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연극의 연극 외적 접근
- 실험극장의「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계기로
이상일 / 연극평론가, 성균관대 교수
셰익스피어의 연극 작품을 보는 우리의 관점은 너무 일면적이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일종의 선입견에 묶여 이미 '연극적으로'지고 들어가면서 제작·상연된 무대에서 관객 또한 처음부터 기가 죽는다.
실험극장이 창단 30주년 기념 공연으로 막을 올렸던「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작품 분석의 입장에서 미화 찬양한 평문들은 그만한 근거가 없지 않겠지만 나는 이 자리를 빌어 드라마로서의 사회, 내지는 세계를 사회 인류학적 접근으로 조명하는 라이만 S.M.Lyman과 스코트 M.B.Scott 의 말을 빌어 연극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보다 더 확대해 보았으면 한다. 우리는 너무 연극 작품 공연 그 자체에 매달려 있고, 작품 분석 그 자체에 우리의 일방적인 지식과 어쩌면 편견일 수도 있는 비평적 안목을 총동원한다.
그렇게 평론의 대상이 된 작품은 일회용으로 버림받는다. 그것도 일개인의 평론가가 시비하는 뱫은 글만 '기록'으로 남고 그 연극 세계가 지닌 무궁한 맛은 건들어 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따라서「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연출이 어떻고 주역이 어떻고 미술장치며 앙상블이 어떻다는 논평은 어쩌면 지역적인 것에 지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로마의 안토니가 전세계를 석권한 마당에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들어 손에 넣었던 전부를 글자 그대로 내팽개치고 싶어해서 죽는, 장대하면서도 또 한편 평범하고 세속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클레오파트라가 상징하는 에로소의 축제로 세계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줄거리를 따라가면 정복자 안토니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 국가 대사를 게을리한다. 아내의 죽음 그리고 정치적, 인간적 의무에 떠밀려 그는 간신히 '매혹의 여왕'과 헤어질 것을 다짐한다. 그는 로마의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란에 대처해야 하는 옥타뷔아스와 레피다스와의 화해를 꾀한다. 안토니의 충성을 담보로 잡기 위해 옥타뷔아스는 안토니에게 자기 누님과 결혼토록 조치한다. 그러나 결국 안토니는 다시 이집트로 달아나 야심에 불타는 옥타뷔아스와 일대 결전을 개시한다.
안토니는 싸움에 겁먹은 클레오파트라가 몸을 피하자 그녀를 따라, 이기고 있던 싸움을 포기해 결국 운명의 해전에서 지고 만다.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정치적으로 승자에게 거는 내기로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그녀의 정치적 술수를 간파한 안토니의 격분이 겁나서 그녀는 죽었다는 전갈을 보낸다. 그 소식에 사랑의 안토니는 자결한다. 이집트의 여왕도 옥타뷔아스 군대의 로마 개선길에 구경거리가 되는 수모를 피해 독사에 물려 죽는다. 이집트라는 낡은 세계는 옥타뷔아스 시저라는 새로운 질서 속에 편입된다. 말하자면 이집트 문명과 로마 문명이 마주치는 한 가운데 안토니라는 인물이 있다. 일찍이 사회인류 학자들은 이집트와 로마를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대조시키고 이 두 개의 대립적 원리는 인정, 그것이 자성과 사회의 양면에서 어떻게 갈등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니이체의「비극의 탄생」이 바로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발견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아폴로적 원리가 세계에 형식과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디오니소스적 원리는 형식이나 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뜻한다.
말하자면 빛과 질서와 통치의 동양적 '양(陽)'의 세계에 대비되는 어둠과 카오스와 본능의 '음(陰)'의 세계를 유럽식 이원론으로 규정짓는 것이 아폴로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인 것이다.
양의 아폴로적 원리는 질서와 형식을 '개별화'하는 디자인으로 꾸며 폭발하는 삶을 제어하는 사회적 형식에 구현화되고 사회적 단위의 개별화는 다시 노동의 분업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근대 사회로 들어와서는 관료제라는 것이 사회 조직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들어가 아폴로적 합리화를 구현한다.
디오니소스적 음의 세계는 삶의 여러 형식에 구속받지 않는 생명력 그것이며, 형식에 반역하는 삶의 변증법적 혁명으로 이 생명력은 에로스적인 것의 형식인 결혼과 매춘에 대립되는 에로스 그 자체로서의 사랑이다.
