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지방 외래 장군신과 남이 장군신
김선풍 / 중앙대 교수
굿판에 앉아 있노라면 12거리 중구능굿(또는 군웅(群雄)굿, 구웅장수굿, 놋동우굿)이라는 제차(第次)를 만나게 된다. 군웅은 인간의 수(壽)와 복(福)을 관장하는 여러 신격(神格)을 뜻하는데, 지역에 따라 군웅신의 모습은 달리 나타난다. 곧, 강릉일대 무꾼(巫覡)들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주인공의 한 사람인 조자룡(趙子龍)을 들춘다거나,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金庾信) 장군을 지역 장군신으로 정해 그 분의 위대성을 기리고 있으며, 서해안 일대에서는 최영 장군과 임경업 장군의 넋을 불러 온 마을의 안과태평을 소망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민속은 인간적이라는 데 중점을 맞출 수 있다. 생시(生時)에 인간이 인간을 위해 주고, 사시(死時)에 인간이 사자(死者)를 생시(生時)처럼 모신다는 인도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사에 그 깊은 뿌리를 대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란 몇몇 승자(勝者)들에 의해 끌려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한 관점으로 응시하노라면 정사(正史)라는 것에는 서민사가 빠져 있고, 보통의 서민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룩되어진 신념의 푯대마저 소위 선민의식을 가진 소수 몇몇 성씨나 집권자들에 의해 무참히도 유린·박탈당한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을 품고 사라진 장군 중에서 최영 장군, 임경업 장군이 서해안의 서낭신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주지하는 바이다.
한국 무속은 한(恨)의 매듭을 푸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못 다한 한(恨)을 서리서리 풀어나가듯 장군신들은 얼기설기 얽혀있는 사연들, 비련(悲戀)들을 풀어주기 바쁘다. 한(恨)으로 갔던 장군들이기에 한의 매듭을 풀어 줄 신격으로 승화된 것이다.
우리 무속에는 그 지방에서 덕치(德治)를 했다거나, 선정(善政)을 베푼 분들을 신격화시키는 신격화(神格化) 문법이 있다. 이것은 내국인(內國人)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인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소위 외래자형(外來者型) 무신(巫神)과 민중형(民衆型)무신(巫神)으로 나눌 수 있는데 경기도 일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자는 감악산 지신(紺岳山之神)이 후자는 남이(南怡) 장군신(將軍神)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감악산(紺岳山)의 서낭신부터 살펴보자, 경기도 파주군 남면 황방리 감악산 정상에는 속칭 '빗돌 대왕비'라고 하는 설인귀사적비(薛仁貴事蹟碑)가 있다. 적성면, 금교면, 양주군에 걸쳐 있는 높이 675m의 감악산, 이산은 「삼국사기(三國史記)」잡지 제사조에 보면 신라시대부터 고성(高城)의 상악(霜岳), 설악(雪岳), 북한산주(北漢山州)의 부악(負岳)과 더불어 매년 국가에서 소사(小祀)를 지냈던 명산이요, 신산(神山)이었다.
「태조실록」에 조선시대 궁중에서 이산에 별기은(別祈恩)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태조(李太祖)는 삼각산(三角山), 백악산(白岳山)과 더불어 호국산으로 여겼고 기우제(祈雨祭)까지 지냈으며, 강릉에는 구한말까지 대성황사(大城隍祠)에 모신 12신위(神位)의 한 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장군의 신권(神權) 영향으로 볼 때 강릉지방은 김유신 대장군이 터를 잡고 있는 지역인지라 감악산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고, 전에는 신라의 김이사부 대장군도 굿판에서 무가의 주인공으로 올렸음직 하나 찾을 길 없어 서운할 뿐이다.
감악산신은 무가에서는 제석거리에서 '감악산 천총대왕'이라고 부르는 분으로 등장하고, 문헌에는 당나라 장군인 설인귀가 죽어서 된 신이라고도 하며, 일설(一說)에는 한(漢)나라 때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던 감악 장군이 이곳 경기도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그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치제(致祭)를 올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흥미롭게도 강릉 대성황사(大城隍祠)에는 주로 신라적 인격신위(人格神位)를 봉안(奉安)하고 있다. 곧, 태백대왕신(太白大王神), 송악산지신(松岳山之神), 남산당제형태상지신(南山堂帝形太上之神), 감악산대왕지신(紺岳山大王之神), 성황당덕자모지신(城隍堂德慈母之神), 신무당성황신(神武堂城隍神), 김유신지신(金庾神之神), 이사부지신(異斯夫之神), 초당리부인지신(草堂里夫人之神), 범일국사지신(梵日國師之神)이 그것이다.
동물 중 우공(牛公)은 군웅들의 상징이다. 오늘날도 시골에 가면 마구간 안에 흰 천이나 흰 창호지를 오려 묶어 기둥에 달아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군웅신체(群雄神體)이다.
