 있다든가, 그림이 대범해지는 것 같은 것은 현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지요.
안휘준 / 화풍상으로 보게 되면 김홍도는 표암보다도 현재 심사정으로부터 더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변영섭 / 심사정과 강세황이 4, 50대에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김홍도가 심사정과 직접적으로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휘준 / 김홍도의 풍속화와 관련해서……단원 김홍도가 풍속화를 갑자기 시작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 이전에 윤두서, 조영석, 강희언 등의 화가들이 닦아놓은 길을 단원이 더욱 더 새롭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선표 / 아마도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다양한 계층의 여러 사람들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제일 많이 맺고 있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단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정양모 / 그 많은 사람을 다 받아들일 수 있었던 단원의 그릇이 큰 것이지요. 또 그러한 관계를 통해 예술을 자기화시킨 단원의 자질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 많은 사람들과 교류도 하고 같이 지내고, 포용하고…….
변영섭 / 김홍도가 강세황과 관련이 깊었던 인물들과 밀접하게 지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친구인 허필이라든가, 심사정, 신위등의…….
안휘준 / 자, 그러면 교유 관계에 대해서 토론해 보기로 하죠. 우선, 단원 김홍도와 직접적 연관이 있었던 사람들로는 앞에서 얘기한 선배들 이외에 동료 화원들과 후배 화원들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단원과 자하 신위와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변영섭 / 신위의 기록에 보면“내가 단원과 노닐기를 가장 오래 하였다.”고 합니다.
안휘준 / 강세황이 타계한 후에도 자하를 통한 문단과의 관계가 지속되었다고 봅니다. 앞으로 자하 신위의 주위 인물들을 파헤쳐 보면 단원 김홍도와의 관계가 강세황과의 관계 못지 않게 많은 인물들이 밝혀질 것입니다. 신한평, 김응환 등이 선배로서 주목되는 화원들인데, 먼저 신한평은 신윤복의 아버지로서 김홍도보다는 19년 위의 선배인데, 김홍도와는 어진 제작을 같이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신윤복의 경우, 아버지인 신한평의 영향과 김홍도의 영향을 함께 수용했다고 봅니다.
홍선표 / 신한평과는 어진 제작도 같이 했고, 또 강희언 집의 그림 수응을 위한 모임에서 함께 활약하는 등 가까웠고 이러한 관계가 결국 신윤복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안휘준 /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한평의 작품을 보면은 신윤복 화풍과 직접 연관이 됩니다. 그리고 신윤복의 그림 중에서 바위 그림이라든가 심지어 글씨체조차 김홍도를 따르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신윤복은 단원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김홍도와 이인문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정양모 / 이인문과의 관계가 제일 깊지 않았을까요? 단원과 이인문이 함께 그린 그림도 있잖습니까. 두 사람이 함께 그것도 산수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점만 보더라도 특별한 관계가 입증되는 셈이지요.
안휘준 / 김홍도가 풍속화·산수화 등 모든 분야를 넘나들었던 화가인데 비해 비교적 산수를 전문으로 그렸던 이인문이 김홍도에 가려져 덜 조명되긴 했지만, 사실 이인문도 대단한 화가가 아닙니까?
정양모 / 대단한 화가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단원이 더욱 높이 평가되긴 해야겠지만요.
안휘준 / 이인문의「강산무진도」를 보면 단원의 영향이 많이 감지되지 않습니까? 이인문도 앞으로 우리가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인물입니다. 다음에 주목해야 할 인물은 이명기인데,「서직수 초상」은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단원이 몸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 당시 초상화의 제1인자였던 이명기와 단원의 사이를 입증하는 예입니다. 김홍도가 활동할 당시에는 각 분야의 수준 높은 화가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그런 화가들과의 연계를 단원 김홍도가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양모 / 이명기 그림 역시 단원의 영향을 확신하게 합니다. 구도도 그렇고 준법도 그렇고, 하여튼 이명기는 초상화는 상당히 이름이 높았지만 산수화는 단원의 영향을 거의 받았습니다.
안휘준 / 「서직수 초상화」에서는 단원의 필치가 무척 섬세하고 꼼꼼합니다. 정식 초상화인 탓도 있긴 하지만 김홍도의 풍속화나 도석 인물화에서 볼 수 있었던 대범하고 활달한 필치와의 좋은 대조라 하겠습니다.
정양모 / 단원의「서직수 초상화」에서 대범한 필치의 다른 인물화의 경우를 상상하긴 힘들지요. 그러나 어깨 부분에 각이 진다든가 하는 등의 여러 가지 변화는 단원 그림 외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점입니다.
