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무용

90년 춤계, 미해결의 문제점들




김태원 / 무용평론가

올해도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볼 때 90년도 춤계는 별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물론 매 해마다 문화예술이 변해 가야 하는 것-나아가 발전해 가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특히 이른바 올림픽 이후의 전반적 문화 침체의 분위기 속에서 춤도 그 예외는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연초에 얘기되었던 춤의 '국제교류'란 측면도 뭍 춤 단체들이 잦은 해외 공연을 하는데 그쳤지, 그 교류의 행위로서 우리에게 돌아왔던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별 뚜렷이 집계되지 않고 있다. 곧 한국컨템포러리 무용단·최청자와 툇마루무용단·윤덕경무용단 등이 동구를 6월이나 8월 전후로 해서 방문 공연을 했지만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어떤 가시적 결과는 사진 화보의 채록 그 이상으로 보고되고 있질 않다.

창무회의 중국 잠행 공연이 나름대로 그 곳에서 변화해 가는 한국춤(창작 춤을 포함)을 보여주고 그 곳의 춤 학자·평론가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은 것이「춤」지 10월호에 게재되었던 것이 거의 유일하다 할까. 나름대로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절차를 거쳐 북경 아시안 게임 축제 공연에 다녀왔던 서울 시립무용단(단장, 배정혜)의 공연 성과도 어떠한 것이었는지 잘 알려지고 있지 않은 편이다.

또 그런 해외 공연과 관련있을 수 있는 문예진흥원의 해외교류국, 문화부의 정책국이 춤 단체의 해외교류의 중요성을 감안, 한 번 정도 춤계의 회의를 소집한 것 빼고는 정책 당국도 어떤 원칙의 수립과 성의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11월 들어, 지난 9월에 있었던 '90서울 ADF'의 결산 보고가 있게 되면 무엇인가 구체적 물증을 하나 더 얻게도 되겠지만.

다음으로 문제가 되었던 춤의 '직업화' 문제도 춤계가 관심을 쏟고는 있지만, 그 구체적 추진 방향이나 노력이 현재의 춤계로서는 부족한 실정이다.

그 한 이유로서는 현재의 춤계의 주도세력이 되다시피한 대학 동문 중심의 민간 춤 단체들이 그것의 절실함을 느끼고 관심을 쏟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실제 직업 춤의 일선에 있는 이들(적국 국·시립 단체장 등)이 제도의 개편과 확대를 위해 별 뚜렷한 노력과 헌신을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9월에 있었던 전국시립무용제가 지방 춤뿐만 아니라 직업 춤의 활성화를 위해 이니셔티브를 취하기도 했지만, 중요 직업 춤 단체인 부산 시립무용단의 경우는 별 뚜렷한 명목도 없이 그런 노력에 동참치 않았다. 그런가하면, 그 프로그램을 주도했던 국립극장도 내년도 그 프로그램의 지속을 위한 어떤 환경을 하고 있진 않은 실정이다.

