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악 평론의 현재
한상우 / 음악평론가, 서울예고 음악과장
한국에 있어서 음악 비평사를 생각해 본다면 1930년대가 그 시발점이 아닌가 한다.
본래 비평이란 비평의 대상이 있어야 하는 법이고, 또한 그 대상이 비평으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양악이 이 땅에 수입된 것이 1885년이라고는 하나 음악회가 무대를 통해서 열리고, 또 작곡가들에 의해 창작품이 발표되기 시작한 것이 1920년대 이후부터이고 보면 역시 이 때부터 한국에서의 음악 비평이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실제로 20년대에서 3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는 홍난파, 김관, 이승학 등의 음악가들과 조선일보 기자였던 홍종인 등이 음악에 대한 비평문을 기고하고 있어 확인할 수 있다. 이승학은 홍난파의 작품에 대해 글을 썼고 홍난파는 다시 이승학의 글에 반박문을 씀으로써 평에 대한 공방전도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음악 비평의 경우 비평의 대상은 음악이지만 비평 그 자체는 문자기능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음악을 잘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문자로 바꾸어 놓지 못하면 비평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오랜 동안 우리 음악계에서 비평의 붓을 든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글재주가 있는 평론가들이었음을 볼 수 있다.
예컨대 문학이나 미술 등의 경우에는 비평의 대상이라 할 수 있은 작품들을 오랜 시간을 두고 감상하고 검토할 수 있지만 음악은 순간적으로 들려오는 실제의 연주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대단한 감수성과 관찰력 그리고 이를 바로 문자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전문성을 지닌 음악평보다는 음악과는 거리가 먼 인상평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이러한 시기는 7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부 음악을 전공하고 음악 비평에 뛰어든 평론가들이 생기면서 보다 더 음악과 접근된 음악 비평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또 이 시기는 6.25이후 어린 나이에 외국에 유학을 갔던 젊은 연주가들이 귀국하기 시작함으로서 수준 높은 연주가 무대에서 펼쳐졌기에 전문 연주와 더불어 음악 비평도 발전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여기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음악이론 전공 교과가 개설되고 이론을 전공한 학생들이 배출되면서 이들에 의한 활동은 이론 분야와 더불어 평론 분야의 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감당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월간 잡지「객석」은 매년 신인 음악평론가를 배출하고 있고 이외에도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새로운 얼굴들이 평론계에 합세하고 있어 양적인 충족감은 느끼지만 과연 이들의 평론 활동이 적어도 공연 평에서 어느 만큼의 믿음을 주고 있는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왜냐하면 이들이 평론계의 문을 두드릴 때 쓰여지는 논문은 공연 평과는 다른 학문적 비평문인데 비해 우리 음악계에서 실제로 활동하게 될 때에는 공연 평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공연평을 쓰기 위해서는 음악을 듣는 훈련이 필요할 뿐 아니라 많은 음악회에 참석해야 한다. 음악을 듣는 훈련이 잘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평문을 쓰게 되면 자신의 음악적 지식을 나열하게 되고 그날의 공연과는 관계없는 글이 되고 만다.
실제로 어떤 평문은 처음부터 난해한 단어들의 연속으로 그 글을 읽고는 도저히 연주에 대해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현 시점에 우리의 음악 평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도 일간 신문들이 음악평에 대한 고정 난을 할애하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뿐만 아니라 음악 전문지들의 경우에도 음악 평 난을 잡지 판매의 수단이나 아니면 광고와 연관시켜 운영하고 있고 보면 객관적 시각의 비평은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어쩌다가 일간 신문이 음악 평을 싣게 될 때에도 그것은 신문사 주최의 음악회가 아니면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이기에 평론가의 자유로운 선택은 봉쇄당하고 만다.
그럼으로 현 시점에서 음악 비평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일간 신문에 음악 평 난이 고정화되어야 하고 전속평론가에 의해 자유롭게 비평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월간잡지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여서 반드시 다루어야 할 음악회는 다루지 않고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음악회만을 다루는 행위는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이들에 앞서 평론가 자신의 자질 향상이 앞서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평론가의 시각은 언제나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음악을 이야기해야 하며 인신공격이나 자신의 주장을 과다하게 노출시킴으로서 설득력을 잃게 된다면 이미 그건 비평문의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현재 우리 비평계의 현황을 89년도「문예연감」에 실린 탁계석씨의 자료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음악 평을 싣고 있는 월간지는「월간음악」,「음악동아」,「객석」,「음악저널」,「피아노음악」.「음악춘추」등이 있으며「음악교육」은 월간에서 계간으로 바뀌었다.
이외에 개인 비평이 아닌 음악에 관한 시평이나 월평을 다루고 있는 월간지로는「레코드음악」,「문화예술」,「예술과 비평」,「예술세계」그리고는 문예지 또는 일반 월간지 중 몇 가지가 시평을 싣고 있다.
89년 한 해 동안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음악에 관해 글을 쓴 사람은 모두 36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들 중에서 1년 10편 이상의 비평문을 기고한 평론가는 김점덕, 김형주, 김원구, 김규현, 김영식, 문일근, 유신, 이장직, 진화숙, 탁계석, 한상우 등 11명이며 음악 시평 난에 기고한 평론가 중에서는 김춘미, 노동은, 탁계석 등이 역시 10편 이상을 쓰고 있다.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음악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은 사람은 10여 명 내외에 불과하며 이들에 의해 음악 평은 소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위의 36명은 각기 20대에서 70대까지 분포되고 있지만 소위 전문 음악평론가로서의 활동에는 아직도 미비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음악 비평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제약들이 따르고 있음을 느낀다.
반드시 연주 현장에서 경험을 토대로 음악 평을 써야 하는 음악평론가의 경우 급증되고 있는 교통난을 헤치고 음악회장을 찾아야 하는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아직도 영세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싼 고료의 문제도 전문 비평가의 출현을 막는 요인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모든 점을 감안할 때 현 시점에서 음악 비평계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하겠다.
첫째는 전문 평론가가 활동할 수 있도록 응당한 대우를 받는 전속 평론제가 정착되어야 하겠다. 전속 평론제는 각 일간지가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둘째로는 평론의 문제는 평론가에게 아껴야 하며 특정 월간지나 일간지가 자신들과 관련된 것들만을 요구한다면 평론의 객관성은 흐려지기 마련이고 평론다운 평론이 살아 남을 수가 없다. 물론 매월 계획을 세워 광범위한 평론의 대상을 편집자와 평론가가 상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나 한다.
셋째는 특히 각 일간지는 음악 평에 대한 고정 난을 반드시 신설해야 한다. 비록 많은 분량은 아니더라도 매일 저녁마다 열리고 있는 중요 음악회가 신문을 통해 독자들에게 알려지도록 하는 것은 음악 문화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넷째는 비평가의 자질이 향상되어야 하며 특히 음악을 듣고 이를 문자 언어로 바꾸는 문학적 기능을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평론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음악을 통해 청중과 감동을 나누는 것과 같이 평론 역시 비평문을 통해 음악가들 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까지도 공감하는 설득력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비평에 임하는 사람이나 비평의 대상자인 음악가들이 깊은 신뢰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비평이 인신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이고 비평이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게 하는 세련되지 못한 문장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차원 높은 음악 예술에 대한 비평은 역시 고상하고 세련된 문장을 통해 전달되어져야 하리라 믿는다. 음악이 하루아침에 변화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평론 역시 하루아침에 그 모습을 달리할 수는 없다. 음악계와 음악 평은 함께 발전되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