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조형 예술과 과학기술
유재길 / 미술평론가, 홍익대 교수
본고는 현대 조형 예술과 과학기술과의 관계, 특히 미술 속에 과학기술이 왜, 어떻게 투입되었는가의 상황을 1960년대 서구 미술(씨네티즘)을 중심으로 알아보고 오늘날 우리의 현대미술과 과학기술의 영입 문제 및 그 필연성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조형 예술에 있어서 과학기술을 생각하기 전에 예술과 기술의 문제를 먼저 다루어야 할 것 같다. 예술이 인간의 삶과 체험을 재정리하고 반성하며 시각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인간 체험 그 자체를 미적 대상 속에서 그 궁극적인 것을 완성시키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루이스 멈포드는 말하면서 기술의 충족은 일차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술(arts)이라는 말속에 기술(technic)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은 고대에서부터 시작된다. 장인에 의한 기술적인 작업들, 그것이 미술이었으며 어느 분야의 예술보다 특히 미술은 시각과 조형의 효과를 항상 생각하기 때문에 기술의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하였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미술은 그같은 기술에 종속되기도 하고 탈피하기도 한다. 미술이 자연의 재현(모방)에서 벗어나 미적 관념을 추상적 표현으로 나타내려 하였던 20세기 현대 미술에서는 장인적인 기술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미술가들의 의지가 강하였다.
인간의 내적인 세계를 시각화시키려하는 조형예술가들, 이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꿈꾸며 조형의 기본 요소인 점, 선, 면, 색채의 본질 추구와 정신성의 탐구를 실천해 나온다. 즉 그림은 자연물의 구체적인 모습이나 시각적인 이야기의 집합이 아닌 색과 형, 그 본질 표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추구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추상화, 관념적인 조형작업들, 이들은 점점 더 기술과 멀어지고 마치 현대적인 조형 작업들은 그래야 지만 순수한 미술로 인정받는 듯하였다.
이 같은 생각의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과학기술이었다. 즉 19세기 중반 사진기의 발명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자연의 재현, 모방에서 벗어나야지만 그들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다. 한편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사진은 화면의 구도나 움직임에 관한 표현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도 한다. 안정된 구도나 대칭적인 비례만을 생각하였던 화가들은 카메라 렌즈에 잡힌 비대칭적이며 불안한 구도, 구성 등에서 새로운 조형 세계를 발견하고 직접 자신의 화폭에 응용하기도 하며 인물의 단계적 움직임을 시각화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과학기술을 직접적으로 응용하고 도입한 것은 움직임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 입체 조형 작업들이다.
이들은 회화나 조각의 장르를 떠나 새로운 공간(후에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짐)속에 다양한 재료의 실험으로 조형화 한 시각 미술을 탄생시킨다. 연대적으로 보면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는 20세기 중반인 1955∼1970년 사이가 되며 이러한 경향의 미술을 총칭하여 씨네티즘(Cinetisme)혹은 키네틱미술(Kineticart)라고 한다.
씨네티즘은 평면이나 입체의 구별 없이 과학기술과 조형 예술의 결합 혹 기계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담는 모든 미술 작품들을 말한다. 이미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 헨리 콜을 비롯하여 폴 수리오 등 미학자들에 의하여 새로운 미가 기계로부터 태어나고 기계 덕택으로 그 같은 새로운 미의 작업이 대중 속으로 확산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견한다. 또한 과학기술에 의한 조형 작업들이 과거의 거장들 그림이나 조각과 같이 진정한 예술이 된다고 확신을 하는 가운데 "합리적인 미"의 성격을 가진 실제 작품들이 몇몇 선구자들에 의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예술은 과학적인 유희를 뛰어넘어 현실적이고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게 하는데, 마치 과거에 예술이 마술이나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만들어지듯이, 오늘날에는 그 대용으로 과학이 예술과 결합하는 것으로 본다.
구체적으로 예술가들은 손을 사용하는 단순 기술자나 요술가에서 벗어나 과학기술을 이용하는 "테크놀로지 예술"을 실험실에서 창조해 내는 것이다. 이리하여 미술 역시 시대성의 발로로 진보적 성격을 갖게 되며, 그림이란 그려야만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구에서는 산업의 발달로 일찍부터 만국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과학기술의 발달과 미술의 상호 협력을 주장하면서 산업 세계는 우리들의 생활을 풍요롭고 여유를 갖게 하면서 삶의 일부분으로 예술을 끌어들인다.