그 사랑의 범람은 때로 은혜를, 때로 참화를 초래케 하는 선한 활력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 아폴로적 원리를 육화한 것은 로마를 대표하는 옥타뷔아스이며 이집트와 그의 육화인 클레오파트라는 디오니소스적 원리를 체현한다.
안토니는 절망적으로 빠져나갈 길없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양극 사이를 방황한다. 안토니가 죽는 것은 싸움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머리와 가슴, 의무감과 자유, 감성과 관능의 분렬에서 오는 치유 불가능한 고통 때문이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세계는 옥타뷔아스, 곧 근대적 인간의 싸늘한 비영웅적 관리 체제라는 질서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아폴로주의와 디오니소스주의의 상극관계는 그 어느 하나의 죽음으로 결판이 나는데 그것은 곧 계량적 합리성과 무한한 관능과의 상극이자 대립성인 것이다.
따라서 클레오파트라의 관능은 가장 범람하는 관능이어야 하고 그에 사로잡힌 안토니는 비극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로마 군인이면서 아폴로적 인간이 아니다. 그는 중간지대를 택한, 그러나 어느 한편을 편들지 않을 수 없는 지식인같다.
옥타뷔아스는 사랑조차 정치적 결합의 수단으로 볼 정도로 계산적이며 냉철한 계약과 철저한 이해타산에 따른 책략의 화신인데 안토니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로마의 아폴로적 세계와 이집트의 디오니스적 세계를 뚜렷이 구별짓는 하나의 척도로서 음식에 대한 태도의 차이도 흥미있다. 이집트의 식탁은 언제나 잔치판이며 이 알렉산드리아식 향연은 로마 장군들의 선망의 표적이 된다.
이집트에서는 아침 한 끼에 여덟 마리의 멧돼지를 굽는데 그게 열 두 사람 분의 식사이다. 잔치는 아무 쓸모도 없는 낭비적인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우의를 다지는 술자리에서 로마의 장군들이 아무리 퍼마셔대도 그 수준은 이집트 수준에는 미달된다.
실험극장 공연에서는 빠졌지만 안토니가 장군들을 '이집트의 주신'의 춤판에 끼일 것을 권유하자 옥타뷔아스는 이 따위 난장판을 거둬치우라고 호령한다. 로마인의 입장이며 관료이자 장군인 그는 음식과 잔치의 유혹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의 아폴로적 인격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식 난장판을 용납할 수가 없다. 알렉산드리아식 잔치가 디오니소스적 낭비와 일탈과 과잉을 나타낸다면 로마식 미식 관념은 절제와 아폴로적 금기를 뜻한다.
음식과 함께 동물의 비유도 대비될 수 있다. 위엄있는 숫사슴이 아폴로적이라면 햇빛을 되쏘는 뱀은 디오니소스적이다. 안토니는 클레오파트라를 나일강의 뱀이라 부른다.
사슴과 같은 로마인들을 유혹하는 것은 이 뱀이며 뱀과 동족인 악어이다. 싸늘하고 굳세고 의젓하고 품위있는 로마의 동물은 따뜻하고 햇빛을 즐기며 펄구덩이에 딩구는 이집트의 동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런 대비는 단순한 동물학적인 의미 이상이다. 문명과 문화의 차이, 인간 기질의 차이에 이런 근본적인 것이 있다. 이 두 사회, 혹은 세계 사이에는 언어를 넘어 커뮤니케이션을 혼미스럽게 만드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사슴과 뱀의 중간에 말이 있다. 이 말은 로마와 이집트 두 문명의 특질과 함께 양의성을 갖는다. 로마 사람들에게 말은 전투의 짐승인데 이집트 여인에게 말은 섹스의 힘을 나타낸다. 말의 이원적 의미는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한다. 로마와 이집트가 결코 단일의 문명으로 융합 될 수 없는 것처럼 이집트의 암말은 로마의 숫말과 결코 함께 살기가 어렵다. 로마의 말은 군마 이상이 아니며 이집트의 말은 에로스의 암말 이상이 되지 못한다.
이런 관점은 연극 비평의 관점이 아니다. 그러나 연극 속의 세계를, 혹은 그 사회를 연극'외'적인 관점에서 보는 시각이 있음으로 해서 연극은 보다 더 연극적 일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