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과 조각가
- 과학기술이 조각에 미치는 영향 ???+??? 조각이 과학기술에 미치는 영향
금누리 / 조각가, 국민대 교수
조각가는 기술에 도전적이어야 한다.
이는 예술이 기술에 대해 적대적인 뜻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함께 존재함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지닌 요구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과학 기술의 발달은 매우 빠른 속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예술성만이 비중을 차지하는 조각품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조작가에게만 요구되어왔던 것이 아니었음은 당연하다.
즉 '예술성'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그것이 있고 없음이 조각가의 관건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성'은 모든 것,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며, 조각가들은 이미 예술 그 자체인 것이다.
기술, 현대 과학적 지혜와 사고 능력이 이들 조각가의 손에 잡힐 때 조각은 예술로서의 기본적인 가치를 보여주게 된다.
입체미술에 활용된 물품:
못
송곳
바퀴
지레
형틀
집게
도르래
톱니바퀴
자석
전기
동력
사진
전신전화
전기송곳
선반
연마기
절단기
계산기
전자제어기
감지기
기계인간
평면 미술에 있어 과학 기술의 집단적 접목과 전개;
원근법-투시도법-사진-활동사진-비디오-입체영상-영상합성
평면적 미술의 과학적 전개는 다분히 소프트웨어적인데 반하여
조각과 같은 입체 미술의 과학적 활용은 직접적이라 할 수 있는 하드웨어적 변화가 함께 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사실적, 구상적 미술에서 추상적, 비구상적 미술로의 급격한 전환과 탈 장르화 현상은 그러한 기술적 접목도 평면과 입체의 구분을 벗어나 혼용되게 하였다.
오늘날의 대표적인 예가 키네틱 아트의 탄생이다.
그것이 구조적으로 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입체물이든 옵티칼과 같은 평면 현상이든 그곳에 속도와 시간이라는 4차원적 움직임이 적용된 것이다.
여기서는 재료와 기술적인 면에서도 현대과학이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망막 신경체계의 직접적 수용이 그렇고, 작품 그 자체 이외의 외부의 힘(전기, 바람 등)과 그 여건을 활용하는 것이 그렇고,
보는 이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그렇고,
고정된 시점이 아닌 연속적 다시점의 요구가 그렇고,
그 자체에 감각 기재를 부착시키기도 한다.
미래의 조각은 '말미잘처럼 흐느적거릴 것이다.'
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미래의 조각 수집가는 호박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덩어리가 자라듯 변하는 조각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이러한 예측은 앞으로의 조각에 과학기술의 적용은 당연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나는 컴퓨터로 아이디어 스케치를 만들기도 한다.
연필 대신 자판과 위치 감지기를, 종이대신 전자 화면이나 디스크를 사용할 따름이다.
송곳 대신 톱니 송곳을, 그것 대신 전기 송곳을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작품에 자석을 넣는다.
지각 심리학을 적용한다.
모터를 사용한다.
바람도 활용하고, 전기도 이용한다.
얼마 전 19000917,
몇몇 동료들과 '전자카페 통신 미술 행위'를 하였다.
전자카페 계획의 일환으로 화상전화기 등 몇 가지 전기 전자 장비를 이용하여 서울과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통신미술 행위이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의 조형적 표현을 즉각적으로 주고받는 것으로 화상전화기와 전송복사기, 개인용 컴퓨터와 비디오 카메라, 전화기와 도청기, 사진기 등 오늘날에 있어 일반화된 과학 기재를 사용한 것이다.
그 첫 시도에 따른 기술적 결함과, 단순하고 대중적인 기재가 지닌 보편성 때문에 그것의 예술화가 용이한 것이냐에 대한 제문제들이 노출되기도 하였으나 조형행위의 공간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음이 바로 작가들의 눈앞에서 증명된 것이기도 하다.
얼마 후 199?????,
나는 작업 도구로 기계인간을 활용할 것이다.
이는 단순한 반복 행위라 하더라도 오늘날의 산업 현장에서는 실질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우에 따라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와 같은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미래이다.
시공간적 한계도 넘어서는 작품(아직까지는 가설적, 철학적으로만 존재 가능한 것)은 차지하고,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작품 제작은 위의 통신 미술의 예로 가능한 것이다.
내가 컴퓨터로 첫 스케치를 했을 때 지닐 수 있었던 하나의 즐거움은 내가 없을 때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나의 조각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자카페 통신 미술 행위 이후 또 다른 즐거움은 서울에 있는, 내가 만들고 있는 조각을 서로 다른 지역들에게 동시에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일의, 미래의 기술적인 문제에서가 아닌 현실, 오늘날의 한 조각가의 사회적 여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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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고에서는 오늘이 곧 미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