1920년 마르셀 듀샹의 오브제(ready made) :「회전판」은 아마 최초의 과학기술이 도입된 예술(듀샹 자신은 반예술이라고 하지만) 작품으로 기록될 수 있다. 그는 시각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반복된 곡선들을 입체적인 구조물위에 그려 놓고 실제적으로 움직여보고 싶어하였다. 이때 필요한 것이 동력의 힘이었으며 간단한 전기 기술의 응용이다.
전기 코드를 빼버린 「회전판」은 무미건조하고 힘없는 구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마치 이는 죽은 조각으로 보인다. 힘차게 곡선들을 돌려주는 전기의 힘, 그 결과에 의해 관객은 새로운 시각의 모험을 하게되며 예술에 대한 전통적 고정 관념의 탈피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는 예술과 과학의 직접적인 만남으로 미술의 획기적인 변화였으며 미술을 감상한다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한편 듀샹의 반예술적인 작업들에 과학기술이 처음 도입되면서 20세기 기계주의 미술이 비인간적이라는 설득력 있는 이론도 성립되나 창조적인 조형예술가들에 의해 미술과 과학기술의 만남은 비인간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끊임없는 탐구로 이루어진다.
이제 미술은 그리거나 조각하는 성격에서 벗어나 시각현상 탐구와 구성, 공간의 문제로 확대시키면서 일반적으로 조형예술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주목되는 작가는 헝가리 태생인 모홀리 나기(Moholy Nagy, 1895∼1946)이다. 그는 그로피우스의 초빙으로 칸딘스키, 클레와 함께 학생들을 지도하게 된다.
당시 그는 추상적 구성주의 화가로써 칸딘스키와 같이 물체의 재현이나 이미지 추구가 아닌 추상적인 요소들(점, 선, 면) 그 자체를 조형화 하는 데 공감을 갖고 공동 연구를 한다. 이미 당시 칸딘스키는 전통적인 재료인 캔버스와 붓, 유화만을 가지고 전통적인 회화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인상」,「즉흥」과 「구성」의 연작들로 추상미술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에 반해 모홀리 나기는 실험성이 강한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의 구조적 추상의 구성을 연구하며 건축적인 실제 환경과 과학적인 기술, 재료 등을 자신의 조형 작품에 직접 응용하게 된다.
모홀리 나기는 1930년 동력에 의해 실제 움직이는 입체 구조물을 만든다. 「빛의 기계」라 불리는 이 작품은 고도의 과학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내부에 설치되는 전기 불과 구조물을 돌리게 하는 작은 모터장치 기술만 있으면 된다. 그의 이 작품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실제 움직이는 리듬의 역동성과 산업문명이 만들어 낸 새로운 재료들의 활용, 조명 장치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각의 신기로움 등과 함께 무엇보다도 기하학적인 형태의 구조물에서 얻는 조형적 아름다움이다.
즉 무색의 플라스틱 판이나 알루미늄, 철사 등을 가지고 원통형의 입체 작품(비생산적이며 쓸모 없는 기계로 불림)을 만든다. 원, 직사각형, 삼각형 등의 판과 수직, 수평의 철봉, 철사들로 마치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 화면을 보는 느낌이다.
이 같은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한 기계주의적인 문명의 산물로 우리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뿐인가 하는 물음에 키네틱 미술가들은 고전적인 미술의 근본 원칙에서 탈피한 우주적인 다이내믹한 세계라고 말한다. 화가들은 이제 붓 대신에 과학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재료들을 가지고 비례와 완벽한 기하학적 구성을 만들어 나간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조형물들은 실제적인 움직임과 인공적인 빛으로 인하여 역동적이며 우주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모홀리 나기의 「빛의 기계」를 제외하고 과학기술을 도입한 작품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1932년부터 제작된 칼더의 「모빌」연작들은 과학기술과 무관한 비테크놀로지적인 움직이는 조각이다. 작은 연꽃잎 모양의 채색된 철판들은 공중이나 중심축 주위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칼더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키네틱적인 움직임의 작품들은 생명감이 없어 보인다. 특히 50년대 중반 이전의 단조롭고 무기력한 기계주의적 실험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이것들은 역시 실험적인 성격이 강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물로 보인다.
