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교육의 문제점
김정규 / 서울대 교수
동서가 냉전의 대결을 청산하여 해빙의 봄을 맞고 있고 주변국들이 대변혁의 문턱에서 꿈틀거리며 남북이 통일의 열기로 들떠 있다. 이러한 우리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계 평화의 장밋빛 희망과는 달리 우리의 경제는 선진화의 문턱에서 좌절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치고 있고 가치관의 상실로 정치와 문화가 혼란을 겪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음악 문화와 음악 교육의 문제점을 냉철히 고찰해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돌이켜 보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일어난 우리에게의 역사적 시련은 피지배와 동족 살상의 광란으로 얼룩져 있다. 이 모두가 대단히 짧은 역사의 한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다.
서양 음악의 실질적인 제1세대들이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는 젊은 세대들(그들 대부분이 조기 유학의 서양 산물이지만)과 공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엄청난 발전 속도에 현기증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질풍과 같은 변화의 속도 자체가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를 가져다 주지 않았는지 우리의 발길을 멈추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 고유의 전통 음악과는 달리 서양 음악은 백인종의 문화임을 잊은 것은 결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의식주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서양의 문화와 문명이 우리에게 파고들어 일상화되어 버렸다. 서양 음악이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의 일부로 형성된 것을 탓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의 국수주의자들뿐이다. 그들은 애국가도 우리의 국악식으로 불러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넥타이와 양복, 구두를 일용화하는 데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모양이니 그들의 자가당착은 더 이상 더 논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세계가 점점 작아져 하나의 지구촌을 부르짖으며 국제 시민주의와 베토벤의 만인 형제 정신이 그 타당성을 더욱 더 인정받는 이 시대에 서양 음악은 우리 고유의 문화(국악)에 더해 주는 문화적 풍요를 가져다 줄 뿐이다.
멀지도 않은 과거의 궁핍을 기억하는 우리 소수(!)의 세대들은 오늘날의 물질적 풍요에 아직도 익숙해 있지 않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귀족들의 향연과 같은 엄청난 비용의 해외 연수도 어렵지 않으며 과분하게 사치스러운 악기도 소유하게 되었고, 화려한 첨단 시설의 공연장에서 외국의 유명 음악인들을 접하는데 드는 고가의(흔히 현지보다 더 비싼) 입장료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또 그들의 음악적 능력도 그들을 지도하는 선배들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세대로 여길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그러면 과연 이들이 겉으로 보이는 만큼 선진국의 같은 세대들과 어깨를 겨눌 수 있는 수준에 와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현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의 짧은 연륜을 생각할 때 우리가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단지 머지않은 장래에 세계적인 음악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우리가 올바른 음악 교육의 길을 가고 있는지 신중히 검토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음악은 근본적으로 예능이라고 생각하는 구라파식 음악학교보다는 전인 교육을 통하여 학위를 수여하는 미국식 제도를 따르고 있다. 요즘에 와서 구라파식 제도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으나 음악학교 제도의 장단점을 논하기 이전에 대학뿐만 아니라 초·중·고에서의 음악 교육, 우리 악단의 현실들을 똑바로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 대학 총장이 대학 교수가 초·중·고 학생을 지도하는 사실을 이해 못한 것은 음악 교육이 본질적으로 조기 교육을 통한 일종의 천재 교육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대다수 음악학교가 대학 정규 학생 이외에도 모든 연령층의 학생들을 수용하는 이유가 이러한 음악 교육의 특성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능은 초보부터 최선의 지도를 요한다는 것이다.
대학 훨씬 이전부터의 종적인 연계없이 홀로 서 있는 우리 음악대학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 점인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몇 사람의 선지자적인 지혜와 용기로 전화의 폐허 속에서 이 땅의 청소년들을 위한 예술고등학교라는 제도를 갖게 되기 시작하였다. 본인을 길러준 초창기의 예술고등학교는 헌신적이고 유능한 예술인들의 지도로(오전에 일반 학과 오후엔 전공 수업) 명실공히 예술고등학교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예술고등학교들은 언제부터인지 누구의 무지와 횡포로 인하여 일반 인문고등학교와 구별이 힘든 어설픈 제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일반 초·중·고에서의 음악 교육도 마지못해 최소한의 시간만 형식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 중 특출한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학생들이 아직까지도 '예능과외 금지'라는 기상천외의 법에 의해 최선의 지도를 받을 길이 막혀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정작 더 심각한 우리 제도의 문제점은 음악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이 예술고등학교와 음악대회의 입학 시험에서 당락을 결정하는 엄청난 비중의 학과 시험 때문에 그들의 재능을 키울 충분한 시간을 희생당하며, 심지어는 아무리 천재적인 재주를 타고났어도 진학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인정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또 국가가 주관하여 치르는 학력고사에 통과하고도 모자라 학과 성적을 50%씩이나 입시의 당락에 반영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입시 제도를 입안하고 관장하는 우리의 석학들과 관리들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Theory of Transfer' 이론을 믿고 있는가? 수학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수학의 천재밖에는 못되고 장기를 아무리 많이 두어도 장기 천재로만 그친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수학적인 두뇌의 연마가 수학과 관련 없는 분야의 두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진데 예술고등학교에서 그토록 많은 시간과 높은 수준의 수학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진정으로 선진사회를 이룩하려면 교육 제도에 있어서 혁신적인 변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는 각기 다른 교육 철학을 가진 기관이 각기의 특성에 맞게 자율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이에 맞는 학생을 선택할 방법과 권리를 행사 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음악 교육에 있어서 문제의 핵심은 입시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결론 지울 수가 있다.
한편으로 입시 제도의 개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제도만 고치면 만사 형통이라는 칼 막스 Karl Marx의 낭만적 오류를 역사의 교훈으로 너무도 잘 봐왔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낙후된 정치 현실이 훌륭한 헌법이 없거나 정부의 제도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님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우리 민족 또는 내 자신에 있을 수 있는 문제점을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축복받는 영광스러운 조국의 미래를 바라보기에는 너무도 많은 부정적인 현상이 우리 주위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나약하고 버릇없는 아이들'로 매도되고 적당주의와 실리주의의 요령만 부리는 무기력한 젊은이들이라고 누가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과연 그들의 교육을 담당한 기성 세대들이 진정으로 그들에게 뼈를 깎는 인고의 '장인정신Professionalism'의 본을 보여 주었는가? 필자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다 열거할 자격도 통찰력도 부족하지만 음악 예능인으로서 우리에게 결여되고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장인정신Professionalism'이라고 부르짖고 싶은 것이다.
오랜 유교적 봉건사회에서 '쟁이들'을 천시하는 전통이 아직도 우리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장인정신Professionalism'이 결여되고 진실이 외면당하는 '풍토'에서는 올바른 음악 교육이 근본적으로 성공할 수 없음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