좋은 음식이 들어온다거나 아름다운 옷감이 들어올 때면 으레 조금씩 끊여서 이곳에 붙여 놓아야 1년 내내 가내가 평안하다고 한다. 집안에서 안택(安宅)을 할 때도 마구간의 군웅신에게 상을 올린다. 이처럼 집안에서는 '군웅맞이'가 되나 부락 단위일 때는 '장수굿(장군굿)'이라고 한다거나 '군웅장수굿'이라고 부르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어떻게 설인귀라고 하는 중국의 인물이 장군신의 대열에 끼어 들었을까가 의문이다. 우선 고대소설인 「설인귀전」의 경계를 더듬어 보자.
설인귀는 원래 강주(絳州) 용문(龍門) 태생인데 당나라 태종 때 용문현의 설영과 그의 아내 번씨 사이에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자라면서 말을 잘 못하는 눌어증이 있었는데 15세 때 책방에서 잠을 자다가 백호(白虎)가 달려드는 꿈에 놀라 말을 하게 된다. 한편, 태종은 꿈속에서 장차 동정(東征) 때 백포장군 설인귀가 자기를 구해 주리라는 예조를 얻게 된다. 인귀는 육도삼략을 공부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해주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유원회의 집에 기식을 하던 중 그의 딸 금화를 얻게 된다. 인귀는 의형제를 맺은 주청의 권유로 동정정벌에 참가하기로 한다.
그때 태종은 장사귀 장군을 용문현으로 보내서 인귀를 찾아오게 하였으나, 장사귀는 자기 위치가 흔들릴까봐 투군한 인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두 번이나 투군했으나 거절당했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번홍해의 딸을 구해 주고 그녀를 부실로 삼게 된다. 다시 세 번째로 투군장을 내니 장사귀는 인귀에게 설례로 개명하게 한 다음 그를 받아들인다.
태종은 을지경덕을 완수로, 장사귀를 선봉장으로 삼아 전장에 나선다. 인귀는 큰 굴에서 보살한테 얻은 다섯 가지 보배로 만나는 적을 모두 물리치게 되나 그 공을 장사귀는 황제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런데 태종이 사냥 중에 합소문에게 사로잡히게 되는 데 지혜로 태종을 구하게 된다. 태종이 그가 꿈속에 나타났던 인귀란 것을 알게 되자 장사귀 일당을 모두 쫓고 인귀를 원수에 봉한다는 이야기이다.
그에 대한 실존 연대는 고대소설과 다소 차이가 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뒤 평안도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도호로 부임하였던 사람으로 한국 땅에 와서 선정을 베풀었던 인물일 가능성을 배재 할 수 없다. 고대소설은 18C에 「설인귀전」이 들어와서 영웅소설 또는 군담소설에 속하는 「유충렬전」,「소대성전」,「장국진전」등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설인귀는 실존 인물이기 때문에 한국 무의 신령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더군다나「동국여지승람」적성현(積城縣) 사묘조(祠廟條)의 기록은 그가 신라때부터 무속례(巫俗禮)로 자리잡을 수 있는 인물이었음을 방증하고도 남는다. "감악산사는 민간에 전하기를 신라가 당나라의 설인귀를 산신으로 삼고 있다. 감악사언전 신라이당설인귀위산신(紺岳祠諺傳 新羅以唐薛仁貴爲山神)."
분명 설인귀는 원한에 간 인물이었거나 선정(善政)을 베푼 장군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우리 무속의 현장에서 만나는 장군들의 삶의 이력서를 들춰보노라면 대개가 그런 유형(類型)이 많기 때문이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앞에서 언급한대로 평양에 설치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도호라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고 그가 죽고 난 뒤 신라인들은 무속신(巫俗神)으로 신격화하여 그의 덕치(德治)를 기리고 그의 위용을 흠모하는 제(祭)로 승화시킨 것이 아닐까 한다.
서울 남이(南怡)장군 대제는 어떤 성격의 축제일까 ? 남이 장군은 조선전기의 무신으로 1457년, 무과에 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이 나자 대장이 난을 평정한 후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가 후에 공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한번은 그가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彗星)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엿들은 유자광(柳子光)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모함함으로써 역적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새남터에서 참변을 당한다.
역적으로 몰린 그의 영혼을 집권자들이 제례를 지내 줄리 만무하다. 그러나 그는 1818년 같은 성씨인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관직이 복구되었고 창령구봉서원, 서울 용산의 용문사(龍門祠), 서울 성동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현존하는 용문동의 야트막한 산봉우리 위에는 그의 사당이 자리하여 그가 칼날을 받았던 형장을 지켜보고 있다.
예나 이제나 역사를 움직이는 일에는 준재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하고 많은 장군, 재상 중에서 민중이 뽑은 인물은 역사의 앞쪽을 달려가다가 뒤편으로 물러나게 된 신원을 못 푼 장군이나 재상들이 대다수라는 사실이다.