그런 한편, 춤 현장의 실제적 측면에서 상반기에 안애순의「업」, 배정혜의「불의 여행」, 김현자의「회일」, 후반기에 김매자의「춤본·Ⅱ」, 이혜순의「혈Ⅱ」, 백현순의「비어있는 곳으로 부는 바람」(변주 Ⅰ·Ⅱ)정도 주목할 만한 것이 있었지,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서울무용제로 이름을 바꿔 진행된 전국규모의 무용제도 안애순의「만남」, 남정호의「아이야,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조승미의「데니의 하루」를 빼고는 전해 상승된 수준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다. 한국 창작 춤과 발레의 예상된 저조와 침체는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 무용제의 민간 추진단체인 한국무용협회는 향후 무용제의 향방이 올해와 같이 이사회가 모든 틀을 만든 속에서 무용제를 운영해 갈 것인가, 혹은 운영위에 전폭적인 권한을 위임할 것인가, 또 기존의 경연제로 나갈 것인가, 혹은 축제와 경연제의 어떤 적절한 조화를 꾀할 것인가를 놓고 분명한 태도를 정하거나, 심포지엄을 통한 의견 수렴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이 모든 현상은 정체의 현상이지 역동적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우리의 풀리지 않은 정치 상황과 같이 현재에서 그 모든 미해결의 문제점만 돌출되어 있지, 그것의 해결을 위한 노력은 그 문제점들의 크기에 비해 유난히 적거나 소극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황에서 우리로서 생각해 봐야 할 점들은 무엇인가. 그 첫째는 보다 내적인 충전, 혹은 내심화를 위해 점검해 봐야 할 것은 다시 점검해 봐야 한다는 점이다. 즉 춤 행사는 끊임없이 치러지고 있되 왜 실속있는 공연은 많지 않은가, 혹은 앞서 나열한 그런 작품들의 수준이면 평년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 문화의 과도기적, 혹은 전환기적 병을 아직도 우리가 앓고 있는 것인가-하는 모든 것을 솔직하고 사려깊게 검토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인가 우리의 것을 바깥에 알리기 위한 노력, 외적 팽창도 좋지만 문화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반성되는 것이고, 또 그 반성 위에서 재출발하는 것이라 볼 때 올해의 정체된 듯한(혹은 더 활기차 보이는) 현상의 제 측면들을 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런 점검후에, 즉 모든 긍정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큰 공백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시급히 치유하거나, 메꿔놓을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창조의 제 현상들과 현실적이고 창의적인 제도들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현대 예술이란 것이 그 자율적 창의성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외적인 제도와 끊임없이 결합되어 가는 것이라 볼 때 그 생산적 결합 관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고조되어야만 한다.

가령, 지난 11년간 춤의 내적인 경쟁관계를 강화하고 춤의 대사회적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한 대한민국무용제란 것을 무용협회가 거의 주관하다시피 해서 이끌어져 왔지만 실제 무용인들이 주체가 되어 제도적 개선점들이 논위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무용평론가회나 그 권 밖의 작음 모임에서 그것이 토론되었을 뿐이다.)

그런 한편, 춤 예술가들의 창조 행위와 가장 밀접한 문예진흥원의 지원 정책이란 것도 그 비현실성 내지는 관례적 집행 방법에 대해 범 춤계의 공통된 의견이 모아져서, 제도의 개선을 위한 건의도 춤계로서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몇 번 전문지의 지상을 통해 거론되었을 뿐이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술 생산을 도와야 할 문예진흥원도 문예진흥원대로 정책의 집행에 따른 어떤 공개적 보고서(1년이나 2년에 한번)도 내어놓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즉 현재의 제도적 지원 방법은 현실성을 띠고 있는가, 혹은 그것의 효과는 있는가, 미흡한 부분은 없는가 하는 문제점들이 춤계 내에서나, 제도적 창출과 관계있는 곳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예술 현상은 순전히 예술의 자율적 구조에서만 점검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런 예술 외적 제도의 중요성에 재삼 깊은 관심을 갖게 한다.

세 번째는 춤 문화와 관련된 활동 상황들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정리될 필요가 있고, 예술 혹은 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정신적 태도가 좀더 완전주의 혹은 완벽주의의 틀 위에 있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2,3년간의 갑작스런 문화 팽창은 확실히 지난 70년대나 80년대의 초반기의 상황과는 다르다. 공연과 기획 프로그램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는데, 그것을 따라가고 점검하고 현장을 살펴보아야 할 우리의 눈과 귀와 발은 불완전하고 더디기 싹이 없다. 즉 무엇인가 벌어지고는 있으나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고, 또 벌어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 둔감할 뿐이다. 즉 책임질 수 없는 양의 팽창은 오히려 문화에 대한 무감각과 무력증을 부를 수밖에 없다. 그런 무감각, 혹은 무력증의 스크린 위에 비춰지는 문화 예술 현상은 필경 '정체' 내지 '퇴보', 혹은 '질의 저하'로 판단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 현상은 이젠 분석·분류되어야 할 정보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와 관련하여 예술, 혹은 그 제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 자체 좀 완전 무결해질 필요가 있다. 곳곳에 너무나 많은 여백, 임기응변, 단견들이 결국은 문화 스스로의 기운 생동의 힘을 죽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춤 문화라 해서 적당히 넘어갈 수 있고, 또 적당히 치유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 자체가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춤계의 미해결의 문제들 모두 사회적 문제, 혹은 예술을 대하는 우리의 정신 태도와 연결되면서 유기체인양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현실적이고 복합적인 구조체로 보고 치유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