정양모 / 임희지와도 같이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보아서 수월헌, 임희지와의 교류도 있었다 생각됩니다.
홍선표 / 최북과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변영섭 / 강세황과의 관계에서도 가능성이 있지요. 최북이 강세황의 계 모임 그림을 그렸거든요.
홍선표 / 그리고 남공철과 신광수, 신광한의 문집 등에서도 양자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안휘준 /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화가들만 보아도 상당히 여러 사람으로서, 각기 맡은 분야에서 최고의 정점에 올랐던 화가들과 김홍도가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인연이 단원의 예술 세계에 큰 활력소와 자극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홍선표 / 특히 이들은 공사간의 수응을 위하여 여럿이 모인 공식 석상 등에서 함께 작업하기도 했기 때문에 선의의 경쟁이랄까 이런 것도 화기를 높이는데 얼마간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양모 / 단원이 다른 사람과 합작을 해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단원의 성격이 활달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예입니다.
안휘준 / 후배 화원으로는 김득신과 신윤복을 먼저 생각할 수 있겠는데요, 김득신은 특히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의 전통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정양모 / 김득신이 김홍도의 풍속화를 충실히 계승시켰고 단원은 구도에 전념을 해서 절묘한 구도를 구사했습니다.
안휘준 / 아무튼 김득신도 김홍도의 제자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럴 경우 김득신의 형제들을 언급해야 할 것 같은데, 김석신, 김양신이 있었죠, 김석신은 겸재 쪽의 진경 산수를 계승했고, 김득신은 김홍도의 풍속화를 계승했습니다. 형제간에 이렇게 두 계열로 나누어지는 경우도 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 생각으로는 혜원 신윤복이 워낙 단원 김홍도의 화풍과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어 간과하기 쉽지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도 김홍도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위등의 디테일이나 서체를 보아도 단원과의 긴밀한 관계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정양모 / 단원의 글씨는 활달하고 신윤복의 글씨는 단원에 비해 조금 여성적이지요. 혜원 신윤복의 경우는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가법과 단원의 영향이 확실히 혼합된 것 같습니다.
홍선표 / 사실 정조 화단에서는 단원의 화풍이 그림의 본보기 내지는 하나의 기준작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변영섭 / 김홍도류의 풍속화나 도석인물화의 경우, 김홍도 이전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김홍도 이후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따라 그렸습니다. 즉 그가 풍속화나 도석인물화에 있어서 그 독특한 소재나 구성의 전형을 이루었습니다.
정양모 / 혜원은 한량과 기녀와 어울리는 상류사회의 속정어린 풍속이고 단원은 매우 서민적 풍의 그림인데, 그러면서도 유사점이라면 등장인물이 구도의 중심이 된다는 점입니다. 해학적인 맛을 풍기는 장면이나 빨래터 장면 같은 것도 단원과 혜원이 닮았습니다.
안휘준 / 빨래터 장면은 강희언의 작품에도 있습니다. 강희언, 김홍도, 신윤복은 서로 연결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변영섭 / 그런 구성을 본뜨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번졌던 것 같습니다.
홍선표 / 우리 학교 박물관(홍익대학교)에「마힐집」이라고 하는 18세기 말경 울산 감영의 지방 화원들의 도안집 같은 것이 있는데요. 거기에는 단원의「무동도」에 나오는 춤추는 소년이 모습 등이 수록되어 있고, 또 얼마 전에 본 작가 미상의 화조도에는 방단원이란 관지가 적혀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심대했던 것 같습니다.
정양모 / 몇 해 전에 누가 신윤복의 화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단원이 자연을 관조해서 그린 그림이 많았는데, 신윤복에게도 그런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 화첩을 보니까 풍속뿐만 아니라 영모 계통에도 단원을 닮은 게 많이 있었습니다.