1955년 미국 우주과학연구소(NASA)의 책임 과학자의 한 사람인 말리나(F. J. Malina)는 과학기술을 직접적으로 조형 예술에 접목시킨다. 그가 경험한 우주의 형상, 공간, 구조와 질서를 파스텔로 그리기도 하지만 과학적인 첨단 재료와 기법을 이용한 우주의 그림을 그린다.
그가 만들 「JAZZ」(1956)는 전기 빛을 이용한 작업으로 ① 빛의 근원적인 문제 탐구, 빛 자체의 아름다운 모습 발견 ② 여러 색의 판을 만들어 회전시킴 - 움직이는 색채의 빛 ③ 우연히 생기는 다양한 빛의 효과 ④ 반사된 면과 조형성 - 전체적인 화면 구성 등 4가지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또한 편광판이라는 폴라로이드(Polaroid)를 만들어 투명의 화면 위에 빛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이는 전기 구조의 회로 자체를 보여주어 화면에 실감 있는 우주공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과학을 통한 미술가이다. 나의 일은 급변하는 과학 기술의 문제를 대중에게 보여주면서 새로운 세계 - 우주를 탐구해 나간다. 인간과 우주, 이는 무한한 역동적인 힘과 조형적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말리나의 이 같은 말과 그의 우주공학적 조형 작품을 보면 분명 우리들은 과학기술과 조형 예술의 결합이 이론만이 아닌 실제적인 미술로 가까이 우리 주위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다른 과학자와 미술가들이 공동으로 제작되는 고도의 테크놀로지 조형 작업들이 관념적인 추상 작업보다 난해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니다. 그들의 전반적인 작품 특성이 관객을 쉽게 끌어들이며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스펙터클 한 모습들이다. 음악과 조화를 중요시한 시적인 표현이 다이내믹한 움직임으로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이 같은 특징을「빛」이라는 과학적 재료를 갖고 조형화 하는 데 가장 성공한 작가는 니콜라스 쇼페르(Nicolas Schöffer)이다.
쇼페르는 1957년부터 벽면에 색종이 구성과 조명과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역동적인 빛 작업을 한다. 「빛-역동성(lumino-dynamisme)」이라는 제목의 연작들을 이때부터 계속하는데 점차 그는 조형적인 문제보다 기술적인 문제 해결에 더욱 더 중점을 둔다. 1961년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있었던 그의 작업은 조형 예술에 있어서 과학기술의 승리라고 할 만한 스펙터클이다. 1,500m의 거대한 화면 위에 움직이는 빛(추상적 형태이나 환상적이며 구체적인 느낌)이 조형화 되고 음악과 주위 공간의 조화로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전기 전자회사인 필립스사의 도움으로 거대한「빛의 벽」을 만들었던 쇼페르는 그후 영화, TV에 관심을 갖고 대중 영화의 매체 이용으로 [Télé-lumino scope]라는 큰 화면의 영상 작업을 만든다. 후에 그는 토탈 예술이라 할 수 있는 음악, 무용, 빛을 이용한 조형 작업을 결합하는 스펙터클을 꾸민다.
결국 과학자들과 미술가들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성공적인 작품은 무엇인가 ? 1990년 지금까지 이 같은 질문은 계속되면서 쇼페르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해답을 찾고자 한다. "…나의 그림은 움직임, 바로 그것이며 누구에게나 매우 흥미롭다. 무질서하면서도 절제된 움직임, 감동적인 구성의 변화, 변형되는 화면들, 내가 사용하는 오브제들은 살아있는 배우들로 이것들은 장대한 스펙터클을 이룬다."
196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씨네티즘이라는 미술의 경향은 가장 황금기이다. 이때 젊은 시각 미술가들(주로 기하학적 추상 작업과 옵티컬한 평면 작업의 작가들)은 과학 기술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며 과학자들과 공동 작업으로 많은 작품제작과 전시가 이루어진다.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독일, 멕시코 등 「빛과 움직임」,「환경과 스펙터클, 씨네티즘」등 공통된 주제로 과학기술과 조형 예술과의 관계를 폭넓게 실험한다.