안휘준 / 그밖에도 단원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18세기와 19세기를 통해서 나왔는데, 시간 관계상 그 부분은 생략해야겠습니다
홍선표 / 이제 앞으로 조선 후기의 회화에서는 단원파나 김홍도파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안휘준 / 김홍도의 화풍을 검토하는 작업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김홍도의 관직, 인물됨, 성격에 대해 토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김홍도의 관직에 대해 홍 선생이 좀 정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홍선표 / 단원이 언제 도화서에 들어갔는지는 지금 남아있는 자료로는 밝힐 수 없는 실정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최초로 확인되는 관직은 1771년의 별제였는데, 이것이 도화서의 별제인지 다른 관서의 별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화원으로서는 제일 높은 품계인 종육 품직에 이미 26세의 약관으로 올라 있었고, 다음으로 1773년의 영조 어진 도사후 감목관을 제수 받았으며 1781년 9월에는 정조 어진을 그린 공으로 영남 어느 지방의 찰방이 되었고, 찰방 역임 후 규장각에 소속되어 국가의 회사를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1791년 정조 어진 윤유관본을 제작하고 그 공으로 연풍 현감이 되어 5년간 재임하고, 1795년에 해임됩니다. 이때 단원이 50세 되던 해였습니다. 이후로 그는 오랜 기간의 관인 생활을 청산하고 처사옹으로 자처하며 야인으로서의 삶을 살았고 화풍도 이때부터 보다 더 문인풍으로 바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안휘준 / 연풍 현감을 왜 그만두었는지요?
홍선표 / 「승정원 일기」에도 기록이 나옵니다만, 1795년 정원에 연풍의 정령이 해괴하다는 충청 위무사의 보고가 있는 직후 관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정양모 / 장계「승장원 일기」에 의하면 구휼하는데 구휼미를 거둬내라고 했는데, 다른 현에서는 몇 백 석씩 다 냈는데 연풍에서는 불과 몇 십 석을 냈다는 겁니다. 단원이 일괄적으로 실적을 못 올리긴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당연한 처사 아니겠습니까?
홍선표 / 그러니까 당시 그러한 보고를 올린 위무사의 당색 등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원이 규장각에도 근무하고 정조하고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데 이에 따른 반 정조파의 모함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안휘준 / 이형원이 올렸다 하지요.
홍선표 / 정조가 죽고 나서부터 단원은 상당히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것도 정조와의 밀접했던 관계를 입증해 주는 실례라 하겠습니다. 단원 말년의 심한 생활고 같은 것도 지원 세력이 약화되어 가는 정치적 세력권의 동향과도 연관지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양모 / 그러니까 그 이후 야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때의 단원 그림이 활달하고 회화미가 완숙된 게 아닐까 합니다.
안휘준 / 현민들을 쥐어짜서 구휼미를 충분히 걷어내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 되어 관직에서 밀려날 때 단원은 많은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정양모 / 얼마 전 제가 들은 이야긴데, 인촌 선생이 서화 골동 수집한 게 지금의 철원 어디에 있었답니다. 북쪽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38선이 그어지자 그걸 채 실어갔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문화재가 평양박물관으로 갔는데 그중에 단원의 자화상이 하나 있었다는 겁니다. 인촌 선생 말씀이 그때 단원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아주 잘생겼더랍니다. 어쨌든 단원이 선정은 했지만 행정가로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을 겁니다.
안휘준 / 결국 그러한 점이 단원의 인물됨이나 성격과도 연관이 되는데, 변 선생이 좀 정리해 주십시오.
변영섭 / 두 분이 말씀하신 대로 단원기에 보면은, 단원이 어렸을 적 강세황의 집에 드나들 때 보면 눈썹이 잘생기고 외모가 특히 뛰어나서 세속 사람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훤출한 외모에 훌륭한 인품이 잘 드러나서 세속을 초탈한 것 같았으며 음악이 아주 절묘했고 풍류가 호탕했다고 합니다.
안휘준 / 단원이 어려서부터 교육을 잘 받았고, 교양이 있었으며, 성품이 훌륭하니까 잘생긴 얼굴이 더욱 신선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변영섭 /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무데서나 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안휘준 / 선생인 표암 자신도 30년 이상 연하인 제자 김홍도를 굉장히 정중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단원의 인품이 뛰어났던 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정양모 / 표암이 다른 사람에게 화평을 쓰면 불과 서너 줄인데 단원은 수도 없이 많다는 점만 보더라도 명분을 따지던 그 당시 표암의 김홍도에 대한 평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변영섭 / 뿐만 아니라 김홍도 그림을 장안에서 구하는 사람이 강세황에게 평을 써달라고 많이들 왔다고 합니다.“김홍도 그림에는 강세황의 평”이 가장 인기가 있었고, 궁중에 들어간 것도 있었습니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신필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안휘준 / 오늘 바쁘신 중에 이 자리에 참석하셔서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신데 대하여 감사합니다. 단원 김홍도의 회화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겠지만 지면 관계상 단원의 생애를 중심으로 해서 검토한 것으로 자족하고 이 좌담회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리/조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