이 같은 실험 이후 과학기술은 조형예술과 더욱 더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환경을 탄생시킨다. 이것은 미술관에서 보여주었던 감상적인 미술이나 장식이 아닌 우리 생활과의 직접적인 것으로 환경 예술의 탄생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 장소나 거리, 건물 등에 설치되어 일정 기간의 제약된 작품들이 영구성을 갖게 되기도 한다.
과학기술과 조형 예술의 만남으로 미술은 개인주의 성격에서 집합적이며 공공의 합리적인 특성을 갖게 된다.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많은 씨네티즘의 작품들이 환경과 어울리면서 더욱 더 이 같은 특성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대미술은 어떠한가 ? 서구의 모더니즘을 획일화된 모습으로 생각하여 심미주의적인 자세와 추상 문제에 매달려 다양한 조형 예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그 결과 아직도 미술은 인간의 내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것인 유미적인 자세의 모더니즘 경향이 뿌리깊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생활은 1960년대 서구의 과학적 문명이기보다 더 많은 활용과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놀라운 첨단 기술의 컴퓨터 이용부터 전력, 교통, 통신 등은 누구나 피부적으로 느끼며 항상 접촉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이 같은 변화와 미술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미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물론 미술가들의 고정된 관념에 변화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즉 미술은 지고의 개인주의적인 성격을 나타내거나 주제(개인적이든 사회적인 주제든)를 시각적으로 잘 조형화 시켜야 한다는 점과 기계적인 모습이나 과학기술의 응용은 비인간적이라는 통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다행스러운 것은 80년대 후반 젊은 작가들에 의한 실험적인 설치 작업에서 과학기술과 첨단재료의 사용이 눈에 띄게 된다.
이들은 서구 키네틱 작가들처럼 미술과 과학기술의 결합을 주장한다거나 현실적인 당위성을 포함하는 논리나 공동 선언문을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개별적인 성격을 특히 강조하면서 분명한 것은 이제 우리의 현대 조형 예술도 다양하고 폭넓은 모습으로 자신과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인식 아래 탐구되어지는 것을 본다.
그들을 유형별로 구분하여 보면 첫째가 비디오 아트와 컴퓨터 아트 등 첨단 전자기술의 이용으로 다양한 영상, 독창적인 이미지의 미술이다. 이 분야는 세계적인 비디오 미술작가로 백남준씨를 생각하게되며 그의 직·간접적인 영향과 많은 우리의 젊은 작가들 노력으로 이 분야에 큰 기대를 갖게 된다. 둘째는 전기 모터와 동력을 이용한 움직임의 조형성과 조각적인 구성미 탐구 경향이다. 전통적인 키네틱 미술의 분야이며 우리의 작가들은 환경의 변화나 움직임 자체의 미 추구보다 조형적 형태의 변화에 치중하는 경향이 크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현대 조형 예술과 과학기술의 접목이 이루어져 다양한 시각적 미의 세계를 펼쳐야 한다는 것에 이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고정된 전통의 미의식 자체를 수정해 나가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더욱 더 과감한 실험 작업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① 근원성 ② 독창성 ③ 사회성이다.
예술에 있어서 독창성을 먼저 생각해야하나 여기서는 조형의 문제나 기술 등 그 근원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근원성을 앞에 두었다. 우리의 현대 미술이 항상 그 근원적인 뿌리가 약하여 깊이가 없어지고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는 것을 볼 때, 미래의 환경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과 미술의 접목에 근원적 탐구를 중요시해야 한다. 그 결과 독창성에서 자신의 독특함을 들어내고 사회적 관계를 추구하는 미술을 창조해 나간다.
이것이 우리의 앞날에 펼쳐지는 조형예술의 목표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결국 미술은 시대성의 발로라고 볼 때, 미술과 과학기술의 결합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필연적이다. 개인적인 성격에서 탈피하여 공공의 이익과 환경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며, 시각적이며 조형적인 예술의 세계를 사회성과 